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후반기 한국관광공사에서 전국민을 대상으로한 관광지 선호도 여론조사를 실시했는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가보고 싶은 관광지가 어디냐는 질문에 지금까지 한번도 예외없이 1위였던
제주도를 제치고 단양이 처음으로 1위를 했다고 한다. 또한 작년 한해 단양을 방문한 관광객이
820만명으로 700만명을 조금 넘은 제주에 비해 수치상으로는
훨씬 앞선다.제주도보다 접근성이 좋아서 그런것이라고 추측이된다.
단양을 여행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단양8경의 일부를 돌아보거나 장회나루에서 유람선을 탄다.
이때 유람선 선장이 꼭 들려주는 이야기가 단양군수로 재직하던 퇴계와 관기였던 두향의 사랑이야기다.
나도 2년전에 그 이야기를 쓴적이 있는데 이제는 거의 기정사실화 된것같다.
장회나루- 퇴계와 두향의 애틋한 사랑이야기
(09. 06. 20) http://blog.daum.net/j68021/13744247
그런데 그 이야기가 실제 있었던 것은 아니고 후세에 정비석의
명기열전에서 각색된 이야기란 지적이 더 설득력 있게 들린다.
2009. 10월2일 조선닷컴 보도내용 인용 철인(哲人)의 사랑은 어땠을까?
충북 단양군청 홈페이지 '고을 설화'난에 퇴계가 단양군수로 있을 때 기생 두향과
사랑을 나눈 얘기가 있다. 퇴계는 거문고와 난초 그림에 능한 두향을 묵객처럼 대했다고 한다.
퇴계가 단양을 떠난 뒤 기적(妓籍)에서 빠진 두향은 퇴계와 함께 노닐던 강선대(降仙臺) 아래 초막을 짓고 홀로
살았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면서 '내가 죽거든 그분이 즐겨 찾던 이곳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것이다.
더 살이 붙은 스토리도 있다. 18세 두향이 48세 퇴계에 반했지만 풀 먹인 안동포 같은 님 앞에서 애간장만 탔다.
그러나 상처(喪妻)의 아픔을 지녔던 퇴계는 한 떨기 설중매(雪中梅) 같았던 두향을 마침내 받아들인다.
퇴계가 단양의 절경들을 '단양팔경'으로 지정했을 때 기지를 발휘한 사람도 두향이었다. 옥순봉은 당시 청풍 땅이었는데
두향은 '청풍군수 이지번(李之藩)을 찾아가 옥순봉의 관할을 단양으로 바꾸도록 타협하라'고 권했다.
이별할 때 두향은 눈물과 함께 매화꽃을 선물했다. 퇴계는 평생 이 꽃을 두향 보듯 했다. 그 후로 20년 넘게 퇴계를
그리워하던 두향은 그의 부음을 듣고 통곡한 뒤 강선대에서 남한강 푸른 물로 꽃다운 몸을 던졌다는 얘기다.
단양 장회나루 건너편에 두향의 무덤이 남아 있다. 충주댐 건설로 강선대는 물에 잠겼지만 두향묘는 그를 기리는 사람들에
의해 1984년 위쪽으로 이장(移葬)됐다. 단양 단성면에서는 1979년부터 매년 두향제(杜香祭)를 열고 있다.
이 스토리는 진짜일까? '두향'은 실존인물로 보인다. 조선 후기 임방·이광려 등이 옛 관도(官道) 근처에 있었던 두향묘의
정경을 읊은 시(詩)가 남아 있다. 하지만 '퇴계와 두향의 관계'를 밝힌 조선시대 문헌은 확인되는 것이 없다.
1977년 단양군이 출간한 '단양군지(丹陽郡誌)'는 강선대를 소개하면서 '명기(名妓) 두향의 묘가 있다'고 했을 뿐이다.
