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톱니바퀴
내가 태어난 다음날 아빠는 사우디에 갔다. 엄마 뱃속이 좋았는지 내가 나올 생각을 안 해서 여러 번 출국을 미루다가,
엄마는 결국 수술을 받았고 아빠는 나를 만난 다음날에 바로 떠났다. 1년 동안 아빠가 편지 속 사진으로만 나를 보며
모래 먼지 속에서 고생한 덕에, 엄마가 신생아 육아와 시집살이를 동시에 버텨낸 덕에, 동생과 내가 방이 세 개 있는
집에 살며 유치원도 다닐 수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 들었다.
그런 식으로 이해하고 감사하게 된 건 한참 후의 일이고, 어린 나에게 아빠의 사우디 시절은 그저 몇 개의 물건으로
존재했다. 아바(ABBA), 사이먼 앤 가펑클(Simon&Garfunkel), 보니 엠(Boney M.)의 히트곡 모음집, 그리고
레이 카니프(Ray Conniff), 제임스 라스트(James Last) 등의 음악가가 새롭게 편곡하고 연주한 팝 음악 모음집.
아마도 당시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라이선스 발매된 것으로 보이는 이 카세트테이프들은 지금도 내가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 끝없는 지평선 외에 아무런 풍경도 없던 1년간 이 음악들이 아빠에게 큰 위안이었다고 한다. 그 후 아주 긴 시간
아들의 최애 장난감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겠지.
다른 장난감도 있었겠지만 이것들만큼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지금도 카세트테이프만 보면 반사적으로 동공이 커지고
침이 고인다. 언제 봐도 대단한 디자인이다. 손에 기분 좋게 잡히는 절묘한 크기와 두께, 둥글게 마감된 네 모서리, 가운데
나 있는 작은 창문, 그 안에 커튼처럼 감겨 있는 반짝이는 흑갈색 테이프. 손가락 끝이 살짝 들어가는 두 개의 동그란 구멍
안쪽에는 앙증맞은 톱니가 여섯 개씩 달려 있다. 케이스를 열고 꺼내는 동안 안쪽의 부품들이 달그락 흔들릴 때, 플레이어에
부드럽게 미끄러져 들어갈 때, 찰칵 문을 닫을 때, 달칵 버튼을 눌러 재생하고 되감을 때… 모든 순간 모든 감각이 이 정도로
만족스럽게 설계된 물건이 또 있을까. 지금은 바이닐로 음악을 듣는 걸 제일 좋아하지만, 물건 자체로 제일 좋아하는 건
평생 카세트테이프일 것이다.
아빠에게는 크고 아름다운 소니 초기형 워크맨이 있었다. 그리고 우리 집 거실에는 카세트와 라디오만 되는 JVC 미니 오디오
세트가 놓여 있었다. 둘 다 은색이었고 옛날 자동차들처럼 멋지게 각이 져 있었으며, 투명한 문이 달려 있어 안쪽의 테이프가
훤히 보인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나는 톱니바퀴 두 개가 돌아가는 모습을 멍하니 보는 걸 좋아했다. 한쪽에 감겨 있던 테이프를
반대쪽에서 끌어당기는 동안, 중간의 트여 있는 부분을 지나가는 테이프가 기기의 헤드를 스치며 음악이 재생된다. 그 원리를
알게 된 건 한참 후이지만(자성 물질의 자화 현상… 같은 진정한 원리는 여전히 이해 불가이다), 톱니바퀴가 돌아가는 방식은
아이의 눈에도 잘 보였다. 둘은 항상 같은 방향으로 돌지만 돌아가는 속도는 서로 다르다. 테이프가 적게 감겨 있는 쪽은 빠르게,
많이 감겨 있는 쪽은 느리게 돈다.
처음에는 그냥 재미있었다. 가벼운 애는 빠르고 무거운 애는 느리네 하하. 그러다 조금 지나서는, 테이프가 적은 쪽이 힘을 내서
열심히 돌 때 많은 쪽은 일부러 속도를 늦춰주는, 그렇게 서로 배려하는 것처럼 보였다. 분명 모터는 한 개 들어 있을 텐데,
그런 식으로 테이프가 헤드를 지나는 순간의 속도(음악이 재생되는 속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게 지금도 신기하다. 부품
하나하나의 원리를 파악할 엄두는 나지 않고, 돌아가는 톱니바퀴 둘을 보고 있으면 그저 마음이 따뜻해진다. 언제나 사이가
좋구나. 늘 같은 방향으로, 최선을 다해 보조를 맞추는구나.
