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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7차 동작문화원 전통문화반 답사자료집
내설악 지역
문화유산을 찾아서
답사지역 : 오색 약수터 -> 한계령 ->
백담사
일시 : 2026년 10월 28일
답사지도 : 박경하 중앙대 역사학과 명예교수
오색약수터
오색약수는 강원도 양양군 설악산 자락에 위치한 천연기념물 제529호의 약수터로, 독특한 색과 효능으로 유명한 관광 명소입니다.
역사와 유래
오색약수는 16세기 설악산 성국사의 한 스님이 발견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름은 성국사 뒤뜰에서 자라던 오색화에서 유래했으며, 오랫동안 지역 주민과 방문객에게 사랑받아 왔습니다. 2011년에는 대한민국 천연기념물 제529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약수 성분과 효능
오색약수는 나트륨, 철분, 칼슘, 마그네슘 등이 포함되어 있으며, pH 6.6의 알칼리성을 띠고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위장병, 신경쇠약, 피부병, 신경통 등에 좋다고 알려져 있으며, 약수로 밥을 지으면 푸르스름한 빛깔이 나는 특징이 있습니다. 다만 일부 성분은 과다 섭취 시 건강에 해로울 수 있어 주의가 필요합니다
위치와 트래킹 코스
오색약수터는 양양군 서면 오색리에 위치하며, 주변에는 주전골, 성국사, 독주암, 선녀탕, 용소폭포 등 다양한 명소가 있습니다
초보자도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코스가 있으며, 약수터에서 선녀탕까지 왕복 약 1시간 정도 소요됩니다. 사진 촬영 명소로는 약수출렁교가 있으며, 흔들다리에서의 체험도 인기입니다
오색약수는 자연 경관, 역사적 가치, 건강 효능을 모두 경험할 수 있는 설악산 대표 명소로, 가족 여행, 단풍놀이, 힐링 여행에 적합한 장소입니다.
한계령
한계령(寒溪嶺)은 강원특별자치도 인제군 북면과 양양군 서면 사이에 있는 고개로, 인제군과 양양군의 경계이기도 하다. '한계'는 일반적으로 쓰이는 제한이 있다는 뜻의 그 '한계(限界)'가 아니라 '찰 한(寒)' 자와 '시내 계(溪)' 자를 사용한, "차가운 시내"라는 뜻이다. 태백산맥을 넘는 고개로, 왕복 2차로로 잘 포장된 44번 국도가 지나간다. 설악산 국립공원을 지나가기 때문에 경치는 아름답다. 특히 단풍구경을 하면서 지나가기에 좋다. 해발고도는 1,004m이나, 일반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한계령휴게소 일대의 고도는 920m이다. 이곳 정상에는 한계령휴게소와 설악산 등산로 입구가 있다.
이곳의 도로는 매우 구불구불하기 때문에 운전 난이도가 높은 편이다. 그나마 인제군에서 한계령 휴게소까지는 나은 편이지만, 휴게소에서 오색리 방향은 말 그대로 낭떠러지를 보게 된다. 바람도 정말 심하게 불며 정상에서는 말 그대로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바람이 심하게 불 때도 있다.[3] 양양읍으로 내려가는 길에는 헤어핀 커브도 적지 않아 엔진 브레이크 없이 운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만큼 와인딩 로드가 많다. 엔진 브레이크[4]를 써가며 천천히 넘는다면 그렇게 어려운 길은 아니지만, 낭떠러지 옆에 있는 급경사 도로 주행에 두려움이 있는 운전자라면 56번 지방도를 타고 미시령터널(유료)을 지나서 속초시로 가는 길을 추천한다.[5] 한계령 휴게소에서 흘림7교/금표교 구간이 경사가 급하고 헤어핀 등 커브가 심한 편이며, 용소폭포 탐방센터 부근부터 커브가 덜 급해지며 오색부터는 경사도 완만해져 일반적인 계곡 도로로 바뀐다. 최소한 시외버스나 관광버스가 잘만 다니는 도로이니 생초보자가 아니라면 너무 겁을 먹을 필요는 없다.
