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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공원 산방기간이 시작됐습니다.
그 날짜를 하루 앞두고 성삼재 ~ 고기리 구간을 진행합니다.
원래는 성삼재 ~ 여원재까지 진행하는 게 맞을 것이나 아무래도 중간에 촬영하랴 노닥거리랴 이래저래 시간이 많이 소요될 것 같습니다.
광명역에서 05:25 KTX를 이용하여 익산역까지 간 다음 거기서 무궁화호로 갈아타고는 구례구역까지 가기로 합니다.
오늘은 푸우 님과 내대로 님 등 후배들 두 명이 동행합니다.
경비 절감에 한몫합니다.
구례구역에 도착하니 문기사님이 대기해 계시고....
그 차를 이용하여 성삼재로 오릅니다.
도로 사정이 지난 주와는 완전 딴판입니다.
눈이나 얼음은 찾아볼 수가 없군요.
벌써 겨울은 다 가버린 것인가!
(조동진 버전)
입구로 들어서서 당동마을 삼거리를 지납니다.
산동면 좌사리에 있는 당동마을로 내려가는 길이죠?
지리산에는 당동마을이 두 곳이 있습니다.
당동고개를 지나면서 우측으로 이정표를 본다. 노고단에 있던 남악사가 산을 내려가서 처음 머물렀던 곳이라 하여 당동마을이다. 그러니 둘레길 제18구간에서 자세히 본 바와 같이 구례 지리산권에는 두 곳의 당동마을이 있다. 하나는 이 산동 좌사리의 당동마을이고 다른 하나는 광의 온당리의 당동마을 등이 그것이다.
- 졸저 '현오와 걷는 지리산' 487쪽
구례에 오면 늘 찾는 문기사님.
오늘도 좋은 얘기 한 마디 해주셨습니다.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심원마을에 사시는 분을 태워드린 적이 있다고 하는군요.
그 분이 도대체 학교나 다녔을까하는 의문을 가졌는데 의외로 그 분은 중졸의 학력이라는데 놀랐다고 하더군요.
그럼 어디에 있는 학교를 어떻게 다녔냐고 물어보니 산동에 있는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녔다고 하더랍니다.
루트를 추적해 보니 심원마을에서 이 당동마을 삼거리로 올라와서는 지금의 등로를 따라 좌사리의 초등학교를 다녔다는 얘기인데..
대단하신 분.
그 어린 꼬마가 겨울에는 얼마나 추웠고 여름에는 얼마나 더웠을까?
하기야 달궁에서 소를 팔러 우시장으로 가기에는 심원을 거쳐 아홉사리재라 불리던 성삼재를 너머 구례로 다녔다고도 하던데.....
남원 장에 가려면 정령치를 넘어 고기리와 덕치, 솔치로 다녔다고도 하고...
지난한 삶의 여정이 느껴집니다.
고리봉.
남원 지역에는 고리봉이 세 개가 있죠.
이 고리봉과 큰고리봉 그리고 요천지맥의 고리봉 등이 있습니다.
요천지맥이 흐르는 남원시 대강면의 고리봉은 풍수지리학상 배모양을 한 남원의 선수(船首)를 이 봉에 매어두는 역할을 하는 산이라 環峰이라고도 불리는 것이고...
이 고리봉과 이따 볼 큰고리봉은 좀 구별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게 진짜 고리봉인가?
정상석이 있는 고리봉1248m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작은 고리봉’이다. 멀리서 보면 이 고리봉은 만복대와 노고단 혹은 반야봉에 눌려 좀 왜소하게 보이긴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까 본 백두대간이 갈리는 2등급 삼각점이 있었던 1305.4m의 고리봉과 구분하여 이 봉우리를 작은고리봉이라고도 부른다. 합당할까?
