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은 몇 년 전에 썼던 홍근수 목사님에 대한 제 글입니다. 누군가가 찾아주셔서 다시 읽어보고 고인에 대한 제 추모의 글로 삼고 싶어 여기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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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04월 02일 그분이 식사하는 모습이 영 불편해 보였다. 손놀림이 적잖이 거북해 보였다. 가끔 밥알이 바닥에 떨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아는 체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아내도 놀란 눈치였다. 소문은 들었지만 설마 했다. 그런데 우리 눈으로 직접 본 것이다. 세상에, 이런 일이... 이 분이 이런 모습을 보이다니!
이곳을 오가는 서울 손님들에게 이 분의 건강에 대해서 간혹 얘기는 들어왔는데 3년 전 이 분이 이곳에 오셔서 내 집에서 일주일 정도 머무실 때 내 눈으로 보고 말았다. 그때 연세가 70세였다. 일흔 노인(?)에게 중풍은 그리 예외적인 일은 아니다 싶지만 이 분이 이렇게 될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지금, 들리는 소문에 건강이 더 나빠졌다고 한다. 하긴 점점 더 나빠지겠지, 낫는 병이 아니니까... 이 분을 오래 아는 사람들은 너무 가슴이 아파 돌아서서 눈물을 훔치곤 한다. 그냥 세월무상을 말하고 말기엔 너무 가슴이 쓰리다.
난 중풍이나 치매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는 모양이다. 그런 병을 소재로 한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가슴이 먹먹하고 눈물이 앞을 가려 잘 보지 못한다. 몇 년 전에 노희경 작가가 쓴 <꽃보다 아름다워>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모시던 고두심이 자기도 치매에 걸리는 드라마다. 얼마나 눈물이 나던지 드라마에 집중할 수 없을 정도였다. 재작년인가에 본 <Away from Her>도 그랬다. 치매에 걸려 요양소에 있는 아내를 만나러 온 남편이 얼마나 안쓰럽던지... 오래 기억에 남을 작품들이다. 그런데 내가 가장 존경하고 내게 가장 큰 가르침을 주신 두 분 중 한 분이 중풍을 맞으신 거다. 영화도 드라마도 아니고 현실에서 말이다.
그 분은 홍근수 목사님이다. 아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을 터이고 안다고 해도 좋지 않은(?) 분으로 아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1980년대 말 이후 한국의 민주화와 통일운동에 관여했거나 관심 있게 지켜본 사람은 이 분 이름을 들어봤을 거다. 홍 목사님은 16년간 서울 향린교회 담임목사로 일한 후 2004년에 은퇴하셨다.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몸이 됐지만 그 자유로운 영혼이 제2의 인생을 살기 시작했을 때 뜻하지 않은 병 때문에 지금은 거동조차 자유롭지 않다. 더 가슴 아픈 건, 몸은 말을 안 듣는데 생각은 극히 정상이라는 사실이다. 불편한 몸을 보고 말을 나눠보면 다시 한 번 놀란다. 겉으로 보면 치매환자 비슷해 보이는데 엉뚱한 말을 하기는커녕 생각은 지극히 정상적이고 정확하고 날카롭다. 단지 그 생각을 말로 표현하는 데 어려움이 있을 뿐이다. 정신은 멀쩡한데 혀가 말을 안 듣고 몸이 맘대로 움직이지 않으니 얼마나 더 안타깝고 절망적일까 하고 생각하니 더 마음이 아프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평생 건강을 위해 운동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다는데 그래서일까? 남의 부탁을 거절 못해 온갖 운동단체의 직책을 다 맡아 일하셨는데 그게 과중했던 걸까? 아니면 1991년 안기부에 끌려갔을 때 고문은 받지 않았다지만 그래도 정신적, 육체적으로 힘든 시간을 보낸 게 원인일까? 그것도 아니면 1년 반 동안의 국립대학 재학(국가보안법 학과) 시절이 그렇게 고통스러웠던 걸까?