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하나님 나라의 중요한 인물의 한 사람으로 감리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레를 들 수 있다. 성경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거듭난 날에 대해서 애기했는데, 자신의 생의 결정적인 전환점이 된 그 날의 시간과 분까지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은 1738년 5월 24일 저녁 8시 45분의 일이었다. 요한 웨슬레는 증조부로부터 3대째 목사를 이어온 집안에서 모태 교인으로 태어났다. 요한은 열 아홉 남매 중 열 다섯번째 아이였다. 그가 하나님의 손길을 처음 느꼈던 것은 아직 어렸던 6세때로, 집에 불이 났는데 마지막 순간에 간신히 구출 받았던 때이다.
훗날에 그는 가끔 자기를 가리켜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스가랴3;2)와 같다고 말하곤 했다. 웨슬레는 소년 시절에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했다. 하나님의 모든 계명만 잘 지키면 구원받는 줄 알았고, 또 그렇게 가르침을 받았다. 청년이 되어서도 그는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했다. 그가 자기를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한 것은 남보다 경건하고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했고, 온갖 선행에 힘썼기 때문이었다.
"난 매일 한 두 시간씩 꼭꼭 성경을 읽고 기도하기를 힘써 지켰고, 매주 성찬식에 참석하였다. 말에나 행실에나 단 한번도 실수가 있을까 하여 언제나 조심하였다. 그러나 웨슬레가 구원의 근거로 열거한 조목 가운데 과연 그리스도가 언급되어 있는가? 모든 것이 자신의 경건, 자신의 노력, 자신의 기도와 성결뿐이었다.
나이가 들자 웨슬레는 교역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명문 옥스퍼드 대학에 들어갔다. 거기서 신학도가 되었고, 여전히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했다. "난 옥 중에 있는 죄수들을 찾아보았고, 빈민굴에 가서 가난한 사람을 병든 사람을 돌봐 주었고, 최선을 다했다. 또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부지런히 자신을 경계했다."
몇 년뒤 웨슬레는 병들어 죽음의 문턱에까지 다다른 적이 있었다. 그런 온갖 선행에도 불구하고, 죽음이 그 앞에 서 있었다. 그런데 웨슬레의 마음은 평안이 없었다. 이대로 죽으면 하나님이 자기를 받아주시질 않을 것 같았다. 도저히 확신이 없었다. 안심하고 소망을 걸어볼 데라곤 어디도 없었다.
마침내 웨슬레는 옥스퍼드 대학의 전과정을 수료하고 성직자로 임명되었고, 마음에서 일어나는 의심을 없애기 위해 더욱 경건한 생활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대학의 추천으로 아메리카로 향했다. 대서양을 건너는 그 지루한 항해 중에도 종교 생활을 방심하지 않았다.
4시부터 5시까지 명상과 기도
5시부터 7시까지 성경
8시부터 9시까지 기도회
9시부터 12시까지 성경 연구
12시부터 1시 까지 간증 시간
2시부터 4시 까지 전도
4시부터 5시 까지 저녁 기도회
5시부터 6시까지 명상과 기도
6시부터 7시까지 성경
7시부터 8시까지 저녁 예배
8시부터 9시까지 설교
매 시간을 오직 자기의 신념에 충실하게 생활하려 한 것이다. 그는 전도를 하고 세례를 주고, 성찬식을 베풀었다 그는 참으로 신심이 두터운 종교가였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죄사함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거기서 오는 기쁨과 평강이 없었다. 그에게 있어서 종교는 하나의 무거운 짐이었다.
항해 도중 그들의 탄 배는 무서운 폭풍우를 만났다. 웨슬레는 죽음의 대한 공포를 부인 할 수 없었다. 그런데 같은 배에 탄 25명의 모라비아교인들은 한 사람도 두려워 하는 기색이 없었다. 웨슬레는 그들의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7시에 모라비아교의 집회에 참석했다. 그들의 생활속엔 깊은 경건이 스며 있음을 부인할 수 없었다. 그들의 겸손은 배에 탄 다른 사람들을 솔선수범해서 돌보고 있었다. 어쩌면 그렇게 아무 보수없이 남을 돌보고 있나요?하고 물으면, 사랑하시는 주님은 그들을 위해서 더한 일도 하셨는데요. 하고 대답할 뿐이었다. 그들은 언제나 온유했다. 그들의 입에서는 불만 불평이 나오질 않았다.
