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잠재적 능력
Tap Your Hidden Energy GEORGE LEONARD 숨겨진 정력을 개발하라. -조지레너드-
우리 모두는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엄청난 잠재적 에너지를 보유하고 있다. 이 방대한 자원을 10%만 더 개발한다 해도 우리 인생은 크게 달라지게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 우선 다음과 같이 시작해 보라.
1. 몸을 튼튼히 하고 튼튼히 보존한다.
신체적 건강은 우리 생활의 모든 부문에 엄청난 정력을 가져다 준다.
2.분노를 활용한다.(Utilize anger)
분노에 수반되는 뜨거운 에너지를 일에 투입하여 적극적인 목적을 위해 활용할 수 있는 가능성도 있다.
3. 긍정적인 면을 강조한다. (Accentuate the positive)
여러 연구 결과 긍정적인 인생관을 가진 사람이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보다 병에 걸리는 경우가 훨씬 적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미국에서 최고 경영자 자문역으로 일하고 있는 톰 피터스와 로버트워터먼은 성공한 회사 경영자들이 사용하는 언어에는 "이상할 정도로 유사성이 많다."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모두 긍정적 태도의 가치와, 칭찬 등 긍정적인 의사전달의 효율성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일단 부정적인 충동을 극복하고 나면 자신 속의 최대의 장점에 전력을 집중할 자유를 얻게된다.
4. 진실을 말하도록 하라. (Tell the truth)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이 좋은 결과를 가져오려면 그것이 자기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라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을 모욕하거나 자기 고집을 내세우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진실을 말하는 것은 여러 가지 바람직한 점이 많다. 모험, 도전, 흥분을 수반하고 무엇보다도 온갖 에너지를 방출시켜 주는 이점이 있다.
5. 우선순위를 정하라.(Set priorities)
우유부단은 게으름을 자초하여 정력을 떨어뜨리고 의기소침과 절망을 가져온다. 행동목표를 분명히 함으로써 정신적 권태를 치유할 수 있는 경우가 많다. 우선순위를 종이에 적어 놓으면 자신의 생활에 명확성을 부여하고 명확성은 에너지를 낳는다.
6. 자신에 대해 약속하라.
어렵고 확고한 마감 날짜를 정해두는 것만큼 힘을 북돋아주는 것도 없다. 마감일을 진지하게 지킬 생각을 해야 한다.
7.계속 움직여라. (Keep on moving)
중도에 포기하면 안된다. 우울증이나 욕구불만도 따지고 보면 우리가 정력을 활용하지 못하고 잠재력을 개발하지 못하는 데 그 궁극적인 원인이 있는 경우가 많이 있다.
**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의 능력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삶을 주장하시게 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가 우리를 주관하시게 되면 우리는 뒷전으로 물러나 앉아 쉬고 있으면 되는가?
첫째, 우리는 풍성한 삶을 사는데 필요한 초자연적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둘째, 우리는 기꺼이 그리고 지혜롭게 그분께 순종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이제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시기 때문에 우리는 장유로이 그분께 순종할 수 있다.
세째, 우리가 그의 일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능력을 받아야 한다. 그것은 성령이다. 성령은 우리가 그리스도께 마음을 여는 순간 우리에게 오신다. 그것은 우리가 자동 조종사 밑에 오게 된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따라 떠다닌다는 뜻도 아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우리의 의지가 "주님, 저는 당신의 저의 삶속에 오셔서 주장해 주시기 원합니다. 당신의 뜻을 알고 싶습니다. 당신이 제공해 주시는 능력 안에서 당신께 순종하고 싶습니다."고 말하는 지점까지 와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소원과 그 뜻에 순종할 수 있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주신다. 때때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들여다 볼 때 단지 우리에게 있는 약점만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그 약점을 글복하실 수 있다. 왜냐하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그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의 이기심, 불결함, 탐욕을 정복하실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면저 그의 의지에 우리 자신을 굴복시켜야 한다. 뒤로 물러나 앉아 아래로 떠내려 갈 수는 없다. 오히려 우리는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에 기꺼이 협조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의 종국적 결과는 그리스도처럼 되는 것이다. 내주하시는 주님의 대한 사랑의 순종이 우리를 변화시킨다. 하나님 같은 성품은 순종, 지속적 교제, 그리고 예배에 의해 형성되는 열매이다.
** 말씀의 능력
독일에서 종교개혁을 확립한 것은 정치적 술책이나 무력의 힘이 아니라 바로 거룩한 말씀에 대한 설교였다. 루터는 후에 그 사실을 이렇게 진술하였다.