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중풍이란 병이 사람 골라서 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 분에게만큼은 이런 일이 안 생길 줄 알았다. 아니, 그런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 더욱 충격적이라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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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무 선생님을 만났던 때와 거의 비슷한 시기인 1986년에 이 분을 처음 만났다. 대학 법대 선배님이기도 한 이 분은 1974년 유학을 떠나 학위 받고 보스턴의 한 교회에서 목회하며 13년을 보낸 후 1986년이 저무는 마지막 날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영구 귀국했다. 서울 향린교회 담임목사로 취임하기 위해서였다. 그때가 1986년 가을쯤이었는데 신학대학원 졸업반이었던 나는 청년 전담 전도사 후보자였다. 청년 전담 전도사가 뭐 그리 대단한 자리냐고? 물론 대단한 자리는 아니다. 대단한 자리라면 내가 선두주자였을 턱이 있나. 게다가 그때는 잘 몰랐는데 그렇게 목회 경력을 ‘험하게’ 시작해 스펙이랄 것 없는 스펙을 쌓은 덕에 지금은 어느 교회도 날 오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러니 여기 그냥 죽치고 있을 수밖에. 만일 그때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그 대단치도 않은 자리를 맡겠다고 했을까? 나도 궁금하다. 어쨌든 현재 내 스펙은 안병무 선생님과 홍근수 목사님 두 분을 만난 덕분에 현재 이 모양이 됐다. ‘그래서’(‘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난 이분들이 너무 고맙다.
홍 목사님은 안병무 선생님 같이 유명한 분은 아니다. 13년의 미국 생활이라는 공백이 있기 때문에 처음에 한국에서 이 분을 아는 사람이 그리 많진 않다. 1980년대 중반 이전에 미국에 온 사람들에게는 더 생소하겠지. 하지만 한국의 진보적인 교회운동, 또는 한국사회의 민주화와 민족통일운동에 관여하거나 관심 있는 분들에게는 널리 알려져 있는 분이다. 나는 1987년부터 7년 동안 이분 밑에서 전도사와 부목사로 일했고 교회 밖에서도 여러 단체에서 함께 활동했기 때문에 우린 서로를 잘 알고 있다. 내가 배운 것도 참 많다. 목사로서 내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분을 들라면 이 분을 드는 데 1초도 안 걸린다.
홍 목사님은 역시 목사인 아내 김영 목사님(남편은 장로교 목사, 아내는 감리교 목사다)과 사이에 딸 하나와 두 아들을 두셨다. 귀국 당시에는 위로 둘은 대학생이었지만 막내는 고등학생이어서 어려움이 적지 않았다. 지금은 모두 장성해서 잘 살고 있지만 막내가 고딩 때는 가족 없이 친구 집에 기거하며 힘들게 살았던 모양이다. 7~8년 쯤 전에 목사님이 내게 오셔서 한국 갈 생각 없느냐, 있으면 좋은 교회 소개하겠다고 하셨을 때(정말 좋은 교회였다) 내가 아이들 때문에 곤란하다고 말했더니 금방 수긍하시고 없던 얘기로 하신 적이 있다. 당신 막내가 겪었던 어려움을 되풀이시키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늦은 감이 있지만 그때가 내 스펙을 바꿀 최후의 기회였는데...
홍근수 목사님과 부인 김영 목사님
홍 목사님에게는 별명이 많다. 반미 목사, 친북 목사, 빨갱이 목사 등등... 대개가 목사와 어울리지 않는 별명들이다. 스스로도 “난 미국으로 갔을 때는 친미 목사였는데 13년 동안 미국 살면서 반미 목사가 됐다”고 말하는 판이니 반미 목사라는 별명에 대해서는 별 불만이 없는 듯하다. 미국의 모든 것에 반대하는 게 아니라 군사정책과 대외정책, 특히 제3세계에 대한 신식민지정책(이런 말 지금도 쓰나? 요즘은 ‘신자유주의’란 말을 많이 쓰던데...)에 반대하는 거라는 단서만 달려 있다면 이 분은 ‘반미 목사’라는 타이틀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 분은 지금도 평화협정 체결과 주한미군 철수에 집중해서 운동을 벌이는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약칭 ‘평통사’)이란 단체의 상임대표다.
