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보안 보도의 결과 part 2- 구스그린 전투-
지난번 쓴 군사보안 보도의 결과 part 1-산 카롤루스만 전투-의 part 2 입니다.
안 읽어보신 분은 이글을 먼저 읽어보셔야 내용이 이어집니다.
http://blog.naver.com/bumryul/100104673210
역시 같은 1982년 포클랜드 전쟁입니다.
포클랜드 전 최초의 지상전은 1982년 4월2일 아르헨티나군이 기습적으로 포클랜드에 상륙하여 벌어
졌는데 당시 극 소수의 영국 해병대는 병력 , 탄약 부족으로 그리 오래 저항하지 못했다.
영국 텔레비젼 드라마1982년 포클랜드 중 아르헨티나군과의 포클랜드 방어 영국해병대와의 전투장면
1982년 5월 21일 산카롤루스만으로 상륙하여 교도보를 확보한 영국지상군이 포클랜드 동쪽섬의
스텐리 항구로 움직임을 시작하자 아르헨티나 군사령부는 26일 스텐리 서북쪽 캔트산에 주둔한
제12보병연대를 구스그린으로 이동하게 하였다.
이것은 곧 스텐리 항을 감시하던 SAS 팀에게 관측되게 된다. 아르헨티나 보병들은 기존의
구스그린의 작은 방어진을 대폭 강화 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25일에 벌어진 아틀란
틱 콘베이어 호가 엑소제미사일에 격침되면서 이 배에 실려와 지상군을 위하여 사용될 막대한 양
의 군수품과 특히 헬리콥터들이 그대로 물속에 수장되버림으로써 영국지상군 작전에 상당한 차질
을 빗게 된다.
덕분에 신속히 공수부대로 에어본 작전을 실시하지 못하고 공수부대는 그 이름이 무색하게 일반
보병처럼 도보로 이동해야만 했다. 3 Para 즉 3공수대대와 45 코만도(영 해병대)는 도보로 Kent
산과 Estancia 지역으로 이동하야 했으며 42코만도만이 헬기로 켄트산지역으로 바로 이동할수있
었다. 다행히 이곳에 미리 숨어들어온 SAS에의해 비점령지역을 확보하게 된다.
40 코만도는 산카롤루스 만에 남아 전 영국 지상군의 생명줄인 이 만을 사수하게 되었다.
* 공수대대는 그 유명한 "머나먼 다리"의 레드데블스이다.
24일 이미 2공수대대의 (2 Para )의 D중대가 이미 이동을 시작하였는데 2공수대대의 처음임무는
적진지를 강습하고 가능한 많은 타격을 준뒤에 철수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27일에 구스그린근처
의 공항과 주거지역 확보가 중요하게 되면서 조금씩 변질되기 시작했다. 이 주거지역은 이 섬에서
두번째로 큰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곧 이곳의 안전한 확보가 우선시 되었고 아르헨티나 12보병
연대 방어선이 있는 곳으로 점차 이동하게 된다.
Herbert "H" Jones"허버트 H 존스 중령, 2공수대대 대대장
존스중령은 이 당시 구스그린의 증강된 아르헨티나 군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받을 수없었다.
그리고 계속되는 공습과 아틀란틱 콘베이어호 격침은 존스 중령의 작전에도 많은 영향을 주는데
차량을 사용할수 없었으며 헬기로만 운반할수있는 대대 중화기들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는 순전히
도보로 운반할수있는 무기만으로 작전을 히야 했다. 물론 증강된 적에 대하여 모르고 있을 때였다.
그럼에도 구스그린에서 약 6마일 지역(5-7km) 밖에 있는 카밀라 그릭하우스 Camilla Creek House
에 105mm 포대인 제8포대의 반인 3문의 포가 이들을 지원하기로 하였고 해군의 HMS Arrow 호가
4.2인치 주포로 해안에서 지원포격을 예정하였는데 기상만 좋다면 영국 공군의 RAF Harrier GR3
해리어 기들이 대지상지원을 해줄수도 있었다.
아르헨티나군 테스크포스 메르세데스Task Force Mercedes
한편 구스그린 지역의 작은 비행장에는 푸카라 공격기를 아르헨티나 공군이 전개시켜 놓았으며
이 지역 부근 고지에 35mm 와 20mm 대공포대가 설치되었다. 그리고 25보병연대의 한개 중대(C중대)
가 또한 이 지역을 확보중이었다. 26일에 도착한 12보병연대는 이탈로 피아지 Italo Piaggi 중령
의 지휘를 받았는데 4문의 포중에 3문만에 가용했다.
*25보병연대는 미국 레인저부대를 모방한 경보병부대로 당시 아랍이민자인 유명한 국가주의자인
Mohamed Ali Seineldin 중령이 지휘중이었다.
