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문제연구소 경북북부지부장 박동규는 회원 여러분을 대표하여
2011년 10월20일부터 23일까지 3박4일 동안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주관하는 신흥무관학교 창설 100주년 기념 신흥무관학교 옛터 답사에 참가하였습니다.
참석한 답사단은 60명이었으며 현지 안내인(여행 가이드), 버스 기사, 초기 신흥무관학교 전신인 유하현 조선족완전중학교 선생님 등 66명이 함께 했습니다. 3박 4일의 답사기간을 두서 없으나 회원 여러분께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1. 출발전까지 준비
- 여권 만들기 - 영주시청 민원실 여권창구, 10년 용 여권용 사진 1장과 수수료 4만5천원, 신청 1주일 뒤 발급
- 신청경비 납부 - 개인부담 45만원(보훈처 지원 50% 있었습니다.) 연구소에 입금.
2. 출발 전날 - 10월 19일
준비물 챙기기 - 3일치 속옷과 양말, 세면도구, 카메라, 휴대전화와 충전기(중국도 우리와 같은 220V 입니다.), 경비외 용돈 30만원(우리집 내무부장관은 중국에서 아무 것도 사오지 말라며 20만원만 가져가라는데 몰래 10만원 더 챙김), 선글라스, 체육복과 슬리퍼, 볼펜 등.
출발지가 인천국제공항이라 저녁 6시 퇴근 후 짐을 챙겨 베낭에 넣고 인천행 막차인 저녁 8시 10분 고속버스로 영주를 출발, 인천시외버스터미널로 갔습니다. 터미널 도착시각은 밤 10시 55분으로 차가 밀리지 않아 3시간 거리를 조금 빨리 도착했습니다. 인천터미널에서 공항까지는 공항철도를 이용했는데 1시간 20분이 걸렸습니다. 과시 인천공항은 세계 10위권 내 규모의 공항으로 깨끗하고 넓었고 편의시설도 잘 되어 있으나 모든 비용의 이용금액은 비싼 편입니다. 저는 도착하여 공항 밖에서 숙소를 구하는 것은 시간도 늦었고 너무 멀어 공항 내 사우나 시설을 이용했는데 찜질방 처럼 잘 수 있는 것이 2만원이었습니다. 영주에서 찜질방이 7천원인데 너무 비싸다 싶었습니다. 깨끗하기나 시설편의성이 찜질방과 다를 바 없는데 공항이라고 너무 비싼가 했습니다.
3. 출발당일 10월 20일
아침 6시에 일어나 짐을 챙기고 공항으로 가서 일행과 합류, 출국 수속. 여권확인, 출국비자 사증도장찍고, 짐 검사하는데 주머니 동전까지 다 꺼내 놨음. 베낭 등 짐 속에 액체류는 테러 때문인지 일체 휴대금지.
비행기는 대한항공편으로 8시 20분에 출발, 심양 공항에 도착하니 시차가 1시간이라 그쪽에서도 한시간 빠른 한국시간으로 도착, 저는 계속 휴대폰의 시계는 한국시간에 맞춰 놓고 썼습니다.
심양 공항에 내려 입국 수속 받는 데 중국의 첫인상은 깔끔하지 못하고 추하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청결은 우리나라 70년대 초반 수준으로 화장실도 푸세식이 많고, 친절은 제맘대로, 장사는 배짱장사, 공항안내석에서도 담배를 빼물고 후~~하면서 안내. 사람들 느낌은 꿰죄죄 하다는 느낌. 경찰은 공항질서의 얼굴임에도 머리도 후덥덥 길고 복장도 멋대로. 한편으로는 참 편하게 사는 사람들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심양공항 맞이방에서>
<한국식, 중국식 식사>
가이드는 윤영석 선생으로 금년 40살이며 공부를 잘해서 요령대 경제학과 출신이더군요. 친절하고 유머 넘치는 재중국동포로 우리역사도 잘 알고 있고, 여러 상황에 대해 공부를 많이 하고 자기나름대로 뚜렷하되 합리적인 주관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차를 타고 2시간 이동해서 점심을 먹었는데, 한식으로 중국식과 섞여서 그런대로 먹을만 했습니다.