"나는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며 설교하고, 기록으로 남겼다. 나는 달리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나 자신은 잠을 자거나 나의 친구 필립과 암스도르프와 함께 비텐베르크에서 맥주를 마시는 동안에 말씀은 군주나 황제로서는 결코 손상시킬 수 없는 교황권을 그처럼 힘없이 약화시켰다.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말씀이 모든 것을 해냈다."
** 스트롱 맨
스트롱 맨(Strong Man)이라고 제목이 붙혀진 그림이 있었습니다. 한 사나이가 아파트 이층 난간 위로 피아노를 들어 올리고 있는 그림입니다. 물론 당신도 어떤 한 사람이 피아노를 머리 위로 들어 올린다는 것은 상상해 본적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피아노의 무게를 짐작하고도 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 볼 때 그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피아노는 가느다란, 그러나 강력한 두 선에 매여 있었고 선의 끝은 옥상 위의 크레인에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 사나이가 피아노를 들어 올린 비결은 위에 매여져 있는 끈이었습니다. 사실 그는 슈퍼맨이 아니었습니다.
오늘날 가장 강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씨름왕 이만기 같은 사람일까요?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세개씩 따낸 어느 삼관왕일까요? 혹은 당신 주위에도 있음직한 "세상에서 믿을 것은 자기자신 밖에 없다" 고 호언장담하는 사람일까요? 아니면 일등을 도맡아 놓고 하는 어떤 친구 같은 사람일까요? 아닙니다. 오늘 이 땅위에서의 진정한 강자는 하나님께서 힘이 되어주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명장 다윗왕 같은 이도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진실로 오늘 우리의 싸움은 주먹과 권세의 싸움이 아니라 누가 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사는가하는 싸움입니다.
** 육체와 영혼
임금은 오차라는 아주 맛있는 열매를 맺는 과수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을 망보기 위하여 두 경비원을 고용했다. 하나는 소경이고 또 하나는 절름발이였다. 그런데 둘은 나쁜 계교를 안출하고 단짝이 되어 나무 열매를 딸 것을 꾀했다. 절름발이를 깨에 목말을 태우고 가리키는 방향으로 소경을 움직여 맛있는 과일을 마음껏 훔쳤다.
임금은 몹시 분노하여 둘을 심문하였다. 소경은 보이지 않는 자기가 딸 수 있을리가 만무하다 하고, 절름발이는 나는 저렇게 높은 것에 닿을 턱이 만무하다고 했다.
임금은 확실히 그럴싸하기는 했지만 두 사람이 하는 말을 신용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건 둘의 힘은 하나 보다도 훨씬 위대하다. 인간은 몸만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영혼만으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둘을 합치면 나쁜 일도 좋은 일도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 최악의 경우와 만족
소크라테스의 아내는 원래 악처로 이름이 높았다. 소크라테스는 아내에게서 말로 다할 수 없는 욕설을 듣는 것은 물론 때로는 그보다 더 심한 육체적인 괴로움을 당하기까지 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이 위대한 현철이 하필 그와 같은 악처에게 시달리면서 고생을 할 필요가 어디 있느냐고 해서 많은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마침내 어떤 사람이 소크라테스를 찾아가서 "선생님, 무엇 때문에 그와 같이 악한 여자를 아내로 삼고 사십니까?"하고 물었다. 이 말에 대하여 소크라테스는 조용히 다음과 같이 말했다.
"훌륭한 기수는 가장 성질이 사나운 말을 택하는 법이라오. 어째서 그런고 하면, 그런 말을 잘 달래서 탈 수 있는 사람이면 다른 어떤 말이나 다 잘 탈 수가 있기 때문이오. 나도 지금 크산티페를 잘 달랠 수만 있다면 다른 사람의 어떠한 성질이라도 잘 달랠 수가 있을 것이오."
소크라테스의 말을 듣고 그에게 질문한 사람은 새로운 진리를 깨닫고 발길을 돌렸다. 즉 어려운 일을 능히 해나가는데 남과 다른 훌륭한 점이 있어야 한다고 하는 예화이다.
** 만족의 종류
1) 이기적인 만족
우리 주변에서 발생하는 강.절도 사건 인신매매 등 흉악한 사건은 바로 이기적인 만족이 가져온 아픔들이다. 이와 같은 삶을 거미인생이라 부른다. 거미는 자기가 편한 곳이면 어디든지 가리지 않고 그물을 쳐 놓고 남의 생명을 노린다.
2) 자기 본위의 만족
자신의 노력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 이에 속한다.
이른 봄부터 땀흘려 수고한 농부들이 가을이면 황금벌판을 바라보며 만족해하는 표정, 열심히 장사한 상인들이 이익금에 만족해하는 표정, 이것이 바로 자기 본위의 만족이다. 그러나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임을 부인할 수 없다. 내가 누리는 만족과 혜택이 나 혼자의 힘에 의해 얻어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같은 사람의 삶을 개미인생이라 부른다.
