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지금 이 세상에 없다. 그렇다고 아주 없는건 아니다.
우리는 모이면 가끔 그를 아야기하며 웃어주곤 한다. 친구들 속엔 이렇게 살아 있다.
인디언 말로 친구란, '내 슬픔을 등에 지고 가는 사람'이라 한다고 했다. 친구란...
孤島에서 태어나 서울치대를 졸업한 수재였는데, 군의관으로 군복무를 마치고
얼마 안돼서 젊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를 돌보느라 애썼던 漁夫 형님 내외가 떠오른다.
가파도(加波島)
모슬포항에서 5.5㎞ 거리에 위치한 어업을 주업으로 하는 섬마을로 대정읍에서 마을단위 포제를 실시하는 유일한 마을이다. 가파도는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곳이다.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서양에 소개된 계기가 된 곳으로 추측되기 때문이다.
1653년 가파도에 표류 했으리라 짐작되는 네델란드의 선박인 스펠웰호. 그 안에 타고 있었던 선장 헨드릭 하멜이 '화란선 제주도 난파기'와 '조선 국기'를 저술함으로써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비교적 정확히 소개된 것이다. 그가 남긴 표류기에서 가파도를 '쾰파르(Quelpart)'라고 소개했다.
섬 전체가 덮개 모양이라는 데서 따온 개도(盖島).개파도(盖波島).더푸섬 등 섬 명칭도 과거엔 여럿이었다. 면적은 84만㎡로 마라도의 약 2.5배다. 학교는 재학생 15명에 불과한 가파초등학교가 유일하다. 마라도의 마라분교는 바로 이 학교의 분교다. 마을 주민들은 독립운동가이자 5대 국회의원을 지낸 김성숙(1896~1976) 선생을 섬 출신 중 첫째가는 인물로 꼽는다.
가파도에서 바라본 마라도
대정읍 모슬포에서 5.5km 떨어져 있는 섬으로 모슬포와 마라도의 중간지점에 있다. 섬 일원에서 갯바위 낚시가 가능하다. 주요어종은 돌돔, 벵어돔, 감성돔, 참돔, 혹돔, 방어 등이다.
마을약사
조선영조 26년(1750년) 목사 "정언유"가 진상을 위하여 가파도에 흑우장을 설치하고 흑우 50두를 방목하였다. 조선시대 헌종 8년(1842년)에 목사 "이원조"가 흑우 약탈을 막기 위하여 주민들의 입도를 허가하여, 상모리 "고부이씨", 하모리 "경주김씨", "김해김씨", "진주강씨", "나주라씨"등 40여 가구가 이주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입주당시는 "더우섬", "개파도"로 칭하다가 후에 "가파도(加波島)"라 칭하였다. 파도가 파도를 더하는 섬이다.
지명유래
▶ 팽풍덕
해안가에 있는 바위가 마치 병풍처럼 펼쳐져 있는 것 같아 보여서 이처럼 불려지고 있고 다른 설로는 이곳에서 바다에 대한 제를 지냈다고 한다.
▶ 진여
'진'은 '길다'의 뜻이다. 진은 긴의 구개음화 현상이다. 또 '진여'는 '긴여'라는 뜻이다.
▶ 주충난여
'주충'이란 해초류의 일종인데 해녀들이 이것을 채취해서 기름을 만들기도 했다. 그래서 이런 해초류가 많이 나는 여를 가리키는 말이다.
▶ 자장코지
'진코지'라고도 한다. 이것은 진코지보다도 더 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 온돌앞(大石前)
암석위에 떠 있는 돌로써 가파도에서 가장 큰 돌이다.
▶ 동항개물
포구 동쪽에서 샘이 솟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멜통
하동포구 제일 안쪽에 자리잡은 이 지역에 멸치 떼가 밀물 때 들어와 썰물에 나가지 못하고 갇히니 주민들이 뜰채로 잡는 데서 연유한 이름이다.
▶ 샛코지
「볼락코지」와「자장코지」사이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코지 >는 곶(串)을 일컫는 제주어이다.
▶ 선물
이 샘은 용천수인데 살아있는 샘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선물」은 살아있는 물, 즉 <산물 >의 변형이다.
▶ 잉개
가파리 바닷가의 이름이다.
