【불교의 역사】
제3절 한국불교
한반도에 불교가 전래된 이래로 두 조류, 즉 교학과 선종은
서로 양립 또는 융화되면서 한국불교의 축을 이루어 왔다.
먼저 불교가 유입되기 시작한 때부터 선종이 전래되기 전까지는
‘교학시대’라고 할 수 있는데, 경전을 중심으로 한 연구가 주를 이루었다.
통일신라 말기부터 선종이 전래된 이후 천태종이 성립되기 전까지는
‘교선 병립시대’라 하여, 양자가 나란히 발전하였다.
고려시대 천태종과 조계종이 성립된 이후로부터 고려 말기까지는 ‘선교 융섭시대’라 하며,
숭유억불의 조선시대에는 서산과 사명의 활약으로 ‘선교 겸학시대’가 열림으로써,
한국불교의 특징으로 손꼽히는 ‘원융불이의 통불교’라는
회통불교의 기반을 다지게 되었다.
1. 삼국시대의 불교
1) 불교의 전래와 수용
불교가 한반도에 전래된 것은 삼국시대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의 문헌에 따르면,
고구려와 백제는 4세기 후반에 중국을 통하여 불교를 받아들였고,
신라는 그보다 150년 정도 늦은 6세기 전반에 공식적으로 불교를 받아들였다.
신라에서 불교 수용이 늦어진 이유는 지리적인 여건 때문에
중국과의 교류가 활발하지 못했고, 불교를 수용할 수 있는 정치체제가
늦게 정비되었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고구려의 불교>
서기 372년, 소수림왕 2년에 전진(前秦)의 왕 부견(符堅)은
승려 순도(順道)를 고구려에 보내서 불상과 불경을 전해 주었는데,
이는 한반도에 불교가 전래된 최초의 일이라고 한다.
그로부터 2년 후에 승려 아도(阿道)가 고구려에 들어왔다.
이에 소수림왕 5년에는 성문사(省門寺)와 이불란사(伊弗蘭寺)를 건립하여,
순도와 아도가 머물게 하고 불교를 공식적으로 수용하였다.
그 당시 부견왕은 불교를 숭상하여 유명한 승려를 초빙하고
불경을 수집하는 데 열성이었다.
그가 고구려에 순도를 보내서 불교를 전한 것도 이러한 신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고구려에서도 국가체제를 정비하기 위해서
중국의 선진제도와 문물을 받아들이고자 노력하는 과정에서 불교를 접하였고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게 되었다.
그런데 순도가 불교를 전해 주기 이전에 고구려 사회에서는
이미 불교를 알고 신앙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소수림왕이 즉위하기 이전에 고구려 출신의 승려가 있었는데,
그가 당시 유명한 중국 강남지방의 승려 지둔(支遁, 314~366년)과
교류한 사실이 중국의 『고승전』에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소수림왕대의 불교수용은
왕실에서의 공식적인 불교의 수용을 기록한 것으로 생각되며,
그 이전에 민간에서는 이미 불교를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광개토왕대(391~412년) 초기에는 중국의 승려 담시(曇始)가
경과 율, 10여 부를 가지고 고구려에 와서 불교의 가르침을 전하였다고 한다.
<백제의 불교>
백제의 불교 수용은 침류왕 때에 이루어졌다.
서기 384년, 침류왕 원년에 남중국의 동진(東晋)에서
서역 출신의 승려 마라난타(摩羅難陀)가 오자
국왕은 궁궐로 맞아들여서 극진히 공경하였다.
그리고 다음 해에는 수도 근처의 한산(漢山)에 절을 건립하고
열 명을 출가시켜 거주하게 함으로써 불교를 공식적으로 수용하였다.
역사 문헌에는 마라난타가 순도처럼 중국의 황제에 의해 파견된 것인지
아니면 개인 차원에서 백제에 온 것인지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동진에서도 전진과 마찬가지로 불교에 대한 신앙이 활발하였고,
백제가 동진을 통하여 중국의 제도와 문물을 수용하려고 노력했던 상황으로 보건대,
마라난타 역시 동진 황제에 의해 파견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해동고승전』에서는 인도 출신인 마라난타가 교화를 위해 각지를 돌아다니다
중국을 거쳐 백제에 왔다는 고기(古記)의 내용을 인용하고 있다.
백제의 경우에도 중국 남조와의 교류가 활발하였기 때문에
침류왕 때 불교의 공식적 수용 이전에 이미 민간에 들어왔을 가능성이 있지만
아직 구체적인 자료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신라의 불교>
신라에는 5세기 초부터 고구려를 통해 불교가 전해진 것으로 보이지만
고구려나 백제처럼 쉽게 수용되지 못하다가,
6세기 전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공식적으로 수용될 수 있었다.
