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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에 탈고된 아랫글은 미국 연극평론가 로버트 브루스타인(Robert Brustein)의 1991년판 평론집 《미국 연극 다시 상상하기(Reimagining American Theatre)》에 포함되어 출간되었고 현대미학사의 《공연과 리뷰》(제59호, 2007년 겨울호, 185~198쪽)에 수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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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와 연극
(Politics and Theatre)
서기전6세기후반에 그리스에서 활동했다고 전설되는 비극시인·연기자(배우)·연출가 테스피스(Thespis)는 비극에 독백, 대화, 가면을 최초로 도입했을 뿐만 아니라 코러스(Chorus; 극중합창)의 역할을 확대하고 격상하여 그리스 비극을 성립시킨 인물로서 유명하다.
그가 비극용 코러스의 역할을 확대하고 격상한 후부터 연극의 맥락에서 정치와 예술의 관계는 뜨거운 논쟁을 지속적으로 유발한 중대한 문제였다. 오늘날 미국 연극계에서도 이 문제를 둘러싼 열띤 논쟁이 계속된다.
이 논쟁의 불길을 점화한 사람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Platon, 서기전428~348)이었다. 그는 자신이 상상한 이상국가(理想國家)에 착각을 유발하거나 유발할 만한 작극가(作劇家; dramatist; playwright)나 여타 예술가를 일절 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훗날에 그런 고집을 누그러뜨린 플라톤은 인류의 귀감으로 삼을 만한 윤리적 행동모델 ㅡ 그가 에토스(ethos)로 지칭한 것 ㅡ 을 제시하는 예술만은 기꺼이 용인했다. 그런데도 그는 예술가란 이상정치(理想政治)를 위협하는 심각한 위험인물이라고 여기는 생각을 고수했다.
예술가 부정론을 설파한 플라톤이 별세하고 십수 년밖에 흐르지 않은 서기전335년경에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서기전384~322)가 탈고한 《시학(詩學; Peri poietikes; De poetica; Poetics)》은 스승의 예술가 부정론을 논박하려는 노력의 뛰어난 성과였다고 평가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작극가를 거짓말쟁이로 치부하는 대신에 예술작품들이야말로, 그리고 특히 비극들이야말로, 인간의 최상활동형식에 속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비극들이 실상(實相)을 가리거나 왜곡하기는커녕 인간을 진리로 인도할 수 있는 잠재력을 정치나 철학보다 훨씬 더 많이 보유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비극의 구성요소들을 열거하면서, 그것들 중에 신화, 줄거리, 이야기(敍事), 연기(演技) 따위로 다양하게 번역될 수 있는 뮈토스(mythos)를 으뜸으로 쳤고, 에토스나 인물성격의 중요성을 버금으로 쳤다. 이 두 요소 다음으로 그가 중시한 것은 “정치”나 “사상”이라고 번역되는 디아노이아(dianoia)였다. 디아노이아는 추구되어야 할 것이라고 회자되는 성격, 개인의 신념에 부합하는 것, 개인의 사회적 도덕성을 의미했다.
요컨대,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에서, 상상력은 환각이나 착각의 원천이 아닌 인간의 최고능력이었고, 플라톤의 경멸을 받은 모방도 중요한 이해방식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연극에서 정치를 배제하지 않고 오히려 연극에 최대한 종속시켰다. 그는 인간의 도덕성이 인간의 옳고 그름을 판별하는 기준이라기보다는 인간의 행동과 성격을 조명하는 방편이라고 믿은 듯이 보인다. 이런 견지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주목한 하마르티아(hamartia)는 그의 비극론을 결정짓는 중요한 개념일 것이다. 때로는 비극적 결함이라고 번역되는 ㅡ 그리고 중세의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는 인간의 도덕심과 행동을 엄격히 따지는 심판을 연상시킨 죄악만 뜻하도록 사용된 ㅡ 그리스어 하마르티아는, 더 정확하게는, 비극적 실수(tragic error)를, 그러니까, 비극을 초래하는 과실(過失)을 의미한다. 오이디푸스(Oedipus)를 비극적 운명에 빠뜨린 것은 그의 성격적 결함도 아니고, 몇몇 해설자가 그의 하르마티아로 간주한, 그의 오만이나 죄악도 아니다. 비록 그의 친부 라이오스(Laios)가 그의 친부살해를 유발했고 라이오스가 그의 친부라는 사실을 그가 몰랐어도, 인생의 기로에서 마주친 친부를 그가 살해했다는 사실이 그를 그런 운명에 빠뜨렸던 것이다. 그러니까 아리스토텔레스는 도덕적 행동과 올바른 견해는 비극보다는 필연성과 더 깊게 관련된다고 믿었다. 우리의 성격이나 믿음 때문이 아닌, 우리가 ㅡ 마치 고압전류가 흐르는 소켓에 젖은 손가락을 박듯이 ㅡ 냉엄한 우주의 어떤 섭리를 어겼기 때문에, 우리는 비극을 겪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진리에 이르는 길과 예술의 기능을 가늠하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런 견해차이는 2,500년간 지속된 논쟁을 점화했다. 중세의 연극에까지 침투한 플라톤의 견해들은 중세의 연극을 모든 서양연극의 온상으로 만들어버렸다. 그의 견해들은 공연예술에 맞선 퓨리턴(Puritan; 청교도; 淸敎徒)의 적대감을 부추겼는데, 급기야 잉글랜드에서는 퓨리턴 혁명(청교도혁명)기간(1640~1660년)에 18년간이나 연극공연이 금지되는 사태마저 초래했다. 나아가 그것들은 공리주의 예술관(藝術觀)에도 영향을 끼쳤는데, 프랑스 외교관·정치학자·역사학자 알렉시 드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 1805~1859)은 미국 민주주의를 고찰한 연구서에서 그런 예술관을 혐오하는 소감을 피력했지만, 오늘날에도 그런 예술관이 미국 문화계를 지배한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근본적 견해차이는 ‘연극이 과연 도덕적·정치적으로 중요한 행위수단이냐 아니면 기껏해야 관객의 감정정화(感情淨化)와 감정배설(카타르시스: katharsis)만 유도할 뿐인 별로 유익하지 않는 상상체험일 따름이냐’ 여부에서 생겨난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식 연극은 관객의 정염(情炎)을 소비시키고 발산시킬 수 있도록 완전히 독립적으로 기획된 목적자체이지만, 플라톤식 연극은, 눈앞에 전개되는 장면을 보고 흥분하는 관객이 세계의 긴장들을 해소하려고 얼마간 적극적인 형식으로 세계에 개입하는 주체로 등장하지 않으면, 달성될 수 없는 미래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수단이다.