▶ 장택코
이 지역에 파도가 닿아 부서지는 소리가 마치 길게 코를 푸는 소리와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허정장걸
바다 깊은 곳의 대륙붕으로 이 일대의 바다의 수심이 워낙 깊고 물살이 센데 마치 허허벌판이 길게 조성된 듯 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허정 >은 아무것도 없는 허한 곳을 뜻하는 제주지역어 이고 <걸>은 바다 밑 대륙붕이나 암반지대를 뜻하는 제주어다.
김성숙 선생
1896년 가파도 59번지에서 태어나 이 섬의 문화적인 향상에 힘을 쏟아 최초 신 교육기관을 창설하였고 정당의 당수, 국회의원까지 당선되었던 인물이다. 그는 이 나라 최남단의 섬 가파도에서 태어났지만 청운의 뜻을 품고 서울 제일고등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와 향토의 개발을 위하여 교육사업에 투신하였다.
그는 먼저 대정 보통학교 부설학교를 모슬포에 세운 바도 있지만 1921년(신유년_에 가파도 인재를 양성할 목적으로 현 가파국민학교 모체인 신유의숙(辛酉義熟)을 창설하여 스스로 교사가 되어 교편을 잡아 2년 동안 가파도민 훈학에 힘썼으며 신유의숙의 학생 모표가 무궁화 도안이었던 관계로 일본 관헌의 감시와 탄압을 받은 바 있다.
그는 큰 뜻을 품고 도일, 조도전대학정치학부(早滔田大學政治學部)에 입학할 때까지 부동의 토대위에 올려놓고 제주시에서 훌륭한 교수들을 초빙하여 의숙을 맡겨 놓고 도일한 것이다.
조도전대학(早滔田大學)을 졸업한 다음에는 조국독립을 위한 결사를 조직하여 일제에 항거하여 민족의 독립운동에 힘을 쓰다가 투옥생활을 겪었으며 해방이 되자 정계에 투신 당신의 야당인 한국사회당의 당수로서 활약한 바 있다. 4·19의거 직후, 제5대 민의원 선거 시에는 야당으로 입후보하여 여당입후보자를 물리치고 국회의원으로 당선되기도 하였다.
선거 시 가파도민으로서는 4표를 제외하고는 전 유권자가 그를 지지 하였던 것으로 보아 가파도민들에게 그가 얼마나 위대한 인물인가를 짐작하게 한다.
문하생들과 리민 일동은 김성숙 선생이 지닌 향토애와 교육에 대한 공로를 추모하기 위하여 가파국민학교 정문 남측 도로변에 1981년 12월에 그의 동상을 건립하였다.
가파도
2009. 10. 21
http://cafe.daum.net/jejuminyo
카페, 한승훈의 제주이야기
김성숙 선생은 잠수인 어머니가 키운 아들이었습니다.삼일운동에 참여했다가 옥고를 치르고일본에서 대학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와 학교를 세우고 후학을 양성한 참 지성인이었습니다. 오늘의 가파도가 집을 떠나 돌아오지 않는 자식들은 많아도 김성숙선생처럼 향리로 돌아와 미래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다시 이 공원을 찾아도 기억에 새롭습니다. 그는 미래를 볼 줄 알고 미래를 지향한 선구자였습니다.
회올공원 표지석 옆에는 충혼비가 있습니다.
오랜 세월이 명문을 흐리게 하여 그때의 희생자들을 알아보기가 어렵습니다.
다시 새 비석을 세울 일입니다.
충혼비에 이어 김성숙선생이 서 계시니....
회올공원의 조상들 석기류 생활도구
가파초등학교 2009년 10월
이웃나라 일본에는 국토를 보존하기 위하여 여러 대책을 시행하고 있는데 도서지방에는 세금을 면제해 주어 물가가 대도시 보다 훨씬 싸고, 생활에서 불편없도록 의료 교육시설을 완비하고 있습니다. 가파도에도 젊은이들이 머물 수 있도록 적어도 의무교육만은 가파도에서 해 낼 수 있도록 초등학교에 중학교를 합병하는 <초-중학교>로 개편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어떤 부모들은 애써 돈을 쓰며 대안학교를 찾아가는데 가파도 학교야말로 <공립 대안학교>가 되었으면 합니다.