퇴계·두향의 관계가 처음 언급된 것은 1970년대 후반 정비석
▲두향이 10대 후반의 나이로 퇴계의 인품을 흠모했고 ▲거문고를 잘 탔으며 ▲단양팔경을 정할 때 중요한 역할을 했고
▲퇴계의 사후 자결했다는 등의 주요 요소들이 이 소설에 들어 있다.
정씨는 퇴계 문중의 인사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명기열전'의 두향편을 엮었다고 했다. 퇴계·두향의 이야기는 이후
퇴계학연구원이 1980년에 낸 '퇴계일화선(退溪逸話選)'에 실렸다. 책의 저자는 다름 아닌 정비석씨였다.
정석태(鄭錫胎) 부산대 점필재연구소 연구교수는 "퇴계가 두향과 관계를 가졌다는 것은 사실(史實)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정 교수는 퇴계의 70년 생애를 날짜별로 고증한 '퇴계선생 연표 월일조록(月日條錄)'의 저자다.
정 교수는 "단양군수로 갔던 1548년(명종 3)은 퇴계 생애 중 정치적으로 위험했던 시기"라고 말했다. 그보다 3년 전 일어난
을사사화에서 간신히 죽음을 면한 뒤 낙향했다가 다시 서울로 온 퇴계를 정적(政敵)들이 호시탐탐 노렸던 것이다.
홍문관 응교가 된 퇴계는 병을 사유로 휴가를 얻거나 청송부사 등의 외직으로 나가기를 청했다. 정 교수는 "퇴계는 중앙으로
부터 달아날 생각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단양은 매우 피폐한 지역이었고 퇴계의 일정은 촉박했다.
퇴계가 단양에 있었던 기간은 9개월 정도다. 기민(飢民) 구제로 눈코 뜰 새 없었는 데다 단양에 도착한 다음 달인 2월에는
차남 채(寀)가 죽었다. 이런 처절한 상황에서 조금만 약점을 잡혀도 서울에선 탄핵 사유가 될 수 있었다.
넷째 형 해(瀣)가 충청도 관찰사가 됐기 때문에 친족이 같은 곳에서 벼슬하는 것을 피하는 상피(相避)의 차원에서 10월 경상도
풍기군수로 전임됐다. 이 때문에 9월부터는 이미 짐을 싸야 했다.
'퇴계가 단양팔경을 정했다'는 얘기도 나중에 지어낸 것이라고 정 교수는 말했다. 퇴계의 시에 나오는 선암(仙岩)은 지금의
하선암인데, 현재 단양팔경으로 돼 있는 중선암과 상선암에 대해서 퇴계는 몰랐다는 것이다.
이지번이 청풍군수를 지낸 것도 21년 뒤인 1569년의 일이니 연대가 맞지 않는다. 조선시대의 지방관들이 국가의 승인 없이
마음대로 군계(郡界)를 수정했다는 것도 일어나기 어려운 일이다.
두향은 누구의 여인이었을까? 정 교수는 "조선 말까지 두향의 무덤에서 제사를 지낸 집안이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산해
(李山海) 가문이란 기록이 있다"고 했다. 이산해의 아버지는 이지번이다. 그는 '토정비결'로 유명한 이지함의 형이다.
이지번은 1556년 퇴계의 권유로 단양 구담봉 밑에 은거할 때 강 양쪽에 칡넝쿨 줄을 묶어놓고 학 모양의 배인 듯한 비학(飛鶴)
을 매달아 타고 다녀 신선이라 불렸다. 구담봉 건너편은 바로 두향이 살았다는 강선대다.
'퇴계의 제자인 이산해가 스승을 기려 제사를 지내 준 것'이란 말도 있지만 정 교수는 "이산해는 퇴계 제자도 아니었고 스승의
여자를 대대로 챙긴다는 게 이치에 맞느냐"고 했다.
퇴계가 여색(女色)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기록도 있다. 1541년 관서 지방에 출장을 갔다 오는 길에 평양에 머물렀는데 평안도
관찰사가 유명한 기생을 치장시켜 접대하려 했는데도 끝내 이를 거부했다고 한다.
