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한집 제16권 / 묘지명(墓誌銘)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세자사 문간 이공의 묘지명 서문을 아우르다.[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文簡李公墓誌銘 幷序]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세자사(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 이공(李公)의 묘는 부평부(富平府) 아래 오정(梧亭) 고리(高里)의 언덕에 있다.
공의 휘는 천보(天輔)요, 자는 의숙(宜叔)이며, 그 선조는 연안(延安) 사람이다. 증조 휘 가상(嘉相)은 과거에 급제하였고, 효를 다하여 죽어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에 추증되었다. 조부 휘 중조(重朝)는 예조 판서를 지낸 문숙공(文肅公) 휘 일상(一相)의 아들로, 수찬의 후사가 되었고,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부친 주신(舟臣)은 옥천 군수(沃川郡守)를 지냈는데, 사복시 첨정(司僕寺僉正) 성조(成朝)의 아들로 찬성(贊成)의 후사가 되었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공의 가문은 대대로 모두 문장에 능하였으니 문충공(文忠公) 이정귀(李廷龜)로부터 문정공(文靖公) 이명한(李明漢), 문숙공에 이르기까지 3대를 이어 대제학이 되었다. 공의 모친 광주(光州) 김씨는 문충공(文忠公) 김만기(金萬基)의 딸이며, 문청공(文淸公) 김진규(金鎭圭)의 아우이다. 문청공은 부자가 서로 이어 문병(文柄)을 잡아 명론(名論)으로 알려졌는데, 일찍이 공을 칭찬하여 말하기를 “참으로 영재(英才)로다.” 하였다.
공이 소시(少時)에 월등하게 큰 뜻을 지니고 독서를 좋아하지 않았다가, 장년에 와서야 태도를 바꾸어서 문장을 하였는데 명론이 최고였다. 경대부(卿大夫)들이 공의 풍도를 듣고 그 문에 이른 자가 매우 많았다. 비록 시속의 취향이 다른 선비라도 그 얼굴을 한번 보는 것을 영광으로 삼았다. 그러므로 공은 젊어서 벼슬하지 않을 때부터 이름이 당세에 높았다.
처음에 생원에 합격하여 내시교관(內侍敎官)에 보임되었다. 42세(1739, 영조15)에 을과에 급제하여 시강원 겸설서(侍講院兼說書)에 배수되었다. 이듬해 홍문관에 뽑혀 들어가 정자(正字)가 되었는데 겨우 3개월 있다가 부수찬(副修撰)으로 옮겼다.
또 이듬해 시강원 사서(侍講院司書),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으로 옮겼다가 문학(文學), 이조 정랑(吏曹正郞)이 되었으며 마침내 교리(校理)에 배수되어 동학 한학교수(東學漢學敎授)를 겸하였다가,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에 개임되어 교서관 교리(校書館校理)를 겸하였다.
이듬해(1742, 영조18, 45세) 정월, 겸사서(兼司書)로서 어사(御史)에 충원되어 옥천옥(沃川獄)을 조사하고 들어와서 수찬(修撰), 부교리(副校理), 겸문학(兼文學)이 되었다. 9월에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으로 옮겼다. 12월에 사복시 정(司僕寺正)으로서 필선(弼善)을 겸하였는데, 얼마 후에 뽑혀서 부응교(副應敎)가 되었다.
이듬해 봄에 시강원 보덕(侍講院輔德)으로 옮겼다가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 겸보덕(兼輔德)으로 개임되었다. 이듬해(1744) 세자빈 책봉 때 도청(都廳)으로 수고했다고 하여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로 발탁되었다.
2월에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 참지병조(參知兵曹)로 개임되었고, 9월에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옮겼다. 이듬해 승문원 부제조(承文院副提調)를 겸하였고, 장예원 판결사(掌隷院判决事)를 거쳐 병조ㆍ예조의 참의로 옮겼다.
이듬해(1746, 영조22, 49세) 2월에 황해도 관찰사로 나가서 해주(海州)에 성을 쌓았다. 1년 좀 지나서 임금이 불러 부제학을 삼았으나 성을 축성하는 일 때문에 그대로 관찰사를 하였다. 이듬해 성이 낙성되어 다시 부제학이 되었다.
윤7월에 이조 참의에 제수되었으나 어떤 일에 연루되어 고부 군수(古阜郡守)로 좌천되었는데, 길을 떠나기도 전에 이조 참판에 발탁되어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예문관 제학. 세자 우부빈객(世子右副賓客)을 겸하였다. 이듬해 면하고, 형조 참판을 거쳐 다시 이조로 들어와 참판이 되어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 비변사 유사제조(備邊司有司提調)를 겸하였다.
이듬해 2월에 판병조 지의금부사(判兵曹知義禁府事)로 발탁되었고, 12월에 이조 판서로 옮겼다. 2년 후 다시 판병조(判兵曹)가 되었다가 여름 6월에 의정부 우의정으로 진급하였는데, 5개월 만에 좌의정으로 옮겨 3년이 안 되어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공은 사람됨이 마음이 트이고 소탈하였으며 능히 마음을 비웠고 개과천선(改過遷善)하기에 용감하였다. 정사를 행함은 관대하게 하였고 일을 떠벌이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일을 처리할 때에는 사려가 고원(高遠)하여 남들이 보지 못하는 바를 볼 수 있었다.
일찍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이천기(李天紀) 등 한두 사람은 포의(布衣)로서 큰 계책에 참여하여 도와서 공적을 세웠으나 그 처신은 대신(大臣)들과 같지 않았다.” 하였다가 이윽고 크게 깨닫고서 말하기를, “옥사는 동일한 것인데, 선비의 죽음이 어찌하여 대신의 죽음과 다르겠는가.” 하였다.
그런데 그가 수찬(修撰)이 되었을 때에는 상소하기를, “그 한두 사람이 만일 역모에 들었다면 그 옥사는 오히려 무고하지 않은 바가 있었다.” 하자 어떤 이가 공을 꾸짖으며 말하기를, “의론이 어찌하여 갑자기 변하는가?”하니 공이 답하여 말하기를, “나는 그 옳은 것을 구할 따름이다.”하였다.
처음에 조정에서 목호룡(睦虎龍)의 무고서(誣告書)를 불태웠으나 국사(國史)가 아직 개수(改修)되지 않았다. 공은 헌납(獻納)으로서 상소하기를, “대의를 한 시대에 펼치고도 사책(史冊) 속에 실리지 않는다면 후세에 어디서 상고하겠습니까. 자고로 실록(實錄)을 혹은 그 오류를 바로잡기도 하고 혹은 그 빠진 것을 보충하기도 하는 것은 실록을 중하게 하는 것입니다.
마땅히 관청을 여시어 따로 1부를 만들어 석실(石室)에 보관하소서.”하였다. 말이 비록 실행되지는 못했으나 조정에서는 모두 그 식견을 따랐다. 공이 일찍이 말하기를, “과거에는 국시(國是)가 정해지지 않았으니, 사대부들이 시골에 은거하면서 벼슬을 하지 않으려고 한 것은 의리상 당연한 것이다.
지금은 국시(國是)가 이미 위에서 정해져서 사대부가 모두 벼슬을 할 수는 있으나, 인재등용의 길이 넓지 않으니 하나의 편당을 키우기에 알맞다.”하였다. 이조에 들어가 참의가 되자 소(疏)를 갖추어 그것을 논하였다. 혹자가 말하기를, “인재등용의 길을 넓히면 소인들이 뒤섞여 진출할 것인데 어찌하겠습니까?”하였다.
공이 근심스럽게 말하기를, “사람에게 직무를 맡겼으면 그 악이 드러난 후에야 금고(禁錮)해야 한다. 어찌 아직 드러나지도 않은 악을 가지고 먼저 그 사람을 금고할 수 있겠는가. 군자의 마음은 그렇지가 않다.”하였다. 그 후에 공이 의망(擬望)으로 천거한 자들이 이광좌(李光佐)ㆍ조태억(趙泰億)을 위하여 국론을 마음대로 중단시키자, 이에 그들을 금고하고 한 명도 시종(侍從)의 직에 의망하지 않았다.
조현명(趙顯命)이 균역(均役)을 건의하자 상이 공에게 명하여, 3개월 동안 비변사(備邊司)에서 숙직하며 세밀한 기획을 짜게 하고 균세사(均稅使)를 파견하여 강과 바다의 어염(魚鹽)의 이익에 세금을 매기도록 하였다. 공이 상서(上書)하기를, “자고로 이익을 취한 것이 어찌 일찍이 어염(魚鹽)으로부터 비롯되지 않았겠습니까. 신이 염려하건대, 10여 년을 넘지 않아 재물을 거두어들이는 신하가 좌우에서 함께 나아가 국가가 그 병폐를 받게 될 것입니다.”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조정에서 다시 균역의 일을 공에게 위임하지 않았다. 공은 정승이 되어 대체(大體)를 지키기에 힘썼으며 일찍이 호오(好惡)와 은원(恩怨)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 젊었을 때 고 대제학 조공(趙公) 관빈(觀彬)과 서로 사이가 좋지 못하였다.