이에 대한 전래설화가 몇 가지 전해 오고 있다.
1) 위(魏, 220~265년)나라의 굴마(堀摩)가 고구려에 사신으로 왔다가
고도령(高道寧)과 관계하여 아도를 낳았다.
아도는 다섯 살에 머리를 깎고 열여섯 살에 위나라로 가서
현창(玄彰) 화상에게 배운 후 열아홉 살에 귀국하였다.
고도령은 아도에게 3천여 달이 지나면 신라에 불법을 보호하는 왕이 나와서
불사를 크게 일으키게 되며, 신라의 수도에 일곱 곳의 가람 터가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신라에 가서 불법을 전하라고 하였다.
미추왕 2년(263), 아도가 신라에 도착하여 궁궐로 들어가서 불교를 믿을 것을 청하자
사람들은 처음 보는 것이라고 꺼리고 죽이려는 사람까지 있었다.
이에 아도는 속촌(續村, 현재 경북 선산지역)의 모록(毛祿)의 집에 숨어서
3년을 보냈다.
그 때 공주가 병이 났는데, 아도가 치료해 주었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천경림(天鏡林)에 가람을 지을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
하지만 미추왕이 세상을 떠난 뒤 불교를 없애려는 사람들이 있어서
다시 속촌으로 돌아가 스스로 무덤을 만들고 그 안에서 입적하였다.
2) 눌지왕(417~457년) 때 승려 묵호자(墨胡子)가 고구려에서 일선군(一善郡,
현재 경북 선산지역)으로 와서 모례(毛禮)의 집 뒤쪽 굴속에 머물렀다.
그 때 양(梁, 502~557년)나라에서 향을 보내 왔지만
신라의 왕과 신하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였다.
그러자 묵호자가 그 이름과 사용법을 알려 주고,
그 향으로 삼보(三寶)에 기원하여 공주의 병을 낫게 하였다.
그 후에 묵호자는 행방을 감추었다.
3) 비처왕(479~499년, 소지왕이라고도 함) 때 아도(阿道)가 시자 세 명과 함께
모례의 집에 왔는데 모습이 묵호자와 비슷하였다.
여러 해 동안 머물다가 아무런 병 없이 죽었는데,
그 시자들이 남아서 경(經)과 율(律)을 강독하니 종종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4) 법흥왕 14년(527년)에 아도가 일선군 모례의 집에 이르니
모례가 놀라서 고구려에서 온 승려 정방(正方)과 멸구자(滅垢疵)가
살해되었다는 것을 알려 주고 밀실에 숨어 있게 했다.
그 때 오(吳)나라에서 향을 보내 왔지만
왕이 그 사용법을 몰라서 아는 사람을 찾았다.
그러자 아도가 불에 태워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물건이라는 것을 알려 주었다.
나중에 아도가 신라의 서울로 왔을 때 중국의 사신이 그에게 예배하는 것을 보고서,
법흥왕이 불교를 믿는 것을 허락하였다.
이와 같이 전설적 성격이 강한 이 전래설화를
그대로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여기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몇 가지 내용들은
신라에 처음 불교가 수용되는 모습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처음 신라에 불교를 전해 준 것은 고구려에서 온 승려들이었으며,
그들은 당시 신라와 고구려의 국경지대였던 경북 선산지역을 거점으로 하여
불교를 전파하였다.
이후 불교에 대한 소문이 신라의 수도에도 알려져서 왕실의 인정을 받게 되었지만,
한편으로 불교를 반대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일부 승려들이 죽임을 당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내용은 실제로 신라에 불교가 수용되던 당시의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의 불교 수용 시기를 고려해 볼 때,
1)과 같이 미추왕 때에 불교가 소개되었다고는 생각하기 힘들며,
대체로 2)에서 이야기하는 눌지왕 때를 전후한 시기에
처음 불교가 전래되었을 것으로 본다.
신라에서 공식적으로 불교가 수용된 것은 법흥왕 15년(528)으로,
이 때 신라 최초의 가람인 흥륜사(興輪寺)의 건립이 시작되었다.
<가야의 불교>
가야에도 불교가 전해졌지만 전래된 시기와 그 경로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삼국유사』에 수록된 「가락국기」에서는
가야 건국 직후에 인도 출신인 수로왕의 부인 허 왕후와 함께 불교가 전래되었으며,
현재 수로왕릉의 앞에 놓여 있는 파사석탑이 그 때 인도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파사석탑은 재질이나 형태면에서도 한국의 다른 탑과는 구별되는데,
인도와 동남아시아지역의 불교문화권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가야의 불교가 삼국과 달리 중국이 아닌 남방불교를 받아들였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파사석탑이 만들어진 시기를 정확히 알 수 없으며,
가야불교에 대한 자료들도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을 밝히는 데는 어려운 점이 많다.