개미는 자신을 위해서는 열심히 일을 하지만 결코 나누어 갖지는 않기 때문이다.
3) 이타적인 만족이 있다.
작은 힘과 지혜를 자신만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사회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사용하면서 얻는 만족이 이에 속한다. 소외되고 압제받는 자의 편에 서서 이름도 빛도 없이 봉사하는 것으로부터 얻어지는 만족이 이타적 만족이다.
이를 가리켜 꿀벌인생이라 부른다. 꿀벌은 열심히 모아 인간에게 그것을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 안테나만 있는 신자
아르헨티나에 한 여인이 살고 있었는데, 그녀는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으면 그들을 무조건 증오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자기 집까지 저당 잡혀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웃 사람들이 좋은 것을 살 때마다 그녀는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을 사야 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이웃집에서 텔레비젼을 구입하고 지붕 위에 안테나를 설치하였습니다. 그녀는 이웃집 사람에게 지붕 위에 있는, 저 나무같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 그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당장 텔레비젼을 사고 싶은 욕구가 충동질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빚이 산더미 같으니 그 빚을 갚기 전에는 아무 것도 살 수 없소."하고 딱 잘라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의 욕망을 억제할 수 없었습니다. 다음 주가 되자 또 다른 이웃이 안테나를 지붕 위에 설치했습니다.
이제 주위에 텔레비젼이 없는 집은 그녀의 집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대리점으로 가서 안테나만 사서 지붕 위에 설치했습니다. 그러나 돈이 없어서 텔레비젼 수상기는 사지 못했습니다. 수상기는 없었지만 안테나만 꽂아도 그녀의 마음은 좀 가라앉았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은 그녀가 텔레비젼을 갖고 있는 것으로 생각할 테니까요.
-후안 까를로스 오르띠즈 著<더 받을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만으로도 충분합니다> 中에서-
안테나는 신앙 생활의 외적인 것들입니다. 즉 외부적으로 드러나는 순종의 측면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삶에서 그리스도가 빠진다면 아무리 엄격히 신앙생활을 한다고 해도 그것은 수상기 없는 안테나 교인일 뿐입니다. 아들의 영이 없는 자는 아무리 훌륭한 일을 하고 계명을 실천하려고 애를 쓴다 하더라도 죽은 자입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한 순간, 우리는 충만해지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소유하게 됩니다...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온전합니다. 그리스도 외에 무엇이 우리에게 더 필요합니까?
**미국에서 가난한 가정에 태어나 무수한 고생 끝에 백화점 왕이 되고, 재무부장관이 되고, 미국의 10대 재벌이 되고 YMCA 창설자가 된 존 와나메이커가 100 만$(9억원)의 예배당을 짓고 낙성식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
"내가 주일학교에 다니던 어린 시절, 애들이 줄을 서서 추수감사예물을 제단에 바치는데 나는 너무 가난하여서 빈손으로 온 것이 너무 괴로워 주일학교 시간이 끝나자마자 벽돌을 굽는 아버지에게 가서 그 이야기를 하면서 벽돌이라도 한 수레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목사관을 찾아갔습니다. 당시 잠버드 목사는 내게 손을 얹고 축복기도를 하여 주셨습니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오늘 나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단독으로 100 만달러의 예배당을 짓게 되니 이 큰 은혜를 어떻게 말로 다 하겠습니까?"
**어거스틴
어거스틴은 "하나님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기까지는 참 평안을 누리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또한 괴테는 "사람은 누구나 친구의 팔 가운데 휴식을 구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 곳에서 우리들의 가슴은 슬픔을 마음껏 터 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국민은 일과 전쟁을 할 수 있어야 하지만, 그보다 한층 더 평화의 휴식을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고 했습니다.
