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14:1-12
찬송가 찬송가 390장 “예수가 거느리시니”
목회데이터연구소는 작년 11월에 흥미로운 조사를 진행했는데, 교회를 출석하며 신앙생활하는 청년들에게 현재의 삶에서 느낄 수 있는 몇 가지 감정을 물었습니다. 이에 대해 교회 청년 3명 중 1명 이상은 ‘불안하다’고 응답했고, 4명 중 1명꼴로 ‘외롭거나 우울한 상태’라고 응답했습니다. 이어서 이들에게 기독교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에 대해 물었고, ‘사람을 위로하는’ 이미지를 가장 많이 떠올렸습니다. 그다음으로 ‘세상과 다른’, ‘정의롭고 개혁적인’, ‘사회를 통합하는’ 등의 순으로 응답했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은 하늘 소망으로 이 땅에서 살아보려 발버둥 치는 우리는 교회라 일컬어집니다. 하지만 교회로 살아가는 우리의 오늘은 결코 녹록지 않습니다. 치열하게 살아가는 오늘은 우리에게 불안과 고독, 우울을 마주하게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서로를 통해 위로를 얻고 싶은 것이 당연합니다. 나만 고달픈 오늘을 살아가는 줄 알았지만, 교회 공동체에 속해보니 나와 같은 인생을 사는 이들이 많다는 것을 봅니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고백하며 치열하게 살아가는 동역자들을 통해 성령께서는 위로와 격려로 함께 하십니다.
우스 땅에 살고 있는 욥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떠난 사람이었습니다. 이 땅의 시선에서 바라볼 때 흠잡을 것이 없었던 그에게 어느 날 도저히 이유를 알 수 없는 재앙이 찾아옵니다. 그에게 세 명의 친구가 찾아왔습니다. 친구들이 찾아왔을 당시 욥은 ‘드디어 나를 위로해 줄 친구들!’이라며 기대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의 친구들은 각자 자신의 경험과 신학으로 욥을 위로하기는커녕 정죄하며 판단만 하기에 이릅니다. 답답한 욥은 친구들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해 호소하기 시작했습니다.
인생의 나약함과 한계 (1-12절)
(1-2)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생애가 짧고 걱정이 가득하며 그는 꽃과 같이 자라나서 시들며 그림자 같이 지나가며 머물지 아니하거늘
욥은 인간의 나약함을 호소합니다. 인간의 수명은 짧고 인생은 괴롭습니다. 그리고 인생은 꽃과 같은 식물처럼 번성하다가 그림자같이 한순간에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는 날은 짧아 가난하지만, 걱정은 많아서 부요한 것이 인생입니다. 2절에 히브리 단어로 ‘시들다’는 ‘잘라내다’의 의미도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은 곡식 거두는 자의 낫에 의해 곡식과 함께 잘리는 봄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꽃이 자라나서 시든다는 뜻도 있고, 꽃이 자라나고 있지만 때가 되면 곡식과 함께 잘려나가는 허무함의 의미도 포함됩니다.
우리의 인생이 이러합니다. 인생의 꽃이 피어 가장 아름다울 때, 열매가 맺어 이제 그 결실을 맛보려 할 때, 한순간에 사라질 수 있는 덧없는 인생입니다. 이유가 있겠지만, 그럼에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인생입니다. 자신이 이러한 인생이라는 것을 고백한 욥은 하나님께 자신의 억울함을 계속해서 호소합니다. 본문 3절과 4절입니다.
(3-4) 이와 같은 자를 주께서 눈여겨 보시나이까 나를 주 앞으로 이끌어서 재판하시나이까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에서 낼 수 있으리이까 하나도 없나이다
욥은 이렇게 연약하고 일시적인 인생을 하나님께서 눈여겨보시며 재판하시냐고 호소합니다. 욥 자신에게 죄가 있는지 심문하고 끝까지 감시하는 하나님께 그는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인간을 감시하고 재판하는 것이 어찌 억울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욥이 가지고 온 논리가 흥미롭습니다.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 즉 모든 인간은 존재론적으로 깨끗할 수 없는 원죄에 빠져있습니다. 애초에 이미 원죄 가운데 있는 인간에게 깨끗한 것을 찾으시려 감시하는 하나님께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욥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5-6) 그의 날을 정하셨고 그의 달 수도 주께 있으므로 그의 규례를 정하여 넘어가지 못하게 하셨사온즉 그에게서 눈을 돌이켜 그가 품꾼 같이 그의 날을 마칠 때까지 그를 홀로 있게 하옵소서
욥은 죄인 된 인간의 사는 날을 하나님께서 정하셨고 하나님이 다 알고 계심을 고백합니다. 또한 모든 인간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주관 아래 있음도 고백합니다. 이러한 제한된 삶 속에서 하나님께 욥이 요구한 것은 인간의 휴식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을 감시자인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 쉬고 싶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백은 하나님을 향한 탄식과 호소의 시편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시 39:13, 새번역) 내가 떠나 없어지기 전에 다시 미소지을 수 있도록 나에게서 눈길을 단 한 번만이라도 돌려주십시오.
얼마나 삶이 고통스러우면 죽기 전 미소 지을 수 있도록 나에게서 시선을 돌려달라는 고백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또한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한 말씀에 일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욥과 시편 기자가 억울함을 누구에게 호소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로 향하고 있습니다. 비록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구가 강하지만, 이 또한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고난이고 하나님의 주관하심을 담은 신앙고백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도 불안하고 외로우며 우울할 때가 있습니다. 이 감정을 누구에게 호소하시겠습니까? 오늘의 아픔과 고통까지도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음을 고백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억울함과 아픔을 호소하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1절에서 6절로 기록된 욥의 호소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이 죄를 범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왜 그들을 감시하고 그들이 잘못했다 하여 그들을 학대하십니까? 인간은 모두가 원래부터 죄가 있고 모두 금방 죽을 것인데, 그런 일 가지고 왜 그렇게 야단법석을 떠십니까? 그러니까 얼마남지 않은 인생 마지막 잠깐이라도 좀 저를 내버려 두십시오.’ 욥은 더욱 심화하여 자신의 처지를 이야기합니다.