하지만 ‘친북 목사’나 ‘빨갱이 목사’란 별명에 대해서는 얘기가 다르다. 자신은 그저 북한에 대해서 무조건 반대만 하지 말고 같은 겨레라는 입장에서 상대방을 제대로 알고 나쁜 것은 나쁘다 하고 좋은 것은 좋다고 하며 점차 동질성을 회복하자는 생각일 뿐인데 남한 상황이 워낙 일방적이어서 자신에게 그런 별명이 붙었다고 불만스러워하신다. 한번 붙여진 별명은 쉽게 바뀌거나 없어지지 않는 모양이다. 그래서 건강이 매우 좋지 않은 지금도 가끔 길에서 봉변당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나는 많은 부분에서 홍 목사님과 생각이 다르다. 안병무 선생님과 생각이 다른 부분이 있듯이 홍 목사님과도 그렇다. 다른 정도가 안 선생님과 사이보다 홍 목사님과 사이가 더 크다. 하지만 난 이 글에서 그 차이에 대해서 말하고 싶지 않다. 반미나 친북에 대해서도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다. 그런 것을 좋지 않게 생각하는 독자를 고려해서가 아니다. 다만 내가 목사로서 이 분과 함께 지내면서 보고 느끼고 배운 것들에 대해서만 얘기하고 싶다. 아크로 독자들이 목사도 아닌데 목사로서 뭘 배웠는지가 뭐 그리 궁금하겠냐마는 이 분을 빼놓고는 내 신앙여정 얘기가 안 되니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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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은 정말 상식적이고 가식 없이 진실하고 소탈한 분이다. 이게 무슨 대수로운 일이냐고? 맞다. 대수로운 일 아니다. 하지만 실제론 무지 대수로운 일이다. 적어도 목사들 세계에서는. 목사는 상식적이고 가식 없고 소탈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 목사 만나기가 쉽지 않다. 오래 전에 서울의 한 초대형교회(이걸 요즘에는 ‘메가처치’[mega-church]라고 부른단다. 아마 초대형교회보다는 어감[語感]이 나은 모양이다)의 잘 나가는 목사가 젊은 목사들 모아놓고 ‘목사는 적당히 가면을 쓸 줄 알아야 한다’는 요지의 강연을 했단다. 목사는 가면 쓰는 일이 수치스런 일이 아니라 거의 당당한 일이란 게 상식이 됐다.
상식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고 가식 없이 목에 힘주지 않고 사람 대하고 거기다가 소탈하기까지 한 목사는 정말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데 이분은 정말 상식적이고 가식 없고 소탈하다. 일할 때는 사리판단 정확하고 리더십도 있고 정열도 있고 게다가 일벌레이지만 누구처럼 아랫사람 ‘쪼인트’도 안 깐다. 아랫사람이 일 잘 못한다고 호통치지도 않는다. 게다가 일하는 자리가 아닌 데서는 얼마나 소탈하고 사람들을 격의 없이 대하는지, 같이 시간을 지내다보면 나도 모르게 감히 ‘맞먹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놀라곤 한다. 일류대학 나오고 박사학위도 있고 많은 사람들이 따르고 존경하는 이 분에게 가식과 몰상식과 권위주의는 눈을 씻고 찾아보려고 해도 없다. 이게 내가 이분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다. 내게도 괜히 목이 힘주고 권위 있는 척하고 이상하게 행동하는 목사를 보면 감자 먹여주고 싶은 마음이 많았다. 그런데 이분을 만나기 전까지 난 목사들 나쁜 모습만 봐왔지 좋은 모델은 한 명도 만나지 못했었다. 그래서 ‘저렇게는 되지 말아야지...’하는 생각은 많이 했지만 ‘저렇게 돼야겠네!’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분은 만나본 적이 없는데 바로 이 분이 그런 분이었다. 그 후로는 다른 모델을 찾을 필요가 없었다. 이 분이 필요한 모든 걸 다 보여줬으니까.