고리봉 얘기가 나왔으니 이참에 아예 정리하고 지나가자. 예전 국립공원에서 제작한 지도에는 이 '작은 고리봉'이 두리봉으로 실려 있었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우리 고어古語에서는 고리봉의 고高와 두리봉의 두頭 모두 높은 정상의 봉우리를 뜻하는 공통점이 있어 이에 착안하여 두 봉우리를 구분하기 위하여 그리 붙여졌다고 한다. 그러다가 백두대간이 알려지면서 고리봉이 산행 이정의 중심이 되고 두리봉이 인구의 회자에서 밀려짐에 따라 그 둘을 구분하고자 '큰'자와 '작은'자를 도입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고어를 놓고 보자면 높을高 보다는 머리頭가 더 높고 '대장'의 의미로 자주 채택되었음은 백두산을 통하여 이미 증명이 되었던 터, 그렇다면 오히려 ‘작은고리봉=고리봉’, ‘큰 고리봉=두리봉’이라 칭하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 졸저 전게서 485쪽
좌측으로 만복대가 서서히 보이기 시작합니다.
우측 산내면 골짜기 중앙 멀리 임천지맥의 삼봉산이 우뚝하고.....
만복대를 중심으로 봅니다.
대간의 골격!
이런 길은 무조건 걸어야죠.
무념무상....
좌측으로올라 만복대로 진행해야죠.
만복대로 오르는 길.
뒤로 간미봉과 지초봉 능선을 보고...
그 우측이 산동면의 지리산 온천랜드.
제 손에는 늘 스마트 폰이 들려 있습니다.
우측 팔걸이에 부착한 오스모 포켓이 어떻게 촬영을 하고 있는지 계속 보면서 가야 하니....
진행방향 좌측으로 서시지맥의 흐름을 봅니다.
원래는 서불지맥이라는 이름으로 뷸려야 했었죠?
서시천의 徐市를 서불로 독음을 해야하는데 서시로 잘못 읽는 바람에 그렇게 굳어지게 된 것이죠.
진시황의 방사였던 서불과 관련한 설화 때문입니다.
고리봉에서 종석대 ~ 노고단으로 이어지는 흐름이 명백합니다.
그러고는 만복대입니다.
만복대 정상석의 위치를 보면 볼수록 공단직원들의 혜안이 돋보입니다.
이 정상석 앞에서 촬영하는 산꾼들을 배려했다는 얘기죠.
바로 이 그림이 그 예시입니다.
즉 만복대라는 정상석의 글자가 나오게끔 찰영을 하면 바로 그 뒤로 반야봉이 자연스럽게 뒷배경이 된다는 것입니다.
가능하면 의식적으로 반야봉을 넣는게 낫습니다.
이 그림도 괜찮습니다.
노고단 길상봉과 우측 종석대에서 흘러내려오는 물들이 만수천이 되어 861번 도로 옆으로 흘러내려가는 그 흐름을 한눈에 담을 수 있습니다.
좌측 능선은 도계능선道界稜線, 우측 능선은 백두대간 길.....
진행 방향.
정령치 너머 뾰족한 큰고리봉 즉 두리봉에서 대간길은 좌틀하겠죠.
중앙 멀리 지리서부능선의 바래봉과 우측 임천지맥의 삼봉산.
우측 아래로 861번도로에서 정령치로 오르는 도로도 보이고....
서시지맥....
남원땅 중앙에 교룡산이 보이고 그 좌측으로 멀리 내장산이 희미하군요.
너무 오래 머물렀습니다.
서시지맥 갈림길 바위에 올라 볼 수 있는 그림입니다.
아주 중요한 사진이죠.
바로 위 지도 '가'의 곳이죠.
위험을 무릅쓰고 푸우 아우님이 찍은 그것입니다.
백두대간이 생물이라는 것을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사진이죠.
즉 이 고기저수지의 물은 서시지맥 우측의 원천천이 모인 물로 이 물은 요천으로 흘러들어가게 되어 있으나 신생대 제4기 그러니까 200~300만년 전에는 남강으로 흘러가서는 낙동강으로 가는 물이었을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살펴보면 운봉고원의 지질은 대부분 중생대 대보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고원의 남쪽과 북쪽에는 지리산 변성암 복합체가 분포하고 있다. 운봉고원은 해발고도 450~550m 범위의 분지상 고원이다. 남동쪽의 산지에서 주촌천周村川이 발원하여 람천濫川에 합류한 다음 북류 및 동류하여 엄천강을 지나 남강에 유입되어 결국 낙동강에 흘러든다. 한편 백두대간 너머인 운봉 고원 최남단의 고기리에서는 원천천이 발원하여 좁고 깊은 협곡을 형성하며 서쪽으로 흘러 요천에 유입되어 결국 섬진강으로 흘러든다.