<윤영석 가이드. 친절하고 박식한 재중동포 - 조선족은 중국사람들이 부르는 말이니 재미동포, 재일동포 하는 우리식으로 재중동포라고 불러달라고 하여 일행의 큰 박수를 받았습니다. 제가 경영학이 전공이라 전공이 뭐냐고 물었더니 경제학이라 하더군요. 이쪽에서는 대학에서 자본론을 배우느냐고 물었더니 자세히 다 배운다고 합니다. 저는 우리나라에서는 자본론을 책으로 불 수 있게 된 것이 얼마되지 않는다고 하였고, 안내하는 동안 말을 맺고나서 마무리 발언, 즉 , 이 설명은 이상입니다 하는 말을 하지 않아 일행이 박수를 칠까 말까 하는 망설임에 박수 치는 시기를 많이 놓쳤기에 민문연 대전지부장님의 의견에 따라 제가 마무리 발언을 하라고 권장하여 자연스런 안내가 되었습니다. 이후 자연스레 박수도 많이 받았고, 분위기도 더 좋아졌습니다. 북한식 발음도 윤 선생의 발음으로 알게 되었는데 북한은 격음이 없더군요. 예를 들어 우리는 북한을 "부칸"으로 발음하는데 북한에서는 "부간"으로 발음하는 식입니다.>
다시 2시간을 이동해서 길림성 유하현 조선족완전중학교에 도착했습니다.
이 학교는 신흥무관학교 전신으로 신흥무관학교가 창설되기 전 신흥강습소였는데 현재도 이름만 바뀌었을 뿐 그 학교 그대로 동포사회의 교육기관입니다. 금년 99주년으로 내년이 개교 100년이 됩니다.
1910년, 대일항쟁기 초기 이회영, 이시영, 이상룡 선생 등이 독립운동 근거지를 마련했던 곳도 이곳 유하현이었습니다.
<교내 은양정 -처음 신흥학교 전에 당시 동포사회에서 삼원보에 학교를 세워 은양학교라 불렀고, 이 학교를 기념하는 의미에서 교내에 은양정이란 정자를 세워 놨습니다.>
이 유하현의 조선족완전중학교는 동포사회의 학교가 동북3성에서 동포들이 취직하여 떠나기 때문에 몇 안되는 학교로 동포들을 묶어주는 소중한 연결고리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옆에는 조선족 실험 소학교가 있었습니다.
이 완전중학교는 중학교 안에 직업고등중학교가 같이 있어서 직업교육도 하고 있었는데 우리나라로 치면 종합중학교, 실험소학교는 우리나라로 치면 시범학교라 보면 적당할 것 같았습니다.
학생들은 한족과 재중동포 학생들이 같이 있었는데 예전에는 한족들이 오지 않았으나 한중수교가 이뤄지면서 한국의 투자가 많아지자 동포학교에 오면 한족들이 한국어를 배워 취직이 쉽기 때문에 인기라고 합니다. 그러나 재중동포들은 한중수교 이후 한국으로 돈벌러, 국적취득으로 많이 떠나 여러가지 문제가 많이 노정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학교 선생님들은 딱히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점인지는 말씀하지 않고, 학생들이 기숙사에 많이 머물고, 조선족학교가 하나 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으로 동포사회의 규모가 줄어들었음을 말했습니다. 그런데 더디기는 하나 한국에서 투자가 계속되자 현재는 동포들이 다시 모이는 중이라고 했습니다.
또가이드 윤선생은 중국동포를 중국 땅에 머물게 하여 동북3성의 재중동포가 한곳에 모여 힘을 발휘하게 하려면 한국기업이 동북3성에 많이 투자하여 동포들이 다시 모이게 해야한다는 간절한 희망을 말하기도 했습니다.
학교 조직은 당서기, 교장, 부교장, 교사 등으로 이뤄지는데 중국은 어느 기관이든 당에서 파견한 당서기가 최고 책임자입니다. 이 학교의 당서기는 재중동포였습니다.
