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념비
상촌장학회, 화서문하연원(華西門下淵源) 어록비 건립
상촌장학회(회장 이정숙)는 애국애족정신 선양운동의 하나로 화서문하연원(華西門下淵源)의 금계 이근원(錦溪 李根元), 의암 류인석(毅菴 柳麟錫), 하사 안승우(下沙 安承禹), 괴은 이춘영(槐隱 李春永) 등 네 선생의 어록비 비석을 제작하여 양동면 석곡리 양평의병묘역에 세웠다.
돌이켜보면 항일독립운동이 화서학파의 척사상소운동 - 의병운동 - 독립운동으로 이어진 결과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조선 말기 양평의 화서 이항로(華西 李恒老, 1792~1868) 선생은 오로지 나라를 걱정하시어 벼슬을 사양하고 벽계에서 도학을 강론하여 도학ㆍ충효ㆍ절의ㆍ문장 등의 수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그 중 양평의 금계 이근원 선생은 화서 선생의 위정척사사상을 계승하고 도학을 강론하여 항일독립운동지사 등 수백명의 제자를 배출하였다.
춘천의 의암 류인석 선생은 금계 선생과 동문수학하셨으며, 1895년 을미의병을 주도하시고, 연해주에서 13도의군도총재로 항일독립투쟁을 하시는 한편 후학 양성에 진력하여 수백여명의 독립투사를 배출하였다. 양평의 안승우ㆍ이춘영 두 선열은 이근원ㆍ류인석 선생 문인으로 을미년 의병봉기를 전국에서 가장 먼저 주도하고 의암선생 휘하에서 중군장으로 싸움터에서 순국하셨다.
금년은 삼일운동 90주년, 임시정부수립 90주년, 안중근 의사 의거 10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이다.
그러나 국내외적으로 경제위기를 당하여 국민 모두가 경제위기 극복을 걱정하고 있는 어려운 시기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나라의 기둥이 되는 선현과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국권 회복과 민족 생존권을 되찾기 위하여 살신성인(殺身成仁)하고 사생취의(捨生取義)한 조상들의 고귀하고도 거룩한 뜻은 어려울 때일수록 강조되는 것이니, 선현(先賢)과 선열(先烈)을 본받고 기리는 것도 경제난국을 극복하는 정신적 에너지가 아닐 수 없다.
'문화경제신문'은 후원사의 하나로서 화서문하연원 어록비 건립이 양평의 항일독립운동사 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운동사의 뜻깊은 일이라 생각되어 이 일을 적극 후원하였다.
다음은 어록비의 내용이다.
▲ 하나. 앞면
금계 이근원 선생 어록비
「擧天下皆曰日本 我獨知有朝鮮也」
온 천하가 모두 일본을 말하여도
나 홀로 조선이 있다는 것을 알뿐이다.
경(敬)은 마음을 보존하는 양약(良藥)이다.
이 세상에는 한 순간도 경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없으며
한 가지도 의(義)롭지 않아도 되는 일이 없다.
- 금계 이근원(1840~1918) 선생 서거 91주년을 기념하여 -
단기4342(서기 2009)년 8월 15일
세움 : 상촌장학회
후원 : 전주이씨전성군파평해군종회
문화경제신문사ㆍ월간선진한국
음기(陰記)
금계 이근원(錦溪 李根元, 1840~1918) 선생은 성종대왕 11자 전성군(全城君)의 11대 손으로 지평면 월산리에서 노가당[養翕]공의 아들로 태어나셨다. 화서 이항로, 중암 김평묵, 성재 류중교 세 선생 문하에서 의암 류인석ㆍ항와 류중악 선생과 동문 수학하시었다. 스승의 도학과 의리정신을 계승하여 벼슬에 뜻을 두지 아니하고 스승의 길을 따랐다. 선생은 반초대(反招臺)를 만들고 처이부지(處而扶持)의 의리로써 학문과 교육에 전념하셨다.