그래서 플라톤식 연극은 세계를 변화시키지 않고 관객의 행동에 영향을 주려는 의도로 기획된 것이라고 이해되는 만큼 정치적 연극이다. 그것은 더 넓은 의미에서도 정치적 연극일 수밖에 없다. 왜냐면 그것은 개선과 설득으로 윤리적·도덕적·사회적 현안들뿐만 아니라 종교적 문제마저 해결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고, 연극이 끝나도 계속 작용하는 원동력을 보유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플라톤식 연극은 죽어서 씨앗을 남기는 식물 같아서 일단 이상국가가 실현되면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할 것이라는 논리마저 성립시킬 수 있다. 그러나 ‘상상체험은 인간의 불가피한 욕구이며, 예술은 인간을 진리에 목말라죽지 않게 한다’고 믿은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 같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에게는 이상국가의 실현 가망성조차 끔찍한 흉조로 간주될 것이다.
미국 연극사학자(演劇史學者) 조너스 배리쉬(Jonas Barish)의 저서제목에도 쓰인 이런 “반연극적 편견(反演劇的 偏見; anti-theatrical prejudice)”은 플라톤의 정치적 연극관(演劇觀)에 밑깔린 동기(動機)라서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한다. 심지어 근대에도 ‘아리스토텔레스 연극관과 플라톤 연극관의 갈등’이나 ‘미학적(美學的; 심미적; 유미적) 연극관과 공리주의적 연극관의 갈등’은 약화되지 않아서, 그런 시대에 활동한 실천적 작극가 몇몇 사이에서도 반연극적 편견이 검출될 수 있다. 노르웨이 작극가·연극연출가 헨리크 입센(Henrik Ibsen, 1828~1906)의 작품세계에서 그런 갈등은 내면화되어 그의 해설자들로 하여금 상이한 견해들을 고집하게 만들고 그의 자기갈등을 중단할 수 없게 만든 근본원인이었다. 그런 갈등을 반영하는 문제는, 예컨대, 다음과 같다. 입센의 《인형의 집(A Doll' House)》은 플라톤식 작품인가 아니면 아리스토텔레스식 작품인가? 《유령들(Ghosts)》이나 《민중의 적(An Enemy of the People)》은 또 어떤가?
입센은 표면적으로는 이런 갈등의 책임을 떠안는 듯이 보여서 사람들을 실망시킨다. 자유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은 하나같이 그를 여성권리운동의 옹호자, 안락사 옹호자, 우애결혼(友愛結婚; companionate marriage: 피임과 이혼을 용인하는 실험적 결혼)의 후원자, 사회적 의무의 확고한 신뢰자로 인식했다. 입센이 이런 문제들에 관심을 보였고 또 사회운동세력에 연루되기도 했다는 사실은 결코 의심될 수 없지만, 그는 자신의 관심사가 정치적인 것보다는 예술적인 것이라서 본질적으로는 현실을 분석하고 묘사하는 것이라고 줄기차게 강조했다. 노르웨이 여성인권동맹에서 연설하던 그는 의식적·이데올로기적인 어떤 목적도 단호하게 거부한다고 주장했다. 미국 연극평론가 에버트 스프링콘(Evert Sprinchorn)은 입센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영역(英譯)했다.
“저는 여성인권동맹의 회원이 아닙니다. 제가 정치선동을 하려는 어떤 의도적인 사상을 저변에 깔고 쓴 글은 지금껏 하나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저를 사회철학자로 믿는 듯이 보이지만, 사실 저는 지금까지 사회철학자가 아니라 시인이었습니다. 저에게 이런 자리를 마련해주신 여러분이 정말 고맙습니다만, 저는 여성인권운동에 의식적으로 동참하는 영예를 포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이런 여성인권운동이 실제로 누구를 위한 운동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저에게 여성문제는 인류전체의 문제처럼 보입니다 …… 여성문제도 다른 모든 문제와 연계되어 해결되어야 바람직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것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선택한 과업은 ‘인간성 묘사하기’였습니다.”
이것은 입센이 자신의 사명을 박탈하려는 모든 집단에게 내놓은 답변인 동시에 그의 적극적 추종자에게는 그가 언제나 일관되지 못한 듯이 보였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추종자들 중 한 명에게 보낸 편지에 다음과 같이 썼다.
“저는 ‘자유’와 ‘정치적 자유’를 동의어들로 간주하자는 의견에는 결코 찬성할 수 없습니다. 귀하가 ‘자유’라고 부르는 것을 저는 ‘자유들’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제가 ‘자유를 위한 투쟁’이라고 부르는 것은 ‘자유의 개념자체를 꾸준히 힘차게 성장시키고 추구하려는 노력’일 따름입니다 …… 국가는 사라져야 합니다! 국가를 없애려는 혁명에는 저도 동참할 것입니다. 국가의 개념을 무너뜨립시다! 자발성과 정신적 친밀감을 연대의 근본요소로 삼읍시다! 그래야만 귀하가 내딛는 자유의 첫걸음이 일정한 가치를 획득할 것입니다. 정부의 형태만 바꾸는 과정은 동일한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방식만 바꾸는 과정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친구여, 위대한 활동은 정치제도의 위엄을 무서워하지도 그것에 굴하지도 않는 활동입니다. 국가는 이미 뿌리를 내렸고 조만간 정점에 도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플라톤주의자의 발언이 아니라, 숨쉴 공간과 삶의 터전을 창출하기 위해서라면 이상국가마저 파괴해버릴 수 있는 아나키스트(anachist)의 발언이다. 입센이 자신의 개인주의 철학을 ㅡ 특히 《민중의 적》에서 ㅡ 표방하려고 실제로 이따금 편향성을 띠거나 심지어 선동적인 면모마저 보였지만, 그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자신이 단일하고 고정된 처지에 안주하는 자로 보이지 않도록 정반대견해를 피력했다. 입센이 장기간 용인할 수 있었던 유일한 영속구조는 자신의 예술구조였다. 왜냐면 오직 그런 구조에 입각해야만 그가 진리의 구성요소들로 여긴 모순들과 대립명제들을 조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러시아 소설가·작극가 안톤 체호프(Anton Chekhov, 1860~1904)는 플라톤주의로부터 입센보다 훨씬 더 멀리 떨어져있다. 체호프의 희곡(극본)들을 들여다보는 사람에게 그는 개인적으로는 공식적 신념을 일절 품지 않은 듯이 보이고, 그가 창조한 인물들이 품은 신념에 대한 존중심도 거의 드러내지 않는 듯이 보인다. 입센은 《유령들》이 폐막되자 분개하여 “그 작자들은 내가 만든 인물들이 피력한 견해들의 책임을 나에게 지우고 싶어 안달한다”고 썼지만, 체호프와 비교되면 비(非)개인적인 작극가 입센은 복화술사와 거의 흡사하게 보인다. 정치적 규제와 공리주의적 요구로부터 연극을 해방시키려고 체호프만큼 진력한 사람은 없었다. 그는 다소 악의적으로 “이 세상에서 모든 철학을 깡그리 없애버리자!”고 주장하다가 급기야 더 신랄하게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나는 자유주의자도 아니고 보수주의자도 아니며 진화론자도 아니고 수도승도 아니며 은둔자도 아니다. 나는 독자적이고 자유로운 예술가가 되고프고, 그리되기만 하면 나는 만족할 것이다.”