운봉 고원 내에서도 상대적으로 경사가 완만한 주촌천의 유역은 침식 작용이 활발하지 않지만 경사가 매우 급한 원천천 유역은 하천의 침식작용이 상대적으로 활발할 것이다. 그러니 원천천은 좁고 깊은 협곡을 이루며 상류 쪽으로 골짜기를 더 확대할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원천천과 주촌천의 경계를 이루는 고기리, 덕치리와 주촌리 일대에서는 원천천이 주촌천 유역에 침입하여 그 유역을 원천천의 유역으로 취하는 하천 쟁탈(stream piracy)이 진행되었고 지금도 진행 중인 것이다. 그러니 위 지형도의 #60 도로 중 백두대간이 지나는 ‘가’~‘나‘ 구간의 좌측은 하천쟁탈의 흔적으로 지금은 주천면 땅이지만 예전에는 운봉땅이었을 것이고, 그 하천인 '舊 주촌천' 즉 무능하천은 물이 흘러 그 물은 북동진하여 람천에 합류되어 남강→낙동강으로 가는 물줄기였을 것이다. 곧 낙동강의 최상류 지역이었을 것이라는 얘기다.
또한 원천천은 지금의 고기리가 아닌 덕치리와 호경리의 경계에서 그저 호경리로 흘러 요천에 합류하여 섬진강으로 흐르는 물줄기였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럴 경우 고리봉~고기3거리~노치마을~759.2봉의 라인은 백두대간이 아닌 것이 된다. 반면 만복대~1109.3봉~906.2봉~728.8봉~ 759.2봉(일명 덕운봉)라인이 원백두대간 라인이었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러니 지금의 운봉고원의 백두대간 라인은 곡중분수계谷中分水界divide in valley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따라서 현재와 같은 상황이 지속되면, 현재 운봉 고원의 남서쪽에 치우쳐 위치한 백두대간의 분수계가 수만 또는 수십만 년 후에는 고원의 중앙부로 이동될 가능성이 높다.
백두대간을 걷는 이들이여! 고리봉에서 내려와 고기삼거리~노치마을의 60번 도로를 따라 걷는 약2km 구간을 그냥 걸을 일이 아니다. 도로 왼편은 섬진강 최상류 지류인 원천천 유역으로, 원천천이 두부침식으로 분수계를 넘으면서 과거 낙동강 최상류 구간을 쟁탈한 곳이라는 사실과 도로 오른편은 여전히 낙동강 유역이라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자. 그러면서 원천천은 급경사의 사면을 따라 활발하게 두부침식을 하면서 분수계를 넘고 하천쟁탈을 하였기에, 완만하게 이어지는 낙동강 최상류 구간보다는 침식력이 탁월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도로를 경계로 농경지 바닥의 고도는 왼편이 오른편에 비해 10cm가량 더 낮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자. 그래야 백두대간이 더 재미있을 것 아니겠는가! 이는 둘레꾼들도 마찬가지이다.
- 졸저 전게서 53쪽 이하
너무 글씨가 작게 나왔네요.
어쨌든 이 정도만 인식해도 백두대간은 어느 정도 안다고 해도 될 것입니다.
이따 고기리로 내려가서 한 번 더 봅니다.
정령치로 내려갑니다.
점심을 먹고 가기로 하죠.
정령치 휴게소는 물론 정령치로 오는 도로가 음지여서 폐쇄됐기 때문인지 주차장도 조용합니다.
정령치에서 보는 반야봉과 심마니 능선..
반야봉 앞으로 흘러내려오는 능선이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과 전라남도 구례군 산동면의 경계인 도계능선.
두루봉이 명백하고...
그 좌측으로 흐르는 능선이 심마니 능선.
투구봉 우측으로 광산우골의 산사태 흔적이 명백하군요.
그 뒷라인이 지리북부능선.
영원령과 와운카페가 보이고 그 뒤로는 천왕봉과 중봉도 확실하게 조망이 됩니다.
바로 아래 왼쪽 골짜기가 황령암지가 있고 달궁 궁궐터가 있던 곳이죠.
