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죽산 안씨(新竹山安氏) 죽산(竹山)은 경기도(京畿道) 용인군(龍仁郡)과 안성군(安城郡) 일부에 속해 있던 옛 지명으로,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개차산군(皆次山郡)이었는데 통일신라(統一新羅) 경덕왕(景德王) 때 개산군(介山郡)으로 고치고 고려(高麗) 초에 죽주(竹州)로 고쳤다가 995년(성종 14)에 단련사(團鍊使)를 두어 음평(陰平) 또는 연창(延昌)이라 하였으며 현종(顯宗) 때는 광주(廣州)에 속하였다. 1413년(조선 태종 13)에 죽산(竹山)으로 개칭, 여러 차례 변천을 거듭한 후 1895년(고종 32) 군(郡)이 되었다가 1913년 일부는 용인군에 속하고 나머지는 안성군에 합해졌다. 1341년(충혜왕 복위 2)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밀직사사(密直司使)를 거쳐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낸 후 벽상삼한 삼중대광보국(壁上三韓三重大匡輔國)에 올라 문하시중 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를 역임하면서 나라에 공(功)을 세워 좌명공신(佐命功臣)에 책록되어 죽성군(竹城君)에 봉해진 안원형(安元衡)을 시조로 받들고 있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그를 시조로 하고 죽산을 관향(貫鄕)으로 삼아 세계(世系)을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맥을 살펴보면, 시조 원형(元衡)의 아들 면(勉)이 1353년(공민왕 2)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과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를 거쳐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냈고 대승상(大丞相)에 올라 흥녕군(興寧君)에 봉해져서 크게 명성을 떨쳤으며, 그의 아들 노생(魯生)과 정생(珽生)이 관찰사(觀察使)와 직제학(直提學)을 각각 역임하여 가통을 지켰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세종(世宗) 때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檢閱)과 충청 감사(忠淸監司)를 거쳐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역임한 철손(哲孫)과 단종(端宗) 때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지낸 신손(信孫)이 유명했고, 추조(追祖)는 군수(郡守)를 역임하여 참의(參議)를 지낸 승(勝), 형조 좌랑(刑曹佐郞) 구(矩), 감찰 양보(良輔) 등과 함께 가세(家勢)를 일으켰다. 한편 중종 때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한 충달(忠達)은 창평 현감(昌平縣監)으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었고, 여근(汝謹)은 명종 때 무과에 올라 전라 좌수사(全羅左水使)를 지냈으며 선조조(宣祖朝)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천일(金千鎰)과 함께 의병(義兵)을 일으켜 왜군(倭軍)과 싸우다가 진주(晉州)에서 장렬하게 순절하여 선무원종일등공신(宣武原從一等功臣)에 책록되었다. 중종 때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한 수륜(秀崙)의 아들 축(舳)은 병조와 호조의 좌랑(佐郞), 정언(正言), 지평(持平) 등을 거쳐 영광 군수(靈光郡守)를 지냈으나 을사사화(乙巳士禍)로 파직되었다가 나주 목사(羅州牧使)로 다시 등용되어 춘추관(春秋館)의 편수관(編修官)을 지냈으며, 감찰 양보(良輔)의 손자 언룡(彦龍)은 태천 현감(泰川縣監)으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어 현민(縣民)들이 그의 치적(治績)을 칭송하여 비(碑)를 세웠다. 그 외 정묘(丁卯)와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의병(義兵)을 일으켰던 방준(邦俊)이 공조 좌랑(工曹佐郞)과 지평(持平)을 거쳐 공조 참의(工曹參議)를 역임했고 성리학(性理學)에 밝아 문명(文名)을 떨쳤으며, 효종(孝宗) 때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를 역임한 여지(汝止)는 숙종조(肅宗朝)에 현령(縣令)과 예조의 정랑(正郞)을 지낸 민유(敏儒), 찰방(察訪) 절(節)과 함께 가문을 대표했다. 한말(韓末)에 와서는 규홍(圭洪)이 의병(義兵)을 일으켜 광양(光陽)의 백운산(白雲山)을 거점으로 독립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감옥에서 옥사하여 신죽산 안씨의 의맥(義脈)을 이었다.
첫댓글 "죽산 안씨(竹山安氏)는 광주군(廣州君) 안방걸(安邦桀)의 17세손이며" 부분은 전의록(의심할 만한 전해 내려오는 기록)으로 뚜렷한 근거가 없는 기록이기 때문에 고증되기 전까지는 믿어서는 안되는 부분이라는 것을 우리 죽산(신)안씨들은 모두 알고 있어야 합니다.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