장담강회에 출입하시고 광탄강회를 주관하셨다.1895년 신병으로 지평의병에 참여하진 못하셨지만 괴은 이춘영의 의병봉기에 영향을 주었으며, 군자금을 두어 차례 내셨다.1905년에는 을사늑약에 분개하여 순사(殉死)한 분들의 충의를 기렸고, 을사오적의 죄를 극렬 토죄(討罪)하셨다.1906년 일진회의 무고로,1910년 경술국치 때엔 소위 은사금(恩賜金) 거절 등으로 일본 헌병대에 붙잡혀가 고문으로 기절하는 등 고초를 겪기도 하셨다.
금계선생은 화서선생을 계승하여 양평에서는 유일하게 후학을 양성한 학자로 주회암ㆍ송우암ㆍ이화서ㆍ김중암ㆍ류성재 오현(五賢)의 영정을 모시고 삭망으로 절하며 정성껏 존경하고 사모하셨다. 또한 일직당(一直堂)을 세워 후학을 양성하셨는데, 김상태 김태원 안승우 이규현 등 수많은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를 배출하시어 조국광복에 이바지하시다 79세로 별세하셨다.
문인 윤정학이 제문에서 “선생의 의리는 천지보다 높고 일월(日月)보다 빛난다고 말하더라도 가늠할 것이다”고 하였으니 여기에 선생의 평가는 모두 드러났다고 하겠다.
지평향교전교 안승규
전주이씨전성군파평해군종회장 이해욱 記
(주)물러나서 나라를 붙잡는다는 뜻의 처이부지(處而扶持)는 의병활동 등으로 나아가서 나라를 붙잡는다는 출이부지(出而扶持)오 함께 위기에 처한 나라를 붙잡겠다(살리겠다)는 정신을 말함.
▲ 둘. 앞면
의병대장ㆍ13도의군도총재
의암 류인석 선생 어록비
한 나라가 남의 나라를 빼앗을 때는
먼저 인심을 빼앗으며
인심을 빼앗으면 국토를 빼앗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제 의거(義擧)는 두 가지 목표가 있으니,
하나는 성인의 도(道)를 보존하는 것이요
하나는 국가의 원수를 갚는 것이다.
저 적들이 나라를 압박하니
의당 급하게 인심을 선동하여 저들의 기세를 꺾어야 한다.
또 대사(大事)를 이루려면 온 나라가
힘을 합치지 않으면 안 된다.
단기4342년(서기2009)년 8월 15일
세움 : 상촌장학회
후원 : 고흥류씨부학공파종회
월간선진한국ㆍ문화경제신문사
음기(陰記)
의암 류인석(毅菴 柳麟錫, 1842~1915) 선생의 본관은 고흥(高興)으로 강원도 춘천시 남면에서 중곤(重坤)공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셨다. 화서 이항로, 중암 김평묵, 성재 류중교 세 선생 문하에서 금계 이근원 항와 류중악 선생과 수학하시었다. 선생은 세 선생의 도통(道統)과 위정척사사상을 정통으로 계승하고 민족자주의식으로 발현하여 항일독립투쟁으로 연결시키는 중추적 역할을 하셨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이라는 변괴가 있자 제천 장담에서 문인사우들에게 처변삼사(處變三事)를 제시하시고 지평의병 창의를 간접적으로 후원하셨다. 모친 상중임에도 이필희 이춘영 안승우 등 제자들의 간곡한 추대로 영월에서 대장이 되어 크게 전과를 올렸다. 지평의병을 기반으로 제천에서 호좌의진을 출범하여 충주관아를 점령하고 영남까지 군세를 떨치는 등 빛나는 전과를 올리며 최대의 연합군을 결성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본군과 장기렴군의 공격으로 충주성을 내어주고 제천도 빼앗기게 되니, 재기를 도모하기 위하여 서행(西行) 길에 올랐다. 그리하여 압록강을 건너갔으나 1896년 8월 무장해제 당해 이국 땅 파저강변에서 부득이 의병을 해산하셨다.