지난 10년 동안 거부인 '엘리사 카롤리나 카사레토 브르게스'라는 공주는 이탈리아 제노아의 큰 저택에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공주의 집 모퉁이 집에 세들은 남작 '왈드마'란 사람이 이 공주에게 최면을 걸어서 하인의 방에서 살게 하고, 공주의 저택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완전히 남루한 거지 모양의 하녀로 전락하게 되어 온갖 고통과 비참한 가운데 정신없이 최면 가운데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에 대하여 동네 사람들이 이상히 여겨서 경찰에 신고하였고, 곧 그녀는 최면에서 풀려났습니다. 이후 그녀는 회고하기로 "나는 그들이 친구인줄 알고 그들을 받아 들였습니다. 결국 그들은 내 주인이 되었고, 나는 어떻게 해야 자유로워지는 줄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나에게 악몽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자유롭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인생은 어떻습니까? 우리 인생은 자신의 신분과 참 위치를 망각한 채, 명예와 권세와 물질과 향락에 빠져 하인처럼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 영국의 소설가 허버트 웰스라는 사람이 쓴「대주교의 죽음」이라는 단편소설이 있습니다. 줄거리가 대략 이렇습니다. 훌륭한 신앙 인격인으로 많은 사람들부터 존경을 받는 대주교가 있었습니다. 그는 오랜 세월 하나님을 잘 섬겨 왔고, 그래서 그의 경건 생활은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의 경건 생활을 대표하는 것은 그의 기도생활이었습니다. 그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날마다 아침 저녁으로 오랜 시간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의 기도생활은 모든 신앙인들의 모범이라고 칭송을 들을 만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보통 기도생활을 오래 한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 기도를 시작하는 말이 있습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여호와 하나님, 이스라엘의 찬양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 나를 도우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언제나 나를 지켜주시는 하나님 아버지, 좋으신 하나님' 등등 기도생활을 오래 한 사람들은 저마다 기도를 시작하는 말이 있게 마련인데 이 대주교는 기도할 때마다 "오 거룩하고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시여!" 이렇게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평생을 아침 저녁으로 기도해 오던 중, 어느 날 저녁에도 예외 없이 기도를 드립니다.
"오 거룩하고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시여!"
바로 그때였습니다. 하늘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그래, 내가 듣고 있노라. 무슨 일인지 이야기해 보아라"
순간 대주교는 너무 놀라 심장마비를 일으켜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내 마음의 풍금}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혹 보신 분이 계신지 모르겠습니다만 내용이 이렇습니다. 시골학교 선생님을 짝사랑하는 초등학생 홍연이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입니다. 동생들과 다툼하는 것이 하루일과의 전부였던 홍연이는 어느 날, 줄넘기를 하며 정신 없이 놀다가 빨래를 태워먹고 맙니다. 그 바람에 야단치는 엄마를 피해서 도망 나온 홍연이는 때마침 전근해 오시면서 길을 묻는 선생님을 처음 만나게 됩니다.
처음 대면하는 선생님께서 홍연이에게 묻습니다.
"아가씨! 여기 초등학교가 어디야?"
'아가씨'라는 말을 처음 들은 홍연이는 선생님 얼굴도 바로 보지 못한 채 부끄러운 표정으로 초등학교 방향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선생님이 사라진 후에야 혼자 남은 홍연이는 굵은 남자 목소리로 선생님 흉내를 내봅니다.
"아가쉬!" "아가쉬!"
그때부터 어리기만 했던 홍연이의 가슴에 선생님이 자리하기 시작하고, 고무줄 하던 친구들이 관심의 전부였던 어린 마음에 선생님에 대한 짝사랑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영화는 그 이후로 철없던 홍연이가 정말로 '아가씨'가 되어 가는 과정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불러준 '아가씨'라는 한 마디가 동생들과 싸우기만 했던 철없던 한 초등학생의 가슴에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었던 것입니다. 선생님이 홍연이를 불러주는 그 순간, 어린 가슴에는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빛이 비추어졌던 것입니다.
이런 경험은 어린 홍연이만 겪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한 번쯤은 과거의 문을 닫고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열어보게 되는 이런 빛을 누군가와의 만남을 통해 겪게 됩니다. 그리고 마음에 이런 빛이 비추어지면 그 사람 안에서는 새로운 변화가 시작됩니다.
사람은 인생을 살면서 수많은 만남을 참으로 다양한 만남을 갖게 됩니다. 그 가운데는 평생 잊혀지지 않는 만남도 있고 반대로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그런 만남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만남 가운데 특별히 나를 변화시키는 만남, 나에게 마음의 빛을 던져주는 만남만이 참된 만남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이런 만남은 필요합니다.
** 이스라엘의 구전 가운데 이러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이방 사람이 랍비를 찾아와 말했습니다.
"나는 이제부터 개종해서 유대인이 되고 싶습니다."
랍비는 유대인이 되고 싶어하는 그에게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해야하는 지를 가르쳤습니다.
이방 사람은 그것을 다 지키고 랍비를 다시 찾아 왔습니다. 그리고서는 어떻게 해야 온전한 이스라엘 사람이 될 수 있는지 율법을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그때 랍비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네 자신이 싫어하는 일은 남에게도 하게 하지 말라. 이것이 율법의 전체다. 그리고 나머지는 그 율법의 해석이다." 라고 가르쳐 주었다는 것입니다.