아기답게 잔인했던 나는 그 사이좋은 테이프들을 매우 적극적으로 가지고 놀았다. 강제로 녹음 버튼을 눌러서 많은 부분 음악이
끊겨 있고, 내 옹알이도 몇 번 들린다. 전주와 후주를 제외하고 다 날려먹은 노래도 한 곡 있는데, 초등학생이 된 후 궁금해지자
아빠가 사이먼 앤 가펑클의 <El Cóndor Pasa> 라고 알려주었다. 얼마 후 나는 아빠 손을 잡고 그 노래가 담긴 카세트테이프를
사러 갔다. 그게 어디였는지는 둘 다 기억나지 않지만 어쨌든 내가 경험한 첫 음반가게였다. 온몸이 긴장과 설렘으로 가득 차
있던 것, 그리고 아빠가 나한테 가수와 노래 제목을 직접 말하게 했던 것은 어렴풋이 기억난다. 사이먼 앤 가펑클의
엘 콘도르 파사 들어 있는 테이프 있나요? 그때 아빠는 지금 내 나이보다 젊었다. 알파벳도 잘 모르는 어린 아들이 음반 가게에서
또박또박 저 말을 할 때 어떤 기분이었을까. 그때를 떠올리면 나도 문득 아이를 갖고 싶어진다.
그렇게 완전한 내 소유의 첫 음반이 된, 지구레코드에서 라이선스 발매한 《Simon&Garfunkel`s Greatest Hits》테이프를 나는
듣고 듣고 또 들었다(지금도 들으면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이 앨범은 바이닐과 시디도 가지고 있지만 이 파란색 테이프로 들을 때가
기분이 제일 좋다.* 그것은 35년 전에도 지금도 같은 모양으로 돌아가는 톱니바퀴 때문이고, 나에게 가장 익숙한 소리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시간이 지나며 상태가 변하긴 했다. 테이프는 얇고 가늘어서 내구성이 약하다. 보관 상태가 좋지 않으면 늘어지고
삭는다. 오래 듣다 보면 한 번씩 기기 안에서 엉켜서(예전에는 씹힌다는 표현을 자주 썼다) 조심조심 다시 펴가며 복구해도
그 구간이 쭈글쭈글해지는 일이 생긴다. 그런데 그런 점도 마음에 든다. 테이프가 늘어지면 소리도 늘어지고, 쭈글쭈글해지면
소리도 쭈글거린다. 소리가 변했다면 오직 나로 인한 것, 나와 함께 나이 들어가는 느낌이 좋다.
* 미국에서만 1,400만 장 이상이 팔린 유명한 앨범이다. 수록곡 전부가 주옥같은 명곡들이기도 하지만 전체적인 흐름도 아름답다.
몇몇 곡들은 폴 사이먼(Paul Simon)의 기타와 둘의 화음으로만 이루어진 라이브 버전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게 다 숨막히게 좋다.
특히 <The 59th Street Bridge Song(Feelin` Groovy)> 와 <Homeward Bound> 의 라이브가 끝난 후 청중들의 박수 소리와
다음 곡들이 이어지도록 믹싱한 게 참으로 절묘해서 매번 탄식을 하게 된다.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베스트 앨범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 매장에도 두 종류의 컬러 바이닐이 있다. 내 테이프와 엘피는 모두 예전에 나온 한국 라이선스반인데, 수입반과 달리
트랙리스트에도 없는 <A Most Peculiar Man> 이 추가로 들어가 있다. 이유는 알 수 없다.
