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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사 신공 행장(觀察使申公行狀)
공의 휘는 익량(翊亮), 자는 군보(君輔), 호는 상봉(象峰)이다. 신씨(申氏)는 평산(平山)에서 나왔다. 시조 장절공(壯節公) 숭겸(崇謙)은 고려의 충신이었다. 서호산인(西湖散人) 효(曉)는 우리 태종조에 정언이 되었으나 벼슬하지 않았다. 3대를 내려와 영(瑛)은 참찬을 지냈고 시호는 이간(夷簡)이며 기묘명현(己卯名賢)이다. 이분이 개성 도사(開城都事) 승서(承緖)와 영숭전 참봉(永崇殿參奉) 광서(光緖)를 낳았다.
공의 부친은 휘가 감(鑑)이며 도사공의 아들인데 출계하여 계부의 후사가 되었으며 형조 참판을 지냈다. 그 형님 흠(欽)이 바로 정승을 지낸 상촌(象村) 문정공(文貞公)이다. 우암(尤菴 송시열)이 공의 묘지명에 “정승이 되리라는 기대는 실로 문정공과 난형난제였다.”라고 하였다. 참판공은 평양 조씨(平壤趙氏)와 혼인하였으니 도승지 인후(仁後)의 딸이다. 만력(萬曆) 경인년(1590, 선조23)에 공을 낳았다.
태어나면서부터 영특하여 말을 할 줄 알게 되자 곧 글자를 알았다. 한번은 밤에 아이들과 놀다가 수풀 사이에서 도깨비불이 켜졌다 꺼졌다 하는 것을 보았는데 얼마 후 가까이 다가왔다. 아이들은 놀라 달아났으나 공은 홀로 태연히 놀았다. 참판공이 사방으로 벼슬하러 다니자 공은 9세의 나이로 따라갔다.
당시 병란이 한창이었으나 의젓하게 똑바로 앉아 책을 읽으니 보는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2년 뒤, 참판공이 평사로 구성(龜城)에 갔다가 등창을 앓자 공은 눈물을 흘리며 의원을 모셔왔다. 음식과 대소변에 관한 일도 모두 묵묵히 알고서 곁에서 간호하니 병이 마침내 나았다.
참판공의 상을 당하자 공은 약관의 나이로 부친의 일을 계승하여 제사를 지내고 손님을 접대하니, 내외의 가솔이 수백 명이나 되었는데 모두의 환심을 얻었다. 문정공이 감탄하며,
“이 아이의 직분은 나도 하기 어렵다.”
하였다.
임자년(1612, 광해군4)에 진사가 되었다. 그 뒤로 광해군이 날로 혼란해지자 공은 과거공부를 그만두고 원주(原州) 강가에서 농사를 짓고 십 년 동안 독서하며 백가(百家)를 꿰뚫었다. 인조가 반정하자 의금부 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벼슬하지 않았다.
당시 문정공이 인사를 맡아 청론(淸論)이 그의 집에서 나왔으며, 공은 또 일찍부터 정승이 되리라는 기대를 받았으나 물러나 지조를 지키며 남과 교유하지 않았다. 익위사 시직에 임명되고 위솔로 승진하였다. 정묘년(1627, 인조5) 난리가 일어나자 동궁을 호종하여 전주(全州)로 갔다. 얼마 후 거창 현감(居昌縣監)이 되었는데 정사가 잘 다스려지고 송사가 공평하기가 온 도의 으뜸이었기에 표리(表裏)를 하사받았다.
신미년(1631) 참판공이 세상을 떠났다. 참판공이 병들었을 때는 넓적다리살을 베었고, 상을 치를 적에는 시묘살이하며 3년상을 마쳤다. 공조 좌랑을 거쳐 태인 현감(泰仁縣監)이 되었다. 태인현은 평소 일이 많은 곳으로 일컬어졌으나 공은 담소하며 판결하고 하루종일 책을 보았다.
을해년(1635),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듬해 오랑캐와 틈이 벌어지자 청음(淸陰 김상헌) 문정(文正) 선생이 공이 세상일에 통달하였다는 이유로 천거하여 자급을 뛰어 넘어 진주 목사(晉州牧使)에 임명되었다. 정축년(1637), 특별히 본도 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말하는 자가 승진이 너무 빠르다고 하여 체직되었다. 여름, 또 충청도 관찰사가 되었다.
당시 병란이 끝나지 않아 조정에서 어진 이를 찾기에 급급하여 바야흐로 점차 크게 쓰이려 하였다. 그러나 공은 나라의 수치를 애통해하여 당세에 뜻이 없어 굳게 사직하여 체직되고 산음(山陰)의 깊은 골짜기에 우거하였다. 청음, 동계(桐溪 정온) 두 선생이 남한산성에서 남쪽으로 돌아오자 공은 늘상 말 한 필을 타고 가서 함께 강개한 마음으로 팔뚝을 흔들며 눈물을 흘렸다. 청주 목사(淸州牧使)에 임명되었다가 얼마 후 해직되어 돌아왔다.
