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그릇에 담긴 영광을 생각하자. 비어서 깊고 비어서 차지 않는다. 비우고 또 비우니 자연히 깊어지고 깊어져서 만물의 으뜸이 된다. 그리스도가 만물의 으뜸이 된 이유도 거기에 있다 (골로새서 1장 15~18) 마음을 다스려 화목을 이루는 길挫銳解紛 (좌예 해분)
도의 길은 끝이 없다. 예리한 것을 둔하게 만들고 挫其銳 앍힌것을 풀어준다 解其紛
예리하다 함은 상처를 내기 쉬운 무기와 같은 것이다. 좌충우돌하는 예리한 성격의 사람은 왕왕 싸움을 일으키기 쉽다. 이런 사람 일수록 성격을 좀 더 무디게 할 필요가 있다. <도덕경>에서는 예리함 보다는 차라리 둔한 편을 높이 산다. 예리하여 남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보다는 둔한것이 낫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도는 예리한 것을 둔하게 만들어 모든 관계가 원활해지게 한다. 얽힌 관계를 풀어주는 것도 도의 일이다. 인간관계에서 얽힌다 함은 정신적 물질적 관계를 포함한 일제의 이해관계를 내포한다.
서로가 상처를 받지 않고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원활한 관계의 회복 그 일을 도가 해낸다. 성서는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 (에페소서 4장 20절)고 말하고 있다 분을 내어 죄를 짓는 일을 마귀에게 틈을 주는 일이다 (4장 27절) 호사다마好事多魔라는 말이 있듯이, 도道의 길 이면에는 마魔의 길이 병존한다.
얽힌 일을 푸는 길, 그것은 마의 일을 넘어서는 길이다. 마의 일을 넘어서는 방법을
스스로 이해 관계의 분을 삭이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않는 것이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게 사는 정신이 필요하다. 평화가 먼곳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자기의 날카롭고 예리한 마음을 다스려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이웃과 더불어 화목하게
살 일이다.
티끌과 하나되는 영성 和光同塵 화광동진
'번쩍거리는 빛을 누그러뜨린다 和光'는 것은 잘난체 하는 이를 겸손하게 한다는 뜻과도 같다.
그렇게 될 때 도는 '티끌과 하나 同塵' 가 될 수있다. 그리스도교적 사고방식으로 생각하면 본래는 빛이 있으나 그 빛을 감추고 마구간에서 태어난 예수의 성육신 사건에 비유될 수 있다.
"그는 근본 하느님의 본체시나 하느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되었고 ,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으며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 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립보서2장6~8절)"
이를 사도 요한은 단적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며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복음 1장 14절)"
마구간에서 먼지나 티끌과 같이 하나가 된 예수, 그를 일러 우리라는 하느님의 성육신 成肉身이라고 일컫는다. 볼 수 있는 대표적인 겸손의 모델, 곧 케노시스 비움옥의 사건이다
인간이 어디까지 겸손할 수 있을까? 과연 티끌과 하나 되도록 겸손할 수 있을까?
빛을 누그러뜨리고 먼지와 하나 되는 길, 그것은 과연 하느님의 영광과 은혜 그리고 진리가 충만한 길이었다. 도의 길은 겸손에 있다. 이를 우리는 티끌과 하나되는 영성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도데체 이러한 도의 정신, 혹은 도 그자체는 어디서 왔으며 누구의 아들인가? 이에 대하여, 중국에서 말하는 하늘님으로서의 상제上帝노후 보다 앞선 존재인 것 같다고 노자는 말한다. 그 어떤 인격적 신명 神名보다 도가 앞선 듯 하다고 말하는 발상은 과연 노자 답다.
그가 이미 1장에서 밝히듯이 도는 일체의 개념에 앞선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는 모든 존재의 기반이며, 일체의 인격성을 앞선 궁극적 실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궁극적 실재인 도가 가는 길은 잘난 체 하지 않고 티끌과 하나 되는 '화광동진 和光同塵'의 길이다. 이것이 성육신의 길이다.
제5장 천지와 성인은 외식 外飾하지 않는다.
1) 공평무사 公平無私의 길
하늘과 땅은 이길지 않다. 만물을 풀로 만든 개처럼 다룬다.
성인聖人도 어질지 않다. 백성을 풀로 만든 개처럼 여긴다.
天地不仁、以萬物爲芻狗;聖人不仁、以百姓爲芻狗。
천지불인、이만물위추구;성인불인、이백성위추구。
하늘과 땅, 즉 천지가 어질지 않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여기서 어질다고 하는'인(仁'의 개념은 다분히 유교적인 배경에서 생성된 용어다.
노자는 공자에게서 비롯되는 유교적 핵심 개념인 '인'의 문제 까지도 단번에 허물어뜨린다 왜 그럴까? 인간이 어질게 되는 이치도 수양修養이나 수련을 통해 되는것이 아닐까? 수양은 필요하다. 그렇지만 수양은 그 자체로도 자연스러운 것이어야 한다. 수양한답시고 수양하는 척하는 자세라든가, 어진 행위로 자선을 베푼다고 해도 그 일체의 행위에 있어서 인위적인 요소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보다 적극적인 의미에서 베푼다고 해도 배푼다는 일체의 작위적인 의식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결국 노자는 유교의 '인仁'개념도 자연스럽지 못한 인위적인 측면이 있는 것이라면 과감하게 거부해야 한다는 것을 시사해 주고 있다.
하늘이나 땅이 어질지 않다는 말은 이와 같이 인위적 조작이 없다는 뜻에서다. 천지가 만물을 대하는 태도는 마치 풀로 만든 개(芻狗: 고대 중국에서 제사때 만들어 쓰고 버리던 짚으로 만든 개)를 다루듯 한다는 것이다. 사실 천자가 어질지 않다는 사실은 변화무상 變化無常한 천지의 기후氣候를 보아서도 알 수 있다. 가뭄이나 홍수로 세계 곳곳에서 수 많은 인명피해와 동식물까지 피해를 입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천지의 무심無心함을 보게된다. 천지가 무심하기에 만물을 풀로 만든 개처럼 여길 수 있다.
무심한 천지를 일러 억지로 어질다고 말할 이유가 없다. 천지의 무심한 운행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느낄수 있는가? 천지는 다만 스스로 그러할 自然 뿐이다 '스스로 그러함'에서 우리는 '인'이라는 또 하나의 장벽을 넘어선다
성인聖人 또한 천지天地가 만물을 대하는 태도와 같아서, 백성을 '풀로 만든 개 芻狗'와 같이 여긴다. 풀로 만든 개야 말로 일회용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성인이 백성을 감히 일회용 도구처럼 취급해서 될법한 말인가? 좀더 깊이 생각해 보자 천지가 자연의 법칙에 따라 천둥번개를 일으키듯, 성인 또한 천지의 운행 방식과 행동양식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주역周易(《주역》을 영어로는 ‘Book of Changes’라고 쓴다)에 나오는 말과 같이 '천지와 덕을 같이 하는 성인 '聖人與天地合其德: (乾/文言)이고 보면 , 성인도 백성을 대함에 있어서 인위적이고 작위적인 마음에 따라 어진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편파적인 치우침 없이, 또한 지나침도 없이 스스로 우러나오는 마음에 따라
자비로운 행위를 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