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48장 26-47절
찬송가 94장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조롱거리가 될 모압(26-35절)
예레미야 46-51장은 ‘이방 10개국에 대한 심판의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48장은 그중에서 3번째인 ‘모압’에 대한 심판의 예언입니다.
어제 1-25절의 말씀에서 모압이 왜 멸망의 길을 갈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서 살폈습니다. 큰 2가지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7절 상반절의 “네가 네 업적과 보물을 의뢰하므로 너도 정복을 당할 것이요”의 말씀처럼 모압은, 자신들이 성취한 업적과 자신들이 가진 것을 신뢰했습니다. ‘업적’의 의미는 ‘손으로 만든 것’인데, 그들이 이룩해 낸 양 떼와 가축 떼로 볼 수도 있지만, 그들이 사는 염해(사해) 동쪽에 지정학적으로 튼튼하게 지어진 요새를 의미합니다. 모압은 비옥한 토지에서 많은 농작물을 재배했고, 요새와 같은 지형이 그들을 지켜 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둘째는 13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이스라엘 집이 벧엘을 의뢰하므로 수치를 당한 것 같이 모압이 그모스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하리로다”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왕이 벧엘에서 우상의 제단을 만들어 숭배함으로 나라가 멸망의 길을 간 것처럼, 모압도 ‘그모스(전쟁의 신)’를 섬김으로 수치를 당하여 몰락의 길을 가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 25-35절은 모압이 멸망하게 되는 또 하나의 이유를 ‘교만’이라고 증거합니다.
(26) 모압으로 취하게 할지어다 이는 그가 여호와에 대하여 교만함이라 그가 그 토한 것에서 뒹굴므로 조롱거리가 되리로다
‘모압으로 취하게 하라’는 명령문으로 시작됩니다. 성경은 종종 인간의 죄가 점점 크고 짙어져서, 하나님께서 참고 넘길 수 있는 한계를 넘겼을 때,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마셔서 취한 사람들에 비유되곤 합니다. 즉 모압의 교만함은 하나님께서 참아주시는 한계가 지났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모압 사람들은 비옥한 토지에서 나오는 많은 농산물과 요새와 같은 지형적인 유리함으로 인해서 하나님이 없이도 충분히 잘 살 수 있다는 교만함이 극에 달했던 것입니다.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7) 네가 이스라엘을 조롱하지 아니하였느냐 그가 도둑 가운데에서 발견되었느냐 네가 그를 말할 때마다 네 머리를 흔드는도다
모압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당할 수밖에 없었던 또 다른 이유로 이스라엘을 조롱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머리를 흔드는 것도 조롱하는 행동입니다. “쯧쯧!”이라고 혀를 차며 머리를 가로 젓는 것입니다.
모압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후손입니다. 그리고 다윗의 증조모인 룻이 모압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모압은 이스라엘과 혈연적으로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이스라엘이 아시리아에, 유다가 바빌로니아에 의해 무너지는 것을 보고, 모압은 안타까운 마음을 갖기보다 조롱하였습니다. 유다 백성들이 도둑이 아니었음에도 모압 사람들은 도둑 취급하며 조롱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모압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8) 모압 주민들아 너희는 성읍을 떠나 바위 사이에 살지어다 출입문 어귀 가장자리에 깃들이는 비둘기 같이 할지어다
모압은 고원지대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도시 전체가 요새와도 같았습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이민족에게 침략을 당하지 않고 번영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넉넉한 수자원과 기름진 땅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풍부한 농산물로 인해서 경제적으로도 안정을 누렸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향해서 고개를 가로저으셨습니다. 그들이 바빌로니아의 침략을 받아서 성읍과 거주지를 떠나서 바위 사이에 숨어 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압이 지리적으로 아무리 안전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영원한 안전은 하나님 안에만 있습니다.