조공이 화경 숙빈(和敬淑嬪)의 죽책(竹冊)에 관한 일을 논했을 때, 상이 매우 노하여 친국을 하려고 대신들을 함인정(涵仁亭)으로 불러 보았다. 상이 공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경이 나를 위하여 죽책문을 지어라.”하였다. 공이, “관빈이 지나치게 근신(謹愼)을 한 것이지 죽책을 불가하다고 한 것은 아닙니다. 지금 전하께서 죽책문을 신에게 명하시니 신이 어찌 감히 사양하겠습니까.”하니 상의 마음이 조금 풀어졌다.
공이 또 말하기를, “관빈은 죄가 없는데다 또한 연로하므로 형을 시행하지 말아야 합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죽책의 일이 급하니 경은 물러가는 것이 좋겠다.”하였다. 공이 이르기를, “전하께서 관빈의 형을 면해 주시지 않으면 신은 감히 물러갈 수 없습니다.”하자 상이 이르기를, “내가 마땅히 경을 위해 형을 시행하지 않을 것이니, 어찌 경을 속이겠는가.”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조공은 화를 면하였다. 그러나 공을 비방하는 자들은 도리어 공이 임금의 노여움을 격하게 했다고 하였으나, 공이 크게 웃으며 끝내 스스로 변명하지 않았다. 이전에 고대성(高大成)이 외종숙(外從叔)의 딸을 공의 첩으로 삼게 하였는데, 공의 여종이 대성의 처였다. 후에 고대성이 제기(祭器)를 훔친 죄에 걸려 포도청에서 죽었다.
얼마 되지 않아 지평 조종부(趙宗溥)가 공이 강씨(姜氏)의 아들을 몰래 죽이고 그 처를 빼앗았다고 탄핵하였다. 상이 형조에 명하여 그 일을 조사하게 하니 형조에서 계(啓)를 올려 말하기를, “아무개 첩은 사실은 고대성의 처가 아니며, 고대성도 또한 강씨가 아닙니다.” 하였다.
이때 수찬 조영순(趙榮順)이 공을 더욱 힘써 비난하였는데 고대성의 일을 흑막이 있다고 여겨, 공의 사촌형 이정보(李鼎輔)와 사촌 아우 이익보(李益輔)를 함께 탄핵하였다. 공이 소를 올려 거듭 조사하기를 청하자 상이 유시하시기를, “이 옥사는 강씨가 아니라 고씨이며, 남편이 아니라 친족인데 무엇 때문에 심문하겠는가. 비록 그렇기는 하나 경의 마음을 이해할 만하다.” 하였다. 이에 형조에 명하여 거듭 조사하게 하여 그 일이 이미 밝혀지자, 공이 상소하여 재상직을 면하기를 청하였으나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이듬해 상이 도승지를 보내어 특별히 그를 불렀다. 공이 들어가 알현하고 면직을 더욱 간절히 청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그 후에 빈객이 조영순이 공을 비난했을 때의 일을 말하자 공이 웃으며, “나는 이미 그것을 잊었다. 그러나 잘 다스려진 조정에서 어찌 조수찬을 금고하여 버려두어서야 되겠는가.” 하고서 대궐에 나아가 조영순을 기용하기를 청하였으니, 듣는 이들이 감탄하며 비로소 공이 대신(大臣)의 국량을 지닌 것을 알았다.
공이 어전(御前)에서 명론(名論)을 함에 있어서 아첨하지 않고 강직하게 스스로 절조를 지켰으며, 비록 죄를 얻을지라도 끝내 굴복하지 않았다. 오찬(吳瓚)이 서(書)를 올려 국무(國誣)를 논하니 상이 의릉(懿陵)에 가서 머리를 조아리며 울며 말하기를, “나의 무함을 씻지 못한다면 돌아가지 않겠다.” 하였다. 공이 눈물을 흘리며 도성으로 돌아가기를 굳이 청하다가 창졸간에 말을 실수하였으나 스스로 알지 못하였다.
상이 돌아온 뒤 공이 마침내 스스로 허물을 밝혔다. 상이 노하여 말하기를, “대신은 스스로 허물을 밝혔으나 조정 안에는 반드시 비방하는 자가 있을 것이다.” 하고 곧 하교하여 비방자를 색출하게 하였다. 혹자가 말하기를, “공이 직간하지 않은 것은 임금을 섬기는 무은(無隱)의 의리가 아닙니다.”하였다.
공이 정색하며 말하기를, “내가 대신이 되어서 어찌 비방자를 고할 수 있는가.”하고서 끝내 고하지 않으니 상이 할 수 없이 공의 직위를 파하였다. 처음에 상이 육상궁(毓祥宮)을 추존하여 소령원(昭寧園)에 봉하니 의론하는 자가 말하기를, “예에 마땅히 묘(廟)에 고해야 합니다.”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보위를 이은 왕이 사친추존(私親追尊)의 예를 태묘(太廟)에 고하는 것은 내가 듣지 못했다.”하고서 마침내 상청(上請)하지 않았다. 상이 크게 화를 내어 이르기를, “나라에 전례(典禮)가 있는데도 대신이 태묘에 고할 것을 청하지 않으니, 이는 그 마음이 그 일을 거스르고자 한 것이다.” 하고서 공의 직위를 파하였다.
처음에 상이 어떤 일로 오래도록 마음이 편치 않았다. 언젠가 효장세자묘(孝章世子廟)에 갔는데 공이 알현하기를 청했으나 노하여 허락하지 않고, 중귀인(中貴人)을 경계하여 궁문을 닫고 신하들을 들이지 말도록 하였다. 공이 문을 밀치고 곧바로 궁의 뜰로 들어가자 중귀인이 공을 막으며 말하기를, “신하들을 들이지 말라는 말씀이 계셨으니 비록 정승이라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하였다.
공이 눈을 부릅뜨고 중귀인을 꾸짖으며 말하기를, “대신이 알현을 하려는데 중귀인이 어찌 막을 수 있는가.”하였다. 상이 휘장 안에서 그것을 바라보고는 하교하기를, “대신이 임금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궁문에 들어오니 매우 불경하다.”하였다.
공이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자고로 임금이 환관을 시켜서 궁문을 깊이 닫아 대신을 굳이 막고도 망하지 않은 나라는 없었습니다.”하니 상이 크게 노하여 즉시 공의 직위를 파하였다. 얼마 있다가 중지하고 근신(近臣)을 보내어 간곡히 부르며 하교하기를, “내가 장차 몸소 가겠노라.” 하였다.
그런데 공이 끝내 나아가지 않으니 삭탈관직하고 축출하기를 명하였다가, 한 달도 되지 않아 문득 다시 좌의정을 배수하였다. 처음에 김상도(金相度)ㆍ이언형(李彥衡)이 언사(言事)로 인하여 벌을 받게 되자 공이 차자(箚刺)를 올리기를, “백성들은 아래에서 굶주리고, 재앙 이변은 위에서 자주 나타납니다.
그런데 오늘 한 사람의 언자(言者)를 벌주고 내일 한 사람의 언자를 벌주면 며칠 사이에 벌을 받은 언자들이 서로 이어질 것이니, 전하께서 재난을 만나 두려워하는 도리가 전혀 아닙니다.”하였다. 상이 노하여 이르기를, “대신이 차자(箚子)를 올려 당인(黨人)을 구하기를 논하여 스스로 관직을 벗으려하니, 고굉(股肱)이 됨이 어디에 있는가.”하였다.
이에 공의 직위를 파하고, 하교하여 삭탈관직하고 내쫒게 하였다. 7일이 지나서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에 임명하였고, 몇 달 뒤에는 다시 영의정이 되었으나 굳이 사양하여 나아가지 않았다. 마침 정성왕비(貞聖王妃) 서씨(徐氏)와 인원왕비(仁元王妃) 김씨(金氏)가 이어서 돌아가시니 공이 산릉 총호사(山陵總護使)가 되어 산릉에 나아갔으나 병이 위독하여 마침내 그만두었다.
이듬해 8월에 상이 심사가 불편하니 조정과 민간이 근심하며 두려워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공이 말하기를, “내가 조정에 나가지 않으면 조정과 민간의 정서를 안정시킬 수가 없다.” 하고 즉시 병든 몸을 끌고 편전으로 들어가 알현하니, 상이 그 병을 딱하게 여겨 중귀인에게 명하여 부축하여 전(殿)에 오르게 했다.