** 영국의 낭만파 시인으로 19세기 초 영국의 문단을 이끌었던 셸리의 아내인 메리 셸리라는 여인이 1818년 "프랑켄슈타인"이라는 괴기소설을 발표했습니다. 이 소설을 원작으로 미국의 유니버설영화사가 영화를 만들어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습니다. 그러자 이 영화의 영향을 받아 그 이후로 가위 손, 터미네이터, 로보캅 등과 같은 '사람의 일부분을 재생시킨 괴물'들이 등장하는 영화들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제네바의 물리학자인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죽은 사람의 시체조각으로 살아있는 인간을 만드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거듭합니다. 그러던 천둥번개가 치는 어느 날 밤, 박사의 연구는 결실을 맺게 됩니다. 그러나 그의 손에서 만들어진 피조물의 모습은 보기에도 끔찍한 일그러진 형상이었습니다. 결국은 박사 자신도 자신의 창조물을 거두지 못하고 맙니다. 박사의 손을 떠난 괴물은 외딴 농가에 숨어들어 이 가족들과 친해지려고 접근을 하지만, 흉물스러운 괴물의 모습에 사람들은 기겁을 하고 맙니다. 극도의 고독과 버림받은 절망감은 자기를 만든 박사를 향한 분노로 변하고, 괴물은 결국 복수를 향해 길을 떠납니다. 그리고 박사를 포함한 주변 사람들에게 끔찍한 복수를 합니다.
이 소설 중에서 우리가 주목해야만 하는 대사가 있습니다. 자신을 만든 박사를 다시 만난 제조 인간이 섣부르게 창조된 피조물로 비참하게 살아가야만 하는 자신의 아픈 심정을 토로하는 내용인데, 이렇게 절규합니다.
"나도 처음에는 온순했어요. 내 영혼은 사랑과 인정으로 불타고 있었단 말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외로운 몸이 아닙니까? 비참하도록 외롭지 않습니까? 나를 창조한 당신조차도 나를 몹시 싫어하니 내가 나와 전혀 관계가 없는 당신의 동료 인간들에게서 무엇을 얻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소설은 결국 자신이 만든 피조물에게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목숨을 잃는 것으로 결말이 나고 맙니다.
이 소설에서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일까요? 과학에 대한 믿음과 기대가 상당했던 19세기 초에 이미 '과학은 인간의 존엄이나 행복을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문제를 제기한 것입니다. 더 나아가 '과학은 진리가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 그리스도의 법
하나님께서 회개의 방도로 주신 말씀을 습관적으로 듣지 말고, 그 말씀에 따라 회개해야겠다는 욕구와 계획과 소망과 기대를 가지고 진지하게 경청하십시오. 설교를 들을 때마다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이 자리에 임하여 주시기를 소망합니다. 이 설교자가 하나님께서 저를 회개시키시기 위해서 쓰시는 분이기를 소망합니다.”
이에 대해서 여러분은 지금까지 오랫동안 말씀을 들어왔지만, 회개하게 될 만큼 효과적이지 못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여러분은 말씀을 여러분의 회개의 방도로 여기지 않았고 또한 말씀이 주는 행복한 결과를 기도하거나 기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의 법을 말과 생각과 행동 모두에 대한 표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부분적인 순종으로는 하늘에 이를 수 없습니다. 전부를 취하든지 아니면 다 포기하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참으로 회개한 사람은 큰 죄들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사소한 죄들과 모든 의무들에 대해서도 양심의 아픔을 느낍니다. 번영할 때든 곤궁할 때든 언제나 그리스도의 법을 준칙으로 삼아야 합니다. 참으로 회개한 사람은 가기로 작정한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않고 자기 시대의 책임 있는 신자가 되려고 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법과 도에 진실로 가까워지기를 원한다면, 그것의 의미와 폭과 넓이를 연구하십시오. 그것이 영적인 것입니다.
<회개의 참된 의미 / 조셉 얼라인>
** 한 사람의 박수
한 신문 기자가 유명한 성악가를 찾아가 인터뷰를 하게 되었습니다. 성악가에게 가장 잊혀지지 않는 공연이 언제였느냐 묻자 성악가는 다음과 같이 대답을 했습니다.
"내가 성악가 된 지 얼마 안된 때였습니다. 그때 한 작은 도시에서 공연을 한 적이 있었지요. 꽉짜인 일정에 눈코 들새 없이 바쁠 때였고, 그날 따라 몸과 마음이 몹시 피곤하고 기분도 별로 좋지 못했답니다. 겨우 공연을 마치고 숙소로 가다 보니 손가방을 놓고 온 것이에요. 다시 공연장으로 지친 발걸음을 돌렸지요. 그런데 나는 손가방을 들고 나오려다 텅빈 공연장 구석에 앉아 있는 한 소녀를 보게 되었어요.
