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실록 14권, 태조 7년 8월 26일 기사 2번째기사 1398년 명 홍무(洪武) 31년
정도전·남은·심효생·박위·유만수의 졸기
정도전의 자(字)는 종지(宗之), 호(號)는 삼봉(三峰)이며, 본관(本貫)은 안동(安東) 봉화(奉化)이니, 형부 상서(刑部尙書) 정운경(鄭云敬)의 아들이다. 고려 왕조 공민왕경자년097) 에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고, 임인년에 진사(進士)에 합격하여 여러 번 옮겨서 통례문 지후(通禮門祗候)에 이르게 되었다. 병오년에 연달아 부모(父母)의 상(喪)을 당하여 여막(廬幕)을 짓고 상제(喪制)를 마치니, 신해년에 불러서 태상 박사(太常博士)로 임명하였다. 공민왕이 친히 종묘(宗廟)에 제향(祭享)하니, 도전이 도(圖)를 상고하여 악기(樂器)를 제조하였다. 예의 정랑(禮儀正郞)·예문 응교(藝文應敎)로 옮겨서 성균 사예(成均司藝)로 승진되었다. 갑인년에 공민왕이 훙(薨)하여, 을묘년에 북원(北元)의 사자(使者)가 국경에 이르니, 도전이 말하였다.
"선왕(先王)098) 께서 계책을 결정하여 명(明)나라를 섬겼으니, 지금 원(元)나라 사자를 맞이함은 옳지 못합니다. 더구나 원나라 사자가 우리에게 죄명(罪名)을 가하여 용서하고자 하니, 그를 맞이할 수 있습니까?"
그때의 재상(宰相)이 듣지 않으므로, 도전이 굳이 이를 말하다가, 노여움을 당하여 회진(會津)으로 폄직(貶職)되었다. 갑자년에 하성절사(賀聖節使) 정몽주(鄭夢周)가 그를 천거하여 서장관(書狀官)으로 삼아 경사(京師)에 갔다가 돌아와서 성균 사성(成均司成)에 임명되었다. 정묘년에 외직(外職)을 자원하여 남양 부사(南陽府使)가 되었다. 무진년에 임금께서 국정(國政)을 맡게 되매 불러서 대사성(大司成)에 임명하였다. 여러 번 계책을 올려 밀직 제학(密直提學)과 지공거(知貢擧)로 승진되고, 십학 도제조(十學都提調)가 되어 상명(詳明)·태일(太一) 등 여러 산법(算法)을 가르치고, 예문 제학(藝文提學)으로 옮겨서 《진맥도결(診脈圖訣)》을 지었다. 기사년에 조준 등과 더불어 사전(私田)을 혁파(革罷)하기를 청하였다. 공양왕이 왕위에 오르매, 삼사 우사(三司右使)에 승진되고 중흥 공신(中興功臣)으로써 충의군(忠義君)에 봉해졌다. 경오년에 정당 문학(政堂文學)에 승진되고, 윤이(尹彝)·이초(李初)의 무망(誣罔)한 옥사(獄事)가 일어나자, 도전이 그 의논을 극력 주장하였으나, 정몽주가 임금에게 말하여 이 일을 그만 중지하게 하였다. 도전이 계품사(計稟使)로써 경사(京師)에 갔다. 신미년에 형벌과 상여(賞與)의 잘되고 잘못된 점에 관하여 말씀을 올리니, 공양왕이 능히 용납하지 못하여 나주(羅州)로 폄직(貶職)되었으나, 임신년에 불리어 돌아왔는데, 남은 등과 더불어 계책을 정하여 임금을 추대(推戴)하였다.
임금께서 왕위에 오르매, 공훈(功勳)을 책정(策定)하여 1등으로 삼고 문하 시랑찬성사 겸 판상서사사(門下侍郞贊成事兼判尙瑞司事)를 가하였다. 또 계품사(計稟使)로써 경사(京師)에 갔다가 돌아와서 판삼사사 겸 판삼군부사(判三司事兼判三軍府事)로 승진되고, 삼도 도통사(三道都統使)가 되어 《진도(陣圖)》·《수수도(蒐狩圖)》·《경국전(經國典)》·《경제문감(經濟文鑑)》을 제작하고, 또 악가(樂歌)를 지었으니, 몽금척(夢金尺)·수보록(受寶籙)·문덕(文德)·납씨(納氏)·정동방(靖東方) 등의 곡(曲)이 있었다. 정총(鄭摠) 등과 더불어 《고려국사(高麗國史)》를 수찬(修撰)하였다. 봉화백(奉化伯)으로 봉해지고, 관계(官階)는 특별히 숭록 대부(崇祿大夫)로 승진되었다. 병자년에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처음으로 초장(初場) 강경(講經)의 법을 시행하였다. 정축년에 동북면을 선무(宣撫)하여 주군(州郡)의 이름을 정하고 공주성(孔州城)을 수축하였다. 무인년 봄에 돌아오니, 임금이 맞이해 위로하고 후하게 대우하였다. 도전은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고 민첩하며, 어릴 때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많은 책을 널리 보아 의논이 해박(該博)하였으며, 항상 후생(後生)을 교훈하고 이단(異端)099) 을 배척하는 일로써 자기의 임무로 삼았다. 일찍이 곤궁하게 거처하면서도 한가하게 처하여 스스로 문무(文武)의 재간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임금을 따라 동북면에 이르렀는데, 도전이 호령이 엄숙하고 군대가 정제(整齊)된 것을 보고 나아와서 비밀히 말하였다.