공이 눈물을 흘리며 이르기를, “사직 존망의 기틀은 민심에 있으니, 민심이 한번 흩어지면 사직은 비록 망하지 않으려 해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심기가 언짢으신지 날이 오래되어 민심이 어수선하니, 이와 같고도 사직이 망하지 않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역적 집안의 친속들 중에 국가를 원망하는 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 그들이 난(亂)을 선동하지 않을 줄을 어찌 알겠습니까?”하였다. 상이 더욱 불쾌해져서 이에 하교하여 공의 직위를 파하도록 하였다. 얼마 안 되어 판중추부(判中樞府)로 불렀으며 이듬해 다시 영의정으로 삼았다.
상이 이미 편안하게 되자 유사(有司)가 대면을 청하고 고사(故事)를 인용하여 계비(繼妃) 책봉을 청하였다. 공은 병으로 유사와 함께 전(殿)에 오르지 못하여 마침내 죄를 얻어 파직되었다. 공이 물러나서는 강가에 육화정(六化亭)을 짓고 빈객들과 더불어 소요자적하였다.
얼마 안 되어 상이 불러서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를 제수하였다. 이듬해 공의 병이 더욱 위독해지니, 상이 태의(太醫)를 보내어 가서 보게 하고 약을 내리고 안부를 물었다. 올해 신사년(1761) 정월 을사일에 집에서 돌아가셨으니, 누린 햇수가 64년이었다. 장례는 3월 갑자일에 치렀다.
공이 곧 돌아가시려 할 때 집안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죽음에 유감은 없으나 오직 대궐을 영원히 떠나게 되니 이것이 남은 한이다.”하였다. 측근에게 명하여 유소(遺疏)를 초하게 하여 임금을 경계하였는데, 개인적인 일은 언급하지 않았다.
공이 돌아가시자 상이 3일간 조회를 파하였고 조제(吊祭)를 내렸으며, 시호를 문간(文簡)이라 하였다. 뒤를 이은 아들 문원(文源)이 유소를 올리니, 상이 비통해하며 비답을 내리고 근신을 보내어 빈전(殯前)에서 읽도록 했다. 공은 청수하고 여위었으며 풍모가 고고하였다.
담론을 잘하였고, 사람들과 웃고 즐거워하며, 꾸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정신과 기운이 시원하게 트였고 뜻이 광대하였다. 다툴 일이 있을 때면 수염을 떨치며 꼿꼿하게 꿇어앉았는데 그 눈이 번쩍거려서 보는 자가 그 때문에 얼굴빛을 바꾸었다.
몸 다스림이 검약하여 집안사람이 공의 수의(壽衣)를 짓기를 청하니 공이 제지하며 이르기를, “내가 모친의 초상을 치를 때 우리 집이 가난하여 수의에 내 마음을 다하지 못했는데, 내가 어찌 차마 미리 수의를 짓겠는가.” 하였다. 공이 돌아가시자 염습할 수의 한 벌도 없어서 남에게 빌린 후에야 염습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 문장은 기위(奇偉)하고 질탕하였는데 논변(論辨)에 장점이 있었으며, 시가 더욱이 뛰어나 심원한 여운이 있었다. 삼연(三淵) 선생 김공(金公) 창흡(昌翕)이 일찍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이모의 시는 지금 사람들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하였다. 공은 자호를 진암(晉菴)이라 하였고, 문집 10권이 가문에 보관되어 있다.
배필인 정경부인 은진(恩津) 송씨는 순흥 부사(順興府使) 송상유(宋相維)의 딸이며, 예조 판서 송규렴(宋奎濂)의 손녀이다. 아들이 없어 공의 친족 아우 진산 군수(珍山郡守) 이국보(李國輔)의 아들을 그 후사로 삼았으니, 바로 이문원(李文源)이다. 딸 3명이 있으니 장녀는 조준(趙㻐)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오재순(吳載純)에게, 막내딸은 서유방(徐有防)에게 시집갔다. 서자 1명은 어리다.
공이 정승으로 있을 때 청류(淸流)를 진출시키기에 힘썼으니, 이태중(李台重)ㆍ남유용(南有容)ㆍ이존중(李存中)이 모두 공이 진출시킨 사람들이다. 늙어서는 선(善)을 즐기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남의 한 재능을 보면 즐거워하는 마음이 얼굴에 나타났으며 오직 남들이 그것을 알지 못할까 걱정하였다.
한가로이 거할 때는 명론(名論)이 더욱 높아 당세의 어진 사대부들의 진퇴영욕을 가지고 근심과 즐거움으로 삼았으니, 아마도 공의 뜻이 왕실을 잊지 않아서 장차 시행할 바가 있어서였던 것이리라. 슬프도다. 명은 다음과 같다.
넓고 크신 이공이시여 / 李公休休
마음은 소탈하고 밖으로는 너그러워 / 疏中坦外
트이지 않은 곳이 없으시니 / 無方不廓
도량이 매우 크시도다 / 而度孔大
위대한 문장이 있었으니 / 有偉文章
무슨 앎이 그리도 통달하셨는지 / 何知之達
의로운 소문 듣고 곧 따라함은 / 聞義輒服
하루를 넘긴 적이 없었도다 / 曾不踰日
공이 조정에 서면 / 公立王庭
높은 벼슬 잊었고 / 則忘軒冕
새장 속의 학과 같이 / 如鶴在樊
그 사려 심원하였도다 / 其思甚遠
공이 정승 자리 계실 때 / 公居相位
청렴하고 결백하셨으며 / 旣廉且潔
시원스레 스스로 비워서 / 曠然自虗
한 물건에도 막히지 않았도다 / 不滯一物
모두들 사소하게 따질 때에도 / 衆皆察察
홀로 그 절조 대단하셨고 / 獨誕其節
모두들 알랑거릴 때에도 / 衆皆睮睮
홀로 그 홀을 바로잡았도다 / 獨正其笏
임금께서 하신 말씀 “원보는 / 王曰元輔
내가 그를 늦게 알았으나 / 予知之晩
사람들이 온갖 비난 할지라도 / 人雖百訿
은혜 외려 줄지 않았도다 / 恩猶不損
나의 수레로서 / 以予轛軫
나의 갈길 함께하여 / 與予輪軌
종으로 횡으로 / 衡之從之
원보를 의지하였도다” / 元輔是倚
공이 말하기를 “밝으신 임금께서 / 公曰明主
신을 곡진하게 보전케 하시어 / 曲全臣身
화를 입지 않았으니 / 得不離尤
명군의 어짊이옵니다” / 明主之仁
영화와 녹은 복이 아니요 / 榮祿匪福
훌륭한 종말만이 복이로다 / 令終惟福
지금 공의 목숨이 다하였으니 / 今公之終
영화와 복록도 다하였도다 / 終于榮祿
위엄찬 그 기운이여 / 卬卬其氣
열렬한 그 정신이여 / 烈烈其神
명을 써서 밝히어 / 銘以晰之
무궁토록 전하노라 / 告于無垠
<끝>
[註解]
[주01] 대광보국숭록대부 …… 이공 : 이천보(李天輔, 1698~1761)로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의숙(宜叔), 호는 진암(晉菴), 시호는 문
간(文簡)이다. 생원시에 합격했고, 1739년 알성 문과에 을과로 급제했다. 이조와 병조 판서를 거쳐 1752년 우의정이 되고 같은 해
좌의정을 거쳐 1754년 영의정에 승진된 후 돈녕부영사(敦寧府領事)로 전임했다. 1761년 장헌세자(莊獻世子)의 평양 원유사건
(遠遊事件)에 책임을 지고 자결했다. 문집에 《진암집》이 있다.
[주02] 이공(李公)의 …… 있다 : 본래 이곳에 있었으나, 1975년 이천보가 태어난 생가가 있는 경기도 가평군 상면 태봉리 반계동으로 이
장하였다.
[주03] 선조는 연안(延安) 사람이다 : 연안 이씨의 시조는 이무(李茂)이다. 이무는 당나라 출신으로 당나라 고종(高宗)때 중랑장(中郞將)
을 지내다가 660년(태종무열왕7)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의 대총관(大摠管) 소정방(蘇定方)의 부장(副將)이 되어 신라에 들어
와 백제를 평정하는데 공을 세웠다.
이후 신라에 귀화하여 연안후(延安侯)에 봉해졌고, 식읍 1천호를 받아 살게 되었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시조(始祖)로 받들고 있으
며 식읍으로 하사받은 땅이 지금의 연안 지방이었다.
[주04] 가상(嘉相) : 이가상(李嘉相, 1615~1637)으로, 자는 회경(會卿), 호는 빙헌(氷軒)이다. 조선 중기의 효자로 손꼽힌다. 이조 판서
이명한(李明漢)의 아들로 1630년(인조8)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636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어머니
를 찾아 적진 속을 헤매다가 여섯 번이나 적에게 잡혔는데 끝내 살해되었다.
