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원사(奉元寺)는 서기 889년 도선국사가 금화산 서쪽에 있는 신도의 집을 희사받아
현 연세대(연희궁)터에 창건한 뒤 반야사(般若寺)라 했다고 한다.
그뒤 고려말 공민왕 때 태고 보우가 중건·보수하고 금화사라고 개칭했다.
1392년 이색이 지은 보우의 비문을 본 태조 이성계가 그의 문도가 되기를 자청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1396년 원각사의 삼존불상을 옮겨 봉안했다고 한다.
태조의 어진을 모시는 진전(眞殿)이 있어 조선시대 불교억압정책 아래에서도 번성하게 되었다.
임진왜란 때 당우와 암자가 소실된 것을 지인대사가 중창했다.
1651년 봄에 큰 화재로 대웅전과 요사채 등이 소실된 것을 1665년에 극령(克齡)과 휴엄(休嚴) 등이 다시 중건했다.
1748년(영조 24)에 왕이 직접 땅을 하사하자 찬즙(贊汁)·증암(證岩) 등이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우고
이듬해에 영조가 봉원사라는 현판을 내린 것이 절이름이 되었다.
영조는 친필로 봉원사(奉元事)라 현액하였으며,
신도들 사이에는 이때부터 새로 지은 절이라 하여 '봉원사(奉元事)'라 부르게 되었다.
1991년 김성월 스님과 사부대중의 원력으로 삼천불전 건립도중 대웅전이 소진됨에 즉시 중건을 시작하여
1994년 주 지 혜경(慧鏡)스님과 사부대중의 원력으로 대웅전을 복원 낙성하였고
같은 해 1,100평 규모의 삼천불전을 새로이 건립하였다.
봉원사 대방(큰방)이다.
봉원사(奉元寺)라는 한문 현판이 걸려 있다.
대개 절의 이름을 써넣은 큰 현판은 절의 입구, 주로 일주문 등에 걸어 놓는다.
봉원사에는 일주문이 없다. 대웅전 앞마당에 자리한 대방(큰방) 건물에 봉원사라는 현판을 걸어 놓았다.
흥선대원군의 파란만장한 사연을 안고 있는 별장 아소정(我笑亭 서울 마포구 서강로 44 서울디자인고)을 옮겨온 것이다.
아소정은 99칸의 대궐 같은 집이었으나 안채만 봉원사로 축소 이동하였다.
원래 봉원사 현판은 영조의 친필이었으나 1950년 한국전 때 소실되었다고 한다.
이 현판은 운강 석봉이 쓴 것으로 되어있다. 석봉은 한석봉은 아니라고 한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선생의 스승인
청나라 대학자 옹방강(翁方綱)의 행서체 현판 친필이다.
무량수각(無量壽閣) 아미타불을 모신 전각이라는 뜻이다.
'청련시경(靑蓮詩境)'은 '산호벽루(珊湖碧樓)'와 함께 추사 김정희의 글씨다.
대방(큰염불당)의 마루는 아주 오래된 나무를 정교하게 깔아 만든 것으로
전혀 손상되지 않고 원형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많은 사람들을 경탄케 하고 있다.
손가락 모양의 커다란 조각상이 있다.
양손을 마주잡고 엄지와 중지손가락을 편 채 검지를 중지 위에 올려놓은 모양이 매우 인상적이다.
이 수인상(手印像) 앞에는 근대화의 개화에 상량한 이동인 선사가 주석하던 자리를 기념하는 조각상이라는
설명이 쓰여 있다.
봉원사는 한국 근대사의 최대 격변기였던 갑신정변의 산실 역할을 한 유서 깊은 곳이다.
개화 승려 이동인(李東仁)은 봉원사에 5년간 머물며 갑신정변의 주역인 김옥균 서광범 박영효 등에게
개화사상을 불어넣었다. 그는 봉원사 뒤 안산 너머에 있는 일본공사관인 천연정(天然亭)에 자주 내왕하면서
일본과 서양문물에 관한 지식을 습득하였다.이를 유홍기(劉鴻基, 일명 유대치)와 그의 제자인 김옥균에게 전수하였다.
이동인의 영향을 받은 김옥균은 갑신정변의 주역이 되었을 정도로 당시 봉원사는 개화사상의 선두였다.
한글학회의 전신인 국어연구학회가 처음 시작된 장소이다.
일찍이 1908년 8월 31일 한힘샘이라는 아호를 가진 주시경의
가르침을 받은 하기국어강습소 졸업생과 뜻있는 인사들이 모여
우리말과 우리글의 연구와 교육을 목적으로 국어연구학회를 만들었다.
우리 얼, 말, 글을 지키고 널리 펴려는 선각자들은 어
려운 여건 속에서도 우리나라 최초의 연구 모임인 국어연구학회가 개화의 요람기에 봉원사에서 창립총회를 열었다.
이 학회는 조선어연구회(1921)-조선어학회(1931)로 이름이 바뀌어 오늘날 한국학회(1949)의 터전이 되었다.
2008년 8월 31일 학회창립 100돌을 맞아 봉원사에 표지석을 세워 한글학회가 처음 시작한 곳임을 기리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