퇴계·두향의 러브스토리는 왜 생겼을까? 정 교수는 "퇴계는 조선 후기엔 성인(聖人)의 반열에 들 정도로 추앙됐다"며 "너무
멀게만 느껴지는 역사적 위인에 대해 인간미와 일상적인 체취를 가미하기 위한 방편이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두향제를 주관하는 단양 단성면 발전협의회의 장신일 회장은 "전해지는 이야기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퇴계와 두향의 이야기는
단양에서 있었던 실제 역사가 분명하다"며 "이를 입증할 옛 기록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어쨌든 스토리가 있는 관광을 즐기는 지금 세대에 이 사랑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로맨틱한 환상을 불러 일으킨다.
장회나루에서 배를타면 상류 단양쪽으로 조금 올라갔다가 다니 유턴을 해서 청풍쪽으로 간다.
장회나루. 여기서 타는배는 옥순대교까지만 갔다가 되돌아 온다. 소요시간은 딱 한시간.
성수기엔 미리 예약하지 않으면 한두시간 기다려야 한다.
장회나루. 단양유람선 선착장
장회나루 충주호 유람선 선착장. 여기서 충주나 청풍까지 갈수있다.
빨간표시가 만수위인데 강원도지방에 내린 많은 봄비로 근래에 드물게 물이 많이 찻다.
유람선의 오른쪽에 충주와 단양을 연결하는 36번 국도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우뚝솟은 봉우리가 제비봉이다.
정면에서 올려다본 제비봉
제비가 하늘로 날아오르는 형세다.
제비봉은 단양읍에서 서쪽인 충주호 방면의 단성면 장회리에 위치한 산이다. 단양퍌경중 수상 관광지로 유명한 구담봉과 옥순봉에서
동남쪽 머리위로 올려다 보이는 바위산이 바로 제비봉이다. 산이름이 제비봉이라 불리우는 것은 장회나루에서 유람선을 타고 구담봉
방면에서 이 산을 바라보면 충주호 쪽으로 부챗살처럼 드리워진 바위 능선이 마치 제비가 날개를 활짝 펴고 하늘을 나는 모습처럼
올려다 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제비봉 서쪽 골짜기가 바로 비경지대인 설마동계곡이어서 산과 계곡, 호수 모두가 수려하기 그지없으며
가을 단풍철에는 그 경관이 극치를 이루고 산행 길목에 [오성암]이라는 산사가 자리 잡고 있어 산행인들의 좋은 쉼터가 되고 있다.
저산위에서 내려다보는 장회나루 일대는 가히 절경이라고 말할수 있다.
이제 유턴을 해서 옥순대교쪽으로 내려오다보면 기생 두향의 묘가 보인다.
원래는 구담봉아래쪽에 있었는데 충주호담수로 수몰되기 직전 지금의 위치로 옮겻다고 한다.
퇴게와 두향의 사랑이야기가 전해내려오는 강선대는 유람선이 지나가는 바로밑이다.
지금은 물이 많이 차서 강선대를 볼수 없다.
그래서 2년전 찍은 사진을 가져왔다.
강선대
단양에서 서쪽으로 약 8㎞ 지점의 가은암산(可隱岩山) 아래에 있는 큰 바위로 이호대(二皓臺)와 마주보고 있다. 바위 높이는 약 15m로 층대(層臺)를 이루는데, 그 위에 100여 명이 앉아서 놀 수 있다고 한다. 지금은 충주호巨儒) 퇴계 이황이 단양군수로 재임중에 두향(杜香)이라는 기생과 정을 나눈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황이 풍기군수로 전임한 뒤, 두향은 강선대충주댐을 건설하면서 두향의 무덤을 강선대 위쪽으로 이장하였으며, 매년 5월 단성향토사연구회에서 그의 넋을 기리는 두향제(杜香祭)를 지낸다.
애처러운 두향의 넋인듯 낮에 뜨는 달이 처연하고 쓸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