돛이 산산 조각이 나고, 배엔 모두 물바다가 되었다. 아수라장인 가운데 그들은 조용히 찬송을 부르고 있었다. 그는 그들 중 한사람을 붙들고 물었다. "무섭지 않습니까?" "참말 하나님께 감사한 일이죠, 무섭지 않습니다". 웨슬레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자신과는 너무나 먼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일이었다. 이때서야, 비로소 구원을 받고,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무리와 처음 접하게 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가운데 미국에 도착해서 구원받은 그 무리인 선교사 아우구스트 슈팡겐베르크 목사를 알게 되었다. 웨슬레는 그 선교사에게 여러가지들을 묻고 싶었다. 그 선교사는 조용히 웨슬레에게 말했다. "당신은 자신에 대해서 알고 있나요? 당신 속에 그 증거가있나요? 하나님의 영이 당신의 영과 더불어 하나님의 자녀인 증거가 있나요?(로마서 8장 16절)
웨슬레는 예상치 못한 그의 질문에 매우 당황했다. 그런 모습을 보고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십니까? 웨슬레는 궁리 끝에 "ご?그 분이 세상에 구주이신 줄 알고 있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야 그렇죠. 그러나 그 분이 당신을 이미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소?" 웨슬레는 "나는 그가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돌아가셨기를 바랍니다. 라고 말했다. 그 후 슈팡겐베르크는 "당신은 자기 자신은 알고 있소?" 라는 말 한마디만 덧붙이고 대화를 끝내버렸다. 그 때 웨슬레는 잘 알고 있습니다. 라고 대답을 했지만 그 대답이 확신이 없는 것이어서 내심 불안했다.
웨슬레는 2년동안 자기의 선교임무를 성실이 수행하려 했으나, 그의 뜻대로 되질 않았다. 미국 선교 여행은 그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그의 일기장에도 기록된 것처럼 자기 영혼의 구원의 필요성에 대해서 절실히 깨달았던 것이다.
"인디안들을 건지기 위해 나는 미국으로 왔다. 아~~그러나 나는 누가 건질까. 이 믿지 않는 마음에서 나를 건져 줄자가 누구냐!! 나의 종교는 한 여름날의 종교다, 내 생명을 위협하는 것만 없으면 나는 자신이 있고 거칠게 없다. 그러나 죽음이 나의 면전에 나타나 내 심령에 풍파가 이는구나! 나 자신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그들이 철학을 공부했는가? 나도 했다. 그들이 신학을 아는가? 나는 여러 해 연구했다. "그들이 영적인 것을 유창하게 말할 수 있는가? 나도 그리 할 수 있다.
보라! 난 내 소유의 전체를 받쳐 가난한 사람들을 도왔다, 또 먹었다. 넘치게 수고하고 고난도 달게 받았다. 난 나의 부귀와 명예를 버리고, 안락과 명성을 버리고, 내 생명의 맨 주먹을 걸고 더위에 그을리고 피곤에 지쳤으며, 힘이 들었지만 하나님이 주신 일이라 생각하고 기쁨으로 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가? 하나님 보시기에 내가 과연 자녀인가? 또 의로운가? 앞으로도 내가 계속 이 마음을 끌고 갈 수 있는가? 과거는 그렇다 치고, 지금도 그렇다 치고 미래를 내가 책임 질 수 있는가? 결코 아니다! 나에게는 그리스도의 공로가 나의 죄를 사하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어 잇질 않다. 하나님에 대해 신뢰가 없다."
이런 고백 속에는 그가 얼마나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는지 명확하게 드러나 있다. 영국에 도착한 그는 바로 구원 받은 목사를 만나게 되었다. 페터 뵐러라는 이름의 목사였다. 그와 내적인 문제를 주고 받은 결과, 웨슬레는 자기에게 구원 받은 믿음이 전혀 없음을 고백했다.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를 마침내 시인한 것이다.
결국 목사도 아니요, 선교사도 아니요, 그리스도인도 아니요, 다만 하나님 앞에서 벌거벗은 한 죄인의 위치로 되돌아 온 것이다. 얼마나 간절히 믿음을 추구해 왔던가! 그러나 자기가 죄인인 것을 깨달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구원 얻는 믿음에 대해서 납득이 가지 않았다. 이젠 다시 설교하지 말아야겠다. 자기 자신도 분명히 모르면서 어떻게 남을 가르칠 수 있겠는가? 그 후 웨슬레는 율법적인 행위는 그만두었지만, 그의 불안은 더욱 더 깊어져만 갔다.
