駕洛國記(가락국기-삼국유사 중) 원문.. *. 가락국기 : 저자는 금관주(金官州:김해지방)의 지사(知事)였던 문인으로 추측되고 있다. 현재 책은 전해지지 않으나, 일부 내용이 《삼국유사》에 요약되어 남아 있다. 그 내용에는 수로왕의 탄생과 여섯 가야의 건국, 수도와 궁실 건립, 수로왕과 탈해왕(신라의 脫解尼師今)의 다툼, 허황후(許皇后)와의 혼인, 관제 정비, 수로왕릉과 사당(祠堂)에 얽힌 설화, 신라에 합병된 이후부터 고려시대까지 김해지방의 연혁, 수로왕묘(廟)에 할당된 토지 결수, 왕후사(王后寺) 창건, 2대 거등왕(居登王)부터 마지막 구형왕(仇衡王)까지의 왕력(王歷), 신라에 투항한 연대에 대한 고증 등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내용이 대부분 설화적이고 후대에 조작된 흔적이 많아서 모든 것을 역사적 사실로서 받아들이기에는 문제점이 많다. 건국부터 멸망 때까지 왕위계승을 부자상속으로 처리한 것은 당시의 다른 삼국과 비교해 볼 때 그대로 믿기가 힘들다. 특히 가야가 멸망한 다음부터 사용된 김씨(金氏) 성을 왕실의 성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아 수로왕의 후손이라고 자처하는 김해김씨의 족보를 주로 참조하여 서술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신보(申輔) ·조광(趙匡) 등 고려시대 이후에 처음으로 사용된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등장하는 등 인위적으로 조작하여 서술한 느낌이 강하게 든다. 일부 학자가 인도 아유타국에서 왔다는 허황후설화 등을 근거로 한국문화의 남방기원설을 주장하기도 하지만 아직은 문제점이 많은 상태이다. 그러나 가야 관계 문헌자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이 책이 지니는 역사적 의미는 크다. 특히 수로왕과 관련된 설화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신라와의 관계 등을 파악하는 데 많은 자료를 제공해 준다. 원문해석 【文宗朝(문종조) 大康年間(대강연간) 金官知州事文人(금관지주사문인)의 所撰(소찬)이니 여기에 抄略(초략)하여 싣는다.】 개벽한 후로 이곳에 아직 나라의 이름이 없고 또한 君臣(군신)의 稱號(칭호)도 없더니 이때 我刀干(아도간) 汝刀干(여도간) 彼刀干(피도간) 五刀干(오도간) < 五刀干(오도간)은 四刀干(사도간)의 잘못인 듯, 그 以下(이하)도 본시 數字順序(수자순서)로 되었던 모양인데, 後人(후인)의 造作(조작)에 依(의)해서 고쳐진 것 같고, 또 九干中(구간중)의 하나가 빠져 있다.> 留水干(유수간) 留天干(유천간) 神天干(신천간) 五天干(오천간) 神鬼干等(신귀간등)의 九干(구간)이 있어, 이들이 酋長(추장)이 되어 人民(인민)을 거느리니 (그 수효가) 무릇 一百戶(1백호) 七萬五千人(7만5천인)이었다. (그때의 生活狀態(생활상태)는 단순하여) 山野(산야)에 도읍하여 우물을 파마시고 밭을 갈아 먹더니 後漢(후한) 世祖光武帝(세조광무제) 建武十八年壬寅三月(건무18년임인3월) ?浴日(계욕일)에 그곳 北(북)쪽 龜旨(구지) 에서 무엇을 부르는 수상한 소리가 났다. <이것은 山峰(산봉)의 이름이니 十朋(십붕)이 엎드린 형상과 같음으로 龜旨(귀지)라 한 것이다.> 衆庶(村人)〔중서(촌인)〕 二三百人(이삼백인)이 이곳에 모이니, 사람의 소리는 나는 듯 하되 그 형상은 보이지 않고 소리만 내어 말하기를 “여기에 사람이 있느냐?” 