Mohamed Ali Seineldin . 국가주의자로 나중에 군부 권력남용에 연류되어 재판에서 유죄를 선고받는다
*대공포대는 601대공포대소속으로 (GADA 601) 1962년 국내의 소요사태에 90mm 대공포로 4-5대의
반대파의 파이어플라이 셔면전차를 격파한 전공이 있다.(사진)
구스그린에 사는 에릭 고스는 이들 12보병연대를 보고 별 시덥지 않았다고 기억하고 있는데 이들
은 대부분 징집병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병력만 많았고 정예로 보이지 않아 보였다.
스텐리의 여단장 오말 파라다 장군은 이들이 중화기와 병력증강으로 강력할것이라고 생각했고
이들을 합쳐서 테스크 포스 메르세데스라고 명명하였다.
제2공수대대는 Forward Air Controller(FAC) 전방공중통제관과 함께 적진을 정찰하면서 해리어기
에 의한 적진지 타격을 요청하게된다. 27일 목요일 오후에 해리어GR.3 CBU가 아르헨티나군
진지에 공격을 가하고 기총소사를 하였는데 35미리 오리콘포에 피격되어 구스그린서쪽에
추락하였는데 이것의 조종사인 편대장 Iveson은 운좋게도 적 진지 멀리에 떨어져 부상당한 몸을
숨기고 3일뒤에 헬기고 구조된다.
Iveson의 격추된해리어기와 이때 피격된 다른 해리어기
이날 아침 C중대 정찰대가 사격을 받고 물러날수 밖에 없었는데 구스그린으로 전진하는 2대대
앞에 아주 강력한 적 방어진지가 있다는 불길한 징조였고 FAC팀이 민간 랜드로버로 정찰하던
아르헨티나 정찰대를 잡아들였다. 이날 대대는 카밀라 그릭하우스를 지나가게 된다.
정보로는 114명의 민간인이 구스그린에 있는것으로 확인되고 있었는데 이들은 제2차세계대전이루
첨으로 타국과의 전쟁으로 억류된 대영제국의 국민들이었다.
하지만 밤 11시에 이미 2대대의 중대들은 구스그린 지협(동섬의 남쪽을 내려가는 중요한 길목)
의 북쪽으로 전진선을 만들어놓고 있었으며 언급된 지원화력에 추가적으로 대대의 2개 박격포가
방열하여 준비되었다.
28일 새벽 0230시(새벽2시30분이라는 소리...) B와 D중대는 번트사이드 연못의 서쪽에, A중대는
우측에 위치하였고 C중대는 북서쪽부근에 정찰대와 함께 위치를 잡았다. 지원중대는 지류의 다른
편에 사격지원진지 FSB(fire support base /미국식으로 하면 OP)를 점령한다.
번트사이드 고지의 춥고 어두운밤에 A중대장인 소령 Farrar-Hockley 경(제글을 계속 읽으신분은
익숙한 이름임, 나중에 설명)은 2공수대대의 첫번째 목표인 번트사이드 하우스로 나아갔다.
HMS Arrow에 지원포격을 요청하였으나 곧 잼이 걸려버려서(허구헌날 잼....지난번 글에서도 자주
나왔죠?) A중대 자체 밀란 대전차미사일등으로 공격을 감행하였다. 이곳에 있었던 아르헨티나
소대는 사상자가 발생하자 곧 철수하였는데 이곳에 민간인이 4명이 있었음에도 다행히 부상자는
없었다
John Crosland 소령이 지휘하는 B중대는 첫목표지를 점령하였으나 곧 막대한 화력을 뒤집어 쓰게
되었고 D중대의 Phillip Neame소령은 B와 A증대를 지나쳐서 나가면서 작은 고지하나를 점령하려
한다. 그러나 야간에 아르헨티나 진지하나를 확인하기 쉽지 않았다 그의 부하중 병장(Lance Cor
poral)하나가 적 기관총 진지 10미터 앞까지 돌격하여 이 진지의 적 3명을 사살하였다 그러나 그
도 그들과 함께 죽고 말았다 중대는 2명 전사와 2명부상을 당하는데 이것이 첫 지상전 전사자였다.
B와 D중대의 전진기세는 여기에서 중단되고 만다.
강력한 아르헨티나의 화력 앞에 저지되기 시작한 이들의 전진기세는 날이 밝으면서 거의 무미건조
하고 은폐와 엄폐가 불가능한 지형으로 인해 거의 꺽여 버렸던 것이다. 겨우 아침에 해군함의
지원포격이 이것을 조금 경감시켜줄 따름이었다.