"훌륭합니다. 이 군대로 무슨 일인들 성공하지 못하겠습니까?"
이에 임금이 말하였다.
"무엇을 이름인가?"
도전이 대답하였다.
"왜구(倭寇)를 동남방에서 치는 것을 이름입니다."
군영(軍營) 앞에 늙은 소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도전이 소나무 위에 시(詩)를 남기겠다 하고서 껍질을 벗기고 썼다. 그 시는 이러하였다.
"아득한 세월 한 주의 소나무
몇만 겹의 청산에서 생장하였네
다른 해에 서로 볼 수 있을런지
인간은 살다 보면 문득 지난 일이네."
개국(開國)할 즈음에 왕왕 취중(醉中)에 가만히 이야기하였다.
"한(漢) 고조(高祖)가 장자방(張子房)100) 을 쓴 것이 아니라, 장자방이 곧 한 고조를 쓴 것이다."
무릇 임금을 도울 만한 것은 모의(謀議)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므로, 마침내 큰 공업(功業)을 이루어 진실로 상등의 공훈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도량이 좁고 시기가 많았으며, 또한 겁이 많아서 반드시 자기보다 나은 사람들을 해쳐서 그 묵은 감정을 보복하고자 하여, 매양 임금에게 사람을 죽여 위엄을 세우기를 권고하였으나, 임금은 모두 듣지 않았다. 그가 찬술(撰述)한 《고려국사(高麗國史)》는 공민왕 이후에는 가필(加筆)하고 삭제한 것이 사실대로 하지 않은 것이 많으니, 식견(識見)이 있는 사람들이 이를 그르게 여겼다. 처음에 도전이 한산(韓山) 이색(李穡)을 스승으로 섬기고 오천(烏川) 정몽주(鄭夢周)와 성산(星山) 이숭인(李崇仁)과 친구가 되어 친밀한 우정이 실제로 깊었는데, 후에 조준(趙浚)과 교제하고자 하여 세 사람을 참소하고 헐뜯어 원수가 되었다. 또 외조부(外祖父) 우연(禹延)의 처부(妻父)인 김전(金戩)이 일찍이 중이 되어 종 수이(樹伊)의 아내를 몰래 간통하여 딸 하나를 낳으니, 이가 도전의 외조모(外祖母)이었는데, 우현보(禹玄寶)의 자손이 김진(金戩)의 인척(姻戚)인 이유로써 그 내력을 자세히 듣고 있었다. 도전이 당초에 관직에 임명될 적에, 고신(告身)이 지체(遲滯)된 것을 우현보의 자손이 그 내력을 남에게 알려서 그렇게 된 것이라 생각하여 그 원망을 쌓아 두더니, 그가 뜻대로 되매 반드시 현보의 한 집안을 무함하여 그 죄를 만들어 내고자 하여, 몰래 거정(居正) 등을 사주(使嗾)하여 그 세 아들과 이숭인 등 5인을 죽였으며, 이에 남은 등과 더불어 어린 서자(庶子)의 세력을 믿고 자기의 뜻을 마음대로 행하고자 하여 종친을 해치려고 모의하다가, 자신과 세 아들이 모두 죽음에 이르렀다.
남은은 본관이 진주(晉州) 의령(宜寧)이며 검교 시중(檢校侍中) 남을번(南乙蕃)의 아들이다. 공민왕갑인년101) 에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고, 폐왕(廢王) 경신년에 사직단 직(社稷壇直)에 임명되었다. 을축년에 왜구(倭寇)가 삼척군(三陟郡)에 침구(侵寇)하니, 성이 작고 또한 위태하므로 지키기가 어려웠는데, 남은이 자천하여 가게 되었다. 이에 삼척군에 도착하니, 왜구가 창졸히 이르는지라, 남은이 성문을 열고 기병(騎兵) 10여 명을 거느리고 졸지에 쑥 나가서 공격하니, 왜구가 패하여 달아났다. 이 사실이 위에 알려져서 사복 정(司僕正)의 관직으로써 불려 돌아왔다. 무진년에 임금을 따라 위화도(威化島)에 이르러 조인옥(趙仁沃) 등과 더불어 군사를 돌이키려는 의논을 올렸으며, 또 비밀히 임금으로 추대(推戴)하기를 모의하였으나, 임금께서 엄숙하고 근신하신 이유로써 감히 말을 내지 못하였다. 이미 돌아와서는 비밀히 전하(殿下)102) 에게 말하니 전하께서 말하지 말도록 경계하였다. 기사년에 응양군 상호군 겸 군부 판서(鷹揚軍上護軍兼軍簿判書)에 임명되고, 경오년에 공양왕이 참소를 믿고 의심하고 시기하여 일이 또한 예측할 수가 없게 되니, 전하께서 이에 남은을 불러 평소부터 진심으로 붙좇는 사람들과 더불어 비밀히 임금을 추대(推戴)하기를 의논하게 하였다.
