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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성남지구 철야 성령 봉사회 원문보기 글쓴이: 바우
# 이오덕 선생과 권정생 선생 두 분의 삶을 신문기사를 통해 소개해봅니다.
과연 우리의 삶은 어떠해야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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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에게 어떤 생각을 심어주겠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잃어버린 것들을 아직 가지고 있다는 걸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게 잘 열매 맺도록 도와주는 겁니다." - 이오덕 선생님.
"솔직히 저는 사람이 싫었습니다. 더욱이 거짓말 잘하는 어른은 보기도 싫었습니다. 나 자신이 어린이가 되어 어린이와 함께 살다 죽겠습니다. … 친구가 없어도, 세 끼 보리밥을 먹고 살아도, 나는, 나는 종달새처럼 노래하겠습니다."
- 권정생 tjstodsla. 1973년 2월8일.
"사람들은 참 아무것도 모른다/
밭 한 뙈기/
논 한 뙈기/
그걸 모두/
내 거라고 한다/
이 세상/
온 우주 모든 것은/
한 사람의 ‘내’것은 없다/
하느님도/
‘내’거라고 하지 않으신다/
이 세상/
모든 것은/
모두의 것이다/
아기 종달새의 것도 되고/
아기 까마귀의 것도 되고/
다람쥐의 것도 되고/
한 마리의 메뚜기의 것도 되고/
밭 한 뙈기/돌멩이 하나라도/
그것 ‘내’것이 아니다/
온 세상 모두의 것이다."
- 권정생 님의 '밭 한 뙈기’전문.
"새 한마리/
하늘을 간다.//
저쪽 산이/
어서 오라고 /
부른다.//
어머니의 품에 안기려는/
아기같이.//
좋아서 어쩔 줄 모르고/
날아가는구나!"
- 이오덕 님의 "새와 산’
* 이오덕 선생님의 무덤 앞에 나란히 서 있는 두 분의 시.
두 시비는 오늘도 서로 마주보며 많은 이야기를 주고 받고 있다.
"몸이 늙는 건 숙명이지만 정신이 늙는 건(온갖 요사스런 핑계와 그럴싸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선택이다. 일흔의 몸에 스물의 정신을 가진 청년이 있고 스물의 몸에 일흔의 정신을 가진 노인이 있다. 그것은 전적으로 제 선택이다. 대개의 사람들이 조금씩 하루도 빠짐없이 신념과 용기와 꿈이 있던 자리를 회의와 비굴과 협잡으로 채워갈 때, 그런 순수한 오염의 과정을 철이 들고 성숙해가는 과정이라 거대하게 담합할 때, 여전히 신념과 용기와 꿈을 좇으며 살아가는 청년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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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아픔에 풀들이 울고 있었다’
-아동문학가 권정생선생의 흙집을 찾아보니...
"정생이 집? 저기제, 저기."
낮술로 불콰해진 마을 어귀의 한 촌로는 서울에서 온 객의 소매를 끌더니 저 너머 둔덕을 가리킨다. 일러준 대로 고샅길을 따라 올라가니 과연 ‘권정생’이란 종이 문패를 붙인 토담집이 나타났다.
경북 안동시 일직면 조탑리. 아동문학가 권정생 선생(67)의 5평 남짓한 집은 마을의 가장자리에 나앉아 있었다. 울도 담도 없이 홀로 떨어진 누옥. 붉은색 슬레이트 지붕의 이 흙집은 주인의 검박함보다 먼저 궁기를 떠올리게 했다.
툇마루가 없는 탓에 창호지 붙인 방문을 열면 바로 바깥이다. 쇠 문고리와 돌쩌귀는 녹이 잔뜩 슬었고, 모퉁이에 놓인 호미, 낫, 종다래끼, 쇠톱에는 손길이 간 지 오래인 듯 마른 흙이 달라붙어 있다. 인적이 끊기지 않았음을 확인해주는 건 댓돌 위에 가지런히 놓인 고무신 한 짝과 희미하게 돌아가는 전기계량기뿐이다. 아동문학계 큰 어른의 집이라 하기엔 보는 이가 면구스러울 정도다.