날이 밝자 A중대는 다윈만으로 이동했는데 3소대가 다윈주거지역의 좌측(지도는 우측)지역을 다
윈언덕위에서 아르헨티나군의 사격 속에서 확보하게 된다. 이 지역은 말발굽모양의 만으로 전방이
휜히 내려다 보이는 곳이었으며이곳의 방어진지는 잘 만들어졌기 때문에 앞선 다른 중대들의 상
태와 마찬가지로 아무런 엄폐물이 없는 아곳은 화력제압을 당하기 딱좋은 곳이었다. 당연히 사상
자는 생기기시작했고 지형으로 인해 장갑 차량을 지원 받을수도 없었으며 바다쪽에서 안개가 발
생하였는데 이놈의 안개는 아르헨티나군 진지에서이쪽을 볼정도는 되어도 항공기가 지원하기에는
짙었다. 파라 하클리(경) Farrar-Hockley소령은 측면 공격을 할수도, 적의 머리에 공격을 할수도 없는
소모적인 전투를 하게 할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때 대영제국의 잘훈련된 육군중에서도 정예인
공수부대원들이 각자 스스로 움직여 전진해야 했다. 파라 하클리(경) 소령은 아버지와 같은 능력
을 보여주어야만 하는데 상황이 그렇지 못했다.
아르헨티나군의 A중대에서 대관식고지Coronation Ridge 라는 이 주요목을 점령중이
었는데 몇정의 FN MAG 기관총으로 굳건히 버티고 있었고 일부는 절대 자기 참호를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증가하는 사상자와 엄폐물이 없는 곳에서 기관총에 영국공수부대의 전진은 여기서 돈좌되었다.
어떻게 이 난국을 헤쳐나갈것인가?
제2차대전 당시 그리스전선에서 영국군 기관총진지에 저지당한 독일군의 공격을 당시 대대장인
쿠르드 마이어(나중에 판저 마이어라고 불렸으며 1944년 노르망디 캉에서 히틀러유겐트사단의 25
장갑척탄병연대장, 티이거전차 최고 에이스인 미하일 비트만이 그의 부하였음)는 전진하진 않는
그의 부대 바로 뒤에 수류탄을 까 던져버렸다. 그러자 돌격하여 영국군 기관총 진지를 점령한다.
2공수의 대대장은 그가 스스로 나섰다.
A중대로 직접 올라와 돌격을 독려하였고 파라 하클리(경)소령도 그의 부하들과 가장 가까운 참호
로 돌격하였으나 기관총에 3명이 전사해버리고말았다
전진이 다시 저지되자 존스중령은 대대의 전진을 위해 뒤에서 밀어붙이지 않았다 그 대신에.
스털링 기관단총 하나 들고 적 기관총진지로 돌격한 것이다 그의 무전병과 부관들인 대대본부
TAC1 인원들 1개분대병력이 뒤를 따라 같이 돌격했다. 사실 대대장이 스스로 이럴필요는 없었다.
포클랜드전쟁 일러스트 스털링 든 장교가 존스 중령이다.
아래는 저격수(설명안해도 아시겠지만)
그는 고지사이의 적 참호로 사격을 하면서 돌격해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엄폐하여 탄창을 교환하
고 철모도 쓰지 않고 눈에 잘띄는 붉은색 베레모만 쓴체로 다시 돌격해 다음 적 참호선까지 30야드
정도만 남은 순간.
그의 뒤를 따르던 대대본부 병사는 뒤에 아직있는 아르헨티나군 참호에서 발사된 총탄에 존스 중령의
머리와 둔부가 총에 맞는 것을 목격한다.
무선병은 긴급 부상자(존스중령) 후송을 요청했으나 이 헬리콥터는 오는 도중에 아르헨티나 공군의
푸카라 공격기에게 격추되어 조종사는 사망하고 승무원은 중상을 당했다.
공격은 다시 파라 하클리(경)소령에 의해 지휘되었는데 3번째 공격도 돈좌되었다. 겨우 아침
안개를 이용하여 다윈 언덕 경사면에 접근하였으나 곧 아르헨티나군의 포격으로 물러나야했다.
이곳은 아르헨티나 25보병연대의 Estevez소위에 의해 지휘되어 절대 물러나지 않았다. 징집병이
라고 해도 우수한 지도력으로 그 단점이 커버 되었던 것이다.
한시간 뒤 존스중령은 사망하였고 임시로 다윈 언덕에 매장되었다. 대대장의 희생은 부대원들을
고무시켜 이어진 공격으로 정오 쯤에 아르헨티나 진지의 동쪽 끝을 확보하여 전진로는 열게 되었다.
저곳이 존스 중령이 전사하여 임시로 매장된 곳이다. 전쟁후에 그의 시신을 산 카롤루스 만으로 옮겨 매장했
으며 현재 추모비가 그자리에 서있다. 보시는 봐와 같이 엄폐물은 눈씻고 봐도 없다
로베르토 에스테베즈 소위(우측) 1982년 포클랜드(말비나스)
Estevez소위는 전사하였고 아르헨티나 정부에 의해 훈장이 수여된다.
이 전투에서 2공수박격포대는 무려 1000발을 쏘아됐으며 다윈 언덕에서 다윈만을 내려다 볼수있
게 되었다.
