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수 시인의 제3시집이 나왔습니다. 박현수 시인은 내게는 바로 위의 형이 되는 사람입니다. 며칠 전 아는 문인들과 함께 출판기념회 한다고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왔는데 동국대국문학과 출신으로 교사인 셋째 형님과 시인과 나 이렇게 셋이서 조촐한 출판기념회를 그 하루 전에 했습니다. "3시집 출간을 기념하며-겨울산을 읽고"라는 글은 그렇게 쓰게 된 글입니다. 박현수 시인은 <세한도>등 다섯 편으로 9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습니다. 91년도에 내가 군대를 제대했을 때 대학 4학년이었던 형은 한 학기 휴학하고 등록금을 벌고 있었는데 같이 막노동을 하던 중 내가 형의 시 다섯 편을 골라 투고했던 기억이 나는군요. 심사위원은 신경림, 정현종, 홍윤숙 시인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투고하지 않았더라도 시인으로 등단했겠지만 "내가 만든 시인"이라고 농담 삼아 말하곤 합니다.
이하 <겨울산> 감상문과 시인의 등단작 <세한도>와 제1시집 중의 <내소사> 그리고 제2시집 중의 <물수제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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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시집 출간을 기념하며-겨울산을 읽고" - 박 오수
겨울산
모든 것이
이렇게 자명하게 드러나는 날이 오리라
대설주의보를 지나
어깨 넓은 겨울산이 제
허리에 걸린 길을 훤히 드러내고 있다
제 몸을 관통하는
이념이 이토록 선명하게 보인 적은 없다
몸을 안고 돌아오는
차가운 정신의 지도가 그려질 듯하다
함부로 밑줄 그을 수도 없는
혹한의 한 마디가
짙은 녹음을 헤치고
현란한 단풍을 털어 비로소 발음되고 있다
일점일획을 더할 수도
뺄 수도 없는 단호한 한 문장이다
눈 녹은 물로
질척거리는 여기, 이 흐물거리는 구절들이
비로소 읽히기 시작한다
저 문장과 이 구절들은 서로의 부연이고 각주다
모든 것은 말해졌다
이제 더 이상의 깨달음은 없다
겨울산을 가로지르는 뇌문(雷文)
모든 것이 이렇게
자명하는 드러나는 날이 기필코 온 것이다.
세잔의 셍 빅트와르산(山) 시리즈를 기억하고 있다. 산을 그리기보다 산의 골격을 중심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겨울산은 없는 것으로 기억된다.
이 시 <겨울산>이라는 작품은 구체적인 산명이 생략되고 있고 산의 내적 골격과 산세의 역동성을 보여준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세잔의 그림과 차이가 있으나 그와 다른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
우선, 사람과의 관계가 들어가 있다. 길이라는 단어를 통해서이다. 그 길은 '이념'이라는 단어로 다시 제시된다. 문신처럼 몸에 새겨진 그 이념이, '단호한 한 문장'이 성스러운 침묵으로 발음되고 있다. 겨울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그 '단호한 한 문장'과 구별되지만 상보적인 '구절들'에 관한 것이다. "눈 녹은 물로 / 질척거리는 여기, 이 흐물거리는 구절들이 / 비로소 읽히기 시작한다"라는 부분부터는 일종의 댓구이다. 이 시의 가치는 이 댓구부분에서 온다고 할 수 있다. '이념'은, '문장'은 눈 녹은 물로 질척거려야 '비로소 읽히기' 때문이다. 산 아래 동네에도 그 산에 난 길과 다름 없는 길이 있지만 그것은 문장으로 오롯이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구절들'로 해체된 것이다. 산 아래에 이념을 곧이곧대로 쳐박아넣는 것에 대한 비판이 여기에 숨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산 위와 산 아래는 온도차가 있으니 '눈 녹은 물로 질척거리는 여기'일 수 밖에 없다. 거기와 여기는 그렇게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 이것을 도외시하고 거기에 매달리고 여기를 부정하는 것은 어리석음痴이 아닐 수 없다.
시인은 거기의 문장과 여기의 구절들이 서로 다른 것도 아니고 서로 같은 것도 아니며 우열도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것이 '서로의 부연이고 각주'라는 말의 뜻이다. '질척거리는 여기'에서 '흐물거리는 구절들이 비로서 읽히'는 것이다. 그것을 읽는 데에는 '현란한 단풍을 털은' 자명하고 선명한 겨울산의 성스런 묵언 또는 발음이 필수적이다. 서로 보완하고 있기 때문이다.
본질과 현상의 혼융! 세속과 탈속의 혼융! 여기에서 거기를 찾고 거기에서 여기를 보는 트인 마음에서 시인은 휴식을 취하거나 안도감을 갖는 것 같다. 모든 것이 말해졌고 더 이상 깨달을 것도 없다는 것이다.
이 시는 단순하지만 길에 대한 이중주를 훌륭히 연주해내고 있다. 겨울산 아랫동네에 사는 우리들은 산을 올랐던 우리의 흔적을 겨울산에서 보고 또 우리의 흔적을 지금 여기 질펀거리는 길에서 본다. 그 길은, 그 겉은 우리 삶의 뼈이자 살이다. 애환이며 동시에 희망이다.