이 분과 같이 일하기 시작했을 때는 사실 좀 의심스러웠다. 지금도 1988년 KBS의 심야토론 사건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해 가을 어느 날에 ‘민주화 과정에서의 이념 문제’(내가 지금까지 주제를 정확하게 외우고 있다니!)란 주제의 심야토론에 나간 목사님은 당시 절대금기였던 북한의 주체사상을 자유롭게 공부하고 토론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뒤로 넘어가게 만들었다. 그때가 1988년이 아니라 1987년이었다면 ‘이 양반은 미국의 첩자가 분명하다’고 생각했을 거다. 앞뒤 안 가리고 너무 튀었고 너무 왼편으로 치우친 얘기를 ‘분별없이’ 마구 해댔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땐 대학 학생회들이 이 분을 강사로 많이 초빙했다. 하지만 그땐 이미 같이 일을 한지 2년이 가까워온 시점이었고 그만큼 내가 이분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랑 생각은 달랐지만 믿음이 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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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글이 길어졌으므로 한 가지만 더 말하겠다. 난 이분에게 교회 안에서 모든 일을 민주적으로 결정하고 실행할 수 있음을 배웠다. 상식적이고 가식 없고 소탈한 것이 목사 개인의 성품이라면 교회 안에서 모든 일을 민주적으로 결정하고 실행하는 일은 교회의 지도자로서 반드시 갖춰야 할 자질이라고 생각한다. 난 이분에게서 이 평범하지만 매우 중요한 사실을 배웠고 훈련받았다.
“사람은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에 민주적이어야 하고 짐승이 아니기 때문에 민주적일 수 있다”라는 말을 아는 목사는 많지만 실천하는 목사는 찾기 힘들다. 교회가 자기 것인 줄 안다. 교회가 자기 것이 아니라 교인들의 것임을 아는 목사, 교회 모든 일의 주체는 교인임을 아는 목사, 이거 그리 흔치 않다. 그게 비극이지만. 이런 말하면서도 한편으론 창피하기 짝이 없다. 이런 당연한 말을 뭐 대단한 거나 된다는 듯이 길게 말하고 있으니...
‘겸손’이란 말은 이 분과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 이 분은 흔히 말하는 ‘겸손한’ 분은 아니다. 쓸데없이, 진실하지도 않게 남 앞에서 겸양 떠는 법이 없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 분은 언제나 남을 존중한다. 남의 생각을 존중하고 남의 의견을 존중하며 남이 살아가는 방식을 존중한다. 남의 종교를 존중하고 남의 사상을 존중한다. 그래서 이 분에게는 스님 친구들도 많고 원불교 법사 동지들도 많다. 가톨릭 신부는 말할 것도 없다. 교회 안에서도 교인들 간에 의견이 대립되면 웬만해서는 투표로 결정하지 않는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어떻게든 합의를 유도하려 애쓴다. 교회 직책을 결정하는 투표에 절대로 관여하지 않는다. 소위 ‘자기 사람’을 자리에 앉히려 하지 않는다. 이분은 평생 목회하면서 그런 편법을 쓴 적이 없다.
난 이 분께 이런 것들을 배웠다. 목사는 교인을 믿어야 한다고. 그리고 교인들 스스로 성장하도록 돕는 사람이 목사라고. 아무래도 내가 교인들보다는 신학공부를 더 많이 했고 신앙에 대해서 더 많이 생각하겠지만 그게 권위 내세울 근거는 아니라고. 다만 서로 이해하고 존중하면서 스스로 설 수 있도록 서로 돕고 같은 목표를 향해 어깨 걸고 함께 걸어갈 수 있도록 끌어주고 당겨주면 되는 거라고.
그런데도 이 분은 지금까지 날 안 선생님의 제자라고만 생각하신다. 어디서든 날 소개할 때 ‘안 선생님이 아끼는 제자’라고 소개하신다. 하지만 이 분은 내게 유일한 목사이고 목회의 스승이다. 아직 이 말을 한 번도 해본 적은 없지만. 이 분을 다시 만나면 제일 먼저 그렇게 말할 것이다. 당신은 목사로서 내 유일한 스승이시라고. 오늘은 이 분의 웃는 얼굴이 더 보고 싶다. 흘린 밥알을 주워드리면서 같이 밥 먹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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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목사님, 이젠 몸도 영혼도 자유롭게 평안히 안식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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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04월 02일 그분이 식사하는 모습이 영 불편해 보였다. 손놀림이 적잖이 거북해 보였다. 가끔 밥알이 바닥에 떨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아는 체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아내도 놀란 눈치였다. 소문은 들었지만 설마 했다. 그런데 우리 눈으로 직접 본 것이다. 세상에, 이런 일이... 이 분이 이런 모습을 보이다니!