<자 그럼 이 전투에서 보인 영국군의 사격과 기동에 대하여 몇자 적습니다
브라보 투 제로-저자 앤디 맥넵(가명,SAS 부사관출신. 실명은 스*** 빌* 미* . 실명을 알지만 얘기 못함 -_-)
번역 이동훈, 출판사가 다들 거부해서 출판 못하고 지인들만 제본으로 만들어 소유
참고
http://blog.naver.com/bumryul/100068356517
당시 SAS 브라보 투 제로팀은 이라크내에서 스커트 탐지임무도중 발각되어 엄폐물이 없는 사막을
급히 가로지르는 도중 장갑차와 트럭으로 구성된 이라크군의 공격을 받습니다. 이들은 전형적인
사격과 기동으로 도리어 이라크군을 압박했습니다.
인용
"기동간에 사격을 하면 기동속도를 떨어트리기 때문에 안된다"
"나는 튀어올라 단번에 15m를 달렸다. 교본에서 얘기하는 거리보다도 훨씬 긴 거리였다.
또한 발리 움직이면 총에 맞을 위험이 줄어들고 아드레날린이 속구쳐 오른다.
이제 전투만이 우리 자신의 소우주가 되어 버렸다. 나와 크리스는 달리고 있었고 스탠과 마크는
미니미 기관총으로 엄호사격을 했다.전형적인 사격 및 기동이 었다. 다른 대원들도 똑같이 달리
고 있었다. 이라크 놈들은 우리가 미쳤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우리를 이런 상황에 쳐넣은 것은
그들이었고 이것만이 유일한 탈출 방법이었다. .....
영화 브라보 투제로에서 전투 장면
영국군의 사격과 기동은 철저히 2인 1조로 이루어 집니다
즉 1인 사격 또는 전방에 총구를 겨누면 다른 1인은 빠르게 뛰어 엎드리거나 엄폐물을 확보합니다.
이 거리가 약 5-10m 정도이죠. 그러면 첫 1인이 다시 빠르게 움직여 동료옆에 같이 붙거나 아니면
앞으로 더 뛰어가 엎드리거나 엄폐하여 사격합니다. 즉 사격간 기동을 거의 하지 않습니다.
한사람 엄호사격간에 빨리 움직이고 사격하면 다른 사람이 다시 빨리 전진하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뒤로 빠지거나 후퇴할때도 위의 반대로만 행동합니다. 이렇게 하면 시간이 길어질지 모
르지만 언제나 한사람은 사격중이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보카 가옥폐허들 이라고 불린 보카 언덕은 아르헨티나 8보병연대의 한개 중대에서 방어중
이었는데 이곳을 공격한 John Crosland소령의 B중대는 이곳을 점령하기 위해서 밀란 대전차미사
일을 적참호에 발사하자고 부대대장인 킴블Keeble 소령에게 건의했다.
부대대장 킴블 소령
킴블은 대대본부의 무전기에서 나는 통신내용을 잊을수가 없었다.
"태양광이 쓰려졌다.""Sunray is down".
대대장인 존스중령이 맞았는 것이었다. 그는 나중에 이렇게 증언했다.
"나는 심장이 너무 뛰었다. 엄청난 책임을 지어야 했다. 저녁 무렵에 대대의 탄약은 줄어가고
있었고 우리는 거의 40시간동안 전투중이었으며 너무 피곤했다. 너무 추웠다. 우리 중 6명중 한
명은 다치거나 죽었고 증원도 없었다 내가 예하지휘관들에게 나아가자 그들은 문제 해결을 위해
나를 쳐다보는 것이 명백했다."
대대장 전사후에 후방의 대대본부에서 최전선까지 바로 달려온 킴블은 이제 2공수대대를 지휘해야
만했다. 이날 첫 전투에서부터 사용하기 시작한 밀란 대전차미사일을 그냥 일반 적거점에 대한
사격은 엄페물이 없는 이곳 전투에서 하나의 상징처럼 되어 버렸고 오히려 이 미사일을 발사하면
날아가면서 유도용 전선이 걸릴 나무같은 것도 전혀 없었기 때문에 적거점 반대편 언덕에 자리를
잡아 발사하면 거의 빗나가지 않았다.
구스그린전투. 밀란 미사일을 적 참호에 발사!
D중대장 필 님 Phil Neame소령 역시 밀란대전차 미사일로 적거점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D중대는 다윈고지의 서쪽 해안지대 부근으로 발각되지 않고 움직였는데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A중대 전투에 온 이목이 집중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보카 언덕을 확보하기 위해 B중대와 연합
하는 중이었으며 해안의 바닷물이 밀러들어오는 시간을 적절히 이용하여 보카 가옥폐허들의 가까
이 은폐하여 접근하는데 성공하였던 것이다.
B와 D중대의 공격으로 아르헨티나군은 20여명이 항복하고 약 12명이 사망하였으며 구스그린으로
가는 길이 다시 열렸다.