공의 아우 익륭(翊隆)과 조카 만(曼) 역시 고상한 선비로 충주(忠州)의 목계(木溪)에 함께 살았는데, 또 청주(淸州) 청천(晴川)의 산수를 좋아하여 그곳으로 이사하였다. 그 뒤 누차 승지, 호조와 예조의 참의, 외직으로는 의주(義州), 여주(驪州), 해주(海州)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오직 한 번 승지로 사은숙배하고 한 번 전주부(全州府)에 부임하였다. 승지가 되었을 때 오랑캐 사신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병을 핑계로 속히 돌아갔다. 전주에서 옥천(沃川)으로 거처를 옮기고 또 회인(懷仁) 강가로 옮겼다.
갑신년(1644), 황도(皇都 북경)가 3월에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아우, 조카와 붙들고 통곡하였다. 한번은,
“《주역》에 ‘천지가 막히면 어진 이가 숨는다.’라고 하였으니 지금이 어찌 군자가 출사할 때이겠는가.”
라고 외었다. 또 승지, 밀양 부사(密陽府使)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병조 참의에 임명되자 한 번 사은하고 안성(安城) 촌가로 돌아왔다.
정해년(1647), 또 승지, 남원 부사(南原府使)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조정이 내쳐서 덕원 부사(德源府使)에 보임하였다. 덕원부는 철령(鐵嶺) 너머에 있는데 공은 억지로 부임하였다. 오래지 않아 누추한 풍속이 거의 변하였다.
기축년(1649), 관직을 그만두고 돌아가니 아전과 백성이 통곡하며 전송하였다. 5월, 인조가 승하하자 공이 한양으로 들어가 임곡(臨哭)하였다. 청음을 비롯한 현인들이 한창 조정에 나와 새로운 교화가 밝아지고 조야가 경도되었다. 여러 공들이 다투어 공을 붙잡으려 하였으나 공은 오래 있으려 하지 않았다. 흉도들이 몰래 오랑캐와 내통하여 사림에게 화를 끼치려 하여 청나라 사신이 예닐곱 차례 국경에 왔다. 현인들이 달아나면서 비로소 공이 기미를 보았다고 탄복하였다.
경인년(1650, 효종 1), 다시 승지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5월 11일, 춘천(春川) 삼내촌(三內村)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61세였다. 공은 기상이 우뚝하고 침착하여 말과 웃음이 적었다. 평소에는 굳세어 범할 수 없는 기색이 있었으나 어버이 곁에 있을 적에는 뼈가 없는 것처럼 부드러웠으며 삼가 부지런히 모셨다.
일찍 모친을 잃고서 이야기가 미치면 반드시 눈물을 흘렸다. 골육의 질병과 생사에 각기 그 정을 다하니, 사람들이 간혹 유곤(庾衮)에 비유하였다. 관혼상제는 모두《주자가례(朱子家禮)》를 따랐으며, 매일 새벽이면 가묘에 알현하고 정침으로 물러가 앉아 《소학(小學)》의
좋은 말과 훌륭한 행실을 읽고 자제들에게 그 앞에서 강론하게 하였다.
또 부녀자들에게 날마다《여훈(女訓)》을 외게 하였으며, 며느리가 처음 오면 반드시《소학》과 우리나라 열녀의 사적을 손수 써서 주었다. 진기하고 사치스러운 물건은 모두 배척하여 멀리하였다. 자제들은 감히 편한 차림으로 뵙지 못했으며, 그 집에 들어가는 사람은 마치 조정처럼 엄숙해졌다.
젊어서부터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았고 주량이 매우 컸으나 어지러운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다. 평생 명성을 겁쟁이처럼 두려워하여 특이한 행동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불러도 오지 않고 쫓아도 가지 않아 빼앗을 수 없는 확고한 지조가 있었다. 옷은 몸을 가릴 정도였고 음식은 배를 채울 정도였으며 집안이 쓸쓸하여 비바람도 막지 못하였으나 태연히 지냈다.
세상의 부귀와 빈천, 영욕과 이해는 그의 마음을 흔들기 부족하였다. 오직 나라가 위태롭고 정사가 잘못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걱정하고 한탄하느라 거의 먹고 자는 것도 잊었다. 다스림의 도를 논할 적에는 옛것에 구애되지 않고 속습에 빠지지도 않았으며 모두 질서있게 이치에 맞았으나 끝내 하나도 시행하지 못하였다.
몇 고을에서 나타난 것으로 보자면 위엄과 은혜를 나란히 시행하고 문교를 먼저하여, 그의 비석을 지나가는 영남 사람이 종종 눈물을 흘렸다. 청음과 막역지교(莫逆之交)를 맺었는데 청음이 당시에 정승이 될 만한 사람 셋을 논한 적이 있었는데 공이 그중 하나였다고 한다.
공은 남명(南溟) 조식(曺植)의 “만고의 천왕봉은 하늘이 울어도 울리지 않네.〔萬古天王峰, 天鳴猶不鳴〕”라는 구절을 즐겨 읊고 무릎을 치며 감탄하였다. 창강(滄江) 조속(趙涑)이 공의 자를 부르며,
“아무개와 이야기하면 산악이 내리누르는 것 같다.”