그리고 체호프는 1888년 어느 편지에 다음과 같이 썼다.
“저는 다른 작가들과 토론할 때마다 ‘협소하게 전문화된 문제들에 답하기’는 예술가의 책무가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작가가 이해하지도 못하는 주제를 걸고넘어지면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전문적인 문제는 전문가에 맡겨두면 됩니다. 농촌자치공동체, 자본주의의 재난, 과음의 피해, 장화수선(長靴修繕), 여성의 만성질환 같은 문제들을 가늠하려는 판단들은 각각의 전문가에게 맡기면 되는 것들이죠. 예술가의 영역도 바로 그런 전문가의 영역만큼 제한된 것입니다 …… 예술가는 모든 질문에 답할 수 있고 여느 질문도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작가는 진정한 작품을 하나도 쓰지 못했거나 진정한 이미지들을 하나도 경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 귀하께서는 당연히 예술가에게 그의 작품에 관한 의견을 묻고 답변을 요구할 수 있지만, 그것은 귀하께서 두 가지를 혼동하고 계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문제의 답변’과 ‘정확한 문제제기’를 혼동하고 계시다는 말이지요. 이 둘 중에 오직 ‘정확한 문제제기’만이 예술가의 의무입니다.”
체호프는 동시대인들로부터 ‘그들 중 한 명이 “이 시대의 화급한 문제들”이라고 수식(修飾)한 현안들’에 애매한 태도를 보인다는 말을 곧잘 들었다. 그러나 체호프는 자신이 선입관이나 지식적 가설에 입각하여 인물들을 창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했다. 그랬어도 그의 자부심은 그가 사회적·정치적 문제들을 그의 희곡에서 배제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세 자매(Three Sisters)》에서 벌어지는 미래논쟁들은 체호프가 모스크바의 상류사회를 드나들며 귀동냥한 것들이 확실하고, 《벚꽃동산(The Cherry Orchard)》에서 혁명을 꿈꾸는 학생 트로피모프(Trofimov)의 원래 대사(臺詞)들도 공연을 금지시키겠다는 당국의 협박에 시달린 체호프가 희곡을 수정하기 전까지는 매우 선동적인 것들이었다는 평을 들었다. 그런 한편에서 이런 견해들은 작극가의 개인적 사견에 불과한 것은 결코 아니었고, 그것들을 표명하는 민중의 것이었으며, 아리스토텔레스적 유형의 성격을 은연중에 드러냈다. 요컨대, 체호프가 자신의 작품에 정치적·사회적·철학적 토론들을 삽입한 이유는 그것들이 그가 애써 표현하려던 현실을 구성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어느 편을 드는 듯이 보이는 인상도, 해답을 암시하는 듯이 보이는 인상도 일절 풍기지 않을 만큼 지극히 신중한 태도를 고수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선호하는 재판장면에 다음과 같이 은유적인 대사를 삽입하기도 했다.
“판사의 책무는 배심원들에게 정확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고, 배심원들의 책무는 각자의 판단기준대로 의견을 결심하는 것입니다.”
체호프는 자신이 창조한 인물들의 행동들이 인습적-도덕적 기준대로 해석되지 않도록 노력한 만큼이나 그 인물들이 정치적 장기판의 말[牌]들처럼 협소한 이데올로기대로 해석되지 않도록 인물들의 복합적이고 인간적인 면모들을 유지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리하여 체호프는 인물들에게 계급적 역할, 정치적 확신, 철학적 태도를 부여했지만, 심지어 그 인물들이 이런 요소들로써 스스로를 규정하기를 원하는 경우에도 그는 이런 요소들로 인물들을 싸잡아 규정한 바는 결코 없었다. 체호프는 정치적 동물과 고뇌하는 인간이 양립하기는 어렵다고 보았을 것이다.
입센이나 체호프는 공적인 규제로부터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지키고파했으므로 자신들의 예술들에도 시민의무(市民義務)에 초연한 자세를 적용했다. 입센은 동향인들의 의지에 순응하기보다는 차라리 외국으로 추방되기를 선택했으므로 이런 초연한 자세를 견지했다고 평가된다. 물론 그가 조국애를 결코 버리지도 않았고 조국의 현안들에 대한 적극적 관심을 결코 중단하지도 않았을망정 그는 죽을 때까지 ㅡ 그를 추종한 아일랜드 작가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 1882~1941)처럼 ㅡ 화해하지 못하는 예술을 위한 침묵, 추방, 간계를 실천하면서 반사회적(反社會的; anti-social) 태도를 버리지 않았다. 그는 실향과 고립으로 이어지는 이런 실천을 위해 비싼 대가(代價)를 치렀지만, 그것만이 그가 진리에 지속적으로 헌신하고 무가치한 목적들에 휘둘리지 않는 독자성을 지키느라 채택할 수 있는 유일한 전략이었고 또 그렇다고 믿었다. 혁명시대가 당도하기 이전의 시대를 살았던 체호프와 입센은 어쩌면 사회현실을 느끼는 교감(交感)의 끈을 놓지 않으면서도 개인주의를 소중히 지킬 수 있던 최후의 작극가들이었으리라.