이곳을 오가는 서울 손님들에게 이 분의 건강에 대해서 간혹 얘기는 들어왔는데 3년 전 이 분이 이곳에 오셔서 내 집에서 일주일 정도 머무실 때 내 눈으로 보고 말았다. 그때 연세가 70세였다. 일흔 노인(?)에게 중풍은 그리 예외적인 일은 아니다 싶지만 이 분이 이렇게 될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지금, 들리는 소문에 건강이 더 나빠졌다고 한다. 하긴 점점 더 나빠지겠지, 낫는 병이 아니니까... 이 분을 오래 아는 사람들은 너무 가슴이 아파 돌아서서 눈물을 훔치곤 한다. 그냥 세월무상을 말하고 말기엔 너무 가슴이 쓰리다.
난 중풍이나 치매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는 모양이다. 그런 병을 소재로 한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가슴이 먹먹하고 눈물이 앞을 가려 잘 보지 못한다. 몇 년 전에 노희경 작가가 쓴 <꽃보다 아름다워>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모시던 고두심이 자기도 치매에 걸리는 드라마다. 얼마나 눈물이 나던지 드라마에 집중할 수 없을 정도였다. 재작년인가에 본 <Away from Her>도 그랬다. 치매에 걸려 요양소에 있는 아내를 만나러 온 남편이 얼마나 안쓰럽던지... 오래 기억에 남을 작품들이다. 그런데 내가 가장 존경하고 내게 가장 큰 가르침을 주신 두 분 중 한 분이 중풍을 맞으신 거다. 영화도 드라마도 아니고 현실에서 말이다.
그 분은 홍근수 목사님이다. 아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을 터이고 안다고 해도 좋지 않은(?) 분으로 아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1980년대 말 이후 한국의 민주화와 통일운동에 관여했거나 관심 있게 지켜본 사람은 이 분 이름을 들어봤을 거다. 홍 목사님은 16년간 서울 향린교회 담임목사로 일한 후 2004년에 은퇴하셨다.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몸이 됐지만 그 자유로운 영혼이 제2의 인생을 살기 시작했을 때 뜻하지 않은 병 때문에 지금은 거동조차 자유롭지 않다. 더 가슴 아픈 건, 몸은 말을 안 듣는데 생각은 극히 정상이라는 사실이다. 불편한 몸을 보고 말을 나눠보면 다시 한 번 놀란다. 겉으로 보면 치매환자 비슷해 보이는데 엉뚱한 말을 하기는커녕 생각은 지극히 정상적이고 정확하고 날카롭다. 단지 그 생각을 말로 표현하는 데 어려움이 있을 뿐이다. 정신은 멀쩡한데 혀가 말을 안 듣고 몸이 맘대로 움직이지 않으니 얼마나 더 안타깝고 절망적일까 하고 생각하니 더 마음이 아프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평생 건강을 위해 운동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다는데 그래서일까? 남의 부탁을 거절 못해 온갖 운동단체의 직책을 다 맡아 일하셨는데 그게 과중했던 걸까? 아니면 1991년 안기부에 끌려갔을 때 고문은 받지 않았다지만 그래도 정신적, 육체적으로 힘든 시간을 보낸 게 원인일까? 그것도 아니면 1년 반 동안의 국립대학 재학(국가보안법 학과) 시절이 그렇게 고통스러웠던 걸까?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중풍이란 병이 사람 골라서 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 분에게만큼은 이런 일이 안 생길 줄 알았다. 아니, 그런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 더욱 충격적이라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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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무 선생님을 만났던 때와 거의 비슷한 시기인 1986년에 이 분을 처음 만났다. 대학 법대 선배님이기도 한 이 분은 1974년 유학을 떠나 학위 받고 보스턴의 한 교회에서 목회하며 13년을 보낸 후 1986년이 저무는 마지막 날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영구 귀국했다. 서울 향린교회 담임목사로 취임하기 위해서였다. 그때가 1986년 가을쯤이었는데 신학대학원 졸업반이었던 나는 청년 전담 전도사 후보자였다. 청년 전담 전도사가 뭐 그리 대단한 자리냐고? 물론 대단한 자리는 아니다. 대단한 자리라면 내가 선두주자였을 턱이 있나. 게다가 그때는 잘 몰랐는데 그렇게 목회 경력을 ‘험하게’ 시작해 스펙이랄 것 없는 스펙을 쌓은 덕에 지금은 어느 교회도 날 오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러니 여기 그냥 죽치고 있을 수밖에. 만일 그때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그 대단치도 않은 자리를 맡겠다고 했을까? 나도 궁금하다. 어쨌든 현재 내 스펙은 안병무 선생님과 홍근수 목사님 두 분을 만난 덕분에 현재 이 모양이 됐다. ‘그래서’(‘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난 이분들이 너무 고맙다.