그 때 하나님은 페터 뵐러를 통해서 편지를 보내주셨다. "나는 진정으로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자주 당신을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창세 전부터 주신 연민의 정이 이미 십자가에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야말로 당신을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사랑하십니다. 그가 당신 속에 들어와 사시는 것을 느끼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불신앙의 죄에서 풀려 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 아들이 하신 일을 믿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신앙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그를 믿으십시오"
죽음을 앞둔 한 죄인이 감옥에 갇혀 있다. 선행을 쌓고,자기의 공로를 쳐다본다는 것은 이 죄인에겐 불가능하다. 마땅히 죽어야 할 몸이고, 사형을 면할 도리는 전혀 없다. 완전히 무력한 꼼짝달싹 할 수 없는 바로 이 죄인에게 유일한 희망은 무엇인가?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 그 구원만이---
이제는 웨슬레도 구원이 인간의 공로에 있지 않고 믿음에 있다는 것은 알았는데 그것이 단 번에 된다는 사실이 좀 납득이 가지 않았다. "어떻게 그것이 순식간에 이루어 질 수 있지? 당장 사람이 어두움에서 빛으로, 죄와 육의 비참한 처지에서 의(義) 가운데로 그리고 성령의 기쁨 가운데 들어 갈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성경의 모든 사실이 모두 순간적으로 구원 얻은 그것만을 기록한 것이다. 그의 이성으로 납득이 되질 않았다. 그렇게 가르침을 받질 않았다. 이전 같으면 모두 `이단`이라고 당장 일갈해 버릴 수 있었지만, 그의 맘은 이미 갈등하고 있었다. 주일 날 그는 구원받은 무리들의 간증을 듣게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역사를 말하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아들의 보혈을 믿는 순간에 주신 것과 어두움에서 빛으로, 죄와 공포에서 성결과 평안으로 이르게 하신 일들을 간증하였다.
오직 나의 부르짖음은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는것 뿐이었다. 웨슬레는 새로 발견한 이 믿음을 자기 교단에서 두려움 없이 전파하기 시작했다. 자기 자신은 그러한 믿음을 발견하지도 못했으면서, 누구든지 믿는 순간에 구원이 단번에 이루어 짐을 거리낌 없이 외쳤다.
그러나 반응은 냉담했다. 교회는 하나 둘씩 그에게서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마침내는 어느 교회에서도 그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진리를 가르쳤건만 진리와 그 전파자는 배척되었다. 웨슬레는 1738년 5월 24일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는 경험을 했다. 구받은 모임이 있어 가보았다. 페인트공인 홀런드씨가 인도하고 있었다. 그는 루터의 로마서 강해 서문을 읽고 있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일으키시는 변화에 대하여 그 사람이 말할 때 이상하게 그의 마음에 감동이 왔다. 그는 그의 구원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오직 그리스도만을 신뢰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나의 죄를, 바로 내 죄를 제하시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구원하셨다는 확신이 생겼다.
그리고 거기 있는 모든 사람에게 공개적으로 그가 처음으로 마음속에 일어난 사실을 간증했다. 요한 웨슬레는 산 믿음의 열매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쉼과 평강 이었다 그것은 죄에서부터 해방된 자만이 느낄 수 있는 평강 그것이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로마서 10:3)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신 일, 십자가에서 세상 모든 죄를 해결하신 것을 믿는 그것이 믿음이다. 그 믿음 후에 즉 죄사함 후에 마음에 성령이 계셔서, 평강과 쉼 뿐이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사도행전 2:38)
웨슬레는 그 때부터 많은 사람들로부터의 따돌림이나 핍박이 문제되지 않았다. 마음 안에 주님으로부터 오는 쉼이 그를 지키고 있었다. 마음 안에 주님이 일을 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구원 받은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평안, 바로 그것이었다.
첫댓글 하토브님, 혹시 이글의 내용이 맞는 글입니까?