"권선생님 계신가요?" 몇 번을 불러도 인기척이 없다. 19살부터 앓은 폐결핵 탓에 병을 달고 산다는 그이기에 글쓸 때 빼고는 꼼짝없이 구들장 신세일 터. 권선생의 가르랑거리는 소리를 들은 것도 같다. 문을 열고 재차 방문객의 존재를 알리자 저 안쪽에서 "누구요?"하는 쇠잔한 목소리가 들린다.
핼쑥한 모습으로 나타난 그는 문지방 너머에 꼿꼿이 선 채로 눈을 끔벅였다. 예상했던 대로 취재 목적의 방문이 영 내키지 않는 표정이다. 봄비가 추적추적 흩뿌리고 있었지만 손님을 안으로 들일 태세가 아니다.
"할 말이 없슴미더. 기냥 가시이소." "신문에 나오고 할 게 없슴미더."
그는 계속 양손을 비비고 매만지며 송구한 태를 냈다. 몇 마디 말을 튼 차에 신발이라도 벗으려 하자, 단호하게 손을 내저었다. 그의 단단한 고집 앞에 입가를 맴도는 많은 질문들은 속절없이 발이 묶였다. '어린이날 특집' 삼아 찾아오긴 했으나, 이쪽 욕심만 차린 것 같아 부끄러웠다. 그는 방 안에서, 이쪽은 문 밖 처마끝에 선 채로 한동안 서로의 어색함을 견뎠다.
그러다 간간이 이쪽에서 가볍게 물었고, 그는 그 물음마저 박절하게 내치진 않음으로써 최소한의 손님 대우를 했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십니까.
"그냥 가끔 숨 쉬러 밖에 나오는 정도지요."
-친분을 유지하시던 이오덕 선생님이 돌아가셔서 많이 적적하시겠습니다.
"그래도 그분이 남긴 책이 곁에 있으니까 괜찮지요."
-건강은요.
"이전에는 안그렀터이만 인자는 (육신의) 고통을 참아내기가 힘들어요. 이렇게 서 있으모 몸에 열이 잔뜩 오릅미더."
-몇 년 전에 생긴 (중앙)고속도로 때문에 여기까지 쉽게 올 수 있었습니다.
"고속도로가 생겨 더 나빠졌어요. 농로(農路)도 마이 없어지삘고. 옛날에는 마을 사람들이 술 묵고도 맘놓고 댕겼는데, 지금은 차가 쌩쌩 달리고 하니까 조심 조심해야 함미더."
어쩌면 이야기를 샘솟게 하던 산골마을을 고속도로가 휑하니 뚫어놔서 불만인 것인지도 모른다. 권선생은 “인자 고마 하입시더”라며 조용히 방문을 걸어 닫았다. 다시 정적이다.
처마 밑에서 바라본 집앞 뜰에는 민들레가 곳곳에 피어 있다. 그의 1969년 데뷔작 ‘강아지똥’에서 민들레는 설움과 소외를 딛고 일어선 ‘희망’ 같은 존재로 그려진다. 그의 동화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강아지똥처럼 서글프고 보잘것 없는 존재가 많다. 매맞는 할미소, 자식들 잃은 엄마, 잡혀죽는 양….
그로 하여금 ‘무명저고리와 엄마’ ‘바닷가 아이들’ ‘몽실언니’ 등 100편이 넘는 생생한 동화를 쓰게 한 힘은 ‘진실’이라고 권선생의 지인들은 말한다. 30년 지기인 숭실대 이반 교수(극작가)는 “권선생은 ‘어린이라고 해서 아름다운 것만 보여줄 것이 아니라 리얼리티를 전달해 줘야만 진정한 아동문학이 된다’고 믿고 있다”고 전했다.
많은 책을 냈으니 제법 돈을 모았을 법 한데도 그는 지독히 가난하다. "지금보다 더 크거나 화려한 것은 내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할 뿐이다. 환갑때 친구들이 "그동안 펴낸 책을 모아 전집으로 묶자"고 제안했으나, 그는 거절했다. "그런 식으로 하면 책 한권씩 내는 조그만 출판사는 죽는다"는 게 이유였다. 무공해 식품이라며 독자들이 가져온 선물도 같은 이유로 받지 않았다. "내가 이런 걸 먹으면 동네 구멍가게 사람들은 어떻게 사느냐"고 반문했다고 한다.