九干(9간)들이 이르되 “우리들이 여기 있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여기가 어디이냐?” 대답하되 “龜旨(구지)”라 하였다. 또 말하되 皇天(황천)이 나에게 命(명)하기를 이곳에 와서 나라를 새롭게 하여 임금이 되라 하였으므로 이곳에 일부러 내려왔으니 너희들은 마땅히 峯上(봉상)에서 흙을 파면서 노래하여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지 않으면 구어 먹으리라」하고 舞蹈(무도)하면 大王(대왕)을 맞이하여 歡喜勇躍(환희용약)할 것이리라 하였다. 九干等(구간등)이 그 말과 같이 모두 기뻐서 歌舞(가무)하다가 얼마 아니하여 쳐다보니 紫色(자색) 줄이 하늘에서 내려와 땅에 닿는지라 줄 끝을 찾아보니 붉은 폭에 金(금)합이 싸여 있었다. 열어보니 해와 같이 둥근 六個(6개)의 黃金(황금) 알이 있었다. 모두 驚喜(경희)하여 百拜(백배)하고 조금 있다가 다시 싸가지고 我刀(아도)의 집으로 돌아와 榻(탑)위에 두고 각기 흩어졌다. 十二時(12시)를 지나 이튿날 平明(평명)에 衆人(村人)〔중인(촌인)〕이 다시 모여 합을 여니, 여섯알(卵:난)이 化(화)하여 童子(동자)가 되었는데 용모가 매우 깨끗하므로 상에 앉히고 여럿이 拜賀(배하)하고 극진히 위하였다. 나날이 자라 十餘日(10여일)을 지나매 身長(신장)이 九尺(9척)이나 되었으니 이는 殷(은)의 天乙(천을)과 같고 그 얼굴이 龍(용)과 같았음은 漢(한)의 高祖(고조)와 같고 눈썹의 八彩(팔채)는 唐高(堯)〔당고(요)〕와 같고 눈에 동자가 둘씩 있음은 虞舜(우순)과 같았다. 그달 보름날에 卽位(즉위)하였다. “처음으로 나타났다”고 하여 諱(휘)를 “首露(수로)”라 하고 혹은 首陵(수릉)이라 하며<首陵(수릉)은 죽은 뒤의 號(호)이다.> 나라를 大駕洛(대가락), 또는 伽耶國(가야국)이라고도 일컬으니 곧 六伽耶(육가야)의 하나요. 나머지 五人(5인)은 각각 가서 五伽耶(5가야)의 主(주)가 되었다. 東(동)은 黃山江(황산강), 西南(서남)은 滄海(창해), 西北(서북)은 地理山(지리산), 東北(동북)은 伽耶山(가야산)으로써 境界(경계)하고 南(남)은 나라의 끝이 되었다. 假宮(가궁)을 짓게 하여 入御(입어)하였으나 질박하고 검소하려 하여 茅茨(모자)를 자르지 않고 土階(토계)는 (겨우) 三尺(삼척)이었다. (卽位:즉위) 二年癸卯(2년계묘) 春正月(춘정월)에 王(왕)이 가로되 “내가 서울을 정하고자 한다.” 하고, 이어 假宮(가궁)의 南쪽 新畓坪(신답평) <이는 古來(고래)의 閑田(한전)인데 새로 耕作(경작)한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요 畓(답)은 俗字(속자)이다.>에 가서 四方(사방)으로 山岳(산악)을 바라보고 左右(諸臣)〔좌우(제신)〕를 돌아다보며 말하기를 “이 땅이 蓼葉(요엽)과 같이 狹小(협소)하나 그러나 (山川:산천이) 秀異(수이)하여 가히 十六羅漢(16나한)의 住地(주지)도 될 만하거든 하물며 一(일)에서 三(삼)을 이루고 三(삼)에서 七(칠)을 이루는 七聖(칠성)의 住地(주지)에 적합함이랴. 疆土(강토)를 開拓(개척)하면 장차 좋을 것이다.” 하고, 周圍(주위) 一千五百步(일천오백보)의 羅城(나성)과 宮闕(궁궐) 殿堂(전당)과 여러 廳舍(청사)와 虎(武)庫〔호(무)고〕倉?(창름)을 建築(건축)할 場所(장소)를 定(정)한 뒤에 還宮(환궁)하였다. 