그렇다면, 제가 그 때 웨슬레를 만났어도 동일한 말을 했을 것 같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 줄도 모르고, 어떤 일을 하셨는지도 모르로, 그래서 죄사함의 은혜도 알 수 없고,
믿고 나서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도 몰랐습니다. 오직 종교적인 경건생활만 배운 것이죠.
이런 사람은 교회에 부지기수로 압니다. 그에게 생명없는 종교생활에서 벗어나 그리스도를 만나라고 얘기 했을 것 같습니다. 웨슬레는 처음 부터 그리스도를 제대로 알고 믿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단순이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봅니다.
모두가 존재를 믿으면 믿는다고 생각하지만, 진짜 믿음은 예수가 그리스도심을 믿고, 그분을 생명의 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물론 영접기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고.
그리스도를 모르는 웨슬레는 생명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거듭난 생명있는 전도자는 생명을 위해 전도하지만,
생명없는 종교인은 자기 교회 부흥을 위해 전도합니다.
그래서 무지 힘들어 하지요..
저의 기본적인 생각은 이렇습니다.
다만 저도 하토브님처럼 몇가지 구체적인 부분에는 아직도 잘 모르는 부분이 있습니다.
제가 올린 거듭난 요한 웨슬레와 내용이 거의 같을 것입니다. 위에서 모라비아 형제단의 슈팡겐베르크는 형제단이 목사제도, 성직자제도를 거부하였기 때문에 올바른 직책이 아니고 스팡겐베르크 형제가 맞습니다. 그가 던진 질문에 요한 웨슬레는 위에 언급된 답변 외에 자기는 국교회 사제라고 답하였습니다.
웨슬레를 만났을 때 슈팡겐베르크와 동일한 질문을 할수 있는 사람은 오늘날 목사들을 만났을때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가? 하고 물을 수 있는 사람이며, 또한 큰 풍랑과 폭풍으로 배가 뒤집히려 할 때에도 오직 찬송으로 잠잠히 하나님을 의지하며 기도하는 사람의 수준이 되었을 때일 것입니다. 파수꾼님은 오늘날 목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아십니까? 하고 질문하십니까? 폭풍과 파도는 굳이 안당하고 계신다 할지라도 오늘날 무수한 거짓 신자들이 득실거리는 현실에서 진정으로 거듭나셨습니까? 하고 물으며 전도하지 않는 사람은 그때에도 당시의 국교회나 자유교회나 모두 예수 믿는다고 하였으므로 더 이상 묻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문제는 사건이 지난 다음에는 항상 옳은 말을 한다는 인간의 자세에 관한 것입니다. 예를들면 우리 세대의 사람들이 옛날에 살았다면 예수님 당시 그분이 무덤에 묻혀계실때 새벽에 가서 향품을 바른다고 나섰을 것입니다만, 지금은 우리는 그렇지 않고 성경에 나온 부활하시리라는 말씀대로 부활할 줄 알고 그 시각까지 갔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세월이 지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훤히 아는 사람이 향품은 왜가지고 갑니까? 부활하시리라고 성경에 나오지 않나요? 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토브님의 진실한 질문 감사드립니다.
혹시 말은 쉽게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그렇지 못하다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기존신자라 믿는다고 하면 더이상 이야기를 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상대방이 예수를 믿으니 복음이 필요없다라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행여나 사랑 님의 비판처럼 교인 뺏는다라고 할까 해서 복음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복음의 양심의 소리가 그들을 그냥 둘 수 없어,
기존신자를 만날 때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아십니까 라고 물어봅니다.
그리고 복음을 이야기 합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존심이 상해 더이상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한편, 목사나 교회의 중직자를 만났을 때는 그렇게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지는 않습니다.
혹 상대방이 기분이 상할까 싶어서 말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싸우기 싫어서 말입니다.
싸우고 변론할 시간에 불신자에게 복음을 전한다가 제 방향입니다.
다시 말하면 시간 낭비하기 싫은 거죠.
다만, 기회가 되어서 지속적으로 만남이 되어지면,
그와 하나씩 대화를 해 나아갑니다.
저의 기존 신자나 목사에게 복음을 전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방법은 이렇습니다.
컵 안의 탁구공이 있습니다. 탁구공은 잘못된 복음과 사고 입니다.
그것을 빼내고 그 안에 물 곧 참 복음의 내용을 채우는 방법은 두가지가 있다고 봅니다
탁구공을 빼고 물을 넣는 것과 물을 계속 집어 넣으면 탁구공이 빠집니다.
