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 고조부모 이장
정월에 설날이나 추석에 부모님이나 고조부모 산소에 차례를 지내려 올라가면 모두 땀을 흘리고 차례를 지내고 내려온다.
부모님 묘소나 고조부모님 산소가 청계산 하오고개 산 능선 7부 능선에 있으니 도로에서 올라가는데 약 반 시간이 걸린다.
겨울에 올라가도 땀이 솟는다.
차례를 지내는 식구나 조카들도 남자만 배낭에 제물을 메고 올라간다.
산소를 높이 써서 차례를 지내며 모두 불만이 많다.
그렇다고 마땅히 좋은 해결책도 없다.
양지바른 야산을 구입하여 현대식으로 가족묘를 5대조부터 조성하던지 납골 봉분을 하여 모시고 싶다.
내가 좌상이라고 하여도 종중에 조금도 관심이 없고 어기장만 놓는 사촌이 있어 나 혼자 결정하기엔 여러모로 문제점이 나타났다.
팔십 평생 한 번도 차례에 참석한 적도 없고 제사한번 지내지 않은 사촌은 제외하기로 하였다.
여러 각도로 생각을 하다 일단은 7부 능선에 있는 산소를 2부 능선에 모시어 후손들이 차례를 지내는데 7부 능선 까지 올라가는 수고를 덜게 하기로 하였다,
윤년인 4년 전에 2부 능선에 일단 가묘를 조성하고 윤년인 금년에 가묘에 이장을 하였다.
이장을 하는데 여러 가지 고민을 많이 하였다.
5대조가 비인 현감이고 아들인 고조부(益圭 字 璣玉) 는 통덕랑인데 그 옛날에 이 산 꼭대기에 고조부 산소를 썼을 때는 풍수지리학상 충분한 고려를 하여 여기 높은 곳을 선택하여 산소를 썼을 것이다.
그 이유도 모르고 차례 지내기 어렵고 자손들이 불평이 많아 산소를 이장한다는 소신은 너머나 이유가 빈약하다.
그렇다고 이장한 2부 능선의 자리가 명당이고 풍수학적으로라도 연구한 적도 없다.
현재같이 7부 능선에 그대로 두면 내가 사후에 페총이 될 확율이 대단히 많다.
지금 우리나라는 조상 숭배의 사상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는 추세에 최소한 페총은 막고 싶은 심정이다.
이장하기 위하여 6월에 전문 이장 업체를 찾아 2023년 7월 12일이 좋은 날이라고 하여 이장하기로 결정을 하였다.
금년은 유난히 날씨가 더워 작업 시작을 8시에서 7시로 변경을 하였다.
작업을 할 때 내가 근심을 한 것은 이백여년이 넘는 고조부 묘는 칠성판 밑의 회 공구리가 얼마나 많이 처져 있느냐이다.
20세 경 할아버지 묘를 금토동에서 음성으로 이장할 때 회 공구리가 얼마나 강한지 포크레인이 브레카로 한 시간을 두드려도 깨지지 않아 오시에 하관시간을 맞추느냐고 고심을 한 기억이 난다.
부모 묘는 내가 관여를 했으니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 있다.
고조부 묘는 감도 잡을 수 없고 묘가 산꼭대기라 포크레인이 올라 갈수도 없고 곡굉이로 해야 하는데 만약을 위하여 수동 브레카를 준비해 달라고 하였다.
둘째아들 혁범이와 6시부터 나는 서울 에서 혁범이는 수원에서부터 청계산 하오고개에 와서 7시에 인부들과 만나 고조부 산소를 오르기 시작하였다.
고조부와 부모님 묘소에 이장한다는 고해와 간이로 혁범이와 제사를 올리고 작업을 시작 하였다.
인부들은 고조부모와 부모묘소를 2개조로 나누어서 삽으로 작업을 시작하였다.
포크레인이 올라온다면 순식간에 할 일을 손으로 작업을 하는 것을 보니 흙일을 하는게 안스러워 보였다.
고조부 묘에서 붉은 벽돌 반 만한 네모의 지석이 나왔다,
지석이 계속 나온다.
지석은 恭人海州吳氏之墓 子坐 라고 쓰여 있는 10개의 지석이 나왔다.
海자 뒷면에는 壬申生 州자 뒷면에는 庚辰卒 이라고 쓰여 있다.
子 자 뒷면에는 巳 자 坐 자 뒷면에는 坐 자가 쓰여 있다
고조부묘라고 중앙을 개복했는데 이런 지석이 나온 것은 고조부 배위인 부인의 묘라는 뜻이다.
족보에는 배위 묘는 용인읍 삼면 내곡 이라고 적혀있어 고조할머니는 용인에 있기 때문에 고조 할아버지 혼자 모셔 있는 줄 알았는데 황당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작업 인부중 팀장이 산소 중앙 흙이 생흙인 것을 보니 여기가 아니라고 한다.
여지껏 이 산소에다 차례를 지냈는데 아니라니 난감하고 산소 근처를 다 파보는 수밖에 없다. 팀장이 인부에게 윗쪽으로 더 파보란다.
윗쪽으로 더 파 올라가니 정강이 뼈가 나타난다.
다 수습을 하니 여자의 뼈란다.
고조할머니의 유골인 것이다.
팀장이 할머니 유골 있는데서 좌 쪽으로 파라고 한다.
유골 흔적이 보이기 시작한다고 한다.
근심하던 고조할아버지 유골도 수습을 하였다.
정위치는 아니지만 쉽게 유골도 찾을 수 있었고 근심하던 회공구리도 나오지 않아 작업을 생각보다 빨리 끝낼 수 있었다.