나는 소녀에게 다가가서 공연이 다 끝난 공연장에 혼자 앉아 있는 이유를 물었지요. 한참을 머뭇거리던 소녀가 대답을 하더군요. 자신은 돈이 없어 공연장에 올 수가 없었고, 꼭 듣고 싶었던 노래를 듣지 못했다고요. 그래서 텅빈 무대만이라도 보고 싶어서 이렇게 앉아 있는 것이라고요.
나는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소녀를 위로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로 위로를 해야 할지를 몰랐습니다. 하지만 도저히 그냥 나올 수는 없었습니다. 나는 무대 위로 올라갔습니다. 조명도 없고, 마이크도 없었지만 나는 노래를 불렀답니다. 어느 때보다도 더 열심히 노래를 불렀습니다. 나를 바라보는 소녀의 맑은 눈망울을 바라보면서 말입니다.
노래가 끝나자 박수 소리가 들렸습니다. 물론 소녀가 혼자 친 박수였지만 그 박수 소리는 지금까지 어느 공연장에서도 들어보지 못했던 커다란 박수 소리로 들렸습니다. 박수 소리를 들으며 저는 생각했습니다. 나를 위해 저처럼 뜨거운 박수를 보내주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나는 언제라도 실망하거나 포기하지 않겠다고요. 바로 그날 소녀가 제게 보내준 박수소리가 오늘의 저를 있게 한 셈이지요.
한 소녀를 위해, 오직 한 소녀를 위해 최선을 다해 노래를 불렀던 성악가의 모습이 귀하게 여겨집니다. 자신의 노래를 그토록 듣고 싶어하는 소녀, 그러나 돈이 없어 공연에 참석할 수 없었던 소녀를 위해 노래를 불렀을 때 소녀는 그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냈고, 바로 그 박수 소리가 오늘의 자기를 있게 했다는 고백이 또한 귀하게 들립니다. 자신을 바라보는 한 사람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단 그 마음이 그를 위대한 성악가로 만든 셈이지요.
오늘 우리 주변엔 우리의 삶을 지극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우리 곁에 있음을 기억하고 살 수만 있다면, 우리 삶은 많이 달라지게 되지 않겠습니까? 아울러 누군가를 향해 따뜻한 박수를 보내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를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한 사람이 진심 어린 마음으로 치는 박수는 많은 사람이 치는 박수보다도 더 의미 있고 더 힘차게 누군가의 마음을 지켜줄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누군가 한 사람을 위해 마음을 다해 박수를 보내는 일이 오늘 우리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 헨리 무어 하우스(H. M. Hause)가 큰 선물 꾸러미를 들고 집안에 들어섰을 때, 휠체어에 앉아 있던 딸이 아버지를 반기며 맞아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아빠! 그것이 뭐예요?"라고 물었습니다.
"응. 엄마에게 줄 선물이란다. 엄마 어디 계시니?"라고 헨리 무어가 묻자 딸은 엄마는 이층에 계시다고 하면서 "아빠! 그것을 제가 엄마에게 갖다 드리면 안될까요?" 하고 물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헨리 무어는 "아니 너는…?" 하면서 휠체어 신세를 지고 있는 자기의 딸을 의아스럽게 바라보았습니다. 사실 그 딸은 소아마비를 앓아 걷지 못하는 장애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그 딸은 재빨리 "아빠! 나는 이 선물 꾸러미를 들고, 아빠는 나를 안으면 되잖아요."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오, 그래. 그러면 되지!" 하면서 헨리 무어는 딸을 안아 올렸습니다. 결국 그 딸은 아버지의 품에 안겨 그 선물 꾸러미를 자기가 들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혼자서는 걸을 수 없는 장애를 가진 딸은 자기보다 힘센 사랑하는 아버지의 힘을 빌린 것입니다. 아버지는 그 딸을 위하여 기쁘게 자기 힘을 보태어 준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시 55:22).
수고하고 무거운 온갖 류의 인생고의 짐을 하나님께 맡겨 버리는 것이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할 일 중에 하나입니다(마 11:28).
** 수년 전에 미국 하버드 대학의 졸업식장에서 유명한 소련의 노벨상 수상 작가인 알렉산더 솔제니친이 강연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그의 강연은 미국 언론사상 최대의 반응과 논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소련에서 추방당한 이 지식인을 따뜻하게 영접한 미국은, 이 사람에게서 미국에 대한 칭찬과자부심을 확인하고 싶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유를 억압한 소련이 나의 고향일 수가 없었듯, 자유의 남용으로 정의가 왜곡되고 부도덕이 만연한 이 미국 사회도 나의 고향은 될 수 없다"는 선언을 했습니다. 자유주의자들의 분노에 찬 비평에도 불구하고, 한 언론인은 그를 가리켜 "진리의 증언자요 20세기의 진정한 예언자"라고 평했습니다.