널리 國內(국내)의 壯丁(장정) 人夫(인부)와 工匠(공장)들을 徵用(징용)하여 그달 二十日(20일)에 金陽(금양)에서 시작하여 三月十日(3월10일)에 이르러 畢役(필역)하였으나, 宮闕(궁궐)과 屋舍(옥사)는 農閑期(농한기)를 이용하여 建築(건축)하니 그해 十月(10월)에 시작하여 甲辰(갑진) 二月(2월)에 落成(낙성)하였다. 吉日(길일)을 택하여 新宮(신궁)에 御(어)하여 萬機(만기)를 다스리고 庶務(서무)에 勤努(근노)하였다. 玩夏國(완하국) 含達王(함달왕)의 夫人(부인)이 忽然(홀연)히 아이를 배어 달이 차서 알을 낳았는바 사람으로 化(화)하였으므로 이름을 脫解(탈해: 신라에 4대 왕)라 하였는데 (이때) 바다로부터 (駕洛:가락에) 오니 身長(신장)이 三尺(3척)이요 頭圍(두위)가 一尺(1척)이었다. 欣然(흔연)히 대궐에 들어가서 王(왕)에게 말하기를 “내가 王(왕)의 位(위)를 뺏으려고 왔다.” 하였다. 王(왕)이 대답하기를 “하늘이 나를 명하여 卽位(즉위)케 하여 장차 中國(중국)을 편안히 하고 下民(하민)을 安堵(안도)케 함이니 감히 天命(천명)을 어기어 位(위)를 주지 못할 것이고 또 우리나라와 백성을 너에게 맡길 수도 없다.” 하였다. 脫解(탈해)가 그러면 技術(기술)로 다투어 보겠느냐 하며 王(왕)이 좋다 하였다. 삽시간에 脫解(탈해)가 化(화)하여 매가 되니 王(왕)은 화하여 독수리가 되었고 脫解(탈해)가 또 화하여 참새가 되니 王은 새매로 화하였는데 그 사이에 寸陰(촌음)의 間隙(간극)도 없었다. 조금 있다가 脫解(탈해)가 本身(본신)으로 화하자, 王(왕)도 또한 제모양을 회복하였다. 脫解(탈해)가 이에 항복해 가로되 내가 術法(술법)을 다투는데 있어 독수리에 대한 매, 새매에 대한 참새가 되었으나 (죽음을) 면한 것은 대개 聖人(성인)이 죽이기를 싫어하는 仁德(인덕)의 所致(소치)라 내가 王(왕)과 더불어 位(위)를 다툼이 실로 어렵다 하고 곧 拜辭(배사)하고 나가서 附近郊外(부근교외)의 津頭(진두)에 이르러 中國船(중국선)의 來寄(내기)하는 水路(수로)를 取(취)하여 가려 하였다. 王(왕)은 그가 滯留(체류)하여 亂(난)을 꾸밀 가 염려하여 급히 舟師五百隻(주사5백척)을 발하여 쫓으니 脫解(탈해)가 鷄林地界(계림지계)로 달아나므로 舟師(주사)가 모두 돌아왔다 한다. <그런데 이 부분은 新羅(신라)의 것과는 많이 다르다.> 建武二十四年戊申(건무24년무신) 七月二十七日(7월27일)에 九干等(구간등)이 朝謁(조알)할 때에 아뢰기를 “大王(대왕)이 降臨(강림)하신 以來(이래)로 좋은 配匹(배필)을 얻지 못하시었으니 臣(신)등이 둔 處女中(처녀중)에서 絶妙(절묘)한 자를 宮中(궁중)에 뽑아 드려 配匹(배필)을 삼게 하소서” 하였다. 王(왕)이 가로되 “내가 여기 내려온 것은 하늘의 命令(명령)이요 나의 配匹(배필)로 后(후)가 되는 것도 또한 하늘의 命令(명령)이니 그대들은 念慮(염려)치 말라”하고 드디어 留天干(유천간)을 명하여 輕舟(경주)와 駿馬(준마)를 가지고 望山島(망산도)에 가서 기다리게 하고, 또 神鬼干(신귀간)을 명하여 乘岾(승점)<望山島(망산도)는 서울南方(남방)의 섬이요 乘岾(승점)은 輦下(연하)의 國(국)이다.>으로 가게 하였다. 忽然(홀연)히 바다 西南(서남)쪽에서 붉은 빛의 돛을 달고 붉은 旗(기)를 휘날리고 北(북)쪽을 행하여 오는 배가 있었다. 留天(유천)등이 먼저 望山島(망산도)에서 횃불을 드니 앞을 다루어 下陸(하륙)하려 하였다. 神鬼(신귀)가 바라보고 대궐로 달려와서 아뢰니 王(왕)이 듣고 기뻐하였다. 이어 九干(구간)등을 보내어 蘭橈(난요)와 桂楫(계즙)을 갖추어 맞이하여 곧 모시고 闕內(궐내)로 들어오려 하였다. 王后(왕후)가 말하되 “나와 너희들은 본래 알지 못한 터인데 어찌 경솔히 따라가랴” 하였다. 