단지 추억 때문만이 아니고, 늘어지고 흔들리는 소리 자체가 내 귀에는 그다지 거슬리지 않는다. 음악 재생 중 거슬리는 소리들은
따로 있다. 에어팟에 이상이 생겼을 때 들리는 지직거리는 노이즈, 정성을 다해 스팸 문자를 읽어주는 시리, 무선 헤드폰의
배터리가 부족할 때 연거푸 들리는 ‘리챠-지 헤드셋’ 같은 것들. 가끔 블루투스나 인터넷 연결 문제로 음악이 뚝뚝 끊기기라도 하면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진다. 그런 반면 카세트테이프는 꾸루루룩 하다가 씹혀도 그냥 웃음이 난다. 그렇다, 나는 카세트테이프가
들려주는 모든 소리의 질감을 좋아한다. 재생 버튼을 누르고 톱니바퀴가 돌고 갈색 테이프가 헤드를 스쳐 가기 시작하면 ‘스~’ 하는
작은 소리가 들린다. 테이프 히스(Tape Hiss)라고 불리는 그것은,
‘자성 입자의 크기로 인해 아날로그 자기 테이프 녹음에 나타나는 고주파 노이즈’ 이다(위키피디아를 참고했다). 테이프 전체에
깔려 있어 노래 사이 조용한 구간에 더 잘 들리는 그 소리를 나는 참 좋아한다. 유튜브에서 찾을 수 있는 그 어떤 백색소음보다도
평화롭다. 더불어 노래 한 곡이 끝나도 끝나지 않았다는 느낌을 준다. 마치 라이브 공연 중 노래와 노래 사이 정적처럼.
뮤지션들은 여전히 무대 위에 있고 모든 음향의 전원도 켜져 있는 상태. 이 음악의 시간은 끝나지 않았고 아직 나는 아티스트와
이어져 있다.
카세트테이프를 좋아하는 이유, 하나만 더 얘기하고 싶다. 옛날에는 모든 뮤지션들이 커다란 릴 테이프에 음악을
녹음했다는 것을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상식으로만 알고 있다. 나도 그렇다. 첫 앨범을 녹음했던 2005년부터 쭉 컴퓨터를
사용했고 아날로그 녹음방식을 직접 경험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렇게 녹음된 음악들을 들으며 자랐고 지금도 듣는다.
사이즈는 다르지만, 카세트테이프는 테이프다. 옛 뮤지션들이 음악을 녹음해 둔 멀티 트랙 테이프, 엔지니어가 후반 작업을 마친
마스터 테이프와 기본적으로 같은 물성이라는 뜻이다. 내가 좋아하는 어떤 앨범이 처음으로 녹음되고 완성되었던 상태,
어떤 면에서는 그것에 가장 가까운 물건이라는 느낌을 종종 카세트테이프로부터 받는다.
요즘도 카세트테이프가 나온다. 우리 매장에서도 판다. 이미 수많은 세상 사람들이 테이프로 들었던 오래 전 음반의 리이슈도
있지만, 지금 활동 중인 젊은 뮤지션들의 앨범이 더 많다. 색깔도 알록달록 예쁘고 다양하다. 예전과는 달리 대부분 이미 한 번
디지털 신호가 되었던 음악을 옮긴 것이지만, 아까도 말했듯 카세트테이프는 테이프다. 요즘 아티스트들이 굳이 카세트테이프를
발매하는 건, 전통적인 매체의 성질과 전통적인 녹음 방식의 기운을 자기 음악에 담고 싶어서라고 생각한다. 새로 나온 그
테이프들을 익숙한 내 기기로 들으며 나는 충분히 그 마음을 느낀다. 매장에 진열된 테이프들을 한참 구경하다가 사 가는 손님들의
주머니에 살짝 워크맨이 보일 때도 그런 마음이 전해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매장에서 일하기 시작하자마자 나는 이곳에 어울리는 중고 카세트 데크 매물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조건은 투명한 문이
달려 있을 것. 얼마 후 나는 예쁘고 소리도 좋은, 그리고 운명처럼 나와 나이가 같은 하얀 기기를 찾아냈다. 저렴한 가격에
구입했지만 수리비가 훨씬 더 들었다. 지금도 살짝 이상이 생겨서 한동안 못 틀고 있다. 참 귀찮은 일거리를 스스로 만들었지만,
손님들이 음악을 들으며 톱니바퀴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게 느껴질 때마다 몰래 희열을 느끼곤 했다. 입사 기념으로 기증할까
했는데 이미 내 의도를 파악한 사장님이 수리비까지 포함해서 급여에 얹어줬다. 부디 장기적으로 카세트테이프 매출에 긍정적인
영향이 있기를 바라며, 살짝 아픈 동갑내기 친구를 들쳐 메고 또 한 번 청계천에 갈 예정이다.
※ 성진환 (Sweet Sorrow의 Memb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