1908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으로 가 항일세력을 규합하시고 1910년 ‘13도의군도총재’에 추대되어 항일독립투쟁에 전력하셨다. 한편 국내를 출입하시며 북한지역에서 강회(講會)를 열며 도학과 의리를 강론하시어 항일독립운동의 근간을 이루는 수많은 제자를 배출하셨다. 이렇게 평생을 의(義)자의 깃발을 붙잡고 조국광복을 위해 풍찬노숙(風餐露宿)하며 동분서주하시다 요동성 관전현 방취구(芳翠溝)에서 74세로 서거하셨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건국공로를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강원대학교명예교수 박한설
고흥류씨부학공파종회장 류훈상 記
(주1)처변삼사(處變三事):의병을 일으켜 일제를 축출하는 거의소청(擧義掃淸), 해외로 망명하여 대의를 지키는 거지수구(去之守舊), 의리를 간직한 채 치명(스스로 자결하여 뜻을 지킴)하는 자정수지(自靖遂志) 등 세 가지를 말한다. 이와 같은 세 가지 행동 방안은 장차 유인석이 항일 운동을 전개해가는 데 그 준거의 역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근대 수구파 지식인, 선비들의 기본적인 처신 방향을 제시하였다는 데 그 의의가 크다.
(주2)풍찬노숙(風餐露宿):바람과 이슬을 무릅쓰고 한데서 먹고 잠, 곧 큰 일을 이루려는 사람의 고초를 겪는 모양
▲ 셋. 앞면
순국선열
하사 안승우 선생 어록비
사람이 짐승으로 변하고 문명인이 야만인이 되는 것은
큰 변이요 큰 악이니,
천지(天地)에 용납되지 못할 일이다.
이 때문에 미약한 선비들이 자기 분수를 헤아리지 않고
‘반역자는 누구나 잡아 죽일 수 있다’고 한
춘추대의(春秋大義)에 입각하여
세상에 의사(義士)라고는 한 사람도 없는 시대를 통탄하고
번쩍 일어나 크게 외치며 성패를 따지지 않는 것이다.
게다가 국모의 원수는 토벌하지 않을 수 없으며
임금의 욕됨은 씻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단기4342년(서기2009)년 8월 15일
세움 : 상촌장학회
후원 : 순흥안씨동오공파종친회
문화경제신문사ㆍ월간선진한국
(주)춘추대의(春秋大義):대의명분을 밝혀 세우는 큰 의리
음기(陰記)
안승우(安承禹, 1865~1896) 선생의 자는 계현(啓賢), 호는 하사(下沙), 본관은 순흥(順興)이니 지평의병 창의를 지도 후원한 퇴앙공[鍾應]의 첫째아들이다. 양동면 출신으로 화서선생의 제자인 성재 류중교, 금계 이근원, 의암 류인석 세 선생 문하에서 수학하여 도학적 의리사상인 위정척사사상이 철저하셨다.
하사는 1895년 일본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공포되자 류인석 선생이 제천 장담에서 처변삼사(處變三事)를 제의하였을 때에 거의소청(擧義掃淸)을 주장하셨다. 그리하여 죽기를 작정하고 이필희ㆍ이춘영ㆍ서상렬ㆍ김백선ㆍ김사정 여러 동지들과 함께 원주 안창에서 지평의병을 가장 먼저 창의하셨다.
제천에서 이춘영과 함께 이필희를 대장에 추대하고 군무도유사로 직무를 수행하고 다시 영월에서 동지들과 류인석선생을 대장으로 추대하였다. 그 막하에서 전군장으로 충주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춘영이 순국하자 그 후임으로 중군장에 임명되고 제천 남산성 전투에서 분투하다 순국(殉國)하시니 32세였다.
광암 이규현이 육의사찬문(六義士讚文)에서 “굳센 자질과 열렬한 그 기운은 대원수(大怨讐)와는 같은 하늘 아래 설 수 없었다. 도적의 괴수를 개 꾸짖듯 하며 비분강개하여 자기 몸을 희생하여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였으니 스스로 인(仁)을 이루었도다” 하며 찬양하였으니 무엇을 덧붙일 수 있겠는가.