留天等(유천등)이 돌아와 王后(왕후)의 말을 傳達(전달)하니 王(왕)이 너그러이 여겨 有司(유사)를 거느리고 闕下(궐하)에서 西南(서남)쪽 六十步(60보)쯤 되는 山邊(산변)에 가서 ?殿(만전)을 베풀고 기다리었다. 山外(산외) 別浦津頭(별포진두)에서 王后(왕후)는 배를 매고 陸地(육지)에 올라 높은 언덕에서 쉬며 입은 비단바지를 벗어 그것을 선물로 삼아 山靈(산령)에 주었다. 其他(기타) 侍從(시종)하여온 ?臣二人(잉신2인)의 이름은 申輔(신보)와 趙匡(조광)이요 그 아내 두 사람의 이름은 慕貞(모정)과 慕良(모량)이며 혹은 奴婢(노비)까지 아울러 二十餘人(20여인)인데 싸가지고 온 錦繡綾羅(금수능라), 衣裳疋段(의상필단), 金銀珠玉(금은주옥), 瓊玖服玩器(경구복완기)는 이루 헤일 수 없었다. 王后(왕후)가 점점 行在所(행재소)에 가까이 오매, 王(왕)이 나아가 마저 함께 ?殿(만전)으로 들어왔다. 臣以下(신이하)의 여러 사람은 뜰아래에서 뵙고 곧 물러가니 王(왕)이 有司(유사)에게 명하여 ?臣(잉신)의 夫妻(부처)를 인도케 하되 各人(각인)을 各房(각방)에 두고 그 以下(이하) 奴婢(노비)는 한방에 五六人(오육인)씩 두어 蘭液(난액)과 蕙?(혜서)를 주고 文茵(문인) 彩薦(채천)으로 자게하고 衣服(의복) 疋段(필단) 寶貨(보화)의 類(유)까지도 주며 軍人(군인)들을 많이 모아 보호케 하였다. 이에 王(왕)과 后(후)가 함께 寢殿(침전)에 계실세(后:후가) 王(왕)께 조용히 말하되... “나는 본래 阿踰?國(아유타국)의 公主(공주)인데 姓(성)은 許氏(허씨)요 이름은 黃玉(황옥)이나 나이는 二八(이팔)이라 今年五月(금년5월)에 本國(본국)에 있을 때 父王(부왕)이 皇后(황후)로 더불어 나에게 말씀하기를 어젯밤 꿈에 함께 上帝(상제)를 뵈오니 上帝(상제)의 말씀이 駕洛國王(가락국왕) 首露(수로)는 하늘이 내려 보내어 登極(등극)케 하였으니 이 사람이야말로 神聖(신성)서러운 이다. 또 새로 나라를 다스리나 아직 配匹(배필)을 定(정)치 못하였으니 그대들은 公主(공주)를 보내어 짝을 삼게 하라. 하시고 말을 마치자 하늘로 울라갔다. 잠을 깨인 후에도 上帝(상제)의 말이 아직 귀에 쟁쟁하니 너는 이 자리에서 곧 父母(부모)를 작별하고 거기로 가라하시었다. 그래서 내가 바다에 떠서 蒸棗(증조)를 구하고 하늘에 가서 蟠桃(반도)를 얻어 ?首(진수)로 외람히 龍顔(용안)을 가까이 하게 되었다“ 하였다. 王(왕)이 대답하되 “나는 生來(생래)로 자못 神聖(신성)하여 먼저 公主(공주)가 멀리 올 것을 알고 신하들의 納妃(납비)의 청을 듣지 않았더니 지금 賢淑(현숙)한 그대가 저절로 왔으니 이 사람의 다행이다.” 하고, 드디어 同寢(동침)하여 두 밤을 지내고 또 하루 낮을 지내었다. 이에 드디어 (그들의) 타고 온 배를 돌려보낼 때 뱃사공 合十五人(합15인)에게 각각 쌀 十石(10석)과 베 三十(30)필을 주어 本國(본국)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八月一日(8월1일)에 (本宮:본궁으로) 還駕(환가)할 때 后(후)로 더불어 輦(연)을 타고 臣夫妻(신부처)도 다 수레를 타고 漢肆雜物(한사잡물)을 모두 실어 徐徐(서서)히 대궐로 들어오니 때는 午正(오정)이 되려 하였다. 王后(왕후)는 中宮(중궁)에 처하고 ?臣夫妻(잉신부처)와 私屬(사속)들에게는 空閑(공한)한두 집으로 나누어 들게 하고 나머지 從者(종자)는 賓?(빈관) 한채의 二十餘間(20여간)에 人數(인수)를 작성하여 區別(구별) 安置(안치)케 하고 날마다 풍부한 飮食(음식)을 주며 그들의 싣고 온 珍物(진물)은 內庫(내고)에 두어 王后(왕후)의 四時(사시) 費用(비용)을 삼게 하였다. ------------------------------------------------ *. 