[주05] 일상(一相) : 이일상(李一相, 1612~1666)으로, 자는 함경(咸卿), 호는 청호(靑湖)이다. 1628년(인조6), 17세로 알성 문과에 급
제한 뒤 학문에 전념했다. 병자호란 이듬해 척화죄인(斥和罪人)으로 탄핵을 받아 귀양 갔다.
효종이 즉위하자 우승지에 발탁되었고, 1654년(효종5)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와서 청의 실정을 보고하여 효종의 북벌계획 수립
에 도움을 주었다. 《선조수정실록》의 편찬에 참여했으며, 대제학을 지냈고 예조 판서로 죽은 뒤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주06] 문충공(文忠公) 이정귀(李廷龜) : 1564~1635.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성징(聖徵), 호는 월사(月沙)ㆍ보만당(保晩堂)ㆍ응암
(凝菴),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1590년 증광 문과에 급제했다. 임진왜란 때 행재소(行在所)에 가서 설서(說書)가 되었고, 1598
년 명나라 병부주사 정응태(丁應泰)가 조선에서 왜병을 끌어들여 중국을 치려 한다고 무고한 사건이 일어나자 진주부사(陳奏副使)
로 명나라에 가서 정응태를 파직시켰다.
이괄의 난 때 왕을 공주로 호종하고 정묘호란 때 병조 판서로 왕을 호종하여 강화에 피난하였으며 화의에 반대했다. 글씨에 뛰어났
고 신흠(申欽)ㆍ장유(張維)ㆍ이식(李植)과 함께 조선 중기의 4대 문장가로 일컬어진다. 문집에 《월사집》이 있다.
[주07] 문정공(文靖公) 이명한(李明漢) : 1595~1645.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천장(天章), 호는 백주(白洲),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1616년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했다.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났을 때 참여하지 않았다 하여 파면되었다. 이괄의 난 때 왕을 공주
(公州)로 호종하여 8도에 보내는 교서를 지었다. 1643년 척화파(斥和派)로 심양(瀋陽)에 억류되었다. 성리학에 밝았고, 시와 글
씨에도 뛰어났다. 문집 《백주집》이 있다.
[주-D008] 공의 …… 되었다 : 3대가 이어서 모두 양관 대제학을 지냄으로써 조선 왕조 최초로 3대 문형을 배출하였다.
[주09] 김만기(金萬基) : 1633~1687. 본관은 광산, 자는 영숙(永淑), 호는 서석(瑞石)ㆍ정관재(靜觀齋),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송시
열의 문인으로 1652년 사마시, 이듬해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했다. 1671년 딸이 세자빈이 되고, 1674년 숙종이 즉위하자 국구
(國舅)로서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총융사(摠戎使)를 겸관해 병권을 장악했고 김수항(金壽恒)의 천거로 대제학이 되었다. 1680년 경신대출척 때 공을 세워 공신에 책
록되었다. 아들 김진규(金鎭圭), 손자 김양택(金陽澤) 3대가 문형을 맡았다. 문집에 《서석집》이 있다.
[주10] 김진규(金鎭圭) : 1658~1716. 본관은 광산, 자는 달보(達甫), 호는 죽천(竹泉), 시호는 문청(文淸)으로 송시열(宋時烈)의 문인
이다. 1682년 진사시에 수석으로 합격하고, 1686년 정시 문과에 갑과로 급제했다. 대제학ㆍ예조 판서ㆍ좌참찬 등을 역임하였다.
문장에 뛰어났고 전서와 예서ㆍ산수화ㆍ인물화에 모두 능했다. 거제의 반곡서원(盤谷書院)에 배향되었다. 문집에 《죽천문집》, 편
저서에 《여문집성(儷文集成)》, 글씨에 〈강화충렬사비문(江華忠烈祠碑文)〉ㆍ〈대헌심의겸비문(大憲沈義謙碑文)〉 등이 있다.
[주11] 옥천옥(沃川獄) : 옥천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이천보를 옥천 안핵어사(沃天按覈御史)로 발령하였다.
《英祖實錄 18年 1月 6日》
[주12] 도청(都廳) : 조선 시대에 가례도감(嘉禮都監)ㆍ책례도감(冊禮都監)ㆍ존호도감(尊號都監) 등 국가의 중요한 의례 행사를 위하여
설치하였던 임시 관서의 관직이다.
[주13] 어떤 …… 좌천되었는데 : 1748년(영조24, 51세) 윤7월에 이조 참의로서 당인(黨人)을 천거했다는 이유로 좌천되었다. 《영조실
록》 24년 7월 18일 기사에 의하면, 장령 현광우(玄光宇)를 장기 현감(長鬐縣監)에, 이조 참의 이천보를 고부 군수로 좌천시켰는
데, 현광우가 대직(臺職)으로 들어간 것은 이천보가 추천한 것이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현광우는 동월 13일에 장령에 임명되었
다.
[주14] 이천기(李天紀) : ?~1722. 본관은 전주이며, 김춘택의 처남이다. 1722년(경종2)에 역모죄로 처형되었는데 그 죄목은 다음과 같
다. 숙종 말년에 숙종이 노론의 거두인 좌상 이이명(李頤命)을 불러 세자에게 양위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이명은 김용택(金龍澤)과 이천기 두 사람에게 숙종의 뜻을 전하고 부탁하였다. 이천기 등은 그의 아들과 조카인 이희지(李喜之)
ㆍ이기지(李器之)와 김창집(金昌集)의 손자 김성행(金省行) 등과 모의하여 무사와 술객을 비밀리에 길러 비상사태에 대비하였다.
경종이 즉위하자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민진원이 중심이 되고, 이천기ㆍ김용택. 심상길(沈尙吉). 서덕수(徐德修). 정인중(鄭麟
重) 등 5인과 더불어 연잉군(延礽君 뒤의 영조)을 왕세제로 세우려고 했다는 죄목으로 역모로 처형되었다. 이 일이 임인옥(壬寅獄)
이다. 이천기 등 5인은 1802년(순조2)에 신원되고 관직이 추증되었다.
[주15] 대신(大臣)들 : 신임사화 때 사사된 노론 4대신을 가리킨 것이다. 노론 4대신은 영조 즉위(1724) 후 즉시 관작이 복구되고 과천에
사충서원(四忠書院)을 세워 사액(賜額)하고 함께 배향(配享)했다.
[주16] 목호룡(睦虎龍) : 1684~1724. 지관(地官)으로서 신임사화의 고변자(告變者)이다. 본관은 사천(泗川)이며 서얼 출신으로 어려서
풍수술(風水術)을 배워 지사(地師)가 되었다. 처음에는 노론인 김용택(金龍澤)ㆍ이천기(李天紀) 등과 왕세제(王世弟 영조)를 옹
호했으나, 소론에 가담하게 되었다.
1722년(경종2) 김일경(金一鏡)의 사주를 받고, 경종을 시해하려는 역모에 자신도 가담했다고 고변했다. 이 고변으로 노론 4대신
인 이이명(李頤命)ㆍ김창집(金昌集)ㆍ이건명(李健命)ㆍ조태채(趙泰采) 등이 사형에 처해지고, 관련자 60여 명이 처벌되는 신임
사화가 일어났다.
이 고변의 공으로 부사 공신(扶社功臣) 3등으로 동성군(東城君)에 봉해지고 동지중추부사에 올랐다. 1724년 영조가 즉위한 뒤 노
론의 상소로 신임사화가 무고로 밝혀지고, 김일경과 함께 체포되어 옥중에서 죽었다. 죽은 뒤 당고개에서 효수되었다.
[주17] 헌납(獻納) : 조선 시대 사간원의 정5품 관직으로 간관(諫官)이다.
[주18] 국사(國史)가 …… 상소하기를 : 《경종실록》은 영조 2년(1726)부터 영조 8년(1732)에 걸쳐 편찬되었다. 영조는 탕평책을 써서
《경종실록》의 편찬은 이집ㆍ조문명ㆍ이덕수ㆍ서명균 등 탕평파들이 주도하였다. 이렇게 편찬된 《경종실록》에 대해 이천보가 그
개정을 제기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소론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정조 대에 와서 《경종실록》이 개정되었는데 정조 2년(1778)에 《영조실록》을
편찬할 때 시작되어 정조 5년(1781)에 완료되었다. 《경종실록》 15권 7책이 《경종수정실록》 5권 3책으로 편찬되어 많은 부분이
삭제되었다. 신임사화에 대한 기록도 수정되었다.
[주19] 의망(擬望) : 조선 시대에 관리를 임명할 때 이조와 병조에서 후보자 3명을 추천하는 것을 말한다.