한계령이라는 지명은 예전부터 있었으나 소동라령(所冬羅嶺)과 혼용되어 쓰이다가 1970년대에 제3군단이 당시 군단장이었던 김재규의 주도로 확장 공사를 하면서 '한계령'이라는 이름이 정착되었다. 고갯마루에 공사 당시 죽은 장병들을 추모하는 위령비를 세웠는데 당연히 김재규 본인의 이름도 있었으나 10.26 사건 이후 누군가가 이름을 지웠다고 한다.
정상에는 김수근이 설계한 것으로 유명한 한계령 휴게소가 있다. 산꼭대기의 휴게소답게 물가는 비싸지만매우 부담이 되는 수준은 아니다. 또한 한계령이 비교적 오지에 속하지만, 놀랍게도 동서울 - 속초(양양 경유) 시외버스와 인제군 하늘내린 마을버스가 한계령을 넘어가며, 한계령 휴게소에도 정차한다. 이는 한계령 휴게소에 설악산 등산로가 있기 때문.서울 방향으로는 한 시간에 한 대 정도의 비율로 오는 편인 만큼 드물지는 않다.
양양군에서는 오색령으로 이름을 바꿀 것을 주장한다. 근거는 조선시대에 이 고개가 오색령으로 불렸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2005년 한계령휴게소 양양군 측 지역에 옛 오색령이라고 적힌 표지석을 설치했고, 2010년 범군민운동을 여는 등 공론화를 했다. 당연히 인제군에서는 반발하였는데 '한계'는 인제군 북면 한계리, '오색'은 양양군 서면 오색리의 지명으로 쓰이기 때문이다.
백담사
창건배경
백담사에 관한 기록으로는 『설악산심원사사적기(雪嶽山尋源寺史蹟記)』와 한용운(韓龍雲)이 편찬한 『백담사사적(百潭寺史蹟)』이 있다. 『백담사사적』에 의하면, 이 절은 647년(진덕여왕 1)에 자장(慈藏)이 설악산 한계리에 창건하였으며, 절 이름을 한계사(寒溪寺)라 했다고 한다. 그러나 강원 지역이 자장을 비롯한 고승들의 수행처로 주목받으면서 자장을 창건자라고 생각하게 됐을 가능성이 높다.
변천
690년(신문왕 10)에 실화(失火)주3로 소실되어 719년(성덕왕 18)에 재건하였다. 『심원사사적기』에는 이때의 전설이 수록되어 있다. 낭천현(狼川縣)주4에는 비금사(琵琴寺)가 있었으며, 주위의 산은 짐승들이 많아 사냥꾼들이 많이 찾아들었다. 이로 말미암아 그곳의 산수가 매우 더러워졌지만, 비금사 승려들은 그것을 모른 채 샘물을 길어 부처님에게 공양하였다. 그와 같은 더러움을 싫어한 산신령은 하룻밤 사이에 절을 설악산의 대승폭포 아래의 옛 한계사 터로 옮겼다. 그 사실을 모르는 승려와 과객주1들이 아침에 깨어나 보니 비금사는 틀림없었지만, 기암괴석주2이 양옆에 늘어서고 앞뒤에 쏟아지는 폭포가 있는 산은 이전과 달랐다. 사람들이 그 까닭을 몰라할 때 갑자기 관음청조(觀音靑鳥)가 날아가면서 “낭천의 비금사를 옛 한계사로 옮겼노라.”라고 하여 사람들에게 그 신이함을 알렸다고 한다.
지금까지도 이 전설은 그대로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이 지방 사람들 사이에는 춘천 부근의 절구골, 한계리의 청동골 등의 지명이 절을 옮길 때 청동 화로와 절구를 떨어뜨렸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 하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이 전설을 통하여 한계사를 중창할 때 비금사를 옮겨간 것임을 추정할 수 있다.
