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講義 資料
天道敎의 神觀定立에 對하여 4.
부제; 천도교에는 신이 있는가?
발표자; 金 用 天(吾菴 東學思想 硏究所 運營管理者.)
(留意事項); 이 글은, 포덕 152(2011)년 5월 7일에 21C문화연구회가 주최한 교양강좌에서 70여분 동안 강의한 강의 자료입니다. 보조 설명 자료는, 여러 개의 도형설명과 해설 자료의 양이 10페이지가 넘어 게재를 생략합니다. 그리고 이 글은, 출판준비 중에 있는 ‘東學思想 硏究의 諸 問題’ 에 게재될 “한울님에 관한 연구” 중에서, 강연 주제에 맞도록 발췌하여 요약한 초록(抄錄)이므로, 원문과는 거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원 주제에 맞게 정리된 자료와 註가 생략된 것이 많으며, 새로 발굴된 관련 자료들을 補完하여 修正한 완성된 연구논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인용하거나 이 글을 바탕으로 어떤 결론을 내리려하지 마시기를 부탁드립니다. / 오암 김 용천 심고.
포덕 152(201)년 5월 7일.
오암 동학사상 연구소 운영관리자. 김 용 천 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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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년 후인 1976년에 최동희가 집필한‘ 天道敎思想’(韓國 現代 文化史 大系 3에 수록.1976.)에서 동학시대의 시천주 사상이 천도교로 대고 천하한 후 에 대종정의에서 교조 수운의 사상적 요지를 인내천이라고 규정하는 과정에서 한울님의 의미를 조명해보고 있다.최동희는 1900년도를 전후하여 서양철학을 바탕으로 천도교의 철학화의 노력을 새로운 변화로 받아 들였고 이 시기의 최고의 이론가로 등장한 芝江 梁漢默이 주도 했던 교리해설시기를 인내천 사상의 이론적인 형성에 있어 전기라고 구분하였다. 주로 대종정의가 간행되기 전후로 간행된 覺世眞經, 授受明實錄, 道訣, 明理傳, 東經演義에서 기술되고 있는 인내천 사상의 근원과 의미를 규명하고 있다. / 金用天의 “東學思想 展開의 諸問題” 중 '人乃天의 참뜻과 유래의 관한 연구' 참조. (PP. 71-138.)
‘東學을 세운 水雲(崔濟愚)은 ’하느님을 모셔야 한다.’(侍天主)고 가르쳤다. 第 2代 敎主인 海月(崔時亨)은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을 모시고 있다.’고 했다. 1899년에 의암이 집필한 것으로 알려진, 각세진경에서는 사람이 하늘 모시고 있는 까닭을 설명하려고 하고 있다. 여기에 몇 가지 注目되는 思想的 傾向이 엿보인다. 라고 하고, 侍天主라는 수운의 표현을 侍天이라고 고쳤다고 지적한 다음,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水雲이 말하는 天主는 글자 그대로 ‘하느님’이며 이 하느님은 어떤 意志的인 神을 뜻하고 있다. 위 句節에 보이는 侍天은, 분명히 하느님(天主)이 아니라 하늘을 모시고 있다는 뜻이다. 이것을 하느님으로부터 그 意志的 性格을 除去하려는 意識的인 意圖를 나타낸 것이라고 解釋된다. 과연 이렇게 하느님의 意志的 性格을 否定한다면 모신다(侍)는 말도 그 뜻이 매우 달라질 수밖에 없다. 저 水雲에 있어서는 ‘모신다’는 말이 정성을 다하여 받든다는 것을 뜻하였다. 그런데 여기서는 萬物의 性과 마음(心)이 하늘에서 나왔기 때문에 하늘을 모신다고 말한다는 것이다.’(PP. 672-673.)