[주20] 이광좌(李光佐) : 1674~1740. 자는 상보(尙輔), 호는 운곡(雲谷)이다. 1694년 별시 문과에 장원급제했다. 소론으로서 사직(司
直)에 재직 중 훗날의 영조인 왕세제(王世弟) 연잉군(延礽君)의 대리청정을 반대하여 경종에게 이를 취소하게 하였다. 신임사화
(辛壬士禍)로 인해 노론이 축출되고 소론이 정권을 잡자 예조 판서가 되었고 1723년 우의정에 올랐다.
1727년 《경종실록》과 《숙종실록》 보유편의 편찬을 맡았다. 영의정으로 있으면서 신임사화를 재론하여, 노론 4대신을 다시 반역
죄인으로 규정하게 했다. 1728년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평정된 뒤 분무 원종공신(奮武原從功臣) 1등에 봉해지고, 이듬해 벼슬에
서 물러났다가 영중추부사로 복직했다.
1730년 탕평책을 추진한 영조의 뜻을 따라 노론 민진원(閔鎭遠)과 제휴하여 노론ㆍ소론의 연립정권을 세우고 당쟁의 폐해를 막기
위해 노력했다. 문집에 《운곡실기(雲谷實記)》가 있다.
[주21] 조태억(趙泰億) : 1675~1728.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대년(大年), 호는 겸재(謙齋) 또는 태록당(胎祿堂)이며, 시호는 문충(文
忠)이다. 1693년 진사가 되고, 1702년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했으며, 1707년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했다.
1709년 통신사(通信使)로 일본에 다녀왔다. 소론으로서 1721년(경종1) 호조 참판으로 있을 때 조태구ㆍ최석항(崔錫恒)ㆍ이광좌
(李光佐) 등과 함께 연잉군(延礽君)의 세제책봉과 대리청정을 반대하여 철회시켰으며, 소론 과격파들과 신임사화를 일으켜 노론을
제거하였다.
영조가 즉위하자 즉위의 반교문(頒敎文)을 지었고, 우의정에 올랐으며 대제학을 겸했다. 그는 소론의 과격파가 주도한 신임사화 이
후 소론이 정권을 잡을 때 이에 참여하여 중용되었으나 온건파에 속했다. 1755년 나주(羅州)의 벽서사건으로 관작이 추탈되었다.
문집에 《겸재집》이 있다.
[주22] 시종(侍從) : 임금을 가까이에서 모시며 국사를 처리하던 홍문관의 관원, 사헌부와 사간원의 대간(臺諫) 등을 가리키는 말이다.
[주23] 조현명(趙顯命) : 1690~1752.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치회(稚晦), 호는 귀록(歸鹿) 또는 녹옹(鹿翁)이며, 시호는 충효(忠孝)
이다. 1713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719년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1728년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종사관으로 공을 세워,
분무 공신(奮武功臣) 3등에 책록되고, 풍원군(豊原君)에 봉해졌다.
1743년 문안사(問安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탕평책(蕩平策)을 지지했으며, 효행으로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문집에 《귀록집》
이 있다. 균역법을 제정할 때 영의정으로서 책임을 맡았다.
[주24] 균역(均役) : 균역법을 말한다. 당시 역(役) 부과 방식의 모순에 따른 농민 경제의 부담을 덜기 위해 영조 26년(1750), 개선에 착수
했고 이듬해에 정식으로 균역청(均役廳)을 설치하여, 종래의 양역(良役) 부담인 군포(軍布)를 2필에서 1필로 줄이는 대신 부족한
부분은 어업세(漁業稅)나 염세(鹽稅), 선박세, 은결(隱結) 등의 결전(結錢)으로 보충하도록 했다. 역을 균등히 한다는 취지에서 제
정하였으나 관리들의 부패로 농촌의 피폐를 초래하게 되어 19세기에는 3정문란의 하나가 되었다.
[주25] 조공(趙公) 관빈(觀彬) : 조관빈(趙觀彬, 1691~1757)으로,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국보(國甫), 호는 회헌(悔軒), 시호는 문간
(文簡)이다. 1714년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노론 4대신의 한 사람인 조태채의 아들로서 신임사화에 연루되어 귀양 갔다.
1731년 대사헌에 재직 중 신임사화의 전말을 상소하여 소론의 영수인 이광좌(李光佐)를 탄핵했다가 당론을 일삼고 사감으로 대신
을 논척했다 하여 제주 대정현(大靜縣)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1753년(영조29) 대제학으로서 죽책문을 지어 올리기를
거부하여 성주 목사로 좌천되었다가 삼수부(三水府)에 안치되었다. 곧 단천(端川)에 이배되었다가 풀려나와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문집에 《회헌집》이 있다.
[주26] 화경 숙빈(和敬淑嬪) : 1670~1718.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를 말한다. 숙종의 후궁으로서 처음 무수리로 궁에 입궐한 것으로 알
려져 있다. 숙종 24년(1698)에 정1품 숙빈으로 봉해졌으며, 49세 때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영조가 즉위한 원년에 최씨의 사당을
지어 숙빈묘(淑嬪廟)라 하였다. 이후 육상묘가 되었다가 육상궁이 되었다. 묘소 또한 1753년(영조29)에 화경(和敬)이라는 시호를
올리고 소령원(昭寧園)으로 승격되었다.
[주27] 죽책(竹冊) : 조선 시대에 왕세자와 왕세자빈, 왕세손과 왕세손비를 책봉할 때 내리는 책봉 문서를 말한다. 대쪽을 반듯하게 깎아
꿰어서 만드는데, 이 죽책에 쓰는 죽책문은 변려문으로 써야 하며 문명이 높은 신하가 왕명을 받아서 저술한다.
[주28] 조공이 …… 때 : 《영조실록》에 의하면, 29년(1753) 7월 28일에, 대제학 조관빈에게 죽책문을 지어 바치라고 명하였다. 29일 기
사에는, 조관빈이 죽책문 짓는 일에 관해 상서(上書)한 내용이 실려 있다. 죽책이 옥책에 비해 경중이 있기는 하나, 국조의 대소 책
문은 승통(承統)한 비빈(妃嬪)이 아니면 일찍이 이런 일이 없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혹 열조의 전례(典禮)에 어그러지는 것이 있는
데 깊이 생각하지 않고 지어 바친다면 국가를 저버리는 것이 될 것이라고 하며, 대조(大朝)께 여쭈어 제때에 미쳐 처리하기를 바란
다고 하였다.
이때문에 조관빈은 즉시 친국을 받고 유배되었으며 좌의정 이천보에게 죽책문을 짓게 하였다. 9월에 이천보가 조관빈의 석방을 청
하니 윤허하여 11월에 석방하였다.
[주29] 함인정(涵仁亭) : 창경궁 명정전 서북쪽에 있다. 국왕이 편전으로 자주 이용하던 건물이다. 휴식을 취하기도 하고 신하들과 경연을
열기도 했다. 성종 15년에 지은 인양전(仁陽殿)이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고, 인조 11년(1633)에 인경궁(仁慶宮)의 함인
당(涵仁堂)을 이건하여 함인정이라 하였다.
[주30] 조종부(趙宗溥)가 …… 탄핵하였다 : 《영조실록》 30년(1754) 11월 20일 기사에, 지평 조종부가 영의정 이천보가 남의 아내를 빼
앗고 그 지아비를 병들어 죽게 한 일을 통렬하게 탄핵한 내용이 실려 있다.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여염의 강씨 성을 가진 사람의 아
내가 자색으로 이름이 났는데, 그 지아비가 멀리 나간 것을 보고 이천보가 부정한 방법으로 겁주어 데려다가 그대로 첩을 만들었다.
그 지아비가 억울함을 호소한다는 말을 듣고는 후한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포장(捕將) 정찬술(鄭纘述)에게 분부하여 때려죽이게
하였으나, 정찬술이 그 억울함을 알고 기꺼이 거행하지 않으니 다른 일을 꾸며서 그를 파직하였다. 정찬술을 대신한 자가 그를 별간
에 가두고 10여 일 동안 물도 마시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굶주리고 목마른 것을 견디지 못하여 죽었다.
얼마 안 가서 포장이 앓아 죽으니 세상 사람들이 그 재앙을 받았다고 하며, 정승을 비난한다는 내용이다. 임금이 정형복(鄭亨復)을
형조 판서로, 유언민(兪彦民)을 참의로 제수하여 참판 심성진(沈星鎭)과 함께 그 일을 조사하게 한 결과, 조종부는 사판(仕版)에서
삭제하고 귀양 보냈고, 이천보에게는 승지를 보내어 위로하였다.