이곳이 정령이 있었던 곳이니 황령은 어디입니까?
달궁 가는 길
산내면 대정리에서 노고단 정령치로 향하는 861번 도로를 따라 오르다가 뱀사골 입구인 반선을 조금 지나면 우측으로 달궁 마을이 나오는데 이곳 주차장 바로 아래에 궁터 흔적이 남아있다. 지금은 초라하게 세워져 있는 안내판에 이곳이 예전 마한의 왕이 쫓겨 와 만든 도성의 흔적이라는 취지의 글만 쓸쓸하게 적혀 있다.
이 달궁 마을 앞을 흐르는 만수천은 노고단에서 흘러내리기 시작한 물줄기로 람천을 만나 임천 ~ 엄천이 되어 남강 쪽으로 흘러갈 것이다. 한편 우리 민족의 불행한 근대사를 다룬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을 보면 달궁에서 열리는 '10월 혁명 기념 씨름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하대치 부대가 피아골을 떠나 달궁으로 향하는 대목이 나온다. 그 달궁에 남부군의 사령부가 있었던 곳이라는 설명도 나온다. 물론 소설 속 하대치의 속내는 멀리서나마 그의 마음 속 영웅 이현상을 보기 위함이었겠지만 어쨌든 깊은 골짜기 안에서도 달궁은 남부군 사령부가 들어앉을만한 비교적 커다란 장소로 묘사된다.
그런 달궁이 2천 년 전으로 올라가면 처음 지리산이 열린 날이 된다. 즉 2천 년 전 인간이 처음 지리산 달궁에 발을 들여놓았으니 신비를 간직한 마한의 피란 도성 달궁의 역사는 그때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후대의 사람들은 그들의 궁전을 ‘달의 궁전’이라 불렀다. 지리산에 사람이 들어와 최초로 인문적 환경을 꽃피웠다고 전해지는 ‘달의 궁전’은 그 이름만 들어도 신비감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지리산의 깊고 좁은 골짜기에 2천 년 전 신비스런 궁전이 들어섰다는 사실, 이는 지리산 ‘개산開山의 역사’를 의미한다. 즉 그로부터 지리산은 ‘자연의 산’에서 ‘사람의 산’이 된 것이다.
천연요새로 에워싸인 달의 궁전은 온조왕의 백제 세력과 변한과 진한에 쫓긴 마한 효왕이 지리산으로 들어와 도성을 쌓으면서부터 시작된 피란도성이었다. ‘달의 궁전’에 관한 기록은 서산대사의 사기寺記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바로 ‘황령암黃嶺庵’에 대해 기록한 청허당집淸虛堂集이 그것이다.
황령黃嶺과 정령鄭嶺
“동해에 한 산이 있으니 이름은 지리산이라 하고, 그 산의 북쪽 기슭에 한 봉우리가 있으니 이름은 반야봉이라 하며 그 봉우리 좌우에 두 재岾가 있으니, 이름은 황령(黃嶺)과 정령(鄭嶺)이라 한다. 옛날 한나라 소제昭帝 3년(BC78)에 마한의 왕이 진한과 변한에 쫓기어 지리산에 와서 도성을 쌓을 때 黃·鄭 두 장수에게 일을 맡겨 감독케 했다. 도성이 완공된 후 도성을 에워싼 고개 이름을 두 장수의 성姓을 따서 각각 황령, 정령으로 불렀다. 도성은 그로부터 72년을 보전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위 기록을 근거로 당시 마한의 상황을 유추해보면 지리산 인근을 근거지로 했던 마한이 북쪽으로는 백제 세력, 남동으로는 진한과 변한의 세력에 쫓겨 도성을 오늘날의 달궁으로 옮겨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으려고 이곳에서 72년이란 세월동안 장기 항전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당시 달궁의 도성을 중심으로 천혜의 요새인 황령과 정령을 전초기지로 삼았음도 엿볼 수 있다. 이곳은 사실 반야봉, 노고단, 만복대, 고리봉, 바래봉 등의 고산준령으로 에워싸여 있어 지정학적으로는 그야말로 천혜의 요새로 조금도 손색이 없다.