홍 목사님은 안병무 선생님 같이 유명한 분은 아니다. 13년의 미국 생활이라는 공백이 있기 때문에 처음에 한국에서 이 분을 아는 사람이 그리 많진 않다. 1980년대 중반 이전에 미국에 온 사람들에게는 더 생소하겠지. 하지만 한국의 진보적인 교회운동, 또는 한국사회의 민주화와 민족통일운동에 관여하거나 관심 있는 분들에게는 널리 알려져 있는 분이다. 나는 1987년부터 7년 동안 이분 밑에서 전도사와 부목사로 일했고 교회 밖에서도 여러 단체에서 함께 활동했기 때문에 우린 서로를 잘 알고 있다. 내가 배운 것도 참 많다. 목사로서 내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분을 들라면 이 분을 드는 데 1초도 안 걸린다.
홍 목사님은 역시 목사인 아내 김영 목사님(남편은 장로교 목사, 아내는 감리교 목사다)과 사이에 딸 하나와 두 아들을 두셨다. 귀국 당시에는 위로 둘은 대학생이었지만 막내는 고등학생이어서 어려움이 적지 않았다. 지금은 모두 장성해서 잘 살고 있지만 막내가 고딩 때는 가족 없이 친구 집에 기거하며 힘들게 살았던 모양이다. 7~8년 쯤 전에 목사님이 내게 오셔서 한국 갈 생각 없느냐, 있으면 좋은 교회 소개하겠다고 하셨을 때(정말 좋은 교회였다) 내가 아이들 때문에 곤란하다고 말했더니 금방 수긍하시고 없던 얘기로 하신 적이 있다. 당신 막내가 겪었던 어려움을 되풀이시키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늦은 감이 있지만 그때가 내 스펙을 바꿀 최후의 기회였는데...
홍근수 목사님과 부인 김영 목사님
홍 목사님에게는 별명이 많다. 반미 목사, 친북 목사, 빨갱이 목사 등등... 대개가 목사와 어울리지 않는 별명들이다. 스스로도 “난 미국으로 갔을 때는 친미 목사였는데 13년 동안 미국 살면서 반미 목사가 됐다”고 말하는 판이니 반미 목사라는 별명에 대해서는 별 불만이 없는 듯하다. 미국의 모든 것에 반대하는 게 아니라 군사정책과 대외정책, 특히 제3세계에 대한 신식민지정책(이런 말 지금도 쓰나? 요즘은 ‘신자유주의’란 말을 많이 쓰던데...)에 반대하는 거라는 단서만 달려 있다면 이 분은 ‘반미 목사’라는 타이틀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 분은 지금도 평화협정 체결과 주한미군 철수에 집중해서 운동을 벌이는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약칭 ‘평통사’)이란 단체의 상임대표다.