임나일본설과 가락국에 관계 1948년 일본학자 江上波夫(에가미나미오)는 ‘기마민족일본정복설’을 주장하여 일본학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4세기 초, 금관가야(임나)가 북 규슈로 건너가 그곳을 점령하여 한?왜 연합왕국을 세웠으며, 1세기 후에는 이들이 세토내해를 통해 畿內(기내)로 들어가 그곳에 새로운 국가를 세웠다. 이것이 일본 최초의 국가인 야마토정권의 기원이다, 라는 것이 그의 설의 요지이다. 북 규슈를 점령한 왕은 일본서기의 제10대 崇神(숭신)천황, 畿內에 야마토 정권을 세운 왕은 제15대 應神(응신)천황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江上波夫(강상파부)는 고고학?신화학?역사학 등의 측면에서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고 있다. 여기서는 그의 ‘기마민족정복설’ 가운데 삼국유사의 가야 및 고구려 건국신화와 관련된 부분을 발췌 소개하겠다. 일본서기?고사기의 신화에 나오는 신은 天神(천신)과 國神(국신)의 둘로 大別(대별)된다. 그리고 天神(천신)이 일본의 국토에 내려와서 그곳에 原住(원주)하던 國神(국신)을 정복 지배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 天神(천신)이 강림한 지방은 出雲(출운: 이즈모, 지금의 시마네현)과 筑紫(축자:지쿠시, 지금의 북규슈지방) 두 곳으로.. 出雲에 내려온 것이 스사노오신이며, 筑紫에 내려온 것이 니니기신이었다. 이 天神, 즉 외래 민족이 한반도남부에서 왔다는 것은 지리적인 관계뿐만 아니라 신화의 내용에서도 엿볼 수 있다. 니니기신은 筑紫 日向(축자 일향)의 高千穗峰(고천혜봉)에 내려온 후, “이 땅은 韓國(가야국)으로 향해있고, 아침저녁 햇빛이 잘 드는 나라이므로 참으로 좋은 땅이다.” 라고 말했다고 古事記는 전한다. 여기에도 韓國(가야)이 특별히 언급되어있어 그곳을 天神의 고향이라고 해석하면 글의 뜻이 저절로 통하게 된다. 그러나 天神 즉 외래 민족이 한반도남부, 특히 임나방면과 깊은 관계에 있으며, 그곳에서 북 규슈로 도래한 것을 가장 명확하게 나타내는 것은 니니기신의 高千穗峰(고천혜봉)의 강림설화 바로 그 자신이다. 이 일본서기?고사기의 전설과 가락국기에 전하는 6가야국의 건국전설의 내용이 중요한 점에 있어서 모두 일치함은 三品彰英박사가 상세하게 논증한 바로, 특히 1. 국토를 지배하라고 하는 天神의 명령(神勅)을 받고 하늘에서 내려온 점 2. 모포에 싸여 내려오는 점 3. ?觸(구시후루)??日(구시히)?久士布流(구시후루)?龜旨 등 동일지명이라고 인정되는 곳에 내려온 점 등 양자의 일치는 도저히 우연이라고는 믿을 수 없다. 이것은 한반도남부, 특히 임나(6가야) 방면으로부터 그 건국설화를 갖고 북 규슈에 도래한 외래 민족(天神)이 그 新支配地(신지배지)의 높은 連山(연산)에 그것을 결부시킨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또 ?觸?久士布流의 ‘후루’가 한국어의 ‘村’의 의미로, ?觸?久士布流가 ‘龜旨의 村’이라는 것, 일본서기의 一書에는 ?觸이 添(소호리)으로 되어있는데 이 소호리는 백제의 수도를 所夫里, 신라의 수도를 서벌, 경성을 서울이라고 하는 것처럼 王都를 의미하는 한국어로, 일본어로는 의미가 전혀 통하지 않는 것이 한국어에서는 쉽게 그리고 합리적으로 이해된다는 것도 그 방증이 될 것이다. 