요즘 그는 세상사에 가끔씩 탄식도 보탠다. 끝내 사랑이 이긴다고 믿는 그의 입에서 "시상에 정의가 어디 있노? 힘이 정의지…"라는 말까지 나왔다. 미국이 이라크 전쟁을 일으켰을 때였다. 최근에는 허락도 얻지 않고 자신과 이오덕 선생간에 오간 편지글을 책으로 펴낸 한 출판사 때문에 상처를 받기도 했다. 책을 모두 수거하는 것으로 일은 매듭됐지만, 지금은 정작 손해를 본 출판사쪽에 미안해하고 있다.
올 여름 출간 예정인 '금강산 호랑이'(가제)는 어쩌면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될지도 모른다. 기력이 달려 책상머리에 앉아 있기조차 힘든 탓이다.
뭔가 허전해 다시 문을 몇 번 두드렸지만 무반응이다. 어느새 빗발은 더 굵어졌다. 젊은 시절 그가 ‘종지기’ 생활을 하며 살았다는 함석지붕의 시골교회가 저 멀리 눈에 들어왔다.
〈안동/글 조장래·사진 서성일기자 joy@kyunghyang.com〉
* 경향: 2004년 05월 0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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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오덕 선생 무덤가에 '권정생 시비' 놓인 까닭은…
<왼쪽> 이오덕/ <오른쪽> 권정생
"살구꽃 봉오리를 보니 눈물이 납니다"
이오덕, 권정생 지음 / 한길사 펴냄.
1970년대 초반, 마흔일곱살의 경상북도 산골 학교 교사인 이오덕(사진 왼쪽)씨가 안동에서 혼자 사는 서른다섯살 무명의 아동문학가 권정생(오른쪽)씨를 찾아갔다. 중견 아동문학가였던 이씨는 권씨의 동화 〈강아지똥〉을 읽은 뒤 해맑은 작품세계에 반해 일면식도 없었지만 먼저 권씨의 집을 방문했다. 열두살 차이, 띠동갑인 두 아동문학가는 금세 마음이 통했다.
두 사람은 이후 수백통의 편지를 수십년 동안 주고받으며 평생지기로 우정을 쌓았다. “저의 자취 경력은 이래저래 아마 이십 년 가까이 된 것 같습니다. 저녁밥을 해 먹고 누우면 글에 대한 생각, 문우들에 대한 생각을 하는 것이 즐겁습니다. 권 선생님의 작품집이 출판되도록 해야 할 것인데, 하고 며칠 밤 생각해 보기도 했습니다.”(이오덕, 1973년 4월30일)
“솔직히 저는 사람이 싫었습니다. 더욱이 거짓말 잘하는 어른은 보기도 싫었습니다. 나 자신이 어린이가 되어 어린이와 함께 살다 죽겠습니다. … 친구가 없어도, 세 끼 보리밥을 먹고 살아도, 나는, 나는 종달새처럼 노래하겠습니다.”(권정생, 1973년 2월8일)
'강아지똥' 읽은 이오덕 무명의 권정생 찾아가 1970년대부터 평생지기 수백통 편지글이 책으로
이씨는 세상의 번잡함을 거부하고 안동땅에 틀어박혀 홀로 어린이문학에만 몰두하는 권씨의 작품을 알려 빛을 보도록 했다. 권씨 역시 문학에 대한 치열한 고민을 이씨와 함께 나눴고, 창작을 마치면 가장 먼저 이씨에게 글을 보내 평을 들었다.
