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6章: 부처님의 가르침
지금까지 우리는 부처님의 생애에 대해 중요한 사건을 중심으로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다. 그 가운데에는 가르침의 내용이 약간씩 나오기는 했으나 어디까지나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기에 가르침은 자세히 다루지를 못했었다.
지금부터 부처님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하나씩 살펴보기로 한다.
Ⅰ. 삼귀의(三歸依)
삼귀의는 불자가 최초로 하는 맹세와 같은 것이다. 그 맹세는 타인을 위해서나 교단을 위해서도 아니며, 부처님을 위해서는 더더욱 아니다. 오직 자신을 위한 새로운 각오를 스스로 결심하는 시작인 것이다.
불교에서는 불·법·승(佛法僧)을 삼보(三寶)라 한다.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과 그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며 깨닫는 스님들이 없다면 불교가 성립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자는 이 삼보에 대한 신뢰를 확보해야만 비로소 깨달음의 여행을 나설 수 있는 것이다.
큰 바다를 유유히 헤엄치기 위해서는 우선 바다에 뛰어드는 것이 중요하다. 뭍에서 아무리 이론적으로 수영에 대해 배워봐야 수영실력이 향상될 리가 없다. 물속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몸부림을 하는 것으로부터 헤엄칠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가르쳐주신 깨달음의 세계는 마치 큰 바다와 같아서 좁은 지식으로는 도저히 짐작키 어려운 것이다. 그러므로 깨달음의 바다에서 유유히 자재하려면 우선 풍덩 뛰어들어야 하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몸과 마음을 다 던져 들어가는 귀의라는 행위이다.
몸과 마음을 온통 던지는 것을 인도말로 ‘나마스(namas)’ ‘나모(namo)’라 하고 한자로는 ‘귀의(歸依)’라고 하는데. 우리말로는 ‘돌아가 의지하다’는 뜻이 된다. 즉 깨달음의 세계에서 자유자재하려면 부처님(佛)과 부처님의 가르침(法)과 부처님의 제자인 스님들(僧)께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의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싫으면 하지 않으면 되지만, 그 경우는 불자가 될 수도 없고 깨닫기도 쉽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목적지(佛)도 모르고, 가는 방법(法)도 모르며, 능숙한 안내자(僧)도 없이 어떻게 여행을 성공할 수 있겠는가!
삼귀의례를 할 때 남방불교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붓담 사라남 갓차아미 : Buddhaṃsaraṇaṃgacchāmi
저는 의지할 곳으로서의 부처님을 따르겠습니다.
담맘 사라남 갓차아미 : Dhammaṃ saraṇaṃ gacchāmi
저는 의지할 곳으로서의 가르침을 따르겠습니다.
상감 사라남 갓차아미 : Saṅghaṃ saraṇaṃgacchāmi
저는 의지할 곳으로서의 스님들을 따르겠습니다.
전통적으로 한문으로 할 때는 다음과 같다.
귀의불양족존(歸依佛兩足尊)
두 가지를 원만히 갖추신 존귀하신 부처님께 돌아가 의지합니다. [이때의 두 가지는 지혜와 자비 또는 지혜와 복덕이라고 하는데, 자비와 복덕은 결과적으로는 같다고 할 수 있다.]
귀의법이욕존(歸依法離欲尊)
욕망을 벗어나게 하는 거룩한 가르침에 돌아가 의지합니다.
귀의승중중존(歸依僧衆中尊)
무리 가운데서 거룩하신 스님들께 돌아가 의지합니다.
1. 부처님께 귀의함.
부처님은 불교수행자의 목적지와 같다. 스스로 성불하기 전에는 불교의 수행은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깨달은 분이란 뜻으로, 모든 괴로움으로부터 해탈하시어 더 이상 괴로움이 없는 경지에 이른 분이시다. 우리가 불교를 믿거나 수행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괴로움에서 벗어나 해탈하기 위함인데, 일반적인 표현을 빌리면 늘 편안한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앞에서 역사적인 부처님인 석가모니부처님의 생애를 따라가며 살펴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명승지의 사진을 살펴본 것과 다를 것이 없다. 그 살핌을 통해 부처님의 땀 냄새를 맡을 수만 있다면, 그 땀 냄새가 세상을 향기롭게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어느 정도 귀의하는 자세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진정한 귀의가 되려면 ‘나’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오직 부처님만을 생각해야만 엉뚱한 옆길로 잘못 들어서지 않을 것이다. 불교에 귀의한 지가 매우 오래임에도 아직 괴로운 일이 많다면 그는 목적지를 잊고 있거나 엉뚱한 길에 들어선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부처님께서는 언제나 중생을 깨닫게 해 주시려 애쓰셨다 -아잔타석굴 기둥에서]
2. 가르침에 귀의함.