[주31] 조영순(趙榮順) : 1725~1775.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효승(孝承), 호는 퇴헌(退軒)이다. 1751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했
고, 1769년 동지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문집에 《퇴헌집》이 있다. 영조 30년 11월 20일에 실린 사신(史臣)의 말에 의하
면, “조영순은 일찍이 참하 홍록(參下弘錄) 때문에 이천보에게 바라는 것이 있었으나 이천보가 들어주지 않았으므로, 조영순이 이
때문에 이천보를 원망하는 것이 날로 심해져서 서로 부추겨 조종부가 그를 탄핵하고 조영순이 또한 뒤를 이어 탄핵한 것이었다.”라
고 하였다.
[주32] 오찬(吳瓚) : ?~? 조선 영조 때의 문신으로 자는 경보(敬父), 호는 수재(修齋), 본관은 해주(海州)이다.
[주33] 국무(國誣) : 국계(國系)에 관한 무함(誣陷)이다. 여기서는 경종의 뒤를 이은 영조에 대한 무함을 가리킨다. 즉 영조가 경종을 시해
하였으며, 숙종의 친자가 아니라고 한 것이다. 영조 27년(1751) 윤5월 18일 기사에 정언 오찬의 상서가 실려 있다.
그 내용은 신축년 임인년의 일(신임사화)과 무신년의 무신난(이인좌의 난)을 거론하며 영조를 무함한 소론과 남인들에 대해 징토를
엄히 할 것과 시비를 분명히 할 것을 청한 것이다. 신임사화는 목호룡이 경종을 시해하려는 역모를 고변함으로써 노론 4대신이 사형
에 처해지고 60여 명이 처벌되었다.
1724년 영조가 즉위한 뒤 노론 측의 상소로 무고임이 밝혀졌는데, 김일경이 끝까지 공모자가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목호룡과 김일
경 두 사람만이 처형되었고 그가 밀고한 글은 불태워졌다. 무신난은 영조 4년(1728), 정권에서 배제된 소론과 남인 계열의 사람들
이 영조와 노론의 제거를 계획했는데 그 명분으로 경종이 영조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의혹과 영조가 숙종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내세웠다.
이때 장헌세자가 대리청정하고 있었으므로 답하기를, “나는 다만 성상의 뜻을 따라야 할 뿐이며, 대조께서 몇 년 동안 고심하신 것
을 어찌 나에게 번거롭게 하는가. 한심스럽다.”라고 하였다.
[주34] 의릉(懿陵) : 조선 제20대 왕 경종과 계비 선의왕후(宣懿王后) 어씨(魚氏)의 능이다. 서울 성북구 석관동에 있다.
[주35] 무은(無隱)의 의리 : 《예기》 〈단궁 상(檀弓上)〉에, “임금을 섬기는 데는, 안색을 범하여 극간하는 일은 있으나 허물을 덮어 숨겨서
는 안 된다.〔事君, 有犯而無隱.〕” 하였다.
[주36] 육상궁(毓祥宮) : 영조의 어머니인 숙빈 최씨를 모신 사당이다.
[주37] 효장세자묘(孝章世子廟) : 효장세자(1719~1728)를 봉사(奉祀)하는 곳으로 영조의 잠저였던 창의궁(彰義宮)에 있다. 효장세자
는 영조의 장남으로 사도세자의 형이다. 1724년(영조 즉위년)에 경의군(敬義君)에 봉해지고 이듬해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나 1728
년 10세의 어린나이에 서거하였다.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후사로 입적되어 등극하였고, 효장세자는 진종(眞宗)으로 추존되었다. 효장(孝章)은 시호이며, 능호는
영릉(永陵)으로 경기도 파주에 있다.
[주38] 중귀인(中貴人) : 환관을 말한다.
[주39] 김상도(金相度) …… 되자 : 영조 32년(1766) 2월에 언관인 정언 이언형과 김상도를 면직시키고 서인(庶人)으로 만들었다. 동년
10월 12일 기사에 의하면,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소견하였는데 영의정 이천보가 말하기를, “재이(災異)가 있고 난 뒤에는 삼
사(三司)의 신하들은 아무리 문구(文具)에 따라 수를 갖추는 일이라 할지라도 일은 응당 해야 하는 것인데, 이번에는 그런 일조차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저께의 차대는 재이 뒤에 처음 있는 연석(筵席)이었는데도 또한 명령에 응하지 않았으며, 비록 한두 대장(臺章)이 있었다
해도 대충대충 책임만 때운 것일 뿐이었습니다. 나라에 언로(言路)가 없으면, 어떻게 나라를 다스리겠습니까.
또 그 말을 쓰지 아니하는 것은 조정에서 말을 하도록 인도하는 본래의 뜻이 아닌 것입니다.” 하고 이어서 김상도(金相度). 이언형
(李彦衡)에 대한 처분이 과중하였음을 말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 예순 살이란 늙은 나이인데 이에 하늘에 계신 조종(祖宗)의 영
혼을 속인 사람이 되었다. 경 등은 김상도ㆍ이언형에게 미련을 두니, 나는 이해하지 못하겠다.” 하였다.
[주40] 고굉(股肱) : 고굉지신(股肱之臣)을 말한다. 임금이 팔다리같이 믿고 소중히 여기는 신하이다.
[주41] 정성왕비(貞聖王妃) 서씨(徐氏) : 1692~1757. 영조의 왕비로서 달성부원군 서종제(徐宗悌)의 딸이다. 소생이 없이 죽었다.
능은 경기도 고양의 서오릉 경내에 있는 홍릉(弘陵)이다.
[주42] 인원왕비(仁元王妃) 김씨(金氏) : 1687~1757. 숙종의 3번째 왕비로서 이조 판서 김남중(金南重)의 증손녀이며 영돈녕부사 경은
부원군 김주신(金柱臣)의 딸이다. 소생이 없이 죽었다. 능은 경기도 고양의 서오릉 경내에 있는 명릉(明陵)이다.
[주43] 산릉 총호사(山陵總護使) : 산릉도감(山陵都監)의 총호사이다. 왕과 왕비의 능침을 새로 만들 때 임시로 두었던 관아의 총책임자
로서 보통 현직 좌의정으로 임명하는 것이 관례였다.
[주44] 병으로 …… 파직되었다 : 영조의 계비는 김한구(金漢耉)의 딸 정순왕후(貞純王后)이다.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貞聖王后) 서씨
(徐氏)가 죽은 뒤, 1759년(영조35)에 왕비에 책봉되었다. 이천보는 계비의 책봉을 청하는 자리에 참여하지 않은 일로 파직되었다.
[주45] 돌아가셨으니 : 이천보의 죽음에 관해서 《영조실록》에는 병으로 사망한 것으로 나와 있다. 영조 36년(1760) 12월 기사에 “이천보
가 병으로 조참에 참여하지 못했다.”라고 했다. 37년(1761) 1월 5일 기사에 영중추부사 이천보의 졸기가 실려 있는데, 여기에서
“이천보가 물러나 육화정에서 살다가 병으로 죽으니, 나이 64세였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당시 영의정으로서 사도세자의 평양원유에 책임을 느껴 음독자살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고종실록》 36년(1899) 10
월 기사에는 이천보 등 3인에게 불천위(不遷位)의 은전을 내리기를 청하는 상소가 실렸는데 이르기를, “이천보 이후 민백상이 온
정성을 다해 세자를 보호하였으며, 신사년(1761, 영조 37)에 이르러는 사태가 어쩔 수 없게 되어 통곡하고 눈물을 흘리며 서로 손
을 잡고 맹세하며 영결한 다음 연달아 죽었으니 충성과 절개가 일월처럼 빛났다.”라고 하며 불천위의 은전을 베풀도록 청하였다.
이어서 불천위를 청하는 계(啓) 2편이 올라있으며, 이 청에 대하여 고종이 칙지를 내려 허락하였다. 《홍재전서》 속에는 정조가 지은
〈문간공 이천보 치제문〉ㆍ〈문간공 이천보의 묘소에 치제한 글〉 등에서 정조의 지극한 공경심이 드러나 있다.
[주46] 유소(遺疏)를 …… 경계하였는데 : 《영조실록》 37년 1월 5일 기사에 영중추부사 이천보의 죽음과 유소에 관한 내용이 있다. 그 유
소의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돌아보건대 지금의 한없는 여러 가지 일 중에 성궁(聖躬)을 보전하고 아끼는 것 만한 것이 없
습니다.
기쁨과 노여움이 간혹 갑자기 발하게 되면 그 중정(中正)한 도리를 잃을 뿐만 아니라 기혈(氣血)이 손상될 우려가 있으며, 시행과 조
치가 간혹 격렬하거나 번뇌를 이루게 되면 교령(敎令)에 해로움이 있을 뿐만 아니라 정신이 소모되고 허물어지는 근심이 있게 됩니
다. 삼가 원하건대, 중화(中和)하는 도리를 더욱 힘쓰시어 강녕(康寧)하는 아름다움을 누리도록 하소서.”