(7-10) 나무는 희망이 있나니 찍힐지라도 다시 움이 나서 연한 가지가 끊이지 아니하며 그 뿌리가 땅에서 늙고 줄기가 흙에서 죽을지라도 물 기운에 움이 돋고 가지가 뻗어서 새로 심은 것과 같거니와 장정이라도 죽으면 소멸되나니 인생이 숨을 거두면 그가 어디 있느냐
욥은 인생의 한계에 대해 한층 고조된 목소리로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그 방법은 꽃과 같이 시드는, 잘려나가는 운명을 지닌 인간과 죽어도 다시 사는 생명의 뿌리를 내리는 희망이 있는 나무를 비교하는 것입니다.
팔레스타인 인근 지역에는 나무가 오래되어 더 이상 좋은 열매를 내지 못할 때 줄기를 잘라 버리는 관습이 있습니다. 좋은 열매를 내지 못하는 나무의 밑둥이 잘려짐은 얼핏 나무의 죽음으로 볼 수 있지만, 뿌리로부터 수분을 공급받으면 그 다음 해에 새로운 싹을 내고 이후에 좋은 결실을 맺게 됩니다. 나무의 죽음이 곧 새 생명을 가져온 것입니다. 더욱이 뿌리마저 늙고 베어진 그루터기마저 땅에 묻혀있을지라도 나무는 물기운에 다시 싹이 나고 새로 심은 듯 가지가 뻗습니다. 나무에는 희망이 있습니다. 다시 일어나 생명을 품고 푸름을 간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나무와 대조됩니다. 아무리 힘이 세고 권세가일지라도 한 번 죽으면 사라지게 되는 덧없는 인생입니다. 좋은 인생을 살지 못하면 죽고 다시 새롭게 시작할 희망이 없습니다. 올해는 고통스럽지만, 내년은 더 나은 삶을 반드시 산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죽은 사람은 그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게 인생들에게 잊히게 됩니다.
(11-12) 물이 바다에서 줄어들고 강물이 잦아서 마름 같이 사람이 누우면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하늘이 없어지기까지 눈을 뜨지 못하며 잠을 깨지 못하느니라
바다로 번역된 히브리 단어는 호수, 늪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즉 호수의 물이 여름의 열기에 증발될 수 있고, 시냇물이 바싹 마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라버린 물은 다시 보이지 않습니다. 인간이 바로 그렇습니다. 하늘이 사라지는 한이 있어도 죽은 사람은 눈을 뜨지 못합니다.
위로를 기대했던 친구들로부터 자신을 향한 정죄와 비판이 쏟아지게 되자 욥은 억울함을 호소합니다. 친구들에게뿐만 아니라 욥은 하나님께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합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비교하면 너무나도 연약한 존재이고, 그 인간을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니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나무도 물을 다시 머금으면 새 생명이 돋아나지만, 한 번 죽은 인간은 다시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슬프고 비통함만 가득한 오늘의 본문에서 우리는 어떤 위로를 얻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욥이 아픔과 고통을 하나님께 호소했다는 것입니다. 살면서 마주하는 아픔을 누구에게 토해내시겠습니까? 물론 이를 위해 많은 사람들을 우리에게 붙여주셨음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위로는 한계가 있고, 공감해 준다 한들 그 고통을 온전히 경험하기 전까지는 만족스러운 위로는 없습니다.
답답함에 사무쳐 오늘의 일과가 손에 잡히지 않을 때면 주님께 억울함을 호소하십시다. 고통스러운 환경으로 나를 모시는 분이 주님일지라도 일단 주님께 분노와 억울함을 토해내십시다. 우리는 욥의 결론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점점 교만해지는 욥에게 자신을 보이셨고, 욥은 하나님 앞에서 모든 것을 인정하고 내려놓으며 회개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때가 언제 올지 모릅니다. 그러나 자신의 아들을 버리면서까지 우리를 살리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기에 버겁지만 한 번 더 창문을 열 수 있습니다. 이해할 수 없더라도 독생자 그리스도를 통해 먼저 우리를 향한 창문이 되어주신 주님의 신실함을 의지하는 오늘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많습니다. 우리가 겪는 고통과 아픔에 어떤 이유와 뜻이 있는지 우리는 다 알지 못합니다. 가족과 친구들에게 위로를 기대했지만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은 정죄와 판단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아픔과 고통을 일단 주님께 호소하는 믿음의 자녀들이 되게 하옵소서. 그리스도를 버리시면서 우리를 살리신 주님의 신실함을 의지하여 한 번 더 창문을 열고 주님의 참된 위로를 기다리는 믿음의 자녀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욥이 고백한 인간의 나약함은 무엇입니까(1-2절)?
2. 욥은 하나님이 애초에 더러울 수 밖에 없는 인간에게 깨끗한 것을 찾는다며 억울함을 호소합니다. 욥이 오해하고 있는 하나님은 어떤 모습입니까(3-4절)? 내가 오해했던 하나님의 모습은 어떤 모습입니까?
3. 욥은 자신의 억울함을 어찌되었든 하나님께 호소했습니다. 탄식하는 기도를 드려본 경험이 있습니까? 그때 나의 심정은 어떠했습니까?
4. 오늘을 살아가는 내가 겪은 억울함은 무엇입니까? 이것을 하나님께 호소할 수 있는 믿음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작성: 김현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