최근에 그 동안 미진했던 동남아시아지역과의 문화교류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으므로
앞으로 가야불교에 대한 이해 또한 보다 더 진전될 수 있을 것이다.
<불교의 수용과 갈등>
삼국 중 고구려와 백제는 불교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별다른 갈등이 없었던 반면에,
신라에서는 이차돈의 순교사건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불교 수용을 추진하는 세력과 반대하는 세력 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차이는 고구려와 백제가 이른 시기에 왕실을 중심으로 하는
집권적인 통치체제를 정비했던 것과 달리,
신라는 6세기 초까지도 왕권이 확립되지 못한 연맹체적인
정치체제를 탈피하지 못하였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고구려와 백제는 일찍이 율령을 반포하고 국왕을 보좌하는 관료체제를 갖추었으므로
국왕이 불교를 수용하려는 정책을 취했을 때 별다른 어려움 없이 이를 시행할 수 있었지만,
신라의 경우에는 국왕의 불교 수용 의지에도 불구하고
귀족 세력들이 이에 반대하여 불교 수용 정책이 쉽게 추진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신라에서의 불교 공인은 귀족세력에 대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정비하려는 정책들과 동시에 추진되었다.
불교를 공인한 법흥왕 때 율령이 반포되었고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는 등
관료체제의 기본 골격이 갖춰졌다.
또한 귀족의 대표로서 상대등(上大等)을 두고
왕은 귀족들을 능가하는 초월적인 존재로 위상을 높이고자 하였다.
불교의 공인은 이처럼 왕의 권한이 강화된 시점에서야 비로소 가능했던 것이다.
불교가 전래된 초기에 삼국의 국왕들이 불교를 수용하는 데 적극적이었던 것은
불교가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고대국가의 통치체제에 부응하는 면이 있기 때문이었다.
고대국가가 성립되기 이전의 부족연맹체 단계에서는
각 부족들은 각기 독자적인 전통과 신앙을 가지고서 독립적인 위상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런데 삼국이 고대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는
이러한 부족적 자율성을 해체하고 전체 사회 구성원이 하나의 단위가 되어
보다 강하게 결합될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해서는 각 부족마다의 독자적인 전통이나 신앙을
모든 구성원들이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전통과 신앙으로 대체해야 했는데,
불교가 바로 이러한 보편적 전통과 신앙에 적합한 사상체계였던 것이다.
불교는 본래 고대인도에서 부족적 전통과 신앙을 부정하고
보편적이고 합리적인 사상을 추구했기 때문에,
한국의 고대국가 형성에도 중요한 사상적 기반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또한 같은 이유 때문에 종래 각 부족의 지배자로서
자신들의 부족적 전통을 유지하기 원하던 귀족들은
불교의 수용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불교의 수용에 의해 자신들의 부족적 전통이 갖는 사회적 비중이 축소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차돈의 순교사건은 왕과 귀족 사이의 이해관계의 대립에서
국왕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서 발생한 사건이었다.
법흥왕은 불교를 받들고자 하였지만
종래의 전통을 고수하려는 귀족들의 반대 때문에 뜻을 이룰 수 없었다.
이에 왕의 측근이었던 이차돈이 자신을 희생하여 왕의 권위를 높이고,
귀족들의 반대를 꺾고 불교를 받들게 했던 것이다.
이차돈의 목을 베었을 때 일어난 여러 이변들은 신앙의 차원에서 이해될 것이지만,
이차돈의 순교 이후 귀족들이 불교 수용에 반대하지 못한 것은
이변에 대한 놀라움 때문만이 아니라 이차돈을 처벌하는 과정에서 보여 준
왕의 강력한 권한행사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왕은 자신들과 대등한 귀족집단의 일원이 아니라
신민(臣民)들의 목숨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초월적인 존재로 여겨지게 되었던 것이다.
신라의 불교 수용과 비슷한 상황이 일본에서 불교를 수용하는 과정에서도 발생했다.
신라에서는 이차돈 한 사람의 순교로 마무리된 것과 달리
일본에서는 왕실과 귀족 사이의 대대적인 투쟁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불교에 대한 수용이 인정될 수 있었다.
이는 두 나라의 고대국가 체제의 진전 정도의 차이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고구려와 백제에서 별다른 마찰 없이 불교가 수용된 것은
4세기 전반에 이미 고대국가 체제를 완성해 놓았다는 것을 반증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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