정치적 강제력을 벗어나서, 어떤 운동의 대변자가 되어달라거나 심지어 시민의 대변자가 되어달라는 요청들을 포함한 모든 요청을 뿌리치는 “자유로운 예술가”라는 개념은 인간의 잠재력을 감지하는 심오하고 영속적인 감정, 불의(不義)에 대한 증오심, 진리사랑과 함께 입센과 체호프가 남긴 또 다른 미완개념(未完槪念)이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 개념은 근대 산업사회의 강압적 현실과 완전히 결별하려고 열망한 근대 시인들, 화가들, 소설가들, 작극가들의 작품들 속에서 더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표현법을 발견할 것이었다. 이것은 19세기후반의 유미주의(唯美主義; 심미주의; 審美主義; 탐미주의; 眈美主義; 예술지상주의; 藝術至上主義; 미학주의; 美學主義) 운동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이것은 예술을 삶과 분리하기보다는 정치와 분리하려는 운동들 중에도 우리가 아는 가장 극심한 운동일 것이다. 19세기 프랑스 유미주의 작가 빌리에 드 릴라당(Villiers de l’Isle-Adam, 1838~1889)은 “삶에 이바지하는 예술은 우리에게도 이바지할 수 있다”고 공언했다. 그리하여 다다이스트(Dadaist)들은 무작위와 우연의 예술에 헌신했고, 상징주의 작극가들은 ㅡ 특히 벨기에 작극가 모리스 메테를링크(Maurice Maeterlinck, 1862~1949)는 ㅡ 삶의 세계에서 고매한 비현실세계(非現實世界)로 피신해버리기도 했다.
그렇게 출현한 유미주의는 거꾸로 강력한 정치의식을 구비한 작극가들의 반발을 부추기는 경향을 보였다. 그리하여, 확신컨대, 두 작극가 ㅡ 브리튼의 버나드 쇼(Bernard Shaw, 1856~1950)와 독일의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 1898~1956) ㅡ 가 20세기의 서양연극을 지배하기에 이른다. 두 작극가의 연극관은 다분히 플라톤적인 것이어서 그때까지 아리스토텔레스적 경향들을 드러내던 모든 작가에게는 일종의 천벌과 다름없는 것이었다.
잉글랜드 작극가·시인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1616)를 거짓말과 꿈으로 가득한 “로맨틱” 연극용 희곡을 쓴 작극가로 간주한 버나드 쇼는 그런 연극을 설교용 및 선동용 연극으로 대체하기를 원했고, 그런 연극에 “청교도를 위한 연극”이라는 의미심장한 부제마저 붙일 심산이었다. 예술가가 아닌 “예술가-철학자”라고 자칭한 버나드 쇼는 사상을 도외시한 “단순한” 감정에만 의존하는 모든 예술에 천벌이 내리기를 염원했고, 마취뱅스(Marchbanks)나 뒤베다(Dubedat) 같은 예술가형 등장인물들을 자신의 대리인들로 내세워서 시(詩)나 그림을 “단순한” 자기표현수단으로 삼는 예술가들의 유미주의경향을 조롱하거나, 그런 인물들의 성격을 완성하느라 인간성의 선(善)한 구성요소마저 무자비하게 희생시켜버렸다. 물론 플라톤주의자이던 버나드 쇼도, 비록 공리주의가치를 지녔다고 입증된 예술가로서 자신의 자격을 제한했지만, 하여간, 자신의 이상국가에 예술가를 ‘포함시킬’ 방법을 모색하는 노력을 중단하지 않았다. 왜냐면 버나드 쇼는 플라톤주의사상가인 동시에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작가이기도 해서 그의 사상도 그의 작극활동 전체에 비추어 언제나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닌 구성요소의 하나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스코틀랜드 작가·연극평론가 윌리엄 아처(William Archer, 1856~1924)를 처음 만난 버나드 쇼는 순회공연 중이던 독일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 1813~1883)의 오페라 《니벨룽족의 반지( Der Ring des Nibelungen)》를 관람하는 틈틈이 브리튼박물관에서 독일 정치경제학자 칼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의 《자본론(Capital)》을 탐독했다. 그때 버나드 쇼는 《니벨룽족의 반지》를 산업혁명의 우화로 재해석하여 바그너의 유미주의를 정당화하느라 노력했지만, 예술의 윤리적 이상과 미학적 이상 사이에서 갈등하던 버나드 쇼의 내면분열은 결코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다고 한다.
브레히트도 그런 분열을 해소하지 못했지만, 그것을 해소하려고 의욕하지도 노력하지도 않았다. 현대 역사에서 아리스토텔레스식 감정연극을 철폐하고 정치적 변화를 고무하는 교훈적 사상연극으로 대체하려고 브레히트만큼 노력한 작극가는 드물다. 버나드 쇼의 정치의식은 자기본성에 대한 배려와 페이비언주의(Fabianism: 점진적 사회주의) 신념에 입각한 점진주의 때문에 부단히 수정되었다. 그러나 브레히트의 정치의식은 그 특유의 과격한 의분과 비관적 전망 때문에 강렬해져갔다. 버나드 쇼는 자신의 무의식이 의식표층을 뚫고 표출되지 못하도록 늘 자기를 억누르는 시인이었으니만치 청교도를 자처하며 인간의 선의(善意)와 존엄성에 대한 믿음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브레히트는 불같은 의지를 품은 감상적이고 극적인 시인이었는데, 심지어 칼뱅주의신학자들 중에도 그만큼 사납고 악마적이며 비이성적으로 행동하려는 충동에 사로잡힌 자는 없다고 말해져도 과언이 아니었다. 인간성의 더욱 음울한 측면에 쏠렸던 브레히트의 관심은 ‘자신을 상대하는 싸움’에서 비롯되었는데, 그런 자기싸움은 공산주의와 그의 관계를 특징적으로 보여준다. 버나드 쇼의 페이비언주의는 그의 온건한 인격을 반영했다. 반면에 브레히트의 공산주의는 본질적으로 음울하고 관능적인 그의 기질이 강요한 엄격한 원칙이었다.