이어서 최동희는 각세진경에서 말하고 있는 ‘하늘과 땅과 사람의 ‘세 가지 根本存在(三才)’는 모두 一氣의 造化일 뿐이다.‘ 라고 말한 것은, ‘萬物을 代表하는 根本存在인 하늘과 땅과 사람(이른 바 三才)은 모두 一氣의 造化라고 하는 말은, 萬物의 本性은 모두 一氣의 造化라는 말과 같은 의미를 가졌다.’고 하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하늘(天)이란 곧 陰陽의 變化가 由來하는 根源으로서의 一氣인 듯하다. 고 했다. 그러므로 尊敬의 對象일 수 없고 따라서 尊稱인 ‘님(主)’을 붙일 필요가 없게 된다. 고 했다. 그런데 같은 해에 지어졌다는 覺世眞經,과 授受明實錄에서 사람과 하늘에 관계를 매우 관심 깊게 설명하고 있다. 授受明實錄에서 사람과 하늘에 관계를 설명하고 있는 글을 보면
‘스승님(海月)이 ’사람은 곧 天人이고 道는 곧 大先生님(水雲)의 無極大道‘이라고 말한 것은 무슨 까닭일까? 사람은 곧 天人이란 天이 萬物을 化生하고 그 뜻을 사람의 形體에 맡겨 뜻대로 萬物을 쓰게 한 것을 뜻한다.
라고 한 것은 천인은 하늘이 낸 사람으로, 곧 사람은 本來 하늘에서 나왔다는 것을 强調한 말인 듯하다. 는 것이다. 이러한 이론적인 해설은 道訣과 의암이 일본에 체루하고 있을 때인 1903년에 지었다는 明理傳에 까지 ‘사람이 곧 天人이다.’란 표형이 핵심주제였다고 볼 수 있다. 1905년 12월에 동학을 천도교로 대고천하할 때 천도교의 종지를 인내천으로 화정 공시한 후인 1907년에 간행된 “대종정의”를 통하여 인내천 사상의 근원과 유래를 밝혀 천도교의 공식적인 언어로 사용되게 되었다. 이후 천도교의 교리해석은 여러 방향으로 새로운 해석이 되었다고 보고 있다. 주의니 사상이니 이념이란 말이 많이 사용되었다.
최동희의 汎神觀에다 하느님의 攝理에 따르는 것이라고 보는 입장과는 달리, 기독교계로 동학, 천도교를 연구하는 金敬宰는 ‘韓國思想’ 12호 崔水雲 硏究라는 특집호에 게재된 ‘崔水雲의 神槪念’에서 동학의 신관을 汎在神觀이라 말하고 있다. / PP.45-62.)참조.
‘神槪念이란 그 용어 자체가 모순이다. 왜냐하면 神的 存在란 槪念化 불가능한 存在자체 혹은 生存 자체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神을 개념적으로는 알 수 없고 다만 神적 生命에 참여함으로써만 신적 생명을 나누어 받을 수 있을 뿐이다.’ 라고 전제한 다음, ‘有限者가 無限存在를 인식하고 槪念化한다는 것은 無限者를 限定하고 규정한다는 말인데 이것의 완전한 성공이 불가능한 이유는 인간의 인식 능력의 한계성뿐만 아니라 神的 生命의 未來性, 非決定性, 無窮性 때문에 그렇기도 하다. 그러나 東學이 한 종교적 현상으로 우리 민족사에 나타날 때 東學이 東學될 수 있었던 그 근원적 원인이 水雲의 神觀에 달려 있느니 만큼 水雲의 신관은 東學 모든 사상의 기초를 이룰 뿐만 아니라 東學이 한국사상사에 공헌하는 점이기도 하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崔水雲의 神觀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西歐의 論理學이 벽에 부딪힌 矛盾律(모순법 또는 모순원리라고 하는 논리학의 용어로, 참인 동시에 거짓일 수 없다는 논리.)과 排中律(형식논리학의 용어로, 배중법, 배중원리라고도 함. 두 개의 서로 상반되는 판단이 竝立할 때 제 3의 판단의 존재를 배제 하고 둘 주에 하나를 서택 하는 것을 말한다. 참이 거짓이거나 아니거나 중에 어느 한 쪽이다.)을 극복한 ‘反對一致’의 논리위에 선 신관이다.