임금이 왕위에 오르매,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임명되고 분의 좌명 개국 공신(奮義佐命開國功臣)의 칭호를 내리었다. 여러 번 천직(遷職)되어 참찬문하부사 겸 판상서사사 우군 절도사(參贊門下府事兼判尙瑞司事右軍節度使)에까지 이르렀다. 정축년에 의성군(宜城君)에 봉해졌다. 남은은 천성이 호탕하고 비범하여 검속(檢束)이 없었으며 어릴 때부터 기이한 계책을 좋아하였다. 개국(開國)할 즈음에는 공이 상등의 반열(班列)에 있었지마는, 그러나 배운 것이 없어 식견이 우매한 때문에 강씨(康氏)가 적통(嫡統)을 빼앗으려는 계책을 찬성하여서, 드디어 정도전 등과 더불어 국권(國權)을 마음대로 하여 종친(宗親)을 제거하고자 하다가 마침내 화(禍)에 미치어 죽게 되니, 나이 45세였다. 아들은 네 사람으로 남경수(南景壽)·남경우(南景祐)·남경복(南景福)·남경지(南景祉)이다.
심효생(沈孝生)은 본관이 순천(順天) 부유(富有)이며 지금주(知錦州) 심인립(沈仁立)의 아들이다. 폐왕(廢王) 경신년103) 에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여 계해년에 을과(乙科)에 제 2인에 올라 당후관(堂後官)104) 으로부터 관직을 오랫동안 하여 장령(掌令)에 이르렀다. 대대로 전주(全州)에 거주했던 때문에 평소부터 임금에게 마음을 두어 개국 공신(開國功臣)의 반열(班列)에 참여하게 되었다. 중승(中丞)에서 외직(外職)으로 나가 경상도 안무사(慶尙道按撫使)가 되었다가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로 승진됐으며, 또 경상도 도관찰사(都觀察使)가 되어 병기(兵器)를 제조하니, 사람들이 그 정교함을 칭찬하였다. 벼슬은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 부성군(富城君)에 이르고, 나이는 50세였다. 아들은 심도원(沈道源)이다.
박위(朴葳)는 본관이 밀양(密陽)이다. 처음에 공민왕에게 벼슬하여 폐왕(廢王) 때까지 이르렀는데, 중앙과 지방 관직에 두루 벼슬하여 재능(才能)으로써 칭찬을 받았으며, 김해(金海)·진주(晉州)·계림(鷄林)·영흥(永興)이 모두 그의 지내온 고을이다. 여러 번 왜구(倭寇)를 공격했으므로 국가에서 그가 장수의 지략(智略)이 있음을 알고 여러 번 천직(遷職)하여 밀직 부사(密直副使)에 이르렀으며, 나가 합포(合浦)를 지켰는데 수군(水軍)을 거느리고 가서 대마도(對馬島)를 쳐부수었다. 임금이 왕위에 오르매 박중질(朴仲質) 등이 체포되어 공사(供辭)가 그에게 관련되므로, 대간(臺諫)이 연달아 소(疏)를 올려 극형(極刑)에 처하도록 청하였으나, 임금께서 변명하여 구하므로 생명을 보전하게 되었다.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로 승진되어 금군(禁軍)을 관장하게 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여러 왕자들이 그를 부르니 갑사(甲士)를 거느리고 대궐 문에 나가서 어정거리다가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아들은 박기(朴耆)이다.
유만수(柳曼殊)는 본관이 문화(文化)로 우부대언(右副代言) 유총(柳總)의 아들이다. 공민왕 때에 보마배행수(寶馬陪行首)가 되었으며, 계묘년에 장군에 임명되어 여러 번 천직(遷職)하여 밀직 부사(密直副使)에 이르렀다. 정사년에 임금을 따라 풍해도(豊海道)에서 왜구(倭寇)를 쳤다. 무진년에 임금을 따라 위화도(威化島)에 이르렀다가, 군사를 돌이키자는 의논에 참여하여 돌아와서 지문하(知門下)에 임명되니 회군 공신(回軍功臣)이라 일컬어졌다. 경오년에 문하 평리(門下評理)에 임명되고 신미년에 응양군 상호군(鷹揚軍上護軍)으로 겸직되었다. 임금이 왕위에 오르매, 원종 공신(原從功臣)이라 일컫고 상의문하부사(商議門下府事)에 임명되었는데, 이때에 와서 그 아들 유원지(柳源之)를 거느리고 이르렀으나 진퇴(進退)를 알지 못하여 모두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아들은 세 사람이니, 맏아들은 곧 유원지(柳源之)이고 다음 아들은 유은지(柳隱之)와 유연지(柳衍之)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