단 한명의 학생을 위해서 모든 과목의 선생님들이 전부 근무하는 어찌보면 학생보다 교사 수가 더 많은 학교를 만든다면 왜, 섬을 떠나겠습니까. 한때 교육부 수장을 경제부처 인사를 임명해 경제적 가치만 중시하는 안목으로 나라를 경영한 적이 있으니 그 풍파가 아직도 남아있어 학생수가 줄어드니 교사도 줄어들어야 한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학생수가 줄어들면 교사 수는 오히려 더 늘어나 학생들의 미래 계발에 더 힘씀이 바람직한데 과연 바람은 어디로 불어가고 있을까요.
회올공원의 김성숙선생을 바라보세요.
그래서 미래를 바라보세요.
가파도 돌로 만들어진 몰고레돌, 연자방앗돌
가파 초등학교에서 하동으로 이어지는길..... 염해를 이겨낼 첫번째 심어야될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 보여줍니다. 가파도에는 나무가 거의 없다시피합니다. 염해가 원인일 것입니다.
성산읍 삼달2리 <주어>도 나무없는 바닷가였습니다. 이곳에 신천강씨가 성산포에서 옮겨오고 김씨가 우도에서 옮겨오면서 여러 씨족이 들어서서 마을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염해 때문에 농사를 지으면 망치기 일수였습니다. 그래서 나무를 심기시작하는데 염해에 강한 <구름비낭>을 심고 관리를 열심히 했습니다. 지금은 숲이 무성한 마을이 되었습니다.
이 마을의 강정옥 노인은 손자손녀들이와서 나뭇가지를 꺾으면 일단 "따끔한 매질"을 하고 우는 아이에게 사탕사먹을 돈을 쥐어주면서 "나무를 꺾어선 안된다." "나무를 꺾으면 혼난다."라고 했답니다. 주민들의 이러한 마음이 허허벌판에 파도치면 염분이 솜사탕같이 부풀어 올라 여기저기 떠올라 굴러다니던 일이 사라진 것이지요. 가파도에 시급한 일은 염분에 강한 나무를 심고, 전문가들이 달려들어서 관리를 해 "푸른 가파도"를 만드는 일입니다.
발전소도 있고 식수를 만들어내는 담수시설도 있으며 이렇게 주민 건강르 위해 보건진료소, 또 급한 환자이송을 위한 헬기착륙장.... 학교 등등이 있으니 조금만 노력하면 천국이 될 곳입니다.
더불어 섬주민들의 생활개선을 위해 국가가 <세금면제>등의 혜택을 줘서 가파도에는 물가가 본섬보다 싸다는 환경을 만들어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국민들은 누구나 할 것없이 "세금을 내야한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여전해 특정지역 세금면제가 곤란하다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웃나라 일본의 정책도 참고하세요. 오키나와 이리오모떼 주민들이, 일본 최남단 요나구니섬 주민들이 어떤 처지에서 사는지 알아보세요. 그들은 섬을 떠나지 않으려 한답니다. 가파도라는 섬이 진정 살고싶은 국토가 되도록 나라를 이끌어 가는 분들의 혜안이 요구됩니다.
푸른 가파도를 꿈꾸며.
하동마을 길에서
가파도 올레 10-1코스
한승훈님이 담아 온 가파도 풍경들...
가파도에서 땅을 일군, 개경 120주년 기념비
섬이지만 상수도가 놓였습니다.
節義의 대나무 작은 숲도 있고, 가파도에는 대문이라곤 없습니다.
대한민국 최남단 마라도가 보입니다. 밭가에 검은 고인돌이 서 있습니다.
고인돌
선사시대의 고인돌입니다. 가파도에서 나는 돌로 판명됐습니다.
또 다른 고인돌...
선사인들은 왜 이곳에 많은 고인돌을 남겼을까요? 역사는 과거와의 대화라고 하던데...?
어김이 있어야 하는 제주돌담...
가파도의 참새들...
어느 곳 참새들도 똑 같습니다.
상동에서 섬을 가로질러 섬 복판에 있는 학교를 찾아가는 길입니다.
올레의 원형입니다.
들고양이들 조차 한가로운 섬...
마라도에서 바라본 가파도 너머 산방산
옛 우물터, 그 옛날 생명수를 길어 올라던 곳이 상수도가 생기면서 쓸모 없는 것이 돼버렸다.
전망대
포구 입구
하동포구 이웃에 옛포구가 있고, 그 포구에 잠수들이 찾는 하동 할망당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