우리는 계속 잘못된 것을 비판하면서 복음과 다른 사이비 내용들 곧 비복음인 탁구공을 계속 해서 빼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 많은 갈등과 변론이 오고 갑니다.
하나님이 제게 주신 방법은 옳은 생명의 복음의 말씀, 꼭 하토브님이 이곳에 올리는 많은 복음에 관한 글과 같은 내용들을
계속해서 이야기해 줍니다. 그러면, 그들 안에 있는 비복음적이고 종교적인 탁구공은 하나씩 물에 의해 빠져 나오게 됩니
다. 이렇게 성장한 이들의 특징은 자신의 안에 있는 복음 때문에 모든 것을 분별하지만, 함부로 판단하고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저는 귀한 복음을 가지고 함부로 남을 이야기한는 자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결국 소모적인 논쟁과 감정섞인 언쟁으로 귀한 복음은 사라집니다.
저는 복음은 사람을 세우고 살리는 것이지 죽이는 것이 아니라 생각됩니다.
이렇게 저와 함께 했던 분들이 이제서야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겠다고 하는 분들이 몇분 계십니다.
물론 다들 본인의 교회에 돌아가서 섬기라 하지만, 마음 속의 걱정은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너무 종교적인니까요.
복음이 하나도 없다기 보다는 복음이 종교에 묻혀 버렸다고나 할까.
제가 드린 질문들에 대해 어느 정도는 문제점을 파악하셨기 때문에 다행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아실 것은 그런 모든 염려와 고려 사항들이 슈팡겐베르크와 그 일행들에게도 당시에 있었습니다. 오늘날 보다 더 어려운 상황이었을 수 있습니다. 민주화된 사회가 아니라 로마 카톨릭이든, 성공회든, 신앙이 다르면 참수하는 것은 기본이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 시대에 슈팡겐베르크는 웨슬레가 어떻게 하면 그런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 하며 의아해할 때 곧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아십니까? 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었던 인물이었습니다.
기독교란 바로 동일한 말이나 질문도 던지는 사람에 따라 그 힘이 달라집니다.
슈팡겐베르크는 오늘날을 와서 산다해도 거친 풍파에 시달리는 삶가운데서도, 그는 평안을 유지하며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할 것입니다. 그러할 때 목사나 사제가 찾아와서 어떻게하면 그렇게 평안하십니까? 하고 물었을 때 그는 목사에게 "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십니까?" 하고 물었을 것이며, 목사가 " 나는 목사입니다" 하고 대답하면, " 저는 당신의 직업이 무엇이냐고 묻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 목사는 " 목사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지 예수 안믿고도 목사하는 사람 보았습니까? "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그는 답하기를 목사면 예수 그리스도를 자동으로 믿는다는 말
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물었던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아십니까?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러면 그는 아마 " 저는 예수님을 믿었고 믿었기 때문에 목사가 되었습니다" 하고 대답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그는 " 저는 님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아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할 것입니다. 그 목사가 진정으로 거친 풍파에 시달리는 삶 가운데서도 평안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감탄했다면,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으려 하였을 것입니다.
진정으로 웨슬레에게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십니까? 하는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은 한국의 목사들마다 만나면, " 예수 그리스도를 아십니까?" 하고 물을 수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는 또한 거친 풍파와 폭풍우가 뱃전을 때려도, 평안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제가 쓴글, 전세살이를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방법과 회사에서 고사지내기에도 나와 있지만, 저는 군대 생활 가운데서도 관물이 없어지면 그것을 채워넣는다는 훔치기를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거친 풍파를 이겨내는 삶이었습니다.
저는 교제하다 보면 목사들에게도 구원을 전합니다만, 목사들은 일반 신자들에 비하여 교만이 쩔어있습니다. 감히 형제라 부르는 것도 거부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폭풍우가 몰아칠때, 배가 뒤집어질 위기 가운데서 평안히 찬송하며 기도하는 삶을 살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많은 것을 생각해 해주는 댓글입니다.
거친 풍파를 이기고 그 속에서 평안을 누리는 삶.
죄송한데 제가 아는 많은 분들(목사님들도 다수 포함)도 이런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거듭나고 생명이 성숙한 자들은 그런 신앙을 가지게 됩니다.