D중대는 보카언덕을 지나 비행장으로 서쪽을 통해 접근하였으며 B중대는 더 남쪽으로 내려가
구스그린 지협을 완전히 차단하려고 이동하였다. 한편 예비중대였던 C중대는 A중대에서 병력을
받아 주거지 북쪽에서 접근하게 되었고 A중대는 다윈만의 적 이동을 차단해야 하기에 다윈만이
내려다 보이는 고지에 진지를 구축한다. 사실 아직 여기저기에 아르헨티나 군의 방어진지가 그대
로 널려 있었는데 이들이 2공수부대의 측후방을 언제든 공격할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포클랜드의 아르헨티나군 대공포
비행장에 접근하는 C와 D중대에게 20mm와 35mm 대공포가 무자비하게 날아들었다. C중대 중대장
Roger Jenner과 다른 한명이 이에 부상당한다. 가장 집중적인 공격은 D중대가 받았는데 이들은
학교건물쪽으로 이동하다가 거의 모든 아르헨티나군의 중화기 공격을 받았다. 구스그린의 105mm
포대가 이쪽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D중대의 12소대가 한 아르헨티나군 진지에서 휘날리는 백기를 보고 소대장과 부사관들이 이곳에
접근하던중 다윈 언덕의 영국군 기관총좌하나가 이 사실을 모르고 이 진지에 사격을 하고 말았다.
그러자 아르헨티나군 진지에서 반격을 해왔고 소대장과 부사관들은 그만 죽고 말았다. 이 진지는
사상자가 더 발생하고 나서자 완전히 제압되었다.
이곳에 집중된 아르헨티나군의 화력은 포병만이 아니었다. Aermacchis MB-339 jet와 푸카라 대지
공격기와 스카이호크기들까지 D와 C중대에 공습과 네이팜탄을 투하하였는데 오히려 이들중 일부가
격추되버리고 말았다.
구스그린의 학교건물이 아르헨티나군의 35mm 대공포에 맞아 불타고 있다
이 지역 여기저기에 아르헨티나군은 지뢰를 깔아 놓아서 작전에 지장을 많이 받았지만 D중대의
11중대는 M79 유탄발사기 등을 이용하여 학교건물과 주변을 완전히 박살내었으며 12소대는 일명
깃대 라고 불리는 곳 역시 날려버렸다. 근처에 아르헨티나 대지상공격기들의 폭탄 저장고가 있었
는데 폭파 시켜버린것이다. 덕분에 한동안 불꽃놀이가 이어지고 있었다.
여기에 3대의 해리어Harrier GR3가 아르헨티나 포진지에 집속탄(클러스터)와 로켓으로 공습을 하여
아르헨티나군에 심대한 사기저하를 가져왔다.
아르헨티나군 한개 중대가 이쯤에 헬리콥터로 구스그린으로 투입되었으나 오자마자 2공수부대에게
뜨거운 환영인사를 받고 뒤로 흩어져 버렸다.
킴블 소령은 완전히 포위된 아르헨티나군진지에 두명의 포로를 통해 한 메시지를 전하게 하였다.
내용은 간단히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라 로 압축될수 있었다.
12보병연대장 Piaggi중령 전쟁후에 군대에서 밀려났다.
아르헨티나군 진지내의 공군지휘관인 Pedroza와 Piaggi중령은 29일 아침 0930시에 킴블 소령을
만나 항복할것을 얘기하였다. 이로써 포클랜드 탈환작전의 첫번째 지상 작전의 전투가 너무나도
성공적으로 끝났던 것이다.
나중에 킴블소령은 당시 그들을 설득할때에 당신들은 포위되었고 같은 크리스찬끼리 서로 죽이지
말자고 말했다고 증언했다. 사실 킴블은 지휘권을 받은 내내 시간이 나면 그냥 도와달라고 신께
기도를 했던 것이다. 결국 신은 그에게 그의 기대 이상으로 기도를 들어주었다.
이 전투중에 아르헨티나군은 55명이 전사하였고 100여명이 부상당하였는데 포로의 수가 1,200명에
달했다. 이 숫자는 2공수대대의 3배였다.
2공수대대는 12명이 전사하고 37명이 부상당하였으며 1대의 헬리콥터와 그 조종사와 엔지니어가
전사했으며 해리어기 1대가 격추되었고 1대가 손상당하였다. 그중에 존스 중령이 있었다.
구스그린 전투후의 전사자 매장
이 전투는 한국전쟁이 끝나고 벌어진 가장 큰 지상전투였으며 원거리에서 대저격전투가 양측에서
벌어졌다. 아르헨티나군은 50구경 기관총으로 장거리 단발 사격으로 영국군을 괴롭혔다고 한다
(다른 자료에서 존스 중령 또는 다른 전사한 장교가 이 50구경 사격에 머리를 맞고 전사했다고
하는데 이번 자료조사에서는 찾지 못했다. 아마 내 기억에 잡지 플래툰기사였던 것던것 같은데
기억이 분명치 않다..........)