솔제니친이 소련에서 추방되기 직전, 그는 재판석상에서 인간성을 부정하는 공산주의는 반드시 망한다고 예언했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는 재판관의 물음에 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공산주의는 진리가 아니기 때문이오"
재판관은 다시 그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진리가 무엇이오?"
그러나 소련의 재판관이 이 질문을 솔제니친에게 던지기 훨씬 전에, 빌라도라는 사람이 예수를 재판하는 자리에서 그와 똑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본문 38절을 보십시오.
"빌라도가 가로되 진리가 무엇이냐... .”
오늘날처럼 거짓된 가치관과 거짓된 우상이 진리처럼 행세하고 있는 이 세상에서 이 질문은 다시금 중요한 가치를 지닙니다.
** 아씨시의 성자 프란시스의 위대한 회심도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프란시스는 청년 시절에 위대한 기사(騎士)가 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당시에는 기사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던 사람이 드물었습니다. 그 나라의 가장 유명하고도 유망한 기사가 되기를 원했던 프란시스, 그는 유달리 전쟁놀이를 좋아하고 쾌락을 즐겼던 패기에 찬 젊은이였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그는, 한밤중에 들려오는 신기하고도 이상한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너는 주인을 따르겠느냐 아니면 종을 따르겠느냐?"
이 낯선 목소리 앞에 그는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누가 주인입니까?"
잠시 후에 그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스도가 나의 주인이라고?"
지금까지 자기의 꿈과 야망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자기 마음대로 살아 왔던 프란시스는 홀연히 던져진 그 질문 때문에 삶에 대한 깊은 고뇌에 빠져들게 됩니다. 그날 이후로 프란시스는 지금까지 즐겨 왔던 그 모든 쾌락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친구들은 어느 날 갑자기 변하기 시작한 프란시스의 모습을 보면서 도대체 이 친구가 왜 이렇게 변했는가 하고 의아해 했습니다. 친구들은 프란시스를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오게 할 생각으로, 그를 위해 큰 파티를 준비했습니다. 그 파티 순서에 일종의 연극 놀이가 있었는데, 친구들은 그 연극의 어릿광대 역을 프란시스에게 맡겼습니다. 처음에는 친구들과 어느 정도 어울리고 싶은 생각 때문에, 어릿광대의 역할을 하면서 그 연극을 같이 준비했습니다.
어느 날 프란시스가 친구들과 함께 연극 놀이를 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같이 길을 걸어가고 있는 장면이었는데, 프란시스가 갑자기 멈춰 섰습니다. 그는 지금까지의 자기 인생이 바로 연극과 같지 않았나 하는 생각에 역겨운 분노를 느끼게 된 것입니다. 한참을 가다가 프란시스가 없는 것을 발견한 친구들은 그를 찾아서 오던 길을 되돌아갔습니다. 그들이 발견한 것은 모퉁이에 쭈그리고 앉아 기도하고 있는 프란시스의 모습이었습니다.
"주님, 이렇게 살 수는 없습니다!"
그는 소리치면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친구들은 프란시스를 일으켜 세우면서 놀려대기 시작합니다.
"아무래도 이 친구, 애인이 생긴 모양이야. 프란시스, 너 요즘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고민 생긴 것 아니니? 애인과의 관계에서 말이야... "
옷을 털면서 일어난 프란시스는 친구들 앞에 이런 고백을 했다고 합니다.
"맞았어. 나는 순결하고 고귀한 내 신부를 만났어. 나의 사랑, 나의 진리이신 주님을 만났단 말이야"
그 순간부터 프란시스는 자기의 전 생애를 그리스도 앞에 드려, 진리의 전파자로서의 변화된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그는 이 오류로 가득 찬 세상에서 연극과 같은 의미 없는 삶을 살고 있는 인류를 향해서 아직도 이 기도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오, 하나님.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심게 하소서"
** 대영 제국의 미술 박물관에 소장된 그림 가운데에 G.F. 왓트라는 사람이 그린 유명한 그림이 있습니다. 앞을 볼 수 없는 한 소녀가 바이올린과 비슷한 악기를 들고 지구 위에 홀로 서 있는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소녀가 들고 있는 악기는 줄이 다 끊어지고 꼭 한 줄만 남아 있었습니다. 하늘은 캄캄합니다. 그리고 그 어두운 하늘에 오직 하나의 별이 빛나고 있습니다. 왓트는 이 그림의 밑에다 이렇게 제목을 썼습니다.