그런데 정령은 지금의 정령치로 남아 있어 그 흔적을 찾기에 그다지 부담이 없다. 그런데 황령은 어디인가? 일설에 의하면 황령黃嶺이 황치黃峙임에 착안하여 만수천이 람천에 합류되는 지점에 있는 산내면 중황리의 황치마을 부근을 든다. 그러면서 천혜의 요새인 달궁의 서쪽인 운봉은 정장군이 정령치에서 방어하게끔 성을 쌓았다면 달궁의 남쪽과 동쪽은 반야봉과 종석대 같은 험준한 산이 막고 있었다. 그렇다면 유일한 통로라 할 북쪽은 황장군 몫이어서 람천 너머의 황치마을은 북부지리인 임천지맥의 투구봉~삼봉산~법화산에서 넘어오는 길목임과 동시에 람천의 동서를 커버할 수 있는 곳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인의 시각으로 보자면야 어딘들 성을 쌓지 못하겠는가? 하지만 BC78년이라면 지금부터 약2100년 전인데 그 당시 건축이나 토목기술로서 과연 어떤 성을 쌓을 수 있었겠는가? 그저 단순하게 지형을 보고 황령을 찾는 게 낫지 않을까 싶다. 왜냐하면 달궁의 동쪽은 반야봉이 막아주며 남쪽은 노고단이 막아주고 북쪽은 골짜기인 천혜의 요새여서 지형상의 유리함을 이용하여 어떻게 해서라도 막을 수 있으니 문제는 백두대간을 넘어오는 서쪽이 문제였을 것이다.
황령은 지금의 묘봉치妙峰峙?
다행히 신라 진지왕 때인 576년 창건한 황령암이 폐사 지경에 이른 것을 1544년 중창하는 과정을 서산대사가 언급하면서 “반야봉 좌우에 두 재를 황령(黃嶺)과 정령(鄭嶺)”이라고 한 기사가 눈에 들어온다. 그렇다면 이들과 문물을 교류했던 운봉은 정령으로 막았으니 다른 한 쪽인 묘봉치 정도가 구례 산동을 커버하는 곳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황령 남쪽에 절을 세우고, 그 이름을 따라 黃嶺庵이라 하였다.”는 황령암기의 기사와도 얼추 맞아 들어간다. 다만 추강 남효온의 ‘지리산일과’에는 “(반야봉) 위쪽에는 만복대가 있었다. 만복대 동쪽에는 묘봉암이 있고 북쪽에는 보문암이 있는데 일명 황령암이라고도 하였다.”라는 내용은 황령암의 위치가 지금의 매막봉 부근의 달궁성 부근의 암자터로 추정이 되는데 그렇다면 이는 오히려 묘봉암보다 북쪽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추강은 ‘대동유묘봉암臺東有妙峰庵 대북유보문암臺北有普文庵’을 ‘대남유보문암臺南有普文庵‘으로 썼어야 정령과 황령이 엉키지 않고 이는 보문암 즉 황령암이 묘봉치 즉 ’황령의 남쪽‘이라는 기사와도 맞아 들어가고 그래야 “반야봉 좌우에 황령과 정령이 있다.”는 서산대사의 언급과도 일치하기 때문이다.
끝내는 함락, 패망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마한의 피란도성인 달의 궁전은 지금은 잡초더미에 묻힌 몇 안 되는 돌더미와 주춧돌 등의 잔해만 남아있을 뿐이지만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달궁月宮을 ‘達宮’으로 표기한다.
우리나라 고대사 대부분이 아직 역사로서 명확하게 정립되지 못하고 있는 부분이 많듯 이곳 달의 궁전을 중심으로 흥망성쇠 했던 마한의 역사 역시 정확한 고증을 거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달궁의 존재로 인해 지리산이 최초로 ‘자연의 산’에서 ‘사람의 산’으로 바뀌게 됐다는 점에서 우리는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듯 마냥 신비롭고 서정성이 깃들어 있는 ‘달궁’은 이제 예전과 같이 달 속에 있는 신비스런 궁전의 모습이 아니다. 1988년 지리산 종단도로인 861번 도로가 연장개통(천은사~달궁 구간)되면서 궁터 주위는 오르내리는 차량들의 소음과 매연, 민박촌과 카페 그리고 관광객들의 북적거림으로 뒤덮였다. 차량의 기나긴 행렬을 따라 달궁은 이제 바깥세상과 하나가 되고 만 셈이다. 즉 달의 궁전은 이제 관광객들의 쉼터로 변해 있는데 그마저도 옛 마한의 역사를 음미하기 위함이 아니라 빼어난 달궁 계곡의 절경을 보기 위해서라는 사실이 안타깝게 한다.