그 뒤 백담사는 785년(원성왕 1)에 다시 불탔으며, 종연(宗演) · 광학(廣學) · 각동(覺洞) · 영희(靈熙) · 법찰(法察) · 설흡(雪洽) 등이 중건을 서둘러 790년에 한계사 터 아래 30리 지점에 이건하고 절 이름을 운흥사(雲興寺)라고 하였다.
그러나 984년(성종 3)에 백담사에 또 다시 불이 나 승려 동훈(洞薰) · 준희(俊熙) 등이 운흥사지 북쪽 60리쯤 되는 곳으로 이건하고, 987년에 심원사(深源寺)라고 개명하였다.
『심원사사적기』에는 이때 법당 · 극락전 · 벽운루(碧雲樓) · 선승당(禪僧堂)주5 · 동상실(東上室) 등의 건물을 중수하였으며, 부속 암자로는 동암(東庵) · 원명암(元明庵) · 백련암(白蓮庵) · 오세암(五歲庵) · 봉정암(鳳頂庵) 등이 있었으며, 동훈 · 준희 등의 뛰어난 고승들이 거주하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뒤 조선 초기에 이르기까지 약 450년 동안은 별다른 변화 없이 전승되다가 1432년(세종 14)에 네 번째의 화재로 절이 전소되었다. 그 뒤 2년 만에 동하(洞下) 30리쯤 되는 곳에 선구사(旋龜寺)라고 개칭하고, 의준(儀俊) · 해섬(海暹) · 취웅(翠雄) 등이 법당과 극락전, 요사채주6 2동을 세웠다.
그러나 1443년에 화재로 다시 소실되었고, 1447년에 옛터의 서쪽 1리쯤 되는 곳에 다시 절을 세우고 영축사(靈鷲寺)라 하였다.
그러나 김시습(金時習)이 부속 암자인 관음암(觀音庵)에 와서 머리를 깎고 출가했던 1455년(세조 1)에 화재로 소실되어 재익(載益) · 재화(載和) · 신열(愼悅) 등이 옛 절터의 상류 20리 지점에 중건하고 백담사라고 개칭하였다.
1775년(영조 51) 겨울에 다시 불에 타서 승려들은 흩어졌지만, 최붕(最鵬)이 태현(太賢) · 태수(太守) 등과 인법당(因法堂)주7을 짓고 심원사(尋源寺)라 개칭한 뒤 6년 동안 머물면서 법당과 향각(香閣)주8 등의 건물을 중건하였다.
심원사를 다시 백담사로 개칭한 것은 최붕과 설담(雪潭)이 절을 중건한 1783년(정조 7)이었고, 이때의 백담사라는 이름이 지금까지 불리고 있다. 백담사라는 이름은 골이 깊고 흐르는 물의 연원이 먼 내설악에 자리한 절이라는 뜻이나, 거듭되는 화재를 피해 보고자 하는 뜻이 담겨진 이름이라는 설을 다음의 전설로 알 수 있다. 거듭되는 화재로 절 이름을 고쳐 보려고 하던 어느 날 밤, 주지의 꿈에 백발 노인이 나타나 대청봉주9에서 절까지 웅덩이[潭]를 세어 보라고 하여 이튿날 세어 보니 꼭 100개에 달하였다. 그래서 담자를 넣어 백담사라 이름을 고치는 동시에 지금의 장소로 옮겼는데, ‘담’자가 들었기 때문에 그 뒤부터 화재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에 의하면, 화재가 있을 때마다 주지 스님의 꿈에 도포를 입고 말을 탄 분이 나타나 변을 알려 주었다고 하는데 기이하게도 지금도 이 근처에 도포를 입고 말을 탄 듯한 암석이 솟아 있다.