[주47] 문원(文源) : 이천보가 아들이 없었으므로 11촌 조카인 이문원(李文源, 1740~1794)을 후사로 입적시켰다. 이문원의 자는 사질
(士質), 시호는 익헌(翼憲)이다. 1763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음보로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1771년 정시 문과에 급제하여 교리ㆍ승지를 지냈으며, 대사간ㆍ동래 부사ㆍ경상 감사ㆍ대사성 등을 지내고, 1784년 가선대부(嘉
善大夫)에 올랐다. 1788년에는 벽파로부터 홍봉한(洪鳳漢)과 관계를 맺고 있었던 한덕후(韓德厚)를 대직(臺職)에 천거하였다는
비난을 받자 빈청(賓廳)에서 조복(朝服)을 벗어던지고 퇴궐하여 숙천부(肅川府)에 유배되었다가 석 달 만에 풀려났다.
이듬해 병조 판서로 있을 때 인척인 오재순(吳載純)이 이조 판서에 오르자 한 집안에서 양전(兩銓)을 겸할 수 없다 하여 사직소를
올리고 물러났다. 판서를 여덟 차례 지냈다.
[주48] 삼연(三淵) …… 창흡(昌翕) : 김창흡(金昌翕, 1653~1722)으로 본관은 안동, 자는 자익(子益), 호는 삼연(三淵)이다. 좌의정 김
상헌(金尙憲)의 증손자이며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의 아들이다. 형 김창협과 함께 성리학과 문장으로 널리 이름을 떨쳤다.
1673년(현종14) 진사시에 합격한 뒤로는 과거를 보지 않았다. 기사환국 때 아버지가 사약을 받고 죽자 은거했다. 1696년 서연관
(書筵官), 1721년 집의(執義)가 되었다. 신임사화로 유배된 형 김창집이 사약을 받고 죽자 그도 지병이 악화되어 죽었다. 이조 판
서에 추증되었으며 양주의 석실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삼연집》ㆍ《심양일기(瀋陽日記)》 등이 있다.
[주49] 문집 10권 : 현재 전하고 있는 《진암집(晉菴集)》은 8권 4책으로서 정조 5년(1781)에 종형 정보(鼎輔), 종제 익보(益輔), 외종제
김양택(金陽澤) 등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황경원(黃景源)ㆍ남유용(南有容)과 아들 문원(文源)의 서문이 있고, 권말에 정보
와 김양택의 발문이 있다. 규장각ㆍ장서각ㆍ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주50] 송규렴(宋奎濂) : 1630~1709. 자는 도원(道源), 호는 제월당(霽月堂)이다. 송준길의 문인으로, 1654년(효종5) 식년 문과에 급
제하여 검열ㆍ서천 군수 등을 지냈다. 1674년 일어난 2차 예송(禮訟)으로 귀양 간 송시열ㆍ송준길의 신원을 주장하다 파면당했다.
1680년(숙종6) 경신대출척으로 다시 서인이 집권하자 재기용되어 대사간ㆍ대사헌 등을 역임했다. 1694년 갑술옥사가 일어나자
대사헌ㆍ예조 참판을 지내고 1699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서인의 중심인물로서 송시열ㆍ송준길과 함께 삼송(三宋)으로 불
렸다. 저서에 《제월당집》이 있다. 회덕의 미호서원(渼湖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주51] 이문원(李文源) : 1740~1794. 자는 사질(士質), 시호는 익헌(翼憲)이다. 1763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음보로 참봉에 임명되었으
나 취임하지 않았다. 1771년 정시 문과에 급제하여 교리ㆍ승지를 지냈으며, 대사간ㆍ동래 부사ㆍ경상 감사ㆍ대사성 등을 지내고,
1784년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1788년에는 벽파로부터 홍봉한(洪鳳漢)과 관계를 맺고 있었던 한덕후(韓德厚)를 대직(臺職)에 천거하였다는 비난을 받자 빈청
(賓廳)에서 조복(朝服)을 벗어던지고 퇴궐하여 숙천부(肅川府)에 유배되었다가 석 달 만에 풀려났다. 이듬해 병조 판서로 있을 때
인척인 오재순(吳載純)이 이조 판서에 오르자 한 집안에서 양전(兩銓)을 겸할 수 없다 하여 사직소를 올리고 물러났다. 판서를 여덟
차례 지냈다.
[주52] 이태중(李台重) : 1694~1756.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자삼(子三), 호는 삼산(三山),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이희조(李喜朝)
의 문인으로 1717년 사마시를 거쳐 1730년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1735년 신임사화 때 화를 입은 노론 4대신의 신원(伸
寃)을 주장하다가 당쟁을 일삼는다는 탄핵으로 흑산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풀려나와 황해도 관찰사ㆍ평안도 관찰사를 거쳐 예조 참판ㆍ호조판서 겸 예문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청백리에 녹선되었고, 문집
에 《삼산집》이 있다.
[주53] 남유용(南有容) : 1698~1773.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덕재(德哉), 호는 뇌연(雷淵) 또는 소화(小華)이며 시호는 문청(文淸)이
다. 이재(李縡)의 문인으로 1721년 진사가 되고 1740년 알성 문과에 급제했다. 1742년 홍문관에 등용된 뒤 오랫동안 세자시강원
에 있었다.
1747년 군덕10조(君德十條)를 진언하여 군주의 성실을 강조했다. 1754년 원손보양관(元孫輔養官)이 되어 세손(정조)에게 글을
가르쳤다. 양관(兩館)대제학ㆍ원손사부(元孫師傅)를 거쳤다. 문장과 시에 뛰어나고 서예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문집에 《뇌연집》
이 있다. 저서에 《명사정강(明史正綱)》 등이 있고, 〈우화교비(羽化橋碑)〉ㆍ〈해백윤세수비(海伯尹世綏碑)〉 등의 글씨가 있다.
[주54] 이존중(李存中) : 1703~1761. 본관은 전주, 자는 경이(敬以), 호는 척암(惕庵). 척재(惕齋). 하당(荷堂)이다.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익위사사어를 역임하고 세자시강원에 출입하였다. 1750년(영조26) 합천 군수로 있으면서 식년 문과에서 삼장장원(三場
壯元)을 한 후 여주 목사. 동부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751년 김상로(金尙魯) 형제를 탄핵하여 거제도에 귀양갔다. 예조 참의를 사직하고 낙향하여 학문 연구에 전심하였다. 오원(吳
瑗)ㆍ윤심형(尹心衡). 이태중(李太重) 등과 사귀었다. 정조 때 이조판서 겸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저서에 《척재집》. 《국조명신록
(國朝名臣錄)》 등이 있다.