왜냐, 하나님과 동행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거듭난 자가 모두 하루 아침에 그런 신앙을 가지지는 않는다고 봅니다.
생명은 자라나기 때문입니다.
한편, 그런 간증을 거듭남의 증거로 하는 것은 많은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왜냐, 제가 볼 때는 종교인들 중에도 그런 간증을 가진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같은 신앙을 가진 기독교인이 많이 있습니다.
성경도 잘알고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해 열심히 노력합니다. 그런데 삶의 실제적인 문제 속에서는 고통을 당합니다.
고통을 당하면서도 거친 풍파를 헤쳐 나가는 신앙으로 주의 뜻을 행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분들 안에 참된 평안이
없습니다. 그리고 기독인은 이 땅에서 고생하나 천국의 소망을 품고 산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은 그런 분들을 보고 기독인은 참 어렵게 산다고 생각합니다. 결코 행복해 보이지 않죠.
그들의 가족들이 증인입니다.
저는 이런 분들이 모두 니고데모와 같은 종교인으로 판단합니다.
그분들은 참 복음과 참 행복을 모름니다. 그저 말씀에 순종한다고 어려움 가운데서 참고 삽니다.
저는 요셉이 고난을 참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요셉은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모든 어려움이 발판이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알고 있는 자는 겉으로 순종할 뿐 아니라 마음 속에도 참된 평안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단 순히 어려움 가운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참고 인내한다고 다 거듭남의 분별은 아니라 생각됩니다.
혹은 성숙한 신앙도 아니라 생각됩니다.
4년 전에 저를 파송한 교회와 더이상 함께 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 그들은 자신의 교회의 지교회를 세우려고 했습니다.
저는 선교지에 현지인의 교회를 세워야지 한국의 지교회를 세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기에 그 교회와 갈라지게 됩니다.
처음에 그 교회에서 계속 어느 정도 후원을 해 준다고 했는데, 역시 그 뒤 5개월 정도 후원이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5개월이 지나 드디어 저의 가족 경제도 한계에 부닥쳤고 일주일 안에 월세도 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아내는 한국에 연락해 도움을 청하라고 했습니다.
저도 전화기를 들었다 놓았다 5번 정도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기도해야지 내가 뭐하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는데 드는 생각이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다면 그분이 모든 것을 책임지시지 않겠나 생각이 들어서,
제게 주셨던 말씀을 붙잡고 기도했습니다.
며칠 기도 안했는데, 저의 동기 목사가 전화하더니만, 자기에게 뜻밖의 수입이 있는데, 제게 필요한 것 같다고 계좌로 보내
왔습니다. 그리고 한 지역에 가서 전도하는데 만난 장로님이 자기는 자기가 만난 사람들은 도와준다고 하며 얼마를 차비로
주시더군요. 모두 합쳐보니 그 주에 필요한 월세와 비슷한 금액이었습니다.
이렇게 경제적인 문제를 3개월 정도 만나처럼 해결 받고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저를 후원하겠다는 교회가 세워지고 부터 만나가 끊어지더군요.
하나님이 저를 이곳에 보내셨기에 책임진다고 하셨고 복음을 전하라고 하신 말씀 그대로 응답되었습니다.
이런 유치한 간증을 왜 하느냐?
저는 경제 때문에 복음이 영향받게 하지 않습니다.
님들이 비판하는 것처럼 목사가 돈에 매여서 복음 전하는 것은 죄악입니다.
안되면 나가서 노가다 하면서 전도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안되면 순교라도 해야 하지 않을 까요?
저는 복음을 생명보다 소중히 여깁니다. 이것이 저와 제 가족 자녀들이 사는 길로 믿습니다.
제가 거친 풍랑 속에 평안을 누릴 수 있느냐?
하나님만 아시겠죠.
제 평생의 기도 제목이 다음과 같습니다.
죽든지 살든지 그리스도만 내 인생에 최고의 존귀를 받으시라고.
거듭나기 전의 요한 웨슬레도 그렇게 기도했을 것입니다.
왜 파수꾼님은 변화된 그리스도인들과 개독교인들을 구분하지 못하시며, 개독교인들의 관습과 제도를 옹호하며 붙드는지 이해가 안갑니다. 그것이 바로 앞으로 있게될 적그리스도 출현시에 진정한 그리스도인들보다는 성전 밖마당에 속하여 이방인과 함께 성전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핍박하는데 동참할 것으로 보게되는 우려입니다.