유골이 있는 데가 봉분 중앙이라면 산소의 총 면적이 매우 큰 묘가 된다.
금토동 증조부의 묘에 버금가는 크기다.
20세 경 할아버지는 대형 옻 관에 이중 관이었는데 이후 언제인지는 몰라도 우리집안은 탈관을 쓴다는 전래가 있어 부모님 묘도 탈관을 하여 모셨다.
부모(寧默 字 準如, 配 慶州金氏 在任)님 쌍묘는 오른쪽에 아버님 왼쪽 봉이 어머님으로 남좌 여우의 일반적인 묘의 위치와 반대다.
고조 할아버지 묘하에 있는 부모님 묘를 보니 어머님 유골은 이미 작업이 끝난 상태이고 쌍묘의 오른 쪽인 아버님 묘는 좌골은 수습이 되고 두개골만 남아있다.
광중의 머리 근처에 수맥이 있어 물이 조금이나마 솟아올라 고이면 퍼내야 했다.
아무리 장마철이라고 하지만 이 높은 산등성이에 물이 흐른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지만 눈으로 확인하며 놀라워 이장하기를 잘 했다고 생각했다.
오래전에 막내 누이가 꿈에 어머니가 천장에서 물이 새어 물이 떨어진다고 손에 종이를 들고 물을 막는 꿈을 꾸었다고 하여 해몽은 못했지만 좋은 일이 아니라고 추측만 하고 있었다.
지금 생각을 하니 수맥이 흐르는 것을 가르처 주느라고 현몽을 하신 것 같다.
6월에 이상고온으로 날씨가 너머나 더워 삽질을 하는 인부들이 걱정이 되었는데 느닷없는 집중호우에 장마가 닥첬다.
이장한다는 전날은 정부에서 극한호우경보가 발령되었다.
이장하는 날 청계산에 가니 장마 하늘이 흐리기만 하고 비는 내리지 않았다.
고조부모와 부모님 유골을 다 수습하는데도 날씨가 흐리기만 하여 오히려 여름에 작업하는데 날씨까지 큰 도움을 주어 하늘이 어찌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비가 올 것을 대비하여 우비 판초 텐트등 이장하는데 필요외의 준비를 했는데 다 필요 없게 되었으니 하늘이 살려주었다.
이장을 하고 다음날부터 또 비가 오기 시작하여 오송 참사 예천 산사태가 나고 인명 피해가 50여명이 나서 나라가 집중 폭우에 아우성이다.
고조부나 부모님 파묘한 장소를 정리하고 부모님 비석은 아버님 판 곳에 묻고 상석은 그대로 두었다.
다 정리하고 가묘에 내려오니 포크레인이 올라 왔다.
이제부터는 기계가 작업을 하고 사람은 보좌만 하면 된다.
가묘에는 집사람이 막내 누이를 데리고 제물을 만들어 가지고 왔다.
작은 며느리도 한몫을 하느냐고 제상에 올릴 나물 등을 만들어 가지고 왔다.
포크레인이 고조부의 가묘 봉분을 모두 허물고 오른쪽에 고조할머니 왼쪽에 고조부 유골을 안치하고 칠성판을 깔고 잘 모셨다.
화장을 하지 않고 유골을 그대로 모시니 일거리가 줄어든 것 같다.
고조할머니 옆에는 위에서 있던 대로 공인해주오씨지묘 란 지석을 묻었다.
부모님 가묘도 봉분을 모두 허물고 오른쪽에 어머니 왼 쪽에 아버지를 모셨다.
위에 있던 어머니가 왼쪽에 있던 때와 반대다.
누울 자리를 파는데 푸석한 암석인데도 포크레인으로 잘 파이지 않는다.
작은 삽날로 파서 바닥이 석관처럼 단단하였다.
아버님은 위에서 수맥이 흐르던 곳에 계시다가 따듯한 구둘장 같이 느끼실 거다.
날씨나 회공구리 때문에 고심을 하던 문제들은 해소되고 일도 빨리 끝나 1시에 인부들이 철수를 하였다.
산소에 잔디는 흙이 마사토라 잔디가 살기 어려우니 다른 흙을 덮어 두라고 하다.
인부들은 꾀부리지 않고 열심히 즐거운 듯이 일하는 모습에 감사한 마음이 든다.
인부들이 철수하고 산소에 제물을 차리고 새집에서 편안히 사시라고 제사를 드렸다.
부모님에게는 물이 나는 곳에 계시다가 따듯한 방에 모셨으니 편안히 쉬시라고 하였다.
윗쪽에 계실 때 아버님이나 어머님 제사에는 우리 부부가 꼭 올라와 산소에서 우리 집안의 큰일을 건건이 부모님에게 꼭 고했다
작년에는 어머니 제사에 올라오다가 집사람이 넘어져 궁뎅이에 시퍼런 멍이 어린이 손바닥만하게 나기도 하였다.
이제는 그런 사고는 나지 않을 것이다.
집사람이 이장이 무사히 끝났으니 거나하게 점심을 사겠다고 하여 운중 농원으로 갔다.
막내 누이도 날씨가 어떻게 이렇게 도와 줄 수가 있느냐며 부모님도 새집에서 잘 지내실거라고 한다.
이장을 하는데 혁범이가 큰 역할을 했다..
할아버지 이장을 한다고 조카들에게 알려주었는데 아무도 오지 않아 쾌심하기 짝이 없다.
수년간 고심하며 해결하려던 이장을 하고나니 속이 후련하고 여기까지가 내가 할일을 다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후의 문제는 이제 나의 손에서 떠나 후손들이 알아서 할 일이다.
고조부모님 부모님 새집에서 편안히 잘 쉬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