영국군은 이 전쟁에서 아르헨티나군 저격수들에게 상당히 피해를 봤다고 하는데 일부는 아마도
월남전에 참전한 미국인 용병이었을 것이라고 마틴 페글러-보이지 않는 공포 스나이퍼 플래툰
출판- 의 책에서 언급되고 있다. 그리고 양측다 대량으로 야간 암시장비를 이용 서로 저격한
사례이기도 했다.
그리고 한국전쟁이후 처음으로 벌어진 대검 착검에 의한 백병전이 벌어진 곳이 바로 구스그린전
투였는데 이유는 아르헨티나군 보병들 중 일부가 절대 참호를 포기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
다. 이 후 다른 고지 전투(특히 텀블다운 산 전투, 스코트 근위대대가 수행함)가 대표적으로
착검 돌격으로 아르헨티나 병사들을 찔러댔다.
영국군이 여전히 착검전투를 중요히 다루고 있는데 이번 이라크,아프카니스탄전쟁에서 몇번의
착검전투로 승리를 한사례도 있는 것으로 봐서 현대전이라고 해도 날카로운 대검끝은 인간에게
여전히 두려운 존재이자 효과적인 살상무기인것 만은 변함없는것 같다
영화 텀블다운 전투장면 1 (전투장면은 4분 뒤부터 나옵니다)
영국의 포클랜드 전쟁영화 텀블다운(산 이름으로 스코트랜드 근위대가 여기서 전투를 벌였다.)
전투장면 2 . 영화의 마지막 부분, 전투장면은 영화후반후에 한 10분만 나온다.
구스그린 전투 다큐멘터리
자 그런데 이것이 이글의 제목인 "군사보안 보도의 결과" 하고 무슨 상관이지??
웨키페디아에 이에 대하여 적은것을 간단히 하면,
구스그린과 다윈을 공격하기 위해 준비중이었을때 대대본부는 BBC 월드 서비스(뉴스)를 듣고있었다.
진행자가 알리기를 공수연대의 제2 대대가 다윈과 구스그린을 공격하기 위하여 준비를 취하고 있
다. 대대장교들은 이 소리를 듣고 엄청난 혼란에 휩쌓였다. 존스중령은 거의 광분하였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BBC의 리포터인 Robert Fox (아르헨티나군이 구스그린에서 항복할때 그가
나와있었음)에게 BBC, 화이트 홀(총리관)그리고 전쟁성을 고소하겠다고 말했다.
아르헨티나 군은 이 뉴스를 들었고 존스는 공포에 휩싸였다. 국가에서 군대의 작전을 발설하다니.
그러나 작전을 진행할수 밖에 없었다.(이상 위키페디아 사전에서)
위 지도의 우측 맨끝이 스텐리 항, 빨간점이 12보병연대의 원래 방어지인 캔트 산이다.
이 뉴스는 아마도 5월26일에 방송된것으로 보인다. 이유는 아르헨티나군 12보병연대가 이날
갑자기 스텐리항의 서쪽고지에 주둔하다가 구스그린으로 급히 이동했기 때문이다.
이미 24일 BBC 월드의 방송에 아르헨티나 항공폭탄의 신관 문제를 발설하여 바로 다음날 HMS
콘벤트리호가 격침되었는데 여전히 방송하고 있었던 것이다.
왜 존스중령이 그럴필요가 없었는데도 굳이 그가 스스로 최전선에서 부하들을 독려하면서 돌격을
했는지 이 사건이 그 해답을 주지 않을까?
일단 존스중령은 정확한 아르헨티나군의 규모를 알수가 없었다. 캔트산에서 12연대가 이동한것은
SAS가 관측하였으나 이들이 이동한 곳까지는 알수 없었을 것이다.
존스중령은 아르헨티나군이 그들이 곧 올것이라는 것을 알고있다는 것을 파악했고 그리고 철저히
대비중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난국을 헤쳐나가야 한다는 것도.
A 중대가 저지되었을때 그에게 남은 방법은 뒤로 철수하는 것, 이것은 전체 영국군의 사기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부하들을 돌격시키는것, 그의 부하들이 많이 죽어나갈 것이다.
아니면 자신이 직접 같이 돌격하는것, 이러면 부하들 얼굴 볼낯은 있고 성공할수도 있을 것이다.
존스 중령은 세번째를 선택했고 그렇게 죽었다.
스스로는 이 전쟁 승리의 희생양으로 바친것이었다. 아르헨티나 12연대의 붕괴는 영국군에게는
엄청난 사기진작 효과가 있었으며 아르헨티나군에게는 공포로 다가왔다. 더구나 그들은 굶주리고
있었던 것이다.
가축을 잡아먹었다가 상관에게 발각되어 모진 매를 맞은 경우도 있었다.