그러나 1915년 겨울밤에 화재가 또 다시 일어났다. 이 화재는 불상과 탱화 20여 위(位)를 제외한 건물 70여 칸과 경전 · 범종까지도 모두 태워 버렸다. 당시의 주지 인공(印空)은 사무(寺務)를 오세암에서 행하면서 백담사의 중건에 착수하였고, 기호(基鎬)와 인순(仁淳) 등이 그를 도왔다. 강원도 일대를 다니면서 시주받은 1,786원 30전으로 1919년 4월에 법당 20칸과 화엄실(華嚴室) 20칸을 건립하였으며, 1921년 봄에는 응향각(凝香閣) 및 사무실 30칸 등을 이룩하고, 종과 북을 새로이 주조하여 낙성법회(落成法會)를 열었다.
한용운이 『백담사사적』을 편찬한 1928년 당시의 백담사는 복구가 끝나고 정리가 되어 있을 때였다. 근대에 이르러 백담사는 한용운이 머물면서 『불교유신론(佛敎維新論)』과 『십현담주해(十玄談註解)』 · 『님의 침묵』을 집필하는 장소가 되었고 만해 사상의 고향이 되었다. 그러나 이 절은 6 · 25전쟁 때 소실되었으며, 1957년에 재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황
현존하는 당우주로는 극락보전을 중심으로 선원(禪院) · 요사채 등이 있고, 남쪽으로 150m 떨어진 곳에 관음전(觀音殿)이 있다.
산 내의 부속 암자는 현존하는 것보다 이미 폐허가 된 것이 많다. 한용운은 유지(遺址)만 남아 있는 역사 미상의 암자로서 동암 · 백련암 · 원명암 · 은선암(隱仙庵) · 극락암(極樂庵) · 오봉암(五峯庵) · 복호암(伏虎庵) · 지장암(地藏庵) · 흥성암(興盛庵) · 자장암(慈藏庵) · 금선암(金仙庵) 등 11개가 있었다고 『백담사사적』에 기록하고 있다. 이밖에도 폐허가 되어 버렸지만, 1777년에 창건한 통선암(通禪庵)과 심적암(深寂庵), 1864년(고종 1)에 역암(饑庵)이 창건하였고 1919년에 훼철된 보문암(普門庵), 1884년에 창건한 축성암(祝聖庵) 등이 있다.
현존하는 부속 암자로는 643년(선덕여왕 12)에 자장이 창건하여 불사리(佛舍利)주11를 봉안함으로써 전국의 5대 적멸보궁(寂滅寶宮)의 한 곳이 된 봉정암, 자장이 선실(禪室)로 사용하기 위해서 창건하고 주석하다가 관음진신(觀音眞身)을 친견한 뒤 관음암(觀音庵)이라고 하였으며, 뒤에 다섯 살의 신동이 관세음보살을 부르다가 견성(見性)한 곳이라 하여 절 이름을 바꾼 오세암, 1648년 유학자 김창흡(金昌翕)이 은거하기를 맹세하고 창건한 영시암(永矢庵), 구전으로 전해져 오던 옛 절터에 1903년 원호(源湖)가 세운 원명암(圓明庵) 등이 있다.
극락보전 주불인 목조 아미타여래 좌상 및 복장 유물이 보물 제1182호로 지정되었다. 이 아미타불은 1748년(영조 24)에 만들어졌다. 불상의 조성 연대를 알 수 있으면 발원문과 많은 복장물이 봉안되어 있어 조선시대 불교 문화 관련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만해 한용운이 머물며 여러 저작을 남긴 절로 출가한 후 잠시 머물며 수많은 저서와 시를 남겼다.
사실 백담사가 전국적인 인지도를 가지게 된 이유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아내 이순자와 함께 '5공 청산'의 일환으로 노태우 정부 시절인 1988년 11월 23일부터 1990년 12월까지 약 2년 동안 자의반 타의반으로 백담사에서 유배 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당시 전두환은 속죄를 하겠다며 연희동 자택에서 대국민 사과를 한 후 세상과 담을 쌓겠다며 백담사로 떠났는데 전두환이 백담사에 은거중이라는 게 알려지자 기자들과 전두환의 측근들, 전두환 지지자는 물론이고 대통령을 보겠다고 전국에서 행락객들이 몰려들어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오세암
강원특별자치도 인제군 북면 백담로 1325[2] 설악산에 위치한 백담사의 암자이며, 대한불교 조계종 제3교구 본사 신흥사의 말사(末寺)이다.