나치즘에 맞선 투쟁과 공산주의 포용은 브레히트가 1930년대 초반부터 1956년 사망할 때까지 수행한 작업의 중심테마였다. 그래서 브레히트는 애오라지 현대 전체주의와 관련된 주제들만 천착한 최초 작극가였다고 평가되어도 무방하다. 그는 하나의 전제정치에 대항하려고 또 다른 전제정치를 선택한 자신의 판단을 자신과 타인들에게 정당화하면서 인생의 후반기를 보냈지만, 타고난 시적(詩的) 재능을 이데올로기에 속박시켜버린 다음부터 그는 자신의 선택이 초래한 잔인한 결과들도 철저히 책임지려고 애썼다. 그는, 예컨대, 《채택된 방침(Die Massnahme)》 같은 희곡들을 통해 ‘당(黨)이 요구하면 개인의 욕구도 희생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냉혹한 변증법적 논리를 내세워서 당원들을 곤혹스럽게 만들기도 했다. 그래서 그의 이데올로기적인 글들은, 때로는, 비록 그가 자각하지는 못했을지라도, 그런 논리 때문에 공산주의체계 전체를 상대로 작성한 가장 강력한 고발장으로 해석되기도 했다.
불평과 푸념만 늘어놓는 대다수 떨거지 당원들보다 훨씬 더 실천적이고 강한 책임을 지녔다고 느끼는 자부심과 결합된 브레히트의 생존본능은 이따금 그의 희곡들을 마치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논리를 증명하려는 투박한 매체처럼 보이게끔 만들었다. 그런데 그렇게 투박하기 그지없는 이데올로기적 작품들에는 사이비선동가와 설전을 벌이는 절묘하고 풍자적인 변론가도 등장하고 공산당통제위원을 상대로 논쟁하는 요기(yogi)도 등장한다. 예컨대 그는 《쓰촨(四川)의 착한 여자(Der gute Mensch von Sezuan)》를 ‘자본주의사회에서는 부자(富者)가 되려면 반드시 피도 눈물도 없는 돈벌레가 되어야 하므로 동정심이나 자비심을 가차 없이 내팽개쳐버리는 정신분열증환자만이 온전한 인간취급을 받고 살아갈 수 있다’는 통념을 증명하느라 구상했다. 그러나 브레히트는 혁명을 선동하기보다는 우유부단과 무정견을 폭로하고 혹평하여 관객들을 곤혹스럽게 만드는 장면으로써 이 희곡을 마무리한다. 그 장면에서는, 현재 통용되는 도덕적-사회적 규약들과 지배적 경제체제가 완벽하게 어울릴 수 있다는 확신을 재확인하느라 지상에 내려온 귀머거리 신(神) 셋은, 정의(正義)와 생존본능이 반목하며 싸우는 수많은 증거들을 목격하고도 ‘지상의 현상유지는 이루어진다’고 철석같이 믿으며 천상으로 다시 올라가버린다. 그들은 “세상이 꼭 변해야 돼?”라고 묻는다.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키겠어? 더구나 그걸 누가 변화시키겠어? 세상은 결코 변하지 않을 거야!” 그때 심하게 구타당한 여주인공은 괴롭게 신음하며 들릴 듯 말 듯 미미한 목소리로 “살려줘요!”라고밖에 말하지 못한다.
요컨대, 버나드 쇼가 이상국가 같은 유토피아를 상상할 수 있었다면, 너무 정직했던 브레히트는 그런 유토피아들의 필요성을 암시하는 데 머물지 않고 유토피아들을 직접 실현하려고 들었다. 은밀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이며 자기억제형 비극작가이기도 했던 브레히트는 동시대인들의 삶을 참혹하고 절박하게 압박하는 사태들을 결코 외면할 수 없었지만, 그의 플라톤주의적 충동들은 그를 미래의 환상들에 몰입시킬 만큼 강력하지는 않았다. 브레히트가 시적 재능을 인민국가를 위해 사용한 최초 작가들 중 한 명이라고 평가될 수 있다면, 어쩌면 예술과 정치의 격전장을 ㅡ 개입하는 동시에 이탈하는 전략을 구사하여 ㅡ 무사히 통과할 수 있는 활로를 발견한 최후 작가라고 평가될 수도 있을 것이다. 브레히트 이후 우리는 공리주의연극과 유미주의연극의 간격, 그리고 연극의 사회정치적 기능만 배타적으로 인정하는 사람들과 연극에 대한 모든 공적(公的) 관심을 강하게 부정하는 사람들의 간격이 더욱 벌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전체주의국가에서 연극은 일차적으로는 정치적 통합을 도모하고 기존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형식 아니면 전복과 저항을 위한 은밀한 형식으로 이용되는 반면에, 자본주의 국가에서 연극은, 가끔은 정치의식의 분출을 자극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도피적이고 순응적이며 심리적이고 심지어 자폐적인 주제들을 다루면서 제한적이고 개인적인 경향을 점점 더 강하게 띤다. 미국 작가 필립 로스(Philip Roth, 1933~)는 이 차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동구권에서는 아무 것도 못하니까 모든 것이 중요하다. 서구권에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으니까 아무 것도 중요하지 않다.”