목적지를 정확하게 정했다면 다음으로는 정확한 안내도가 필요하다. 잘못된 안내도는 목적지로부터 멀어지게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처님의 가르침만큼 완벽한 안내도를 찾기란 불가능하다.
부처님께 귀의했다고는 하지만 사람들은 제각기 그 취향이 다르다. 이는 여행을 떠나려 할 때 취향에 따라 여러 가지 방법이 나오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만약 자동차로 여행하길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우선 자동차가 다니는 도로를 분명하게 설명한 안내도가 필요하다. 그러나 기차여행을 좋아하는 여행자라면 기차역을 중심으로 한 안내도가 최적일 수 있다. 도보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빠른 지름길의 도로 안내도는 필요가 없다. 역이나 고속도로휴게소의 특징을 상세히 기록한 안내도도 불필요하다. 사람이 걷기에 좋은 멋진 길이나 곳곳의 인심 좋은 마을이 소개되고, 산속에 수줍게 있는 맛있는 음식을 준비한 곳 등이 상세히 소개 되어 있다면 최상일 수 있겠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상대로 펼쳐 보인 안내도와 같아서, 그 다양성과 자세함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자기의 취향에 따라 안내도를 선택하고 주저함 없이 나아가기만 하면 된다.
왜 가르침에 귀의해야 할까?
대낮에 운전을 한다면 자동차의 전조등을 켤 필요가 없다. 그러나 어두운 밤에는 전조등을 켜지 않으면 위험해진다. 그런데 가로등이 밝게 켜져 있고 다른 많은 차들이 전조등을 켜고 오가는 도심지의 길이라면 자기 차의 전조등을 켜지 않고도 달릴 수 있다. 어떤 때는 교통경찰이 정지시킬 때까지도 그냥 달린다. 그러나 가로등도 없고 달리는 차도 없는 한적한 산길이라면 자기 차의 전조등이 켜지지 않으면 위험해지는 것이다.
가르침이란 결국 자기의 등을 켜라고 일깨워 주는 것이다. 깨달음의 세계나 본성의 세계에는 완벽한 등이 준비되어 있다. 그러나 자기의 차임에도 전혀 파악이 되지 않은 사람이라면 어둠속을 빛도 없이 달리다가 큰 사고를 당하게 된다. 그것을 고해라고 하는 것이다.
중생의 세계는 어두운 밤과 같다. 군중 속에 휩쓸려 갈 때는 도심의 밤을 전조등 없이 가는 차처럼 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혼자가 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므로 가르침에 귀의하여 스스로를 파악해야만 하는 것이다.
[법보-부처님의 지혜와 자비가 담긴 가르침이 가득한 고려대장경-개화사 무량수전]
3. 스님들께 귀의함.
‘스님들’이라고 한 것은 정확히 승가(僧伽, 상그하Saṅgha)를 뜻한다. 승가란 출가한 이들이 서로 화합하며 수행하는 것을 뜻한다. 화합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뜻을 놓아야 한다. 제멋대로 하려는 사람은 결코 다른 사람과 화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기 뜻을 놓는 것을 하심(下心)이라고 표현한다. 하심한 사람은 항상 다른 사람을 존중한다. 그러므로 남을 존중할 수 있는 사람은 이미 깊은 수행의 경지에 이르렀다고도 할 수 있다.
가르침에 귀의하여 완벽한 안내도를 가졌다고 해도 전혀 낯선 곳에서 혼자라면 낯선 곳에 대한 불안함과 스스로의 공포심으로 착각을 일으키기 쉽다. 이때 이미 그 곳을 환히 아는 사람이 안내를 해 준다면 걱정 없이 따라갈 수 있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에 있어서도 자신의 지혜가 완벽한 경지에 이르기 전까지는 선지식의 안내가 필요한 것이다.