"요즘 저는 아동문학에서 아주 철저하고 과감한 태도로 평을 쓰고 논리를 세워 가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만 안일무사주의와 문단출세주의로 흐리멍텅하게 되어 있는 우리 아동문학을 일깨워 전진시킬 수 있다고 봅니다.”(이오덕, 1974년 11월23일)
"창문으로 내다보이는 건넛집 살구나무에 꽃이 피었습니다. 며칠 전 창동이네 할머니가 산에서 내려오시는 걸 보니 할미꽃을 따서 비녀를 만들어 머리에 꽂으셨더군요. 어쩐지 눈물이 나올 것처럼 아름다워 보였습니다.”(권정생, 1985년 4월11일)
이씨는 권씨와 주고받은 편지 하나하나에 직접 제목을 달아 보관해 왔다. 5년 전, 이씨는 출판사에 편지들을 보냈다. 권씨는 사실 책을 내길 원치 않았지만, 결국 독자들과 만나게 됐다. 지난 8월 이씨가 먼저 세상을 떠난 뒤였다. 권씨는 이씨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를 책의 서문으로 썼다.
"선생님 가신 곳은 어떤 곳인지, …〈일하는 아이들〉에 나오는 그런 개구쟁이들과 함께 별빛이 반짝이는 하늘 밑 시골집 마당에 둘러앉아 옥수수 까먹으며 얘기 나누시는 그런 세상이었으면 합니다. 선생님, 이 담에 우리도 때가 되면 차례차례 선생님이 걸어가신 그 산길 모퉁이로 돌아가서 거기서 다시 뵙겠습니다.”
이씨는 임종 전에 일절 조문객을 받지 말고 부고도 장례 이후에나 알리라고 가족들에게 당부했다고 한다. 다만 자신이 묻힐 곳 근처에 세울 시비를 지정해 남겼다. 시비 하나에는 권정생씨의 〈밭 한 뙈기〉를 넣고, 다른 하나에 자신의 시 〈새와 산〉을 넣도록 했다. 충주에 있는 이씨의 무덤가에는 지금 고인의 바람대로 두 시비가 마주보고 서 있다.
구본준 기자 bonbon@hani.co.kr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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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년간의 편지 >
- 이오덕이 세상에 남겨놓은 가장 아름다운 유산
이오덕이 세상을 떠났다. 조문객도 곡도 없는 빈소에서, 그는 혼자 웃고 있다. 조문객을 받지 말 것, 그것이 그의 유언이었다. 그는 이미 죽기 전, 자신의 장례를 홀로 치렀다. 장례가 다 끝나고 난 후에 띄우라던 부고장, 무덤에 세울 비석까지 그는 스스로 모든 것을 준비하고 떠났다. 그런 그가 자신의 무덤 곁에 권정생의 시비 하나를 세워주길 원했다. 그는 죽어서까지 권정생을 곁에 두고 싶어한 것이다.
이오덕과 권정생 두 사람은 30년간 편지를 주고받았다. 무명의 동화작가와, 중견의 동화작가가 만나 주고받은 30년간의 편지. 그것은 이오덕이 세상에 남겨놓은 가장 아름다운 유산이었다.
- 만약 이오덕(79세)이 없었다면 우리 시대의 국어는 어땠을까
이오덕의 국어 사용 태도는 아주 분명하다. 그는 일체의 외래어 사용을 반대하며, 번역 문투의 문법과 특히 지식인 특유의 복잡한 문장을 거부한다. 그래서 누군가는 그를 '국어 순결주의자'라고 부르며, 그의 원칙주의가 시대착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반세기에 가까운 식민 시대와 비정상의 근대화 과정에서 형편없이 훼절당한 우리의 국어에 그마저 없었다면, 우리의 국어는 또 얼마나 초라해졌을 것인가. 세계 유일의 '발명' 문자인 한글에 대한 자존심마저 흔적 없이 사라진 우리 시대에 그는 모국어의 순수함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다.
- 만약 권정생(67세)이 없었다면 우리 시대의 아동문학은 어땠을까
권정생의 동화는 슬프다. 그는 '예쁘고' '고운' 동화를 쓰지 않는다. 그의 동화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어두웠던 현대사 속에서 상처받고 버림받은 가난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그의 동화가 어린이들에게 읽히기에는 '너무 어둡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현실과는 전혀 다른 '예쁜' 동화들만이 판치는 세상에서 그가 쓴 <몽실언니>나 <강아지똥>이 없었다면, 우리의 아동문학은 또 얼마나 부끄러웠을 것인가. 아동문학의 개념마저 정립되지 못한 우리 시대에 그는 우리 아동문학의 한 귀퉁이를 지켜가는 살아 있는 증언자다.