<당서기의 환영사>
<교장 선생님의 환영사>
<김용호 답사단 대표의 우리말 교재 전달>
답사단은 민족문제연구소 회원들과 경희대 민주동문회원들이 대부분이었는데, 경희대학교는 신흥무관학교 후신으로 해방후 이시영 선생이 신흥학교를 세웠는데 경영난에 봉착하여 조영식씨의 경희대 재단에 학교를 넘겼답니다. 그런데 신흥학교가 경희궁 옆에 있어서 조영식씨는 학교이름을 경희대로 했다고 합니다. 이 학교에서 신흥학교의 전통을 이어가자고 하는 동문들 모임이 경희대 민주동문회라고 합니다. 이들 회원들 다수가 연구소 회원으로 우리들과 뜻이 같아서 참 반가웠습니다.
<재학생 대표 인사>
<재학생들,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진지하게 함께 했습니다. 행사를 마치고 제가 재학생석을 돌면서 악수를 하자 여학생들은 쭈뼛한 학생이 있었습니다. 제가 악수하면서 열심히 공부해서 북경대학을 가거라, 그래서 우리 동포의 긍지를 높여라 하고 말하자 그 여학생은 제 손을 꽉 잡으며 미소를 짓더군요. 바로 오른 쪽 고숙인 남학생 뒤편 여학생이었습니다.>
<환영행사가 끝나고 강당에서 안동독립운동기념관 한준호 학예사의 신흥무관학교에 대한 특강을 들었습니다.>
<완전중학교 앞에서 이순옥 대전지부장님과 기념촬영. 이순옥 지부장님은 지난 2월 대전지부 회원들이 안동에 왔을 때 우리 지부 회원들이 김병수 회장님과 함께 안동에 가서 만난 적이 있어서 참 반가웠습니다. 출판업무의 전문가입니다.>
<양동석 울산의대 교수님 부자, 이번 답사 중 교수님의 아들 양준민 군은 귀여운 행동으로 일행의 귀여움을 독차지 했습니다. 자기 소개도 당당하게 했는데 마지막에 "여기 오는 바람에~~학교를 못가도 좋고요"라고 하자, 일행들이 웃으며 "학교를 안가는게 더 좋고요~~"라고 하며 함께 웃었습니다.>
<학교 앞에서 회원들>
학교에서 행사를 마치고 유하현 식당에서 식사를 했는데 학교 선생님, 교장 선생님 모두 함께 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발음이 경상도 발음이기에 제가 어찌 경상도 말씨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안휘성 출신으로 안휘성에는 경상도에서 건너간 사람들이 많아서 그렇다고 하시더군요.
그러면서 중국의 생활상을 질문에 따라 답하시는데, "중국은 의료보험의 경우 1년에 1가구에서 한국돈 2만원 가량 바치면(납부한다는 것을 여기서는 60~70년대 우리 농촌에서 세금을 바치다라는 말을 그대로 쓰고 있었음) 되고, 땅이 넓어서 농사도 실동시간은 1년에 두 달 정도이며 나머지는 다른 일을 해서 돈을 번다. 아주 큰 부자 내놓고 능력에 따라 부지런한 만큼 더 큰 집이 있고, 조금 덜 부지런하면 조금 작은 집이 있고, 교육, 의료, 생활 등에서 큰 불편은 없다. 모든 것을 국가가 책임지고 해주는 것이 많기 때문에 인심도 좋고 살만 하다." 이 대목에서 회원이 "범죄율은 어떻습니까?"하고 질문하자, "공안, 즉 경찰의 비율이 인구에 비해 얼마 안되는데 도로에 비해 차도 적어서 서로 부딪힐 일도 별로 없고, 또 최근들어 범죄율이 급격히 줄었다"고 하더군요.
저녁식사 후 1인당 5만원씩 내서 꼬치집, 노래방 등을 갔는데 밤새 토론하고 즐거운 분위기였다고 합니다. 저는 어제 잠을 설쳐 피곤하여 일찍 자고 술 마시는 자리에는 가지 않았습니다.
여기까지 첫날. 다음은 둘 째날 신흥무관학교 옛터 답사편입니다.
2011.10.25.
민족문제연구소 경북북부지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