아무리 좋은 문화유산이 있어도 그것을 전수하는 사람이 없다면 점차 그 문화가 사라지기에 인간문화재를 정해 대접하듯이, 불법의 세계도 그러해서 가르침이 아무리 훌륭해도 수행하여 그 참뜻을 깨닫는 스님들이 사라지면 참된 진리를 만나기 어려울 것이다.
[승보-몸을 던져 가르침을 실천하여 깨달은 스님들이 있어 불보와 법보가 빛난다]
▶ 삼귀의는 신(信)·해(解)·행(行)·증(證)에서 신(信)의 확립이 되는 것이다.
신(信)은 부처님을 믿는 것이니, 부처님을 믿기 위해서는 곧 가르침과 그 가르침을 실천하는 선배이며 안내자인 스님들을 믿어야 하는 것이다.
해(解)는 그 믿음의 대상에 대해 분명히 아는 단계로 부처님의 생애와 그분의 가르침과 그분의 제자들을 통해 괴로움이 없는 세계를 확실히 이해하는 것이다.
행(行)은 이해한 것을 실천하는 것이다. 이해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머릿속에서 그려지는 가상(假想)일 뿐이다. 그것을 몸소 실천해 봄으로써 실제의 도를 깨달아가는 것이다.
증(證)은 스스로 깨달아 부처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처음 귀의로 믿음을 대상이었던 부처님의 자리와 가르침의 내용이 이론이 아닌 삶이 된 경지이다. 그러므로 언제나 행복하고 편안한 삶이 되었을 때만 진정한 깨달음에 이른 것이다.
삼보(三寶)에 대한 귀의는 깨닫고 보면 결국 자신에 대한 믿음을 확립한 것이며, 잊고 있었던 자신의 본 모습을 되찾은 것이 된다. 불(佛)은 자신의 불성(佛性)인 자성(自性)에 대한 믿음이다. 그래야만 다른 것을 주인으로 섬기지 않게 된다. 법(法)은 자신의 성품에 갖춰진 지혜에 대한 믿음이다. 그래야 일시적인 지식에 속지 않게 된다. 승(僧)은 자신의 본성의 공덕인 실천력과 자비심에 대한 믿음이다. 그래야 행복을 구걸하지 않게 된다.
[신, 해, 행, 증을 통해 결국은 자신의 삼보를 구현해야 한다-개화사 일요법회 좌선]
첫댓글 _()()()_
힘찬 정진을 축원합니다. ^^
무명으로 덮힌 어두움을 거두어 내는 밝은 등불을 비추어 행복하고 편안한 길로 인도해 주시는,
불.법.승. 삼보님께 귀의 합니다.
바른 길 인도해 주시는 스님의 자비로우신 가르침 감사드립니다! _()()()_
스스로 자기의 갈 수 있답니다. ^^
'삼귀의란 자신의 본 모습을 되찾는 것', '진정한 귀의가 되려면 나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나의 참모습을 찾기 위해서는 나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라는 말씀 깊이 새기겠습니다. 나라는 생각의 좁은 성을 툭 허물어버리고, 이 무한한 우주의 참주인이 될 수 있기를, 삼보님께 귀의합니다.
우물 속의 개구리는 그 우물을 왕국이라고 생각한답니다. ^^
불 법 승 삼보께서, 한결같이 이르시길 ' 스스로의 마음에서 ' 참나' 의 모습을 보라.'
고 하십니다. 맑고 고요한 가운데 삼가고 살피길 부지런히 하여야 함을 다짐합니다.
삼보님께 합장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것을 찾아서---- ^^
이해하고 믿음으로 드는것과 믿음으로 곧 바로 드는것에 대해 생각해보게됩니다.
신.해.행.증을 통해 늘 행복하고 편안한 삶일수있도록 매순간 묵묵히 노력해야겠습니다.
삼보께 귀의합니다. 이 인연에 감사합니다.
묵묵히 노력하여 꼭대기에 이르면 천하를 한 눈에 볼 수 있지요. ^^
부처님 땀냄새에서 부처님의 마음을 느끼면 신심을 가지지 않을수 없을것 같습니다. 다가설수 없을 것같은 위대한 진리의 중심에 그 땀냄새 나는 마음이 있다는것이 큰 감동입니다.
땀냄새가 없는 이론은 그저 공허한 관념일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다만 그 땀 흘림을 자랑하지 않을 뿐이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