모압이 얼마나 교만했는지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9-30) 우리가 모압의 교만을 들었나니 심한 교만 곧 그의 자고와 오만과 자랑과 그 마음의 거만이로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그의 노여워함의 허탄함을 아노니 그가 자랑하여도 아무 것도 성취하지 못하였도다
모압은 교만, 자만(자고), 오만, 거만(자랑) 등 여러 ‘만(慢)’자가 다 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심한 교만’에서 ‘심한’은 히브리어에서 최상급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모압 사람들의 교만은 그 넓이와 높이가 끝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레미야 선지자는 모압의 교만을 들었다고 합니다. 모압사람들은 지형적인 특성과 풍부한 경제력을 자랑삼아 교만한 말을 남발하고 다녔던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아노니’라며 하나님께서 모압의 교만함을 아신다는 것을 강조해서 말씀하시고, 모압의 자랑은 허풍이며, 모압이 이루었다는 것도 거짓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모압은 예루살렘이 함락당하고 4년이 지난 후인, B.C. 582년에 바빌로니아에 의해서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31) 그러므로 내가 모압을 위하여 울며 온 모압을 위하여 부르짖으리니 무리가 길헤레스 사람을 위하여 신음하리로다
‘내가 모압을 위하여 울며’라고 하는데, 여기서 ‘내가’는 ‘예레미야 선지자’보다 ‘하나님’으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하고, 거짓된 모압을 조롱하시거나 멸망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그런 삶을 안타까워하시며 슬퍼하셨습니다. 특별히 ‘길헤레스 사람들’을 생각하며 슬피 우신다고 합니다. ‘길헤레스’는 염해 동쪽 약 13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요새와 같은 도시였습니다. 이곳이 무너진다고 하는 것은 다른 곳은 이미 다 무너졌음을 의미합니다. 70년에 로마의 티투스 장군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함락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로도 2-3년 동안 더 버틴 곳이 있었는데, ‘마사다 요새’였습니다. 그곳이 무너짐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1900년 동안 나라 없는 백성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길헤레스는 모압의 마사다와 같은 곳이었습니다.
(33-34) 기쁨과 환희가 옥토와 모압 땅에서 빼앗겼도다 내가 포도주 틀에 포도주가 끊어지게 하리니 외치며 밟는 자가 없을 것이라 그 외침은 즐거운 외침이 되지 못하리로다 헤스본에서 엘르알레를 지나 야하스까지와 소알에서 호로나임을 지나 에글랏 셀리시야에 이르는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소리를 내어 부르짖음은 니므림의 물도 황폐하였음이로다
이제 모압 땅에서는 더 이상 포도주를 생산해 내지 못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성경에서 포도주의 상징 중에 하나는 ‘기쁨’입니다. 모압은 더 이상 기쁨의 땅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34절의 ‘헤스본’, ‘엘르알레’, ‘야하스’, ‘소알’, ‘호로나임’ 등 서로 가까운 곳에 있는 도시들이 아닙니다. 모압 전역에 떨어져 있는 도시들입니다. 어느 도시에 가도 부르짖음이 들린 모압 전역이 초토화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모압이 받을 벌(36-47절)
36-47절은 전반부와 같이 모압 멸망을 예언하고 있는데, 전반부가 멸망의 참상에 초점이 맞추어지고 있다면, 후반부는 그 멸망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36-38) 그러므로 나의 마음이 모압을 위하여 피리 같이 소리 내며 나의 마음이 길헤레스 사람들을 위하여 피리 같이 소리 내나니 이는 그가 모은 재물이 없어졌음이라 모든 사람이 대머리가 되었고 모든 사람이 수염을 밀었으며 손에 칼자국이 있고 허리에 굵은 베가 둘렸고 모압의 모든 지붕과 거리 각처에서 슬피 우는 소리가 들리니 내가 모압을 마음에 들지 않는 그릇 같이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피리 같이 소리 내다’는 것은 주로 장례식장에서 애통하며 부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모압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압 사람들이 모두 대머리가 되고, 수염을 모두 밀었다고 하는 것은, 당시 중동에서는 큰 재난을 당했을 때에 극도의 슬픔을 표현하며, 머리카락이나 수염을 밀었습니다. 그리고 손에 칼자국(상처)을 내는 것, 베를 두르는 것도 동일한 이유입니다.
