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시헌력에 수용된 서양 르네상스 천문학
이 무렵 유럽의 천문학은 급변하고 있었어. 1543년 지동설을 주창한 코페르니쿠스가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를 인쇄 출판하고 바로 운명했다고 해(오언 깅그리치 지음, 장석봉 옮김, 아무도 읽지 않은 책(지식의숲, 2008)에는 코페르니크스 지동설의 형성 과정과 책이 인쇄되어 세계로 퍼지는 과정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담겨 있단다). 코페르니쿠스는 아슬아슬하게 인쇄본을 손에 넣은 채 임종을 맞이한 것이지. 그런데 이 책은 당시 천문학자들에게 그리 큰 영향을 주지는 못해. 오늘날 과학혁명의 효시로 알려진 것과는 사뭇 다르지. 무엇보다 코페르니쿠스 역시 프톨레마이오스와 마찬가지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원운동 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했거든. 그의 태양계 모델은 지구와 태양이 자리만 바꾼 것이었어. 모델이 좀 단순하기는 했지만, 무엇보다 관측자료와 어긋났거든. 그래서 극소수 수학자들만 관심을 가졌지 대부분은 외면했어. 심지어는 종교재판소조차도 무관심할 정도였단다. 코페르니쿠스의 저서는 금서로 지정된 적이 없어. 지구의 운동을 직접 언급하는 문구만 검정 잉크로 지워진 채 유통되었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흥미를 느낀 과학자 중 한 사람이 바로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야. 갈릴레이는 우연히 얻은 망원경으로 태양의 흑점을 관찰해서 어쩌면 지동설이 옳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해. 그렇지만 갈릴레이가 종교재판소에서 지동설을 부인하고 재판정을 나오다가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혼잣말을 했다는 이야기는 후대에 만들어진 신화야. 옆에서 그 말을 듣고 전해준 사람을 확인할 수 없거든. 사실 갈릴레이는 천문관측보다는 역학에 더 많은 관심이 많았어. 그에게는 내던진 돌멩이가 몇 초 후에 어디에 떨어지는지를 계산하는 것이 더 중요했던 거야.
당시 유럽에서 가장 뛰어난 천문관측자는 덴마크의 대귀족 티코 브라헤(Tycho Brahe. 1546~1601)라는 사람이었단다(키티 퍼거슨 지음, 이충 옮김, 티코와 케플러(오상, 2004)에는 티코 브라헤와 케플러의 천문학과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소개되어있단다). 그는 자신의 영지인 섬에 자신만의 거대한 천문대, 우라니부르크를 지어놓고 여러 명의 조수와 함께 천문 현상 관측에 매진하고 있었어. 당연히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관한 소문을 들었지. 태양 중심 모델의 단순성에는 감탄했지만, 천문관측에 능했던 그는 곧바로 코페르니쿠스 태양 중심 체계가 자신의 관측자료와 어긋난다는 사실을 발견했어. 물론 구교도인 자신의 종교적 신념도 어느 정도 작용했겠지. 당시 가톨릭은 천동설이 성경에 합당하다고 간주했거든.
어찌 되었든 그는 자신의 축적된 관측자료에 일치하는 체계를 고심하다가 일종의 절충 모델을 고안해. 성경에 어긋나지 않도록 지구를 우주의 중심에 놓고 달과 태양이 그 주위를 공전하는데, 다섯 행성과 항성은 태양 주위를 돈다는 것이야. 아리스토텔레스를 존경했던 브라헤가 원운동을 그대로 유지한 것은 당연했지. 아무튼 그는 주전원들을 끌어들이지 않고도 행성들의 불규칙 운동을 어느 정도 계산할 수 있었어. 그러나 화성의 역행 운동이 문제였어. 그 모델에 기초한 계산과 실제 관측자료가 일치하지 않는 거야. 화성의 역행 운동이 잘못일 리는 없기에 브라헤는 자신의 가설에 잘못이 있음을 알았어. 그러던 중 젊고 뛰어난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이자 점성술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돼. 브라헤는 망설이지 않고 그를 자신의 조수로 채용했지. 그 젊은이가 바로 케플러(Johannes Kepler. 1571~1630)야.
케플러는 당시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를 읽고 감명을 받은 소수의 사람 중 하나였어. 그는 튀빙엔대학에서 지동설을 믿었던 매스틀린 교수에게서 천문학을 배웠단다. 서너 명의 학우들이 동아리를 만들어 교수와 함께 코페르니쿠스의 책을 읽고 토론했다고 해. 대학 졸업 후 그는 그라츠대학의 교수로 재직했지. 케플러는 플라톤주의자였어. 플라톤의 우주론을 담은 대화편 티마이오스에 우주를 정다면체들이 겹쳐 있는 것으로 설명하는 장면이 나와. 케플러는 여기에 영감을 받아 지동설에 바탕을 둔 기하학적인 태양계 모델을 제안해. 그는 이러한 담대한 주장을 담은 책을 출판해서 당시 유명한 수학자, 천문학자들에 보냈단다. 갈릴레이와 브라헤도 그 책을 받았어. 갈릴레이는 자신도 지동설을 믿지만, 물리적 증거가 아직 부족한데 이러한 공상적 장난은 지동설의 신빙성을 떨어뜨릴 뿐이라고 맹비난했어. 그 소식을 들은 케플러는 크게 실망했겠지.