하지만 ‘친북 목사’나 ‘빨갱이 목사’란 별명에 대해서는 얘기가 다르다. 자신은 그저 북한에 대해서 무조건 반대만 하지 말고 같은 겨레라는 입장에서 상대방을 제대로 알고 나쁜 것은 나쁘다 하고 좋은 것은 좋다고 하며 점차 동질성을 회복하자는 생각일 뿐인데 남한 상황이 워낙 일방적이어서 자신에게 그런 별명이 붙었다고 불만스러워하신다. 한번 붙여진 별명은 쉽게 바뀌거나 없어지지 않는 모양이다. 그래서 건강이 매우 좋지 않은 지금도 가끔 길에서 봉변당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나는 많은 부분에서 홍 목사님과 생각이 다르다. 안병무 선생님과 생각이 다른 부분이 있듯이 홍 목사님과도 그렇다. 다른 정도가 안 선생님과 사이보다 홍 목사님과 사이가 더 크다. 하지만 난 이 글에서 그 차이에 대해서 말하고 싶지 않다. 반미나 친북에 대해서도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다. 그런 것을 좋지 않게 생각하는 독자를 고려해서가 아니다. 다만 내가 목사로서 이 분과 함께 지내면서 보고 느끼고 배운 것들에 대해서만 얘기하고 싶다. 아크로 독자들이 목사도 아닌데 목사로서 뭘 배웠는지가 뭐 그리 궁금하겠냐마는 이 분을 빼놓고는 내 신앙여정 얘기가 안 되니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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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은 정말 상식적이고 가식 없이 진실하고 소탈한 분이다. 이게 무슨 대수로운 일이냐고? 맞다. 대수로운 일 아니다. 하지만 실제론 무지 대수로운 일이다. 적어도 목사들 세계에서는. 목사는 상식적이고 가식 없고 소탈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 목사 만나기가 쉽지 않다. 오래 전에 서울의 한 초대형교회(이걸 요즘에는 ‘메가처치’[mega-church]라고 부른단다. 아마 초대형교회보다는 어감[語感]이 나은 모양이다)의 잘 나가는 목사가 젊은 목사들 모아놓고 ‘목사는 적당히 가면을 쓸 줄 알아야 한다’는 요지의 강연을 했단다. 목사는 가면 쓰는 일이 수치스런 일이 아니라 거의 당당한 일이란 게 상식이 됐다.
상식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고 가식 없이 목에 힘주지 않고 사람 대하고 거기다가 소탈하기까지 한 목사는 정말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데 이분은 정말 상식적이고 가식 없고 소탈하다. 일할 때는 사리판단 정확하고 리더십도 있고 정열도 있고 게다가 일벌레이지만 누구처럼 아랫사람 ‘쪼인트’도 안 깐다. 아랫사람이 일 잘 못한다고 호통치지도 않는다. 게다가 일하는 자리가 아닌 데서는 얼마나 소탈하고 사람들을 격의 없이 대하는지, 같이 시간을 지내다보면 나도 모르게 감히 ‘맞먹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놀라곤 한다. 일류대학 나오고 박사학위도 있고 많은 사람들이 따르고 존경하는 이 분에게 가식과 몰상식과 권위주의는 눈을 씻고 찾아보려고 해도 없다. 이게 내가 이분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다. 내게도 괜히 목이 힘주고 권위 있는 척하고 이상하게 행동하는 목사를 보면 감자 먹여주고 싶은 마음이 많았다. 그런데 이분을 만나기 전까지 난 목사들 나쁜 모습만 봐왔지 좋은 모델은 한 명도 만나지 못했었다. 그래서 ‘저렇게는 되지 말아야지...’하는 생각은 많이 했지만 ‘저렇게 돼야겠네!’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분은 만나본 적이 없는데 바로 이 분이 그런 분이었다. 그 후로는 다른 모델을 찾을 필요가 없었다. 이 분이 필요한 모든 걸 다 보여줬으니까.