위와 같은 설화로 미루어볼 때 天皇家의 조상은 한반도남부로부터 북규슈에 도래하여 거기에 우선 일본에 있어서의 최초의 거점을 두었다고 추정된다. 그들은 몇 代 후에 다시 畿內로 진출하게 되었다. 그것이 神武(일본의 초대천황)의 東征(동정)전설에 반영되어 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그 전설에는 그보다 더 오래된 천황가의 출신을 암시하는 듯한 傳承(전승)이 부가되어있다. 즉 神武가 筑紫로부터 畿內에 이르러 야마토조정을 창시한다고 하는 東征 길에 세토내해의 速吸門(속흡문)에서 거북등에 타고 온 國神을 만났는데, 그가 바닷길을 잘 안다고 하므로 그를 수로 안내인으로 삼아 동쪽으로의 항해를 계속했다고 하는 所傳이 古事記에 나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에 비교할만한 설화가 부여나 고구려의 건국전설에서도 발견된다. 즉 부여의 시조 동명이 고국을 떠나 남으로 피신할 때 施掩水(시엄수)라는 강에 가로막혔지만 활로 강물을 치니까 거북이 떠올라와 다리가 되어주었기 때문에 동명은 무사히 강을 건너 부여의 땅에 이르러 왕이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후한서). 고구려의 시조 주몽에 관해서도 거의 동일한 所傳이 있다. 이와 같은 부여?고구려의 건국전설의 요소로 되어있는 것은 1. 고국을 떠나 강을 건너 새 토지로 가서 건국하는 것 2. 거북의 도움으로 무사히 강을 건너는 것 3. 시조가 된 사람은 天의 아들로, 때로는 부친이 天, 모친이 河神의 딸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을 神武의 동정전설과 비교해보면 전자에서 강을 건너는 것이 후자에서는 바다를 건너는 것으로 되어있고, 전자에서 거북이 물위로 올라오는 것이 후자에서는 거북에 탄 사람이 나타나는 것으로 되어있다. 또 전자에서 부친이 天이고 모친이 河神의 딸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도 후자에서는 神武가 天孫이고 그의 모친은 海神의 딸이라고 하는 것처럼 대동소이한 것이 주목된다. 요는 부여?고구려시조전설의 ‘강’이 神武전설에서는 ‘바다’로 되어있는 것뿐으로, 큰 줄거리는 똑같다는 것이다. 이것은 대륙기원의 전설이 섬나라 일본에 전해져, 그 신 환경에 적응하여 변형된 것임을 인정해야할 것이다. 그러면 왜 이와 같은 부여?고구려계의 건국전설이 神武의 동정전설로 되었나 하면 天神인 외래민족(특히 天孫系(천황계))에 부여?고구려계의 건국전설이 전승되어 왔으며, 한편 그들이 筑紫로부터 세토내해를 통하여 畿內로 진출하여 일본을 건국했다고 하는 史實 위에, 그보다 더 오래된 부여계의 건국전설이 합쳐진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만일 그렇다고 하면 天神인 외래 민족(특히 天孫系(천황계))는 앞에서 본 것처럼 직접은 한반도남부의 임나지방으로부터 이주했다고 하더라도, 부여?고구려계의 전승을 갖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 본래의 출신이 만주?북한방면이었을지도 모른다고 하는 추측을 하게 되는 것이다. |
출처: "세미신선의 무릉도원의 꿈...^^... 원문보기 글쓴이: 세미신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