세한도(歲寒圖) - 박현수
1
어제는
나보다 더 보폭이 넓은 영혼을
따라다니다 꿈을 깼다
영원히 좁혀지지 않는 그 거리를
나는 눈물로 따라갔지만
어느새 홀로 빈 들에 서고 말았다
어혈(瘀血)의 생각이 저리도
맑게 틔어오던 새벽에
헝클어진 삶을 쓸어올리며
첫닭처럼 잠을 깼다
누군 핏속에서
푸르른 혈죽(血竹)을 피웠다는데
나는
내 핏속에서 무엇을 피워낼 수 있을까
2
바람이 분다
가난할수록 더 흔들리는 집들
어디로 흐르는 강(江)이길래
뼛속을 타며
삼백 예순의 마디마디를 이렇듯 저미는가
내게 어디
학적(鶴笛)으로 쓸 반듯한
뼈 하나라도 있던가
끝도 없이 무너져
내리는 모래더미 같은 나는
스무 해 얕은 물가에서
빛 좋은 웃음 한 줌 건져내지 못하고
그 어디
빈 하늘만 서성대고 다니다
어느새
고적한 세한도의 구도 위에 서다
이제
내게 남은 일이란
시누대처럼
야위어가는 것
(199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내소사
1
길은 흘러내린다
꿈꾸는 것은 모두
스스로의 무게로 흘러내리고 만다
모래도, 흐르는 모래만이
강을 이루고
산으로 떠돌 수 있는 것이다
내소사 낡은 문을 들어설 때
거대하게 꿈틀거리던
유사(流砂)가 하늘을 흐르고 있었다
어디선가
적막한 발소리가 걸어 들어온다
뫼비우스의 길
어디서 어디로 이어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하지만
누군가 이 길을 개관하는 이가 있다
적요가 깊을수록
벽은 하나씩 허물어지고
내소사 낡은
뜨락에 단풍은 별처럼 지다
2.
길이 늘
수평선으로 흘러드는 서해에 서면
옥상에 뿌리를 둔 담쟁이처럼
가을은
경도를 타고 내려 온다고 한다
전나무 숲을 지나
낙엽 붉어 길 더욱 밝은 외길을
하염없이 빨아들이는 내소사
볕이 드는 툇마루의 오후를
스님의 말은
그림자의 내 귓속으로 지나가고
내 말은
결 불거진 기둥 사이로 흩어지고 있었다
전나무 씨앗이 날아든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진 짐이 한짐이라서
청련암을 물었다
석벽 아래
한 뼘
스님의 손 끝에 단풍이 탄다
제1시집<<우울한 시대의 사랑에게>>(청년정신)에서
물수제비
말없음표처럼
이 세상
건너다 점점이 사라지는
말일지라도
침묵 속에 가라앉을 꿈일지라도
자신을 삼켜버릴
푸르고 깊은 수심을 딛고
떠오를 수밖에 없다
떠올라
저 끝을 가늠해볼 수밖에 없다
수면과 간신히 맞닿으며
한 뼘이라도
더 나아가기 위해수평선을 닮아야 한다, 귀는
-제2시집 <<위험한 독서>>(천년의시작)에서
첫댓글 박현수 시인의 세번째 시집 출판을 축하드립니다. 오수씨 통해서 제게도 한 권 보내주셨기에, 제가 다 읽어보았습니다. 훌륭한 시들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오수씨에게 여기 좀 올려서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일독을 빕니다. 감사합니다. 오수씨는 세째 형님도 국문과 출신이라고 하니 다 문학에 재주가 있는가 봅니다. 나무아미타불
선생님, 고맙습니다. 올 해엔 여동생이 <<코끼리, 달아나다>>(박지숙 지음, 꿈꾸는 달팽이 펴냄)라는 동화책을 내기도 하여 형제들에게 수확이 있었던 해인 것 같습니다. 발자크가 잉크로 관개하여 수확을 거두려면 10년은 걸린다고 했는데 여동생의 경우 주부로 있으면서 틈틈이 습작한지 5년도 안되어 좋은 결과를 내어 즐거웠습니다.
앞으로 이 곳에 시와 관련된 글들을 올리겠습니다.
내내 건강하십시요.
박 오수 .().
축하드립니다!
'허리에 걸린 길을 훤히 드러내고 있다 '
*겨울산 도 좋고요 제가 생각지 못했던 시속으로 의 여행 제가 좋아하는
겨울처럼 선명하고 새롭습니다
앞으로도 부탁 드립니다 ?
고맙습니다. 내년부터는 이 곳에 시 이야기를 되도록 꾸준히 올릴까 계획하고 있습니다. 시를 옷처럼 입고 사는 경계와는 멀지만 더 가까이 해야겠다고, 김호성 선생님 연구실 문 옆에 매번 새로이 걸리는 시들을 보며, 생각하고 있습니다.
새 해 복 많이 받으십시요. 박 오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