물론 이런 일반론이 적용될 수 없는 예외적인 국가도 서구권에는 많이 있다. 나도 그런 국가들이 있다고 기꺼이 인정하지만 여기서는 세 국가만 예시하겠다. 1930년대 미국에서 클리퍼드 오딧츠(Clifford Odets), 존 하워드 로슨(John Howard Lawson), 연방극단(Federal Theatre), 극단조합(Theatre Union)이 공연한 대단히 정치적인 연극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시대의 연극들에까지 흔적을 남겼다. 특히 급진적인 1960년대의 플라톤주의적 모방혐오감을 대변하던 아나키스트적 생활극단(Living Theatre)이 무대와 객석을 가르는 모든 장벽을 타파하려는 시도의 일환으로써 공연한 아서 밀러(Arthur Miller)와 오거스트 윌슨(August Wilson)의 작품들도 그런 흔적을 드러냈다. 1950년대 후반에 시작하여 지금에도 여전한 “성난 젊은이들”의 시대에 브리튼의 연극들이 드러낸 특징은 급진의식의 강력한 긴장이다. 그것은 부분적으로는 웨스트엔드(West End: 대저택, 대형상점, 극장이 많은 런던 서부지역)에서 주류(主流) 전통을 형성한 실내연극과 해변휴양지연극에 맞선 반작용의 소산이었다. 그런 전통은 20년 전에 존 아든(John Arden)과 존 오스번(John Osborne)이 발표한 후부터 데이빗 헤어(David Hare), 데이빗 에드거(David Edgar), 하워드 브렌턴(Howard Brenton), 캐릴 처칠(Caryl Churchill)이 현재에까지 유행시키는 작품들도 포함한다. 그리고 어쩌면 현대 연극계에서 이탈리아 마르크스주의 익살극작가 다리오 포(Dario Fo)만큼 철저히 정치적인 작가는 없을 것이다. 물론 나는 ‘연극을 향한 플라톤식 접근법과 아리스토텔레스식 접근법의 간격은 대중산업국가의 압력과 절박한 상황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차츰 넓어졌다’고 믿는다. 정치적 연극은 사회주의의 현재를 대변하는 공식선전활동이나 환상적이고 유토피아적인 미래를 지지하는 논쟁적 설교의 경향을 보인 반면에, 주류 유미주의연극은 브레히트가 “부르주아의 자아도취용 공장”이라고 비꼬았던 가식적이고 사상 없는 공연에 안주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리하여 오늘날 우리는 이데올로기 연극과 평온주의(quietism)연극 사이에서, 그리고 훈계와 과격한 선동에 몰두하는 연극과 사상 없는 오락에 환호하는 연극 사이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듯이 보인다. 그렇다면 연극이 변증법적 형식을 전개하지 않고도, 혹은 ㅡ 알제리 출신 프랑스 철학자·작가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1960)가 전체주의의 공식미학과 동일시한 ㅡ “암울하고 가혹한 현실주의”에 함몰되지 않고도, 공공현안들을 떠맡을 방법은 과연 존재하지 않을까? ‘연극이 불의(不義), 인종차별주의, 불평등, 비인간성, 전쟁, 핵무기철폐 같은 현대의 시급한 문제들을 다루되 대중산업국가에서 개인적으로 자족적인 멜로드라마를 연출하거나 감상할 자유를 유지하고 개인들이 누릴 수 있는 자유의 가능성들을 줄인다’는 비난도 듣지 않도록 연극이 다룰 수 있는 방법이 과연 있을까? 작극가는 소속한 사회의 정치적 문제들과 어떤 식으로 관계할 수 있고, 그의 사회적 책임과 그가 타고난 창조적 사명은 어떤 식으로 결합될 수 있을까?
나는 ‘현대 연극이 은유연출법을 매개로 삼는다면 시적 책임과 정치적 책임을 동시에 짊어지고 아리스토텔레스식 역할과 플라톤식 역할을 종합할 수 있다’고 믿는다. 작극가들은 여전히 문제해결능력을 구비하지 못했지만 ― 아마도 그런 능력을 구비한 작극가는 이제 예술가로 공인받지 못하리라 ― 그들이 은유적 상상력을 발휘한다면 틀림없이 문제를 정확히 제시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은유법의 장점은 직설하기보다는 암시하고 직사(直射)하기보다는 반사(反射)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진리로 걸어가는 시(詩)의 큰길(大道)을 대표한다. 또 그것은 극예술의 자율적 본성을 추방하기보다는 묘사함으로써 보전한다. 나아가 그것은 극예술가에게 가정불화나 부부갈등보다 더 광범한 문제를 다룰 수 있도록 허용함으로써 그가 공공역할을 지속할 여지를 그에게 부여한다.
모든 위대한 현대극은 은유극들이었다. 입센은 ‘부르주아의 사회적 유산을 망가뜨리는 상징’을 유령들로써 은유했고, 체호프는 ‘취지를 상실하여 사멸하는 귀족사회의 상징’을 벚꽃동산으로써 은유했으며, 버나드 쇼는 ‘파멸의 바다를 정처 없이 표류하는 유럽의 상황’을 ‘키(方向舵) 없는 배를 탄 듯한 (비탄에 잠긴) 가족’으로써 은유했고, 브레히트는 ‘탐욕과 대략학살로 점철된 파괴적 전쟁의 실상’을 ‘용감한 어머니의 이동식 군용매점’으로써 은유했으며, 아일랜드 작가 새뮤얼 베케트(Samuel Beckett, 1906~1989)는 그런 실상을 ‘앙상한 한 그루 나목(裸木) 밑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는 뜨내기 두 명’으로써 은유했다. 내가 볼 때 현대의 정치극과 가족극(家族劇)을 불문한 비주류 연극들은 이런 은유적 예술기법을 간과하는 듯하다. 대다수 현대극은 복잡미묘한 시적 구조를 결핍한 채로 산만하고 무미건조하며 단순한 경향을 보인다. 그래도 연극의 신비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이 시대 최고 작극가들은 은유의 광맥을 부단히 굴착하는데, 내가 확인하고 조명하려는 작극가들도 바로 그들이다.