"희망"
꼭 하나밖에 없는 바이올린의 현, 캄캄하기만 한 하늘, 그러나 소녀는 그 어둠 속에서도 하늘에 떠 있는 단 하나의 별 때문에 남은 줄 하나로도 희망을 노래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별은 하나님 이외에 그 누구일 수가 있겠습니까?
** 옛날 어떤 나라에 나이 많은 임금님께 한 재상이 질문을 했습니다.
"임금님 어떻게 하면 죄의 유혹을 피하고 시험을 이기고 나라를 위해서 깨끗한 충신으로 충성할 수 있겠습니까?"
임금님은 젊은 재상의 그 뜻이 기특하여 지혜를 베풀기로 합니다.
"너는 지금부터 이 컵을 들고 3시간 안에 시내를 한 바퀴 돌되 물은 한방울이라도 흘리면 큰 벌을 받을테니 알아서하라" 그리고는 창과 칼을 든 군사들을 뒤따라 보냈습니다.
젊은 재상은 한 번 잘못 질문했다가 큰 곤욕을 치른다고 생각하고 시내를 한 바퀴 돌았습니다.
임금님은 땀을 뻘뻘 흘리며 돌아온 재상에게 칭찬했습니다. 그리고 질문을 합니다.
"자네가 시내를 한 바퀴 도는 동안에 여자를 보았나"
"아니요 못 보았습니다."
"그러면 술집은 보았나" "아니요 못 보았습니다."
"그러면 길거리에 사람들이 얼마나 나왔던가"
"전혀 보지 못했습니다."
"그렇지 자네가 할 일을 열심히 하노라면 하지 않아도 되는 시시한 일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법이야"
이처럼 목적이 있는 경주자는 다른 곳을 볼 겨를도 정신도 없는 것입니다.
** 어떤 집사님이 목사님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마귀와 하나님과의 거리는 얼마나 됩니까? 마귀가 우리에게 다가오는 시간은 얼마나 걸리며, 또 우리에게서 떠나는 시간은 얼마나 걸립니까?"
그 질문을 받고 목사님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집사님, 깜깜한 방에서 불을 켜 보십시오. 순식간에 방안이 밝아집니다. 그러나 다시 불을 켜면 순식간에 어두워집니다. 빛과 어둠 사이에는 거리가 없습니다. 빛이 있으면 어두움이 사라지고 빛이 사라지면 어둠이 나타납니다. 하나님과 마귀의 거리가 이와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빛이 비췰 때 모든 어두움은 물러가고 새로운 소망과 생명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빛이 없으면 마귀는 즉시 우리에게로 와서 우리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킵니다.
** 한 수도사가 스승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찾을 수 있을까요?"
스승은 대답했습니다.
"갈망함으로써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느니라"
수도사는 다음날도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스승은 역시 같은 대답을 했습니다. 며칠 동안 똑같은 대답을 들은 수도사는 다시 물었습니다.
"저는 온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아직도 그 분을 못 찾고 있을까요?"
스승은 제자의 물음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일어나 제자를 데리고 강가로 나갔습니다. 그리고는 갑자기 제자의 머리를 잡아 물 속에 밀어 넣었습니다. 스승의 행동에 놀란 제자는 스승의 손아귀에서 풀려나려고 필사적으로 몸부림을 쳤습니다. 한참이 지나자 스승은 제자의 머리를 놓아주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번에는 스승이 묻습니다.
"자네, 내가 머리를 물 속에 넣었을 때 왜 그렇게 몸부림을 쳤나?"
"그야 숨이 막혀서 그렇습니다"
그때 스승이 말합니다.
"바로 그렇게 하나님을 숨막히게 찾으면 하나님을 찾게 될 걸세"...
우리는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찾을 수 있습니까? 생명을 걸고 하나님을 힘써 찾을 때 하나님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것은 그 방법상의 문제에 포인트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찾는 태도에 그 포인트가 달려 있는 것입니다.
** 옛날 헬라의 도시 국가에 아주 부강한 왕이 하나 있었습니다. 왕은 처첩들이 많았으며 그 처첩들은 모두 왕을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왕은 그들을 모아놓고 "너희들이 날 사랑하기 때문에 이제부터 너희가 원하는 것을 선물로 주겠다. 나라의 주권만 남겨 놓고 무엇이든지 다 가져가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많은 여인들 가운데 일대 소란이 일어났습니다. 보석이니 집이니 하는 좋은 것은 모두 달라고 하면서 서로 싸우고 야단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유독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 조용히 서 있는 여인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아무 것도 달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왕이 그 여인에게 묻습니다.
"너는 왜 원하는 것이 없느나? 욕심도 없느냐?"
그러자 그 여인은 대답합니다.
"아니,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왕 바로 당신입니다. 당신을 갖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