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 전 이맘때였습니다. 제가 동아일보에서 의학 기자를 하고 있을 때였죠. 당시에는 특종도 도맡아했고 꿈의 건강학, 물 잘 마시는 법, 눈물의 건강학 등 그때까지 다루지 않았던 여러 주제를 색다른 문체와 시각으로 써서 박수를 많이 받았습니다. 전날 밤에 그때까지 누구도 쓰지 않았던 주제였던 ‘필름 끊기는 현상’과 ‘술 상식’에 대해 기사를 써서 내놓았기 때문에 또 독자들의 박수를 기대하고 출근했습니다.
그날 전화 100여 통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박수가 아니었습니다. 보조 기사(記事)에서 ‘여성은 남자보다 알코올분해효소인 아세트알데히드분해효소(ALDH)가 적어서 술을 덜 마신다’고 써야 하는데, 어쩐 일인지 ‘아세트알데히드가 적어서’로 나가서 아침부터 하루 종일 ‘그것도 모르면서…’하는 타박 전화를 받았습니다. 정정 보도를 썼지만 부끄러워서 몇 주 동안 그것만 생각하면 얼굴이 달아올랐습니다.
그날 메인 기사의 주제가 ‘모주망태가 필름 끊기는 이유’였던 것 같습니다. 당시에는 자료도 없고 지금처럼 인터넷 검색 시스템이 잘 돼 있지도 않아서 며칠 밤 미국 하버드 대학교, 스탠포드 대학교 등의 홈페이지를 뒤지고 알코올 중독 전문가들을 꽤나 괴롭혔던 것 같습니다.
다른 기자들도 이에 대해서 많은 기사를 써서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상식으로 알고 있지만, 혹시 모르는 사람이 있을 듯해서 과음으로 필름이 끊기는 것에 대해서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특히 본격적 송년회 시즌인 요즘 여러분의 건강을 위해서 말입니다.
술에 취해서 기억을 잃는 것을 영어로는 블랙아웃(Blackout)이라고 합니다. 원래 군사용어로 전투기 조종사가 전투기를 급상승시킬 때 일시적으로 생기는 시각장애나 공습에 대비한 등화관제 등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다이버가 갑자기 깊은 바다에 들어갔을 때 필름이 끊기는 것도 블랙아웃이라고 합니다.
블랙아웃은 알코올의 독소가 뇌에서 기억의 입력을 담당하는 해마의 작용을 방해해서 기억정보가 아예 입력되지 않는 것입니다. 뇌의 다른 기능이 정상적으로 기능하고 있다면 겉으로 보면 멀쩡한데 기억만 나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술 때문에 필름이 끊긴 것은 뇌에 기억이 아예 입력되지 않은 것이므로 최면을 걸어도 기억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의학적으로는 매년 두 차례 이상 필름이 끊기면 넓은 의미의 알코올 중독으로 봅니다. 필름이 끊기는 일 때문에 생활에 문제가 생기는 데도 계속 술을 마시면 누가 뭐래도 알코올 중독이고요.
‘필름 절단 사고’에도 불구하고 술잔을 놓지 못하면 비타민 B1(티아민)이 파괴돼 보행 장애, 안구 운동 장애, 혼수 등의 증세가 나타나는 베르니케뇌증에 걸릴 수 있습니다. 이 병의 증세는 인간 광우병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MBC PD수첩이 인간광우병으로 오보한 아레사 빈슨은 술 때문이 아니라 위 절제수술 뒤 티아민 흡수가 방해돼 베르니케 뇌증에 걸렸다 숨졌지요. 베르니케뇌증이 악화되면 기억을 지어내고 거짓말을 하는 코르사코프 정신병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런 심각한 병이 오지 않는다 해도 치매나 뇌졸중 등의 위험이 커지지요.
대한민국에서는 송년회 광풍을 피하기가 힘들 겁니다. 술을 적게 마시는 수밖에 없습니다. 술에는 장사가 없지요. 저도 사실 걱정입니다. 여러분, 모두 이 연말 무사하게 보내시기를 기원합니다. 필름 끊겨서 얼굴 후끈한 얘깃거리 남기지 않으시기를….
<이성주의 코메디닷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