요한 웨슬레가 그런 믿음이 없었다면 선교사로 버지니아에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믿음이었으며 성경에 예수님을 믿고도 예수님을 죽이려 한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요 8:30, 56-58)
이 부분 만큼은 제가 님에게 분명한 말을 해 드리겠습니다.
이 부분은 님의 분별이 틀렸습니다.
하토브님도 복음을 잘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웨슬레가 그런 기도를 할 수 있었을까요?
위에 묘사된 그의 이전의 신앙이 올바른 신앙으로 보이십니까?
하나님의 계명만 잘 지키면 구원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참 평안이 있을리 있겠습니까?
제가 볼 때는 완전히 니고데모 신앙으로 보입니다.
제가 볼 때는 하토브님의 분별은 생명이 아닌 행함에 치우쳐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토브님은 웨슬레의 이전 이후 신앙의 내용이 같았다고 보이는지 대답부탁드립니다.
어렸을 때 불가운데 나왔다고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어떤 기적을 체험해도 구원받은 것이 아니며,
경건하게 산다고 구원받은 것도 아니며,
목사제도, 십일조, 십자가 우상, 절기 반대한다고 구원받은 것도 아닙니다.
오직 생명의 말씀 그리스도가 증거되고, 그 말씀에 빛이 우리 안에 비춰지고,
그 부름에 반응할 때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혹시 하토브님은 경건하게 살고 파생교리 내용을 잘 지키고 있으면 거듭난 자라고 생각하시나요?
제가 볼 때는 웨슬레는 이렇게 기도했을 겁니다.
죽든지 살든지 하나님이 내 인생에 최고의 존귀를 받으시라고.
저의 기도 제목과 차이를 구분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니죠.
하토브님의 말대로라면, 웨슬레의 이전 이후 믿는 바는 같았지만, 이전에는 거듭나지 못했다.
그 예로 요8:30절과 59절의 사람을 예로 드셨습니다.
근데, 웨슬레의 이전 이후의 믿는 바는 달랐으며 ,웨슬레는 거듭나기 전에 복음을 몰랐습니다.
요한 복음 8장30절의 믿는 자들과 8장 59절의 이들이 같이 이들이라면,
그것은 처음 부터 믿는다고 하였지만, 원래 부터 믿지 않는 자들입니다.
제가 말씀 드린 것처럼 예수 믿는다고 영접기도하고 세례 받아도,
그 뒤의 진리 말씀을 계속 전달하면 안 믿는다는 것이 다 드러나죠.
반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진짜 믿고 영접한 이들은 나중에도 그대로 믿습니다.
한편, 그들이 다른 인물일 수도 있구요. 31절에 믿는 유대인, 48절에 그냥 유대인.
웨슬레는 원래부터 그리스도를 믿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신앙의 종교를 믿은 사람입니다.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 모른 것이었죠.
이런 분들이 주변에 많이 있죠.
하나님은 아느데 그리스도는 모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자만이 하나님을 안다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저의 전도도 하나님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파수꾼님은 요한 웨슬레를 만나면 예수 그리스도를 아십니까? 하고 질문했을 것이라고 말하셨습니다. 그런 말을 할 수 있다면 왜 오늘날 수많은 목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아십니까? 하고 질문하지 못합니까? 오늘날의 목사들은 요한 웨슬레가 미국 선교사로 나갈 때의 신앙보다 훨씬 좋은 신앙들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까?
웨슬레를 만났어도 동일한 질문을 던졌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오늘날 목사들에게 전도좀 하시고, 그들에게 예수님의 명령대로 형제라 불러보십시오.(마 23:8)
파수꾼님의 종교는 제가 믿는 기독교와는 다른 것같습니다.
제가 다른 답글에 쓴 것과 같이,
웨슬레는 이미 자기의 상태를 인정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경우입니다.
웨슬레의 상태가 눈에 보이는데 다른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를 아냐고 물어 보겠죠.
그리고 저는 예전에 다짜고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냐고 물었다고 많은 갈등을 유발했습니다.
지금은 마음의 문을 연 자들하고만 이런 물음을 던집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그들의 직분을 부르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왜 제가 일부러 그들에게 형제라 불러야 하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한 형제임을 믿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