그런데 이런 아름답고 그윽하며 서정적이기도 한 유래를 가지고 있는 달궁을 노고단이나 지리산, 두류산 같이 국어학적으로 그 어원을 파악하면 좀 김이 새는 기분이 더해진다. 즉 우리의 옛말 ‘ᄃᆞᆯ’은 지금의 ‘높다’라는 뜻을 가진 말이었다. 중세 국어까지만 해도 달月은 ‘ᄃᆞᆯ’이라 했고 매달다의 ‘달다’가 여기서 온 말이다. 그래서 月=達이고 高이다. 그러니 달동네라는 말도 ‘달이 보이는 동네’라는 뜻이 아니라 ‘높은 곳(달)에 있는 동네’라는 의미라는 게 쉽게 이해가 가겠다. 그러니까 이 달궁을 위와 같이 서정성이 깃들고 운치가 있는 궁에서 그저 이 지리산이라는 높은 산에 있는 ‘궁宮’이어서 ‘달궁’이었다고 하면 기분이 좀 잡칠까?
예전 이 달궁의 주민들은 남원으로 장을 보러가려면 이 정령치를 넘어 고기리의 구룡치로 갔음은 둘레길 제1구간에서 봤는데 그 일정은 2박 3일이 될 수도 있었다. 만복대를 오르면서 조망처에서 주위를 살펴본다. 지나온 고리봉과 세걸산 그리고 멀리 바래봉까지 확실하게 보이고 고리봉 좌측으로는 운봉의 덕산저수지가 보인다. 진행방향으로 만복대가 바로 앞으로 다가왔고 좌측으로는 반야봉이 손에 잡힐 듯하다. 우측 중앙에는 노고단의 케른도 선명하게 보임은 물론 서시지맥이 갈리는 바위봉 또한 선명하게 볼 수 있다.
- 졸저 전게서 487쪽 이하
일반적으로 큰고리봉이라 불리는 곳이지만 우리는 두리봉으로 부르는 게 더 낫다고 인식합니다.
지리서부능선을 버리고 좌틀하여 고기리로 내려갑니다.
기억 속의 그곳을 지나,
고기교가 있는 삼거리로 떨어집니다.
원천천은 이 고기교 아래로 흘러 요천으로 흘러들어 가는데 예전에는 이 물이 요천 ~ 섬진강으로 흐르는 물이 아니고 우틀하여 주촌천과 합쳐져 람천이 된 다음 임천 ~ 남강 ~ 낙동강으로 흐르는 물이었다는 얘기죠.
이 곡중분수계가 그걸 알려주는 중요한 근거입니다.
좌측으로 흐르는 물은 원천천이 되어 요천으로 가고 우측으로 흐르는 물은 추촌천이 되어 람천으로 간다는...
실제 좌측 논바닥은 우측의 논바닥보다 10m가 낮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합니다.
더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올릴 현오TV에서 확인할 수 있으실 겁니다.
동영상을 곁들여 자세한 설명을 들으시면 더 이해가 쉽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늘은 덕치마을 삼거리까지 입니다.
편집하는 친구가 바쁘다 보니 동영상을 올리는 게 조금 늦어지고 있습니다.
속도를 내겠습니다.
지금 유튜브 동영상이 좀 재미없는 부분이라 광고도 안 합니다.
곧 대간길로 들어서니 조금만 참으십시오.
어제 올린 것은 산줄기와 물줄기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가 대간이라는 산줄기를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알아야 할 내용들 입니다.
관심 가져 주시기를....
첫댓글 TV 잘보고 갑니다...외람된 말씀이나 조금 말을 천천히 해 주셨으면 합니다
네. 선배님.
생각 보다 화면이 볼 만 한데요.
벌써 정기구독자 200명에 구독횟수 1,000회를 넘었습니다.
부끄럽고...차차 나아지리라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