註 39; 矛盾律-모순법 또는 모순원리라고 하는 논리학의 용어로, 참인 동시에 거짓일 수 없다는 것.
註 40; 排中律-형식논리학의 용어로, 배중법, 배중원리라고도 함. 두 개의 서로 상반되는 판단이 竝立할 때 제 3의 판단의 존재를 배제 하고 둘 주에 하나를 서택 하는 것을 말한다. 참이 거짓이거나 아니거나 중에 어느 한 쪽이다. 는 것.
註 41; 反對一致-두 개의 명사 또는 개념에 있어 外延的으로 지칭되는 사물이 內包的으로 離接的인 개념을 서로 반대개념 또는 반대명사라고 한다. 예를 들면 賢과 愚, 黑白, 善惡, 陰陽 等은 반대개념으로, 동시에 참일 수는 없지만, 모두가 허위일 수는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반대일치란 반대개념을 가진 말의 궁극적인 의미를 추구해 보면 그 근원에서 일치한다고 보는 논리. 실질적인 개념에 있어선 현도 우도 아닌 상태가 생기는데 이런 제 3의 상태가 생기지만, 이는 모순개념과는 다르다. 이 용어는 이돈화가 저술한 ‘東學之人生觀’에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이돈화는 ‘位置에서 東,西,南,北 色에서 靑,黃,赤,白 質에서 生滅消長, 價値에 있어서 善,惡,禍,福 等無數한 相對値가 究極 宇宙 全一的 原理에 一致된다는 것이다.’ 라고 설명하고 ‘反對一致’의 眞理는 宇宙의 普遍妥當性을 意味하는 點에서 人間相互間는의 主觀的 反對爭論도 亦是 이 眞理에 依하여 統一될 수 있다.‘라고 하고 있다. / 복간 신인철학 pp.218-219. 참조.
‘전통적인 신관에서 보면 ‘절대적’인 것과 ‘상대적’인 것은, 한 神的 本性 속에서 모순개념이다. 뿐만 아니라 ‘存在로서의 神’은 ‘生成으로서의 神’ 또는 ‘人格으로서의 神’과 모순되는 것으로 규정되었다. 그러나 水雲이 이해하고 체험한 神은 存在의 근원이면서 동시에 인격적인 당신이었으며, 절대적인 영원한 무궁이면서 동시에 변화ㅘ정 속에 있는 상대적인 시간적 생성신이기도 했다. 이러한 神觀은 필자에게는 汎在神論(Panentheism)으로 보여지는데 汎在神論 神觀은 人類高等宗敎의 최고 발달 상태에서 나타나는 신관이다. 水雲은 天主에 관하여 여러 경우에 언급하고 있지만 한 번도 한울님에 관하여 개념적으로 규정을 내린 적니 없다. -중략- 그러나 東學 崔水雲의 神觀이 천도교 교인들의 신념처럼 人類 宗敎史에서 전무후무한 전혀 새로운 창조적 신관이라 부를 수는 없다. 崔水雲의 神觀이 종교사상에서 神觀形態의 분류상 전혀 불가능한 새로운 신관이 아니다. 필자는 그의 신관을 韓國的 汎在神觀으로 보고자 한다.‘ 라고 설명하고 있다. 汎在神論은 적어도 有神論과 汎神論을 극복한 것이어야 한다. 水雲이 전통적인 有神論的 초월신을 극복하려고 했던 점은 그가 당시의 西學 및 더 구체적으로 天主敎 신앙 형태에 대한 비판에서 나타나 있다.’ 라고 전제한 다음 논학문을 위시한 여러 법설에서 찾아낸 수운의 신관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위에서 인용문을 주의해서 보면, 水雲의 神觀에서는 소위 神性과 人性의 본질의 同一, 統一, 연합, 교류, 연속적발전 등을 인정하거니 전제하고 있다.’ 라고 설명하고 있는 한편 ‘水雲’의 神觀은 至氣一元論 自然觀이다. 라고 설명하고 있다.