정부에서는 선생의 건국공로를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순흥안씨동오공종친회장 안도희
국사편찬위원회사료조사위원 홍정표 記
(주)처변삼사(處變三事):의병을 일으켜 일제를 축출하는 거의소청(擧義掃淸), 해외로 망명하여 대의를 지키는 거지수구(去之守舊), 의리를 간직한 채 치명(스스로 자결하여 뜻을 지킴)하는 자정수지(自靖遂志) 등 세 가지를 말한다. 이와 같은 세 가지 행동 방안은 장차 유인석이 항일 운동을 전개해가는 데 그 준거의 역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근대 수구파 지식인, 선비들의 기본적인 처신 방향을 제시하였다는 데 그 의의가 크다.안승우선생은 처변삼사중 의병을 일으켜 일제를 축출하자는 거의소청(擧義掃淸)을 주장하여 의병을 일으켰다.
▲ 넷. 앞면
순국선열
괴은 이춘영 선생 어록비
천하를 위하는 자는 집안을 돌보지 않는다.
나는 지금 사람이 되느냐, 짐승이 되느냐, 하는
판가름을 당하여 바른 길을 찾아
죽고자 하는 것은 실로 마음에 달갑게 여기는 바이다.
다만 차마 못할 일은 늙으신 어머니가 계시는데
끝내 봉양을 해드리지 못하는 것이니
원하건대 그대는 아무쪼록 내 뜻을 받아서
내가 살아 있지 않다 생각하지 말고
정성과 공경을 다하여
나의 지하의 넋을 위안해 주오.
단기4342년(서기2009)년 8월 15일
세움 : 상촌장학회
후원 : 월간 선진한국ㆍ문화경제신문사
음기(陰記)
이춘영(李春永, 1869~1896) 선생의 자는 우삼(友三), 호는 괴은(槐隱), 본관은 덕수(德水)이니, 민화[敏和]공의 둘째아들이다. 양동면 출신으로 의암 류인석 선생을 종유(從遊)하여 학문을 닦아 위정척사사상이 확고하셨다. 그리고 금계 이선생의 영향을 받고 안승우와는 사상례(士相禮)를 하는 절친한 사이였다.
1895년 일제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공포되자 의암선생이 제천에서 처변삼사를 제시한 후, 안퇴앙과 계책을 논의하고 안승우ㆍ김백선ㆍ김사정ㆍ김용준 등 동지들과 함께 안창 만수암에 모여 의병봉기를 논의하였는데, 의암선생에게 진퇴를 물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창의호국의 깃발을 높이 들었다.
지평의병의 실질적인 지휘자로 의병진을 이끌었으니, 제천에서 안승우 등과 함께 이필희를 대장에 추대하여 전과를 올렸다. 순흥에서 대장에 올랐으나 영월에서 다시 류인석 선생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충주성 공략에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중군장으로 충주 수안보전투에서 용전분투하다 순국(殉國)하시니 28세였다.
광암 이규현이 육의사찬문(六義士讚文)에서 “향배를 옳게 보고 정하며, 화하(華夏)를 높이고 이적(夷狄)을 물리치는 계획을 세워 지평에서 거의하여 충주에서 순절하니 충성은 해와 달을 꿰뚫고 신의는 돼지와 물고기에까지 미쳤다”고 공을 찬양하였으니 무엇을 덧붙이겠는가.
정부에서는 선생의 건국공로를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강원대학교명예교수 박한설
덕수이씨문정공파종친회 전회장 이재건 記
앞으로 상촌장학회는 2010년에는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을 기념하여 안 의사(華西淵源) 유묵비를 양평군 서종면 노문리 벽계에 세울 예정이고, 2011년에는 만주의 항일독립운동 총집결체인 대한독립단 도총재 박장호 선생(華西門人, 순국)의 유묵비를 선생의 고향인 가평에 세울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