아르헨티나의 말비나스전쟁(포클랜드 전쟁) 영화Blessed By Fire 중에서
아르헨티나군은 상급지휘관이 폭력과 명령에 의한 리더쉽으로 안전한 뒤에서 징집병들을 이끌었
지만 영국군은 존스중령과 같이 최전선에서 부하들의 앞에서 돌격하는 리더쉽으로 부하들을 이
끌었으며 3배나 많은 적을 분쇄했다. 그리고 이 리더쉽은 정보가 뻔히 언론에 다 공개되었어도
패배하게 하지도 않고 대단한 승리로 결부되었다.
존스 중령에 대한 프로그램, 와이셔츠입고 증언하는 사람은 1987년에 퇴역하고 컨설턴트 회사를 운영중인 킴블 소령이다.
그가 여기서 중령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 그는 정말 전사-워리어-였습니다"
만약 방송에 나오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아르헨티나군 12연대는 구스그린으로 이동하지 않았
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2공수대대의 구스그린 공격은 간단했을 것이다.
결국 BBC가 존스 중령을 죽인것일까?
때로 언론은 진실을 말한다고 하지만 그 진실이 과연 진정한 진실인지 아니면 동전의 한면만
보인 진실인지 누가 판단하는가?
이번 천안함 사건에서 언론들과 일부 정치인들이 서로들 국사보안를 떠들고 다녔다.
이것이 내일 다른 군인과 국민의 생명을 앗아갈 정보의 밑거름이 되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하는가?
국민의 알권리가 한사람의 생명보다 소중한가? 그거 안다고 국민의 삶이 더 윤택해지는가?
구스그린의 BBC방송보도를 동전의 다른면을 한번 생각해 보았다.
영국군 공격로
구스그린은 지도에서 보는 봐야 같이 포클랜드 동섬의 남쪽을 이어지는 다리와 같은 지협이다
그런데 섬의 대부분의 주요시설은 동섬의 북쪽 동쪽끝에 있으며 그곳에 스텐리항이 있다.
사실 구스그린의 남쪽은 전략적으로 별로 의미가 없으며 구스 그린 그 자체만이 의미가 있다.
비행장이 있기 때문이다.
지난번 글에서 5월24일 방송보도로 인한 콘벤트리 격침이 주내용이었다. 그리고 바로 며칠도
안되어 또 방송에 기밀 유출이었다. 기밀 유출이 너무 흔하거 아닌가?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영국 상급지휘부에서 오히려 이 문제는 이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무슨 얘기냐하면 산 카를로스 항에 상륙한 영국군의 주공격은 스텐리 항이다. 구스그린은 주요
공격지점이 아니다. 당시 주둔병력은 1개 레인저급 중대와 대공포대, 공군부대였다.
그런데 방송보도는 구스그린을 공격할것이다 라고 나왔다.
주공격목표인 스텐리 항이 아니고 , 스텐리 항이라고 하면 당연하지 라고 생각하면되는데 그게
아니라 구스그린이다 . 물론 비행장이 있기에 먼저 점령해야 하긴 하지만 당장 점령하여도 도처에
아르헨티나군 대공포와 대공미사일들이 널려 있어서 고정익 항공기가 착륙할수도 없다.
당시 영국군의 항공기는 비행장과 별 관계 없는 헬리콥터와 항공모함 발진이 가능한 해리어기들
이었는데 비행장확보한들 정비사들까지 비행장에 다 데려다 놓지 않는 이상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영국에서 비행기가 착륙하기에 너무 멀다.
이런 이유에서 21일에 산카롤루스 만에 영국이 상륙하여도 바로 구스그린을 증강하지 않은 것이다.
손자병법에 이런 말들이 있다(지피지기면 백전백승 이런 헛소리는 손자병법에 없다!)
병자 궤도야-전쟁이란 속이는 일이다
공기무비-준비안된 곳을 공격하라
고선공자 적부지기소수-그러므로 정말 잘 공격하는 군대는 적이 도저히 어디를 방어할지 모른다.
오소여전지지 불가지-내가 공격하여 싸우는 곳을 적이 모르게 한다
불가지 즉적소비자다-적이 몰라야 지켜야 할곳이 많게된다.
적소비자단 즉오지소전과자의 -적이 지켜야 할곳이 많아야 내가 싸울 적이 줄게 된다.
즉 스텐리 항을 보다 손쉽게 점령하기위해 아르헨티나 병력을 구스그린으로 빼돌리려고 한 계책이
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물론 순전히 빤스지기의 생각일 뿐이다.
언론보도로 작전에 영향을 준 경우는 그밖에 여러개이다. 월남전 당시 월맹의 구정공세는 월남의
베트콩들을 노출시키면서 군사적으로 실패했지만 언론에서 이것을 과잉보도함으로써 결국 미국이
전쟁에서 빼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경험으로 결프전 당시 미국은 언론을 이용히여 특히
CNN 방송에 첨단무기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어 이라크군이 불리하다는 생각을 후세인에게 주입시
켰다. 사실 당시 언론보도로 다 망친 경우도 있지만.
