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칙 목주할후(睦州喝後) : 목주스님의 고함을 지른 후
“보검은 본래 집안에 있는데, ‘싸구려 검’ 빌려 써서야…”
목주(睦州, 780~877)선사는 황벽 희운(黃檗希運)선사의 법을 이은 스님이다.
젊은 임제(臨濟)스님이 열심히 정진하는 것을 보고 큰 그릇임을 간파하고는
황벽스님을 세 번이나 찾아뵙게 하여 깨달음으로 인도하였으며,
찾아온 운문스님이 법을 묻기 위해 문 안으로 발을 들이밀자
세차게 문을 닫아 다리를 분질러 깨달음으로 인도하였다.
명예를 싫어하여 숨어살기를 좋아하였으며,
짚신을 만들어 팔아 어머니를 봉양할 정도로 효심이 깊었다.
흔히 진존숙(陳尊宿)으로 많이 알려져 있는 선사이다.
➲ 본칙 원문
擧 睦州問僧近離甚處 僧便喝 州云老僧被汝一喝 僧又喝
州云三喝四喝後作麽生 僧無語 州便打云 這掠虛頭漢
※약허두한(掠虛頭漢) : 당·송 시대의 속어로 ‘멍청한 놈’
‘얼간이 같은 놈’ 정도의 뜻.
➲ 강설
만일 깨달음 그 자체만을 위해 한없이 상승해가는
절대부정의 입장에서만 말하자면 제불보살이나 일체의 성현이
한 마디도 할 수 없고, 팔만대장경의 온갖 교설이 한 글자도
쓸모가 없게 될 것이다. 오로지 다 쓸어버리면 될 것이다.
그런 것은 어디까지나 말에 불과하고 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성현들의 말씀이 세상에 전해진지가 얼마인가.
그 말씀들을 외우고 이해하는 정도로 모두가 성현의 경지가 될 수 있었다면,
세상은 이미 성현들로 넘쳐날 것이다.
숟가락은 매번 제가 먼저 음식을 만나지만 그 맛을 모른다.
수행도 그러해서 귀는 모든 것을 먼저 듣되 그 맛을 모른다.
오로지 목숨을 던져 들어간 사람만이 깨달음의 맛을 아는 것이다.
석가세존도 세상 모든 학문 다 익혔지만,
결국에는 스스로 깨달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반대로 상대적 입장인 절대긍정으로만 논하자면
이 세상의 그 모든 것이 다 존귀한 것이니,
어찌 곤충이나 미물이라고 무시할까 보냐.
모두가 제 모습을 확연히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부처라는 표현도 중생이라는 표현도 필요 없는 것이다.
절대부정과 절대긍정의 두 가지 지도법은
이미 온갖 경론 등에서 다 보여준 것이며,
선지식들이 즐겨 사용했던 방법이다.
하지만 이 두 가지는 너무나 정형화되어서
어떤 경우에는 오히려 악용되기도 한다.
만약 이 두 가지의 측면이 아니라면 어떻게 해야만 할까?
이에 대한 적절한 예를 목주스님께서 보여주신다.
➲ 본칙
이런 얘기가 있다. 목주스님이 찾아온 스님에게 물었다.
“최근에 어느 곳을 떠나 왔는가?”
➲ 강설
흔히 선사들이 새로 찾아온 수행자에게 묻는 방식 중의 하나이다.
어느 어른 밑에서 지도를 받았는지를 묻는 것이기도 하고,
아울러 상대의 경계를 묻는 것이기도 하다.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를 아는 이는 이미 할 일의 반은 마친 셈이다.
그러나 대부분 자신이 선 자리는 모르는 채 바깥만 보느라 정신없다.
➲ 본칙
객승이 갑자기 고함을 꽥 질렀다.
목주스님이 “내가 자네에게 한 번 당했군.” 하자,
객승이 다시 고함을 꽥 질렀다.
➲ 강설
찾아온 스님은 여러 곳에서 공부했거나 꽤나 선어록을 많이 본 듯하다.
따라서 ‘그따위를 알아서 무엇 하겠는가!’라는 입장을 분명히 드러내었다.
절대적인 입장에서야 과거의 일 따위를 묻는 것은 우스운 일이 아니겠는가.
이 객승은 목주화상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었으리라.
그러면서도 이렇게 내지를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칭찬할 만하다.
목주스님은 “아이쿠, 내가 자네에게 한 방 당했네 그려.”
슬쩍 비키듯 칭찬하는 듯 상대를 시험하였다.
객승은 다시 호기를 부렸다. 또 꽥 고함을 지른 것이다.