性理學에서 理氣論을 발전시켜 세계철학사에 공헌하였고 여기에서 논의된 理氣論은 결국 本體的 개념으로서 宇宙生成의 요소원리를 밝힌 것이다. 이런 이기론의 쟁점 중의 하나인 氣論이 동학에 이르러 묘하게 나타났다고 하면서 至氣一元論 自然觀의 형성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水雲이 말하는 氣는 性理學에서 말하는 氣의 본질을 내포하면서도 이것을 인격화 하였다. -중략- 水雲에 있어서의 氣는 결국 우주의 本體인 동시에 삼라만상 개체의 現象이다. 삼라만상의 生滅, 動靜, 變化가 모두 氣의 활동이다. 동학의 氣論 속에서도 花潭과 栗谷에서 보았던 존재의 근원적 힘으로서의 氣 우주생성 원리로서의 氣, 삼라만상의 생성자료로서의 氣論을 계승하고 있다. 자연은 고정된 靜物이 아니라 끊임없이 창조적 생성작용을 하는 살아 있는 생명 자체인데 그것을 가능케 하는 근거, 과정, 결과가 모두 氣의 所以이다. 이 氣는 삼라만상 안에서와 밖에서 간섭하지 않는 일이 없고 명령하지 않는 일이 없는 命令, 行爲, 實體이다. 이 氣는 神靈한 능력으로서 만물과 인간 속에 內在할 뿐만 아니라 밖으로 충만하게 氣化하므로 인간은 이 氣의 現存的 臨在에서 도피할 수 없다.
水雲의 神은 氣化의 神으로서 生成 自體(Becoming itself)이다. 생성 자체는 한 存在(A being)이거나 生成(A Becoming)이 아니라 그것들의 전체를 포용하면서 그것들을 개체 개체로 살려내는 무궁한 생명 자체이다. 그러므로 생성의 근원과 능력으로서의 至氣는 물질도 아니고 정신도 아니다. 至氣의 현실화된 형태가 물질 또는 정신으로 나타날 뿐이다.至氣가 일종의 근원적 에너지로서만 그치지 아니하고 神靈的 存在로서 인간의 誠願과 感應도 하신다고 보는 점이 東學이 종교로서 성립되는 갈림길이다.’ 라고 판단하고 이해하며 설명하고 있다.
註 42; 汎在神論은 C, K, W, E, T 다섯 가지 요소를 모두 내포한 生存 자체이다. 神은 自意識的인 생존으로서 세계를 알고 그러면서도 세계 속에 內在하며, 영원무궁한 존재 자체이면서도 神的 相對性을 갖고 있는 시간적 생존이다. 이것의 상징은 정점을 지향하는 원추형의 입체이며 인간과 神과의 관계는 順理와 順命에 서서 神과 共役的이며 同役的인 창조 행위로 참여하는 관계를 띈다. 크게 보아서汎在神論은 전통적인 有神論과 汎神論이 창조적으로 종합 지향된 형태이다. 西歐의 宗敎, 哲學史에서 슈라이엘맛하(1768-1834)와 쉘링(1775-1854)에 이르러 대체로 인간의 보편적인 神意識은 汎在神論的 경향성을 띄기 시작했는데 한국의 종교, 철학사에서 水雲(1824-1864)의 위치가 그와 같으며 시간적으로 동시대이다. / P. 47.
註 43; C 는 神은 自意識的이다. K 는 神은 세계를 알고 있다. W 는 神은 세계 속에 內在해 있다. E는 神은 영원하다. T 는 神은 시간적이다. 란 神性의 다섯 가지 요소이며 특징을 설명한 것으로 화이트헤드의 영향을 받은 미국의 정신의학자인 하트손(Charles Hartshorne 1897- )이 이 함수관계를 만들어 신관의 특징을 설명한 데서 출발했다. / PP. 46-47.
오문환은 ‘동학의 천주관’(신인간 통권 633호-635호(144년 5-7월호 상,중,하로 게재)
에서 2000년도 초까지 동학의 천주관에 대한 연구동향을 살펴보고, 수운, 해월, 의암의 법설을 바탕으로 동학의 천주관을 철저히 규명하였다. 이와 유사한 연구 결과물이 여럿 있었지만 종합적으로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어, 장문의 글에서 발췌, 요약하여 오문환의 동학의 천주관을 이해보려고 한다.