그런 작극가들의 대표작은, 예컨대, 벨기에 출신 미국 작극가·배우 장-클로드 반 이탈리(Jean-Claude van Itallie)의 3부작 《아메리카 만세(America Hurrah)》의 제3부 《모텔(Motel)》일 수 있다. 《모텔》은 모텔의 여자지배인이 독백하는 식으로 진행되는데, 그녀는 거대한 인형인데, 커다란 사육제용 가면을 썼고 머리카락들을 헤어롤러로 감았으며 노인용 안경을 썼고 앞치마를 둘렀다. 그녀의 음성은 일반객실에서는 물론 유서 깊은 객실에서도 들릴(“대리석 객실이나 코르크 객실을 망라한 모든 객실을 진동시킬”) 만큼 괄괄한데, 특히 이 모텔의 객실에는 의자등받이덮개, (캔버스나 삼베로 방직된) 양탄자, 일본풍 플라스틱 조화(造花), TV수상기, 자동수세식 화장실이 구비되어있다. 여자지배인이 숙박부를 정리하는 동안 조명을 가리며 출입문이 열리고 젊은 연인 한 쌍이 들어온다. 그런데 그들은 털신들을 신고 커다란 머리통들을 기분 나쁘게 까딱거리며 몸통들을 살아있는 괴물들처럼 위협적이고 과격하게 움직이는 커다란 모형인형들이다. 날이 서서히 어두워지자 옷을 홀라당 벗어버린 그들은 해괴하기 그지없는 자세로 서로를 껴안고 징그러운 몸뚱이를 비벼대다가 TV를 켜고는, 거기서 터져 나오는 고막을 찢을 듯이 쾅쾅대는 로큰롤 반주소리에 맞춰 신나게 객실을 파괴하기 시작한다. 화장실변기의 엉덩이받침대를 뜯어버리고 침대스프링을 망가뜨리며 출입문과 창문을 부숴버리고 사방의 벽에다가 립스틱으로 온갖 음란한 욕설들과 그림들을 쓰고 그려대다가 결국에는 여자지배인마저 머리부터 발끝까지 찢어발겨버린다. 러시아 출신 미국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Vladimir Nabokov, 1899~1977)는 장편소설 《롤리타(Lolita)》에서 모텔문화를 우리의 비열함과 지리멸렬함을 이미지화하는 데 이용했다. 반 이탈리는 모텔문화를 우리의 폭력성, 우리의 심신상실증, 우리의 모독욕구를 은유하는 데 이용했다.
예시될 수 있는 또 다른 미국 작극가의 작품은 아서 커핏(Arthur Kopit, 1937~)의 《세상의 종말(을 초래한 향연)[End of the World (with Symposium to Follow)]》이다. 이 블랙코미디는 느와르영화기법을 채택했는데, 파멸을 초래하는 희곡을 써달라고 의뢰하는 정체 모를 이방인의 방문을 받은 어느 작극가가 주인공이다. 이 작극가는 마치 살인범을 찾도록 고용된 사설탐정처럼 이 진기한 의뢰를 수락하고, 우리의 핵무기전략을 아는 많은 증인들을 상대로 탐문조사를 벌인다.
작극가는 우리의 핵무기정책이 정신병자의 발상이라는 사실뿐 아니라, 핵무기정책과 그것의 입안자들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도 발견한다. 그 정책은 곧 “폐쇄된 악순환체계”이다. 확실한 파괴와 안이한 대응은 모두 동일한 결과를 낳는다. 그런 체계자체가 부서지지 않으면 활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런 체계는 마치 실물을 착각시키는 네덜란드 판화가 마우리츠 코르넬리스 에셔(Maurits Cornelis Escher, 1898~1972)의 상자와 다르지 않다. 그것은 사실처럼 보여도 아무 실효도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면 그것이 효과적인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것에 영향을 끼치는 활동을 중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작극가는 결국 그런 희곡을 쓰기는 불가능하다고 결론짓고 모든 기대와 집필계획마저 포기해버린다.
그의 마지막 대사는 은유적인 것인데 길더라도 여기에 인용해보겠다.
“얼마 전에 우리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우리는 아들을 집으로 데려왔지요. 내 기억으로는 아마 그때가 아들이 태어난 지 닷새쯤 되었을 겁니다.” (몸동작) “그리고 그 다음날 아내가 집을 나갔고 …… 집에는 아들과 나만 남았고 …… 이토록 자그마한 아들을 안고 거실을 천천히 걸어서 돌기 시작했어요. 우리는 허드슨 강이 멀리 보이는 고층에서 살았는데 …… 나는 이 작은 생명체를, 이토록 작은 아이를 가만히 내려다보았지요. 그러다가 나는 깨달았습니다 ……” (몸동작) “나는 그때까지 내가 누구도 완전히 내 마음대로 상대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던 겁니다!” (몸동작) “그리고 나는 아들이 완벽하게 순수하다는 것도 깨달았어요. 그래서 나는 아들을 번쩍 들어 올리고 바라보았습니다. 아들이 볼 수 있는 모든 것은 단지 순수하게만 보였을 겁니다. 그러니까 아들은 나의 소유물이었다는 말이죠. 지금껏 나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몰랐어요! 아이와 그렇게 멀리 떨어져있으니 아무것도 몰랐단 말입니다! 그 순간 나는 내가 창문가에 서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창문은 열려있었어요. 물론 창문은 나로부터 1미터 남짓 떨어져있었지만요. 나는 생각했습니다. ‘나는 할 수 있어 …… 아이를 내던져버리자! 그러기는 정말 쉬워.’ 그리고 나는 창문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왜냐면 그런 생각이 내 머리에서 떠올랐다고는 믿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대관절 나의 어디에서 그런 생각이 떠올랐을까요? 이 소년에 대한 사랑을 빼면 나의 몸 어디에서도, 털끝만큼도, 그런 생각이 날 리가 없었습니다! 나는 늘 아내와 의논했고, 서로 사랑했으며, 그녀에게 화를 내거나 탓하거나 어두운 기색을 보인 때도 결코 없었고, 그녀의 아들을 나보다 사랑한 사람은 지금까지 한 명도 없었는데 …… 그래서 나는 생각했습니다. ‘나는 아들을 창문 밖으로 던져버릴 수 있어! …… 그러면 아들은 10층, 12층, 15층, 20층 아래로 떨어질 테고, 그러면 나는 아들을 다시는 볼 수 없겠지! 그리고 나는 양심가책에 시달리겠지 … 그것도 한없이 …… 아무도 나를 구원하지 못할 거야. 나는 구원자들로부터 영원히 버려지겠지. 신이 존재하더라도 이런 짓을 저지른 나는 영원히 저주받을 거야.’ 그러자 나는 공포감에 휩싸였습니다! 나는 무서웠습니다! 그것은 무서운 공포감이었습니다! 아무 까닭도 없이 어떤 짓을 저지르면 영원히 저주받으리라는 생각이 떠오르자 나는 전율스런 공포감을 느꼈단 말입니다! 그때 나는 ‘신은 내게 이런 공포감을 안겨주겠지’라고 혼잣말했지요. 그러나 나는 당연히 저항했습니다. 그러기는 어렵지 않았어요. 저항하기는 힘들지 않았어요 …… 그러나 나는 창가에 계속 서있지 않았습니다! …… 그리고 창문을 닫았습니다! 그 자리를 벗어남으로써 나는 저항했고 거실로 다시 돌아갔어요 …… 나는 아들과 함께 바닥에 앉았습니다.” (몸동작) “물론 내가 그런 짓을 저지를 기회는 없었어요. 기회가 없었을 뿐이란 말입니다!” (몸동작) “비록 나는 기회를 포착할 수 없었지만, 그것은 너무나, 너무나 …… 매혹적이어서 …… 파멸이 온다면 …… 그것도 바로 그런 식으로 올 겁니다.”