당시 사막에서 이라크군 전차를 찾기 위해 이런 방법을 사용하였다.
낮의 사막열을 흡수한 잔타가 밤에 태양열을 서서히 방출, 급격히 식은 주변과 뚜럿히 구별되어
미공군의 킬로 스카웃들이 열탐지장치로 이라크군 전차를 잘 찾아냈다고 한다.
이 방법이 고안되고 불과 몇일만에 F-15E와 F-111F가 각각 이라크군 전차 60대어 200대를 파괴하
였다 라고 1991년 2월 19일 미국ABC 방송에서 특종으로 보도했다.
이것을 안 파월 합참의장은 대노하고 방송국에 항의했다. 이 기사를 오린 봅 젤니크기자는 미국
방부에 수차례 문의해서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후 방송했다고 주장했고 어차피 이라크군이 미
공군을 피하려면 더 깊이 묻거나 엔진 가동을 위해 정기적으로 시동을 걸지 말아야 하는데 안그
러면 전차가 쓸모가 없어지지 않냐고 반박했다
(출처:첨단 전쟁, 걸프전쟁과 첨단 무기, 저자 이남규 .조선일보사 1992년 발행)
어릴때 이 기사를 신문에서 읽은 기억이 났다. 그래서 그런가 보다 했는데 나중에 보니 이라크군이
이것에 대항했던 것이다.
"걸프전에서 이라크군이 가짜 전차를 많이 사용하여 미군의 화상정보분석 담당자를 혼란스럽게 했
다. 가짜 전차의 엔진부에 히터를 설치하여 진짜 처럼 보이게 했다"
(컴뱃 바이블 2, 호비스트 발행 1994년)
빤스지기가 이글을 시작한거 자체가 천안함 사건이 그 시작입니다. 정치인 언론들은 떠듭니다.
평화를 우한 계기가되기를 진실이 밣혀지기를. 그리고 자신들의 주장을 진실이라 떠듭니다.
사망자(사실 전사자가 맞는 표현이지만)들에게 명복을 빕니다. 라고 한다미씩 합니다.
그들은 어리고 젊고 자신의 삶이 여전히 많은 남아있었습니다. 그러나 죽었죠.
전문가들이 말하고 있는 것을 믿지 않고 아니다 좌초다 피로 파괴다 하며 말들하죠. 그들 말대로
라면 그분들은 그냥 사고사일뿐입니다. 무의미하고 가치가 없죠. 운이 없어 죽은거 밖에 안됩니다.
그분들의 죽음을 그렇게 가치없게 만들고 싶은 이유가 뭘까요? 단지 자신들의 정치적 이념에 반해서?
인간은 어떻게 사는것보다 얼마나 가치있게 사는가가 중요합니다.
생존자들을 무슨 청문회에 끌려온 죄인들 처럼 다루면서 그런것가지 기대하기는 힘들다고 봅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은 이들의 죽음이 가치있게 하기 위해서 몇가지 전제가 있어야 합니다.
먼저, 이 짓을 저지른 자들에 대한 국가와 사회의 명확한 인식입니다.
1+1=2 입니다. 현재 나온 결과가 2이죠 그런데 1이나 3이라고 떠듭니다.
언론이라는 것이 정말 사망자들을 위해서 뭔가 하고 싶다면 말도 안되는 어불성설 꺼내지 말고 사실
을 인정하는 것이 먼저라고 봅니다. 어제나 국민의 알권리, 그리고 진실 보도 이렇게 떠드는데
정말 진실을 말하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더이상 뭐라 쓸말이 생각나지 않고 허우적 되는 군요. 그럼 이번 글을 여기서 매듭짓습니다. 그럼
아 그리고 이글의 2 공수대대의 A중대장 소령 Farrar-Hockley 경의 설명을 잊었는데 사실 그의 부친이 더 유명한 사람으로
당시 그의 부친은 장군이었다.
누구냐 하면.
맨우측이 안소니 파라 하클리 경. 중간은 누구~ 게??
1951년 경기도 설마리(감악산)에서 영연방 29여단 글로스터 대대의 부대대장을 지내고 2년이 넘는 포로 생활동안 7번의
탈출시도를 한 Anthony Farrar-Hockley 경이다.
참고
안소니 파라 하클리 경
http://blog.naver.com/bumryul/100098588761
한국인만 몰랐던 파란 아리랑 (원제)The Edge of the Sword
안소니 파라 호커리 저 | 김영일 역 | 한국언론인협회 | 2003
그의 한국전에 대한 책은 파란 아리랑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포클랜드전쟁의 중대장인 그의 아들인 Charles Dair
Farrar-Hockley도 나중에 장군이 되었다.
참 셍각해보면 아버지라는 존재가 무서울수 있다 그 명성을 따라 가려고 하다가 아들이 죽을수도 있으니까. 어쨋거나
그의 부친은 위대한 분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