이 분과 같이 일하기 시작했을 때는 사실 좀 의심스러웠다. 지금도 1988년 KBS의 심야토론 사건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해 가을 어느 날에 ‘민주화 과정에서의 이념 문제’(내가 지금까지 주제를 정확하게 외우고 있다니!)란 주제의 심야토론에 나간 목사님은 당시 절대금기였던 북한의 주체사상을 자유롭게 공부하고 토론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뒤로 넘어가게 만들었다. 그때가 1988년이 아니라 1987년이었다면 ‘이 양반은 미국의 첩자가 분명하다’고 생각했을 거다. 앞뒤 안 가리고 너무 튀었고 너무 왼편으로 치우친 얘기를 ‘분별없이’ 마구 해댔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땐 대학 학생회들이 이 분을 강사로 많이 초빙했다. 하지만 그땐 이미 같이 일을 한지 2년이 가까워온 시점이었고 그만큼 내가 이분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랑 생각은 달랐지만 믿음이 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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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글이 길어졌으므로 한 가지만 더 말하겠다. 난 이분에게 교회 안에서 모든 일을 민주적으로 결정하고 실행할 수 있음을 배웠다. 상식적이고 가식 없고 소탈한 것이 목사 개인의 성품이라면 교회 안에서 모든 일을 민주적으로 결정하고 실행하는 일은 교회의 지도자로서 반드시 갖춰야 할 자질이라고 생각한다. 난 이분에게서 이 평범하지만 매우 중요한 사실을 배웠고 훈련받았다.
“사람은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에 민주적이어야 하고 짐승이 아니기 때문에 민주적일 수 있다”라는 말을 아는 목사는 많지만 실천하는 목사는 찾기 힘들다. 교회가 자기 것인 줄 안다. 교회가 자기 것이 아니라 교인들의 것임을 아는 목사, 교회 모든 일의 주체는 교인임을 아는 목사, 이거 그리 흔치 않다. 그게 비극이지만. 이런 말하면서도 한편으론 창피하기 짝이 없다. 이런 당연한 말을 뭐 대단한 거나 된다는 듯이 길게 말하고 있으니...
‘겸손’이란 말은 이 분과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 이 분은 흔히 말하는 ‘겸손한’ 분은 아니다. 쓸데없이, 진실하지도 않게 남 앞에서 겸양 떠는 법이 없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 분은 언제나 남을 존중한다. 남의 생각을 존중하고 남의 의견을 존중하며 남이 살아가는 방식을 존중한다. 남의 종교를 존중하고 남의 사상을 존중한다. 그래서 이 분에게는 스님 친구들도 많고 원불교 법사 동지들도 많다. 가톨릭 신부는 말할 것도 없다. 교회 안에서도 교인들 간에 의견이 대립되면 웬만해서는 투표로 결정하지 않는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어떻게든 합의를 유도하려 애쓴다. 교회 직책을 결정하는 투표에 절대로 관여하지 않는다. 소위 ‘자기 사람’을 자리에 앉히려 하지 않는다. 이분은 평생 목회하면서 그런 편법을 쓴 적이 없다.
난 이 분께 이런 것들을 배웠다. 목사는 교인을 믿어야 한다고. 그리고 교인들 스스로 성장하도록 돕는 사람이 목사라고. 아무래도 내가 교인들보다는 신학공부를 더 많이 했고 신앙에 대해서 더 많이 생각하겠지만 그게 권위 내세울 근거는 아니라고. 다만 서로 이해하고 존중하면서 스스로 설 수 있도록 서로 돕고 같은 목표를 향해 어깨 걸고 함께 걸어갈 수 있도록 끌어주고 당겨주면 되는 거라고.
그런데도 이 분은 지금까지 날 안 선생님의 제자라고만 생각하신다. 어디서든 날 소개할 때 ‘안 선생님이 아끼는 제자’라고 소개하신다. 하지만 이 분은 내게 유일한 목사이고 목회의 스승이다. 아직 이 말을 한 번도 해본 적은 없지만. 이 분을 다시 만나면 제일 먼저 그렇게 말할 것이다. 당신은 목사로서 내 유일한 스승이시라고. 오늘은 이 분의 웃는 얼굴이 더 보고 싶다. 흘린 밥알을 주워드리면서 같이 밥 먹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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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목사님, 이젠 몸도 영혼도 자유롭게 평안히 안식하십시오.
첫댓글 저도 영결예배 갔었는데 뵙지 못했군요. 저도 홍근수 목사님과는 서울구치소에서 같은 시기에 감옥살이한 특별한 인연도 있고, 또 저를 무척 아껴주어서 좋아하고 존경했는데 그렇게 안타깝게 가셨네요. 잊을 수 없는 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