[주55] 원보(元輔) : 영의정의 별칭이다. <끝>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 박재금 이은영 홍학희 (공역) | 2015
-------------------------------------------------------------------------------------------------------------------------------------------------------
[原文]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文簡李公墓誌銘 幷序.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李公。墓在富平府下梧亭高里之原。公諱天輔。字宜叔。其先延安人也。曾祖諱嘉相。擧及第。以孝死之。贈弘文館修撰。祖諱重朝。以禮曹判書。文肅公諱一相子。爲修撰 後。贈左贊成。父諱舟臣。沃川郡守。以司僕寺僉正諱成朝子。爲贊成後。贈領議政。公家世皆能文章。自文忠公諱廷龜,文靖公諱明漢。至文肅公。仍三世爲大提學。而公母夫人光州金氏。文忠公諱萬基之女。文淸公諱鎭圭之弟也。文淸公父子相繼執文柄。以名論聞。嘗稱公曰。眞英才也。公少卓犖有大志。不好讀書。及旣長。能自折節爲文章。名論最高。卿大夫聞公之風。造其門者甚衆。雖時俗異趣之士。一見其面以爲榮。故公自其少賤時。名重當世。初擧生員。補內侍敎官。年四十二。中乙科。拜侍講院兼說書。明年選入弘文館。爲正字。纔三月。遷副修撰。又明年。轉侍講院司書,司諫院正言。爲文學吏曹正郞。遂拜校理兼東學漢學敎授。改司諫院獻納兼校書館校理。明年正月。以兼司書。充御史。案沃川獄。入爲修撰,副校理兼文學。九月。遷成均館司藝,司憲府掌令。十二月。以司僕寺正兼弼善。已而。選爲副應敎。明年春。轉侍講院輔德。改司諫院司諫,司憲府執義兼輔德。又明年。冊世子嬪。以都廳勞。擢承政院同副承旨。二月。改司諫院大司諫。參知兵曹。九月。遷成均館大司成。又明年。兼承文院副提調。由掌隷院判决事。移兵曹禮曹參議。明年二月。出爲黃海觀察使。城海州。歲餘。召爲副提學。以城事。仍觀察使。又明年。城成。復爲副提學。閏七月。授吏曹參議。坐事。斥守古阜郡。未行。擢吏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藝文館提學,世子右副賓客。明年免。由刑曹參判。復入吏曹。爲參判兼同知經筵事,備邊司有司提調。明年二月。擢判兵曹知義禁府事。十二月。移判吏曹。後明年。復判兵曹。夏六月。進議政府右議政。纔五月。轉左議政。未盡三年。拜領議政。公爲人開廓簡平。能虗心。勇於遷善。爲政寬大。不喜更張。其臨事。思慮高遠。能見人之所不能見。嘗與人言曰。李天紀等一二人。以布衣。與贊大策。立功績。然其所處與諸大臣不同矣。已而。大悟曰。獄一也。士之死者。何以異於大臣之死者邪。其爲修撰。上疏言。一二人如納於逆。則其獄猶有所不誣也。或讓公曰。議論何變之遽也。公謝曰。吾求其是而已矣。初朝廷燒睦虎龍誣告書。而國史猶未改修。公以獻納。上疏曰。大義伸於一時。而不載史冊之中。則後世何所考焉。自古實錄。或正其謬。或補其闕。所以重實錄也。宜開局。別爲一錄。藏之石室。言雖不行。而廷中皆服其識。公嘗謂往者。國是未定也。士大夫棲遲農畒而不肯仕。義當然也。今國是旣定於上。士大夫皆可仕也。而用人曾不廣焉。適足以養一淫朋也。及入吏曹爲參議。具疏論之。或曰廣之則小人雜進。奈何。公愀然曰。人之任職。其惡著然後錮之。安能以未著之惡。先錮其人哉。君子之心。不如是爾。其後公所擧擬者。爲李光佐,趙泰億擅停國論。於是錮之。一不擬侍從之職。趙顯命建均役議。上命公三月直宿備邊司。指畫條目 。遣均稅使。榷江海魚鹽之利。公上書曰。自古征利。何嘗不自魚鹽始乎。臣恐不出十餘年。聚斂之臣。左右幷進。而國家受其病矣。由是朝廷不復委公以均役事矣。公爲相。務持大體。未嘗以好惡恩怨。存於心。少時與故大提學趙公觀彬不相能。及趙公論和敬淑嬪竹冊事。上盛怒。將親鞫之。大臣召見涵仁亭。上顧公曰。卿爲予作竹冊文。公曰。觀彬過於謹愼。匪以竹冊爲不可也。今殿下以竹冊文命於臣。臣何敢辭。上意稍解。公又言觀彬無罪。年又老。不當施刑。上曰。竹冊事急。卿可退。公曰。殿下不許觀彬免於刑。臣不敢退。上曰。予當爲卿不施刑。豈欺卿邪。由是趙公免於刑。然謗公者。反謂公激上之怒。公大笑。終不自辨。初高大成。以異姓從叔之女。爲公妾。而公之婢。大成妻也。後大成坐盜祭器。死捕廳。未幾。持平趙宗溥劾公幽殺姜氏子。而奪其妻。上命刑曹。案其事。刑曹啓言。某妾實非大成妻。而大成亦非姜氏。是時。修撰趙榮順詆公益力。以大成事。爲䵝昧。幷劾公從兄鼎輔,從弟益輔。公上疏請覆案之。上諭曰。此獄非姜而高。非夫而戚。何以問乎。雖然。卿心可諒矣。乃命刑曹覆案之。其事旣白。公上疏乞免相職。終不許。明年。上遣都承旨。特召之。公入見。乞免益懇。上許之。其後賓客言。榮順詆公時事。公笑曰。吾已忘之矣。然治朝。豈宜錮棄趙修撰邪。及上殿請用榮順。聞者嗟歎。始知公有大臣量。公在上前。不面諛於名論。侃侃自守。雖得罪。終不能屈也。吳瓚上書論國誣。上如懿陵。叩頭而泣曰。予誣未雪。則不還矣。公流涕固請還都。倉卒失辭而不自知。及上旣還。遂自引。上怒曰。大臣自引。廷中必有誹謗者。乃下敎索誹謗者。或以謂公不直陳。非事君無隱之義也。公正色曰。吾爲大臣。其可告誹謗者邪。卒不告。上不得已罷公職。始上追尊毓祥宮。封昭寧園。議者曰。禮當告廟。公曰。嗣王以私親追尊之禮。告于太廟。吾未之聞也。遂不上請。上大怒曰。國有典禮。而大臣不請告廟。此其心欲諱其事也。乃罷公職。初上以事久不怡。嘗幸孝章世子廟。公請進見。怒不許。戒中貴人。閉宮門。無納羣臣。公排門直入宮庭。中貴人遮公語曰。有敎無納羣臣。雖相公。亦不可入。公瞋目叱中貴人曰。大臣進見。中貴人。其可拒邪。上在帷中。望見之。下敎曰。大臣不待君命。而入宮門。甚不敬也。公泣曰。自古人君。使宦官。深鎖宮門。固拒大臣。而國不亡者。未之有也。上大怒。立罷公職。已而寢。爲遣近臣敦召之。下敎曰。予將躬臨。公終不就。命削黜。未盡一月。輒復拜爲左議政。初金相度李彥衡言事得罪。公上箚曰。赤子饑饉於下。而災異數見於上。然今日罪一言者。明日罪一言者。數日之間。言者得罪相隨屬。甚非殿下所以遇災驚懼之道也。上怒曰。大臣上箚。論救黨人。而欲自脫焉。烏在其爲股肱也。乃罷公職。下敎削黜。旣七日。叙拜領敦寧府事。數月。復爲領議政。固辭不就。會貞聖王妃徐氏。與仁元王妃金氏。相繼而薨。公爲山陵總護使。詣山陵。疾篤遂免。明年八月。上不怡。中外憂懼。不知所出。公以爲吾不造朝。無以安中外之情。卽扶病入見便殿。上閔其病。命中貴人護上殿。公泣曰。社稷存亡之機。在於民心。民心一散。則社稷雖欲不亡。不可得也。今殿下不怡日久。民心皇皇。如是而社稷不亡。誠難矣。逆家親屬。怨國者不可勝數。安知其不扇亂也。上益不怡。乃下敎罷公之職。未幾。召判中樞府。明年。復爲領議政。上旣禫。有司求對。引故事請冊繼妃。公以病。不與有司偕上殿。遂坐罷職。公旣退。作六化亭於江上。與賓客逍遙自適。居未幾。召拜領中樞府事。其明年。公病益篤。上遣太醫往視之。賜藥存問。以今年辛巳正月乙巳。卒于家。享年六十四。其葬則三月甲子也。公將卒謂家人曰。吾死無憾。惟永違闕庭。是遺恨也。命左右草遺疏。以戒聖躬。言不及其私。公旣卒。輟朝三日。賜吊祭。謚曰文簡。嗣子文源。上遺疏。上惻然爲賜。批答遣近臣。讀于殯前。公淸癯。風儀嶷嶷。善談論。與人嬉笑。不矜飾。神氣疎爽。志曠如也。至有所爭。奮髯長跪。其目燁然。見者爲之改容。治身儉約。家人請爲公斂衣。公止之曰。吾喪先妣。吾家貧。斂衣不能盡吾心也。吾何忍預爲斂衣乎。及公卒。斂無一衣。至匄貸然後乃斂。其文章奇偉佚蕩。長於論辨。詩尤遒警。有遠韻。三淵先生金公昌翕。嘗語人曰。李某之詩。非今人之所能及也。公自號曰晉菴。有文集十卷。藏于家。其配曰貞敬夫人恩津宋氏。順興府使相維之女。禮曹判書奎濂之孫。無子。以公族弟珍山郡守國輔子爲之後。卽文源也。女三人。長適趙㻐。次適吳載純。次適徐有防。庶子一人。幼。公在相府。務進淸流。李台重,南有容,李存中。皆公所進。及旣老。樂善不懈。見人一能。則喜心達於容貌。惟恐人之不知也。其閒居。名論益高。以當世賢士大夫進退榮辱。爲其憂樂。豈公志不忘王室。其將有所施爲歟。悲夫。銘曰。
李公休休。疏中坦外。無方不廓。而度孔大。有偉文章。何知之達。聞義輒服。曾不踰日。公立王庭。則忘軒冕。如鶴在樊。其思甚遠。公居相位。旣廉且潔。曠然自虗。不滯一物。衆皆察察。獨誕其節。衆皆睮睮。獨正其笏。王曰元輔。予知之晩。人雖百訿。恩猶不損。以予轛軫。與予輪軌。衡之從之。元輔是倚。公曰明主。曲全臣身。得不離尤。明主之仁。榮祿匪福。令終惟福。今公之終。終于榮祿。卬卬其氣。烈烈其神。銘以晰之。告于無垠。<끝>
ⓒ한국문집총간 |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