643년(선덕여왕 12) 자장율사가 지었는데, 당시에는 관음암(觀音庵)이라 불렀다. 1548년(명종 3)에 보우가 중건한 후 1643년(인조 21)에 설정이 또 중건하면서 현 명칭이 붙었다. 1888년(고종 25) 백하화상이 박달나무를 써서 2층짜리 법당을 지었다.
오세암(830m)을 가려면 백담사에서 영시암을 거쳐 오거나(6km), 설악동에서 마등령을 거쳐 오세암으로 오는 길(7.8km)을 선택해야 한다. 대부분은 백담사에서 오는 코스를 선택하며 여기서 마등령으로 올라 공룡능선을 진입하거나 오세암을 통해 봉정암으로 가는 경우로 이 곳을 찾는다.
오세암 전설
5살 된 아이가 폭설 속에서 부처의 도움으로 살아남았다는 전설이 있어서 '오세암'이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이 설화는 암자를 중건한 설정 스님의 얘기를 토대로 했으며 전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선시대 설정이란 스님이 설악산 깊은 곳의 암자에서 수행을 하던 중 잠이 들었는데 관세음보살이 꿈 속에서 설정스님에게 서둘러 마을로 가라고 얘기한다. 꿈에서 깬 설정스님은 서둘러 자신이 살던 마을로 달려갔는데 마을로 오니 사람들이 한 명도 없다. 무언가 이상해서 지나가던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니 이 마을에 전염병이 크게 돌아 마을 사람들이 모두 죽었다고 얘기한다. 그런데 그 사람이 어린 남자아이 한 명만이 이 난리통에 혼자 살아남았다고 얘기한 뒤 갈 길을 다시 갔다.
설정스님은 남자아이란 말에 놀라 서둘러 자신의 여동생이 살던 집으로 달려갔다. 그 곳에 3살 난 남자아이가 있었다. 바로 스님의 조카이다. 스님은 관세음보살이 이 아이를 지켜주었다고 생각하며 부모를 잃은 어린 조카를 데리고 자신의 암자로 갔다. 이후 홀로 어린 조카를 키우며 지내던 중 어린 조카는 이제 5살이 되었다.
그리고 어느 날 스님이 암자를 둘러보니 양식이 다 떨어져 어쩔 수 없이 산 아랫마을로 양식을 구하러 가게 되었다. 이에 혼자 남겨질 조카에게 "혼자 있는 것이 무섭거든 관세음보살님의 이름을 외우며 지내거라."하고 일러주고는 길을 떠났다. 그런데 스님이 산을 내려가서 양식을 구할 무렵 설악산에 엄청난 폭설이 내려서 도저히 암자로 돌아갈 수 없었다. 결국 봄이 되어서 눈이 다 녹은 뒤에야 서둘러 암자로 올라갔는데, 놀랍게도 조카는 멀쩡하게 살아있었다. 어찌 된 연유인지 까닭을 물으니 조카가 말하길 관세음보살이 때마다 찾아와 보살펴 주었다는 것. 스님은 관세음보살의 신력(神力)에 감동해 암자의 이름을 오세암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아래의 동화로 유명해지기 전만 해도 실제로 길이 험해 가기 힘든 암자였다. 우학 스님의 수필 《저거는 맨날 고기 묵고》를 보면 처음에 오세암을 찾아갈 때 너무 힘들어서 도착했을 때는 감격해서 눈물이 났다고 한다. 하지만 나중에 오세암이 유명해지고 찾아가니 좁고 험한 산길은 다니기 좋게 다 정리해 놓고, 암자 주변도 자갈을 깔아 놓거나 시멘트로 정리를 다 해 놓은 탓에 처음에 갔을 때의 감격을 느낄 수 없었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