그런데 브라헤로부터는 기쁜 소식이 온 거야. 당신의 수학적 능력에 감탄했다면서 함께 일하지 않겠냐고. 사실 브라헤는 천문관측자일 뿐이어서 관측자료를 기하학적으로 해석할 능력이 부족했어. 반면에 케플러는 시력이 나빠서 육안 관측이 아예 불가능했지. 그래서 갈릴레이와는 다른 방식의 망원경을 제작하기도 했단다. 모친이 마녀로 고발당해서 이 문제를 해결하느라 지체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브라헤의 우라니부르크에 도착한 케플러는 곧바로 공동 작업에 착수해.
브라헤는 케플러가 자신의 지구‧태양 중심 모델을 신뢰하지 않고 태양 중심 체계를 믿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해. 브라헤는 자신과 다른 이론을 가진 케플러를 묵인하고 오히려 격려해 주기까지 했다는 거야. 과학자로서 훌륭한 모습 아니겠니? 케플러는 굉장히 큰 용기를 얻었을 거야. 그렇지만 둘 사이가 그렇게 원만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 브라헤는 결투에서 코를 베이는 사고를 당해 가짜 코를 달고 살았는데, 이 때문에 매우 신경질적이었던가 봐. 케플러 또한 한 성격 하는 사람이라 둘이 다투는 일이 잦았다고 해. 케플러는 브라헤의 다른 조수들과는 거의 원수처럼 지내고 말이야. 그러다가 짜증이 난 케플러는 1년도 못 되어 우라니부르크를 뛰쳐 나와 그라츠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단다. 그런데도 브라헤는 케플러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던 모양이야. 케플러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브라헤는 갑자기 병이 들어 유명을 달리하고 말아. 죽기 전 그는 천문대에서 30년 넘게 축적한 모든 관측자료를 케플러에게 물려주라는 말을 유언으로 남겼단다. 사이가 좋지 않았던 조수들이 관측자료가 탐나 케플러가 스승을 독살했다는 헛소문을 퍼뜨렸지만, 유언집행을 막을 수는 없었어. 그렇게 해서 당시 육안으로 수집한 가장 정확하고 가장 정밀한 관측자료가 케플러의 손에 들어왔던 거지.
케플러는 그 이후 꼬박 8년을 그 자료들과 씨름하며 보냈단다. 자료들을 훑어보는 작업을 반복하면서 지구의 운동 궤적을 기하학적으로 구성하던 중 그는 지구가 찌그러진 원운동을 한다고 가정해야 관측자료를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어. 찌그러진 원이라니! 실망한 그는 지구의 궤적 추적을 미뤄 두고 우선 화성 궤적을 구성해 보기로 마음먹었단다. 화성은 역행 운동을 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거든. 그런데 놀랍게도 화성 역시 태양 주위를 찌그러진 원운동을 한다고 가정하면 역행 운동이 설명된다는 사실을 확인한 거야. 행성들은 태양 둘레를 찌그러진 원운동, 정확히 말하면 타원운동을 하고 있었던 거야. 케플러는 지구의 타원운동 궤적을 제1법칙으로 정식화하고, 부등속운동을 설명하는 면적속도일정의 법칙을 제2 법칙으로 수식화했어. 이 두 법칙을 설명하고 증명한 신 천문학이 인쇄 출판된 것은 1609년이야. 10년 후인 1619년 케플러는 다시 천체운동의 조화를 수식화한 제3 법칙을 서술한 우주의 조화를 출간하지. 지구가 돈다는 사실 뿐만 아니라 천상계가 완전한 것이 아니라 불완전한 것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세계라는 것을 세상에 알린 거지.
그러나 상황은 만만치 않았어. 이 책을 읽어 본 갈릴레이는 콧방귀를 뀌었다고 해. 도저히 타원 개념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거야. 2천 년 이상 서양인들의 머릿속을 지배해 온 사상을 그 책 하나로 하루아침에 무너뜨릴 수는 없는 노릇이지. 더욱이 타원 개념은 기독교 진영, 특히 구교도들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반성경적인 것이었어. 50년이나 더 지나서 뉴턴은 케플러의 법칙을 수학적으로 증명해서 타원의 발견이 진정한 과학혁명의 시발점이라는 것을 확인했단다. 오늘날 타원 궤도를 의심하는 사람은 없지. 너도 학교에서 케플러의 세 법칙을 당연한 것으로 배울 거야.
첫댓글 너무 어려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