➲ 본칙
목주스님이 “세 번 고함치고 네 번 고함친 후에는 어쩔 셈인가?”하니,
객승이 말이 없었다.
목주스님이 곧바로 후려쳤다. “이 얼간이 같은 놈!”
➲ 강설
이제 목주스님은 완전히 간파해 버렸다.
“그래. 꽥 꽥 고함을 지른 후에는 어쩔 셈인가?”
이건 객승이 전혀 예상치 못한 고단수였다.
그는 그냥 벙어리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덕산 선사의 할(喝, 고함)이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
자유자재한 보검이었음을 모른 채,
그저 흉내만 내어 고함(할)을 꽥 꽥 질러본 것이다.
자신이 보검을 쓴다고 생각했겠지만 목주스님의 보검과 부딪혀 보니,
자신이 쓴 것은 보검이 아니라 납으로 모양만 낸 엉터리 검이었던 것이다.
진정한 보검은 본래부터 자기 집안에 있었는데,
찾지를 못하고 싸구려 검을 빌려 쓴 것이다.
게다가 사용법도 모르고 냅다 휘두르기만 하였으니….
쯧쯧! 목주스님의 칼끝이 심장을 향하고 있음을 몰랐구나.
“바보 같은 놈!”
➲ 송 원문
兩喝與三喝 作者知機變
若謂騎虎頭 二俱成瞎漢
誰瞎漢 拈來天下與人看
※작자(作者) : 흔히 ‘작가(作家)’라는 말로 많이 사용되는 선가(禪家)의
독특한 표현. ‘눈 밝은 수행자’ ‘훌륭한 스승’ 등의 뜻임.
※기변(機變) : 임기응변(臨機應變)의 준말. 곧바로 상황에 맞춰 대처하는 솜씨.
※염래(拈來) : 집어내 보라. 드러내 보라.
➲ 송
두 번의 할과 더불어 세 번의 할이여!
➲ 강설
객승의 도전은 칭찬할 만하다.
멍청하게 앉아 있어서는 그 어떤 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하지만 진정한 고수는 똑같은 초식을 거듭해 쓰지 않는다.
투수가 같은 구질의 공을 계속 던지면 타자에게 당한다.
유도선수가 같은 방식으로만 상대를 제압하려하면 역이용 당한다.
그들이 비록 뛰어난 솜씨를 지녔다고 해도 지혜롭지 못하면
상대에게 제압당하는 것이다.
수행자의 능력(경지)은 많이 알고 있느냐가 아니라,
깨달음의 지혜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다.
매 순간 깨어있느냐가 관건이다.
아! ‘깨어있다’는 것을 ‘잘 인식하는 것’으로 알면 큰 코 다친다.
➲ 송
눈 밝은 이라야 대처하는 솜씨를 알리라.
➲ 강설
찾아온 객승이 꽥! 고함을 지르고 목주스님이 슬쩍 비켜서서 치켜세우듯
“내가 자네에게 한 방 맞았구나!”하는 대처.
그리고 또 꽥 고함을 내지른 객승과
“계속 고함을 지른 뒤에는 어쩌려고?” 묻고는 냅다 후려치는
이 멋들어진 광경을 보라!
선지식은 무릇 이와 같아야 한다. 비록 법사라도 머릿속에 든
경전만 되풀이하고 있거나 유명한 대학교수라도 낡은 강의 노트대로
계속 떠든다면 녹음기나 다를 바 없다.
상대에 따라 그가 처한 구덩이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다면 선지식이 아니다.
하긴 선지식의 노력으로도 안 되는 놈이 많긴 하지.
➲ 송
만약 호랑이 머리를 걸터탔다고
이른다면 둘을 함께 눈먼 봉사로 만드는 것이리라.
➲ 강설
누군가가 객승이 괜스레 객기를 부렸다고 깔아뭉개 버린다면,
이는 객승이나 목주스님이나 모두 눈먼 봉사로 만들어 버리는 격이다.
과연 둘만 봉사가 되고 말았을까? 아마도 참으로 많은 이들이
이와 같이 평가했을 것이다.
➲ 송
누가 눈먼 봉사인가?
세상에 드러내 사람들에게 보여라.
➲ 강설
설두스님은 끝끝내 당신의 말을 아꼈다. 그리고는 다시 일깨우려 하였다.
과연 누가 눈먼 장님이 된 것일까?
뭐, 드러내 보일 것이나 있나. 이미 명명백백하게 드러난 것 아닌가?
아뿔싸! 설두 늙은이를 너무 쉽게 평하였구나.
2021년 8월 17일
송강 스님 서울 개화사 주지
불교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