나는 이 인용문에 구구한 해설을 덧붙이고 싶지 않다. 왜냐면 이 인용문 자체가 이미 해설보다 훨씬 강력한 위력, 정확히 말하면, 극적 은유법의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기 때문이다. 커핏은 핵무기를 주제로 삼은 연극을 통해서 시민으로서 자신이 짊어져야 할 책임들을 생략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들을 정면으로 직시함으로써, 우리의 공포감을 이해하고 그것을 예술로 전환시키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여기서 하나 더 예시될 수 있는 작품은, 내가 아는 한에서, 플라톤주의의 현실관(現實觀)과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현실관 사이에서 발행하는 긴장들을 가장 잘 체현하는 프랑스 작가 장 주네(Jean Genet, 1910~1986)의 《발코니(Le Balcon)》이다. 장 주네는 ‘관능적 환상들을 매개로 현상유지되는 매음굴의 이미지들’을 동원하여 부르주아사회를 은유한다. 정부, 사법기관, 군대, 경찰, 교회 같은 권력기관들은 일반시민들이 뻔질나게 드나드는 매음굴흉내를 냄으로써 번영한다. 이런 체계를 비꼬는 연극은 매음굴에서 자행되는 협잡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이런 체계를 유지하는 모든 거짓과 위선을 파괴하는 데 투신하는 자들이 도시의 길거리에서 일으킨 반란에서 비롯된다. 이것은 순수한 퓨리턴의 이상(理想)을 고수하려고 반란을 원하는 반란지도자 프롤레타리아 로제(Roger)가 추구하는 최소한의 목적이지만, 결국은 역할극으로 마무리된다. 로제는 반란이 “흉내와 거짓에 대한 경멸”로 시작되지 않으면 순식간에 적(敵)들을 닮으려는 흉내로 변질되고 말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시가전(市街戰)이 벌어지면 예비동작이나 우아한 예절이나 미모 따위에는 아예 신경도 쓰지 말아야 한다. 이성(理性)은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 그리고 체제의 거물들이 체포되면 그들의 의상들도 찢어발겨져야 마땅하다.
그러나 로제는 몽상가이다. 그래서 반란자들은 표장(標章), 영웅, 깃발과 숭배할 만한 전설적 인물을 바라는 열망을 포기할 수 없다. 이 혁명의 꽃으로 통하는 샹탈(Chantal)은 “매음굴에서 협잡하고 연기하는 예술”을 배웠다. 이제 그녀는 그런 예술을 혁명에 응용하고, 그러면 예술은 혁명의 여성적 상징이 된다. 이것이 반란의 운명을 결정한다. 장 주네가 프랑스 혁명을 모델로 삼아 구상한 이 반란은 자생적 의전절차(儀典節次)를 발달시키기도 전에 책략을 멸시하면서 시작되었다. 이성과 미덕을 신봉하는 청교도인 로제는 잉글랜드 장군·정치인 올리버 크롬웰(Cromwell, 1599~1658)이나 프랑스 변호사·정치인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Maximilien Robespierre, 1758~1794)를 모델로 구상된 인물이 분명하다. 이들의 플라톤식 청교도주의는 혁명의 횃불과 감격에 집착한 인민들 사이에서는 살아남지 못했다. 배역(配役)에 충실하려는 욕구는 변혁을 바라는 욕구를 갉아먹고, 반란자들은 미리 정해진 인물성격에 순응하고 만다. 심지어 혁명지도자들도 배역들을 맡아 또 다른 복식(服飾)에 맞는 단출한 의복들을 착용한다. 그리하여 로베스피에르는 구체제(ancien régime)가 흘린 피보다 훨씬 더 많은 피를 흘린 공포정치를 자행한다. 소련(소비에트 연방) 정치지도자 스탈린(Joseph Stalin, 1878~1953)은 로마노프(Romanov) 왕조의 봉건계급체제보다 훨씬 더 살인적인 관료체제를 수립한다. 모든 진보는 꿈들이다. 왜냐면 현실은 파악되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시간은 미래로 흘러도 착각된 시간은 순환한다면, 인류는 거짓과 위선에 사로잡혀 악순환만 반복해야 할 운명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므로 장 주네는 연극과 정치를 공생하기 어려운 것들로 보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중시된 모방개념도 현상유지용 방법의 일종으로 이해했다. 더구나 장 주네가 플라톤주의혁명가들이 염원한 현실을 바람직하지도 완성될 수도 없는 것으로 믿었을지언정, 장 주네는 연극의 은유법을 이용하여 자신의 심오한 혁명정신을 진술하느라 노력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대다수 사람들이 정치적 극예술에 관해서 질문할 수 있다. 단, 그 질문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우리의 이해력을 증진시키고, 가능성을 제공하기보다는 불가능성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지켜주는 것이다. 나는 또 다른 맥락에서 이런 글을 쓴 바 있다. “예술은 정치를 안고 가더라도 긍정하기는 거부한다. 예술가는 현실과 타협하며 살아가지만 상상세계 같은 또 다른 세계에서도 살아가는데, 그곳에서 그가 꿈꾸는 것은 순수하고 절대적인 것이다 …… 정치는 해결책을 요구한다. 극예술은 우리를 애매한 상태로 남겨두기만 해도 만족한다. 그 결과들은 반론, 긴장, 나태를 수용하지도 않지만, 아름답게 표현된 순수한 진리가 선사하는 메타자연학적(형이상학적) 희열에 만족하지도 않는다.” 그런 한에서, 아니, 어쩌면 오직 그런 한에서만, 은유는 정치와 연극이 만나는 다리(橋梁)를 건설할 수 있을 것이고, 바로 그 다리 위에서, 상상력이 합류하는 그런 다리 위에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만난다면 그들은 비로소 그들의 오래된 주장들을 내려놓고 서로에게 경의를 표하는 악수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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