또한 모압의 우는 소리가 모든 지붕에서와 거리 각처에서 들린다고 합니다. ‘지붕’과 ‘거리’는 누구든지 볼 수 있는 공개적인 장소입니다. 그런 곳에서 통곡하는 것은 그들이 당한 재난이 개인적인 차원의 것이 아니라 국가적인 차원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이스라엘 자손들이 출애굽할 때에 애굽에 10가지 재앙이 있었는데, 마지막 10번째가 애굽 사람들의 장자가 죽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애굽 전역에서 ‘큰 부르짖음’이 있었습니다. 그 일이 모압에도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이 우연히 일어났거나, 바빌로니아가 강성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압을 그릇 깨듯이 깨뜨리셨다고 합니다. 그들이 교만하고 우상숭배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0-42)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그가 독수리 같이 날아와서 모압 위에 그의 날개를 펴리라 성읍들이 점령을 당하며 요새가 함락되는 날에 모압 용사의 마음이 산고를 당하는 여인 같을 것이라 모압이 여호와를 거슬러 자만하였으므로 멸망하고 다시 나라를 이루지 못하리로다
하나님께서는 바빌로니아의 느부갓네살왕이 모압을 공격하는 것을 독수리가 그 날개를 펴고, 먹잇감을 공격하는 것과 같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독수리가 날개를 펴면 그 크기가 2m가 넘습니다. 그리고 독수리의 시력은 2000m 상공에서 들쥐가 움직이는 것도 다 볼 수 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독수리가 먹이를 낚아채기 위해서 수직강하 할 때, 그 속도가 시속 240km나 된다고 합니다. 그 만큼 느부갓네살왕이 신속하게 모압을 공격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 때에 모압 사람들은 여인이 느끼는 최고의 고통이이라고 하는 출산의 고통과 같은 고통을 겪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보다 더 비극적인 것은 모압이 다시는 회복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모압은 바빌로니아에게 멸망을 당한 후에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포로로 끌려갔고, 개별적인 생존자는 있었을지라도 나라를 재건하지 못했습니다. 후에 아랍 사람들과 혼혈이 이루어져서, 지금은 그 민족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오늘 본문이 이렇게 마무리가 됩니다.
(46-47) 모압이여 네게 화가 있도다 그모스의 백성이 망하였도다 네 아들들은 사로잡혀 갔고 네 딸들은 포로가 되었도다 그러나 내가 마지막 날에 모압의 포로를 돌려보내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모압의 심판이 여기까지니라
46절은 ‘감탄사’로 시작합니다. 슬픔, 애통, 탄식을 표현하거나, 재난을 직면했을 때 쓰는 말입니다. 그리고 모압 사람들이 ‘그모스의 백성’이라고 불립니다. 그것은 모압 사람들이 얼마나 열심히 그모스를 섬겼는지를 보여줌과 동시에 그모스는 국가적인 위기를 당한 모압 사람들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모압 사람들이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꼴’, 아니 ‘믿는 신에게 발등 찍힌 꼴’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모압의 심판에 대해서 말씀하다가 마지막 절에서는 모압의 회복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모압이 망한 이후로 다시 회복되지 못했기 때문에 ‘마지막 날’은 메시아께서 온전히 통치할 때에 모압도 회복이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예레미야 48장은 47절이나 모압의 멸망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모압 민족은 롯의 후손들이었고, 다윗의 증조모도 모압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하나님을 섬기는 틀’은 없었고, ‘그모스를 섬기는 틀’만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요새 같은 도시와 비옥한 토양이 자신들을 지켜주지 못한다는 분별력을 갖지 못했습니다.
오늘 하루 우리 삶의 가치관이 그모스나 우리가 만든 것이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우리를 지켜 주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과 진리와 생명이 우리를 함께 지어져 가게 해 주시고, 또한 우리를 지키시고 인도해 주시는 것을 믿는, 바른 분별력을 가진 그리스도인으로 사시는 한 날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모압은 참 교만하였습니다. 요새와 같은 지형과 비옥한 땅이 자신들을 책임져 줄 것이라고 생각했고, 또한 그모스 신이 전쟁에서 이기게도 해 주며,지켜 줄 것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들의 영적인 눈이 어두워져서 바른 분별력을 상실했기 때문임을 몰랐습니다. 자신들의 분별력의 상실로 그들은 머리와 수염도 전부 밀어야 했고, 손에 상처를 내고, 허리에 굵은 베옷을 두르고, 공개된 장소인 지붕에서와 거리에서 기력이 없을 정도로 울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회복되지 못했습니다.
혹 우리도 모압 사람들처럼 우리를 책임져 줄 수 없는 것을 붙잡고서도 그것들이 우리를 책임져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을 하거나,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우리 인생의 최고의 자리에 올려놓고서도 잘 행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세뇌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하루도 세속적 가치관의 틀이 아니라 진리와 생명의 틀을 가지고, 하나님을 목적으로 삼고 사는 한 날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