하였으니, 그 기상을 알 만하다. 또 감식안이 뛰어나 여관에서 우암 선생을 한 번 보고 탄식하기를,
“이 사람은 선비의 종주이다. 그러나 훗날의 사화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조경(趙絅)은 젊은 시절 광해군의 조정에서 절개를 세워 당시 명망이 있었는데, 공만은 만년의 절개가 걱정스럽다고 하였고, 훗날 과연 그의 말대로 되었다.
부인 이씨(李氏)는 장령 진빈(軫賓)의 딸이다. 3남을 두었으니 호(暠), 담(曇), 환(㬊)이다. 계배(繼配) 고령 박씨(高靈朴氏)는 부사 효성(孝誠)의 딸이다. 딸 하나를 두었으니 나성위(羅星緯)에게 시집갔다. 측실 소생 2남은 욱(勖)과 진사 적(逷)이고 딸 하나는 생원 윤두만(尹斗晩)의 처가 되었다.
용화(用華), 관화(觀華), 현감 명화(鳴華)는 장남 소생이고, 태화(泰華)와 만(曼)의 후사로 출계한 일화(日華), 제화(濟華)는 3남 소생이다. 적의 아들은 대화(戴華), 위화(緯華), 우화(遇華)이다. 증손은 서(恕), 원(愿), 각(愨), 희(憙), 헌(𨏥), 지(志)이다. 서는 진사가 되었는데 실로 공의 제사를 주관하였다. 공의 묘소는 여주(驪州) 두둔리(斗屯里) 아무 방향의 언덕에 있고 박 부인을 부장하였다. 이 부인의 묘소는 김포(金浦)에 있다.
내가 삼가 공의 행실을 살펴보고 논하건대, 공은 문벌이 높고 도량이 넓으며 아울러 문무의 재주까지 있었으니 곧 정승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는데, 훌쩍 벗어나 적막한 강가에서 자유롭게 지냈다. 유랑하며 곤경을 겪다가 생애를 마쳤으나 원망하거나 후회하지 않았으니, 작은 한 몸으로 천지 사이의 큰 법도를 부지하고자 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 마음은 청음, 동계의 마음과 같은데 또 그 자취를 숨겼으니, 그 자취가 기이할수록 그 마음은 더욱 고달프다. 구당(久堂) 박장원(朴長遠)은 그의 처조카로 망년지우(忘年之友)였는데, 공이 한가로이 이야기하다가 탄식하기를,
“나는 늙었고 세상과 맞지 않지만, 그대는 반드시 원대한 경지에 도달할 것인데 장차 어떻게 북쪽 오랑캐를 대할 것인가.”
하였다. 박공이 훗날 원접사가 되어 의주(義州)로 갔다가 공의 말을 생각하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아, 천하에 관디(冠帶) 차림을 한 나라는 오직 우리나라 하나 뿐이다. 그러나 지금의 사대부들은 대부분 오랑캐를 섬기는 기간에 태어나서 늙어 죽으므로 더 이상 원한을 품고 애통함을 참는 뜻이 있는 줄 모르게 된 지 오래이다. 공이 본다면 어떤 사람이라고 여기겠는가.
서가 임종을 앞두고 공의 종증손 유(愈)가 지은 가장(家狀)을 내게 보내 행장을 부탁하였다. 나는 그의 뜻을 슬피 여겨 마침내 뜻과 사업의 대략을 감히 이와 같이 서술한다. 훗날 입언군자(立言君子)가 나온다면 행여 살펴보고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숭정 두 번째 무신년(1728, 영조4) 여름, 삼주(三州) 이재(李縡)가 쓴다.
[주해]
[주01] 관찰사 신공 행장 :
이 글은 신익량(申翊亮)의 행장이다. 신익량의 자는 군보(君輔), 호는 상봉(象峰)이다. 1590년(선조23) 태어나 1650년(효종1) 5월 11일 세상을 떠났다.
[주02] 정승이 …… 난형난제였다 :
《송자대전(宋子大全)》 권165에 실려 있는 〈형조 참판 신공 신도비명(刑曹參判申公神道碑銘)〉의 명(銘)에 보인다.
[주03] 천지가 …… 숨는다 :
《주역》 〈곤괘(坤卦) 문언전(文言傳)〉에 나오는 말이다.
[주04] 유곤(庾衮) :
진(晉)나라 사람으로, 전염병이 돌아 두 형이 죽고 형 하나만 남았는데, 전염될 위험을 무릅쓰고 간호하여 병을 낫게 하였다. 《晉書 卷88 庾袞列傳》
[주05] 만고의 …… 않네〔萬古天王峰, 天鳴猶不鳴〕 :
《남명집(南冥集)》 권1에 실려 있는 〈제덕산계정주(題德山溪亭柱)〉에 나오는 구절이다.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최예심 장유승 권진옥 이승용 (공역) | 20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