- 첫 만남, 그리고 30년 동안 계속된 편지
1972년 가을, 당시 중견 아동문학가로 주목받기 시작하던 이오덕은 무명 작가 한 사람을 찾아간다. 조그만 기독교 잡지에 실린 <강아지똥>이라는 짧은 동화를 읽고 난 직후였다. 글을 쓴 권정생은 조그만 산골 교회의 종지기였다. 권정생은 한 해 총수입이 5천원에 불과할 정도의 가난과 전신 결핵의 고통 속에서 죽음을 기다리며 사는 사람이었다. 두 사람의 나이 차이는 12살. 그러나 이오덕은 권정생에게서 한국 아동문학의 희망을 봤다. 그때부터 두 사람의 편지가 시시작됐다. 그 속에서 이오덕은 가난한 무명 작가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고, 권정생은 글이 써지는 대로 이오덕에게 보냈다. 권정생이라는 작가는 그렇게 세상 속으로 나왔다.
- 나이를 뛰어넘은 존경과 우정
권정생은 평생을 전신결핵에 시달리며 독신으로 지냈다. 그의 전신결핵의 통증은 원고지 한 장을 채우기 위해 수십 번도 더 일어났다 앉았다를 반복해야 할 만큼 극심하다. 그런 권정생에게 이오덕은 '다만 동화를 쓰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찬사를 바쳤다. 그런 이오덕에게 권정생은 또 '당신이 없었다면 나는 살 수 없었을 겁니다'라고 고백했다. 두 사람이 존경과 애정을 전달하는 방식은 오로지 편지뿐이다. 그러나 두 사람에게 그보다 더 충분하고도 충만한 대화는 없었다. 천형처럼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작가와 그 작가를 아동문학의 희망으로 여기는 국어학자가 주고받은 30년간의 편지는 그래서 치열하고도 아름답다.
- 편지로 만나는 두 청년의 영혼
두 사람의 건강 상태는 지금 최악이다. 이오덕은 신장염과 위염으로 하루 300cc의 미음만으로 견뎌간다. 권정생의 결핵은 이제 치유마저 불가능한 상태, 그는 한 평도 안 되는 골방에 틀어박혀 혼자 그 고통을 이겨내고 있다. 두 사람은 문 밖 출입을 하지 않는다. 며칠을 기다려도 두 사람의 모습은 볼 수가 없다. 그들은 세상이 자신들의 고통에 동참할 기회마저 주지 않는다. 두 사람의 머리 속은 오로지 '가난하고 슬기로운 이 땅의 아이들을 위해 죽기 전에 해놓고 가야할 일'들로 가득 차 있고, 그들은 각각의 방에 틀어박혀 남은 목숨을 그 일에 바치고 있다. 세상은 감히 그 일을 방해할 수가 없다. 늙고 병들었으나 스스로 지운 '시대적 책임'에 철저히 몰두할 수 있는 두 사람, 그들은 영원한 청년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세상은 그 아름다운 두 청년을 만날 수 없다. 그들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은 단지 편지뿐이다.
- 한 시대의 스승이 된다는 것, 그것을 증명하는 편지
두 사람의 편지는 처절하다. 그들은 편지를 통해 끊임없이 고민하며 과연 올바로 사는 길이 무엇인지를 묻고 대답했다. 배가 부르면 게을러졌다고 고백하고, 독서량이 줄면 나태해졌다고 자책한다. 그런 다그침 속에서 그들은 스스로를 지켜갔고, 마침내 스스로 한 시대의 스승이 돼 가는지를 증명해준다. 주고받은 편지만을 세상에 내어놓은 채 두문불출하는 두 사람. 그러나 정결한 두 영혼의 편지만으로도, 오늘 세상은 충분히 위로 받는다. 은자처럼 숨어버린 삶의 흔적위로 그들의 편지가 역사처럼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