이재봉(1999)도 천(天)개념을 인격적 특성을 가지는 천신(天神), 자연계의 보편법칙이자 도덕 인륜의 근거로서의 천도(天道), 만물의 근원으로서의 천기(天氣)로 분석하여 동학의 천주는 인격적 속성이 강한 천신에 배속시켰다. 노길명(1995)도 동학의 천주관은 성리학(주로 주자학)의 강한 이법천(理法天)적 성격보다는 경외지심을 일으키는 일반인의 종교적 심성에 호소하는 인격천(人格天)의 성격을 강조했다. 살아 움직이는 인격천에 주목하여 박경환은 동학의 신관은 천인합일적 천인관계의 사유는 계승하되, 주자학의 이기이원적 존재론을 기일원론적 존재론으로 전환(박경환 2001, 175)시켰다고 본다.
동학에서 천주가 인격천의 의미를 갖는다는 점은 수운이 주(主)자를 주라는 것은 존칭해서 부모와 더불어 같이 섬긴다는 것이요(「논학문」)라고 해석한 것만 보아도 자명하다. 부모처럼 나를 낳고 기르는 존재이기 때문에 천주를 공경해야 할 존재임에는 분명하나 그렇다고 해서 어떤 초월적 주재자 혹은 절대자는 아니라는 점을 수운은 다음처럼 상기시킨다. 아는바 천지라도 경외지심 없었으니 아는것이 무엇이며 천상에 상제님이 옥경대 계시다고 보는듯이 말을하니 음양이치 고사하고 허무지설 아닐런가(「도덕가」). 김상일(2000, 2001)은 동학의 신관을 인격신적인 측면과 함께 비인격적인 측면의 종합으로 보아 이 점을 서구의 현대 서구철학 및 화이트헤드 철학과 비교 분석하고 있다.
동학의 출발은 천주를 모심으로서 시작된다. 천주를 모시게 되면 천주는 두 갈래 방향으로 나타난다. 먼저 안으로는 지금껏 없었다고 할 수 있는 신령이 새로이 드러나게 되고 밖으로는 우주와 연결된 하나의 기운이 솟아나게 된다고 하겠다. 모실 때 천주는 나의 안과 밖에서 새로이 드러나게 되고 그 자리에서 한 걸음도 이동하지 않을 때 천주의 조화권능이 내 안에 자리 잡게 된다(造化定). 천주조화가 내 안에 자리 잡게 되면 나와 천주는 하나로 통하여 우주만사를 알게 된다(萬事知)고 하겠다. 동학에서 천주는 지기로부터 고립시킬 수 없으며, 존재(Being)를 활동(Becoming)으로부터 단절시킬 수 없는 이원적 일원론임을 수운, 해월, 의암의 언행을 중심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동학에서 천주는 인간을 포함한 우주만물을 생성시키며 동시에 인간을 포함한 우주만물 안에서 살고 있는 존재로 이해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천주는 한편으로는 우주만물을 생성시키는 초월적 존재로 그려지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우주만물 안에 내재된 존재로서 이해되고 있다. 그러므로 동학의 천주관을 초월적 내재론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두 시각은 아무런 충돌없이 융합되고 있는 점이 동학 천주관의 특성이라 할 수 있겠다.
하늘 안에도, 나 안에도, 돌멩이 안에도 우주만물을 낳고 기르는 자비로운 손길이 똑같이 작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학의 신관은 지배, 통제, 주재의 절대 유일신관과는 다르다. 또한 만물에는 각각 개체 신이 존재한다는 범신론과도 다르다. 동학을 따른다면 개체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하나의 신만이 존재할 뿐이다. 하나란 다수 가운데 최고 높은 하나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둘이 아니다(不二)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둘이 아니라는 것은 천주와 우주만물이 둘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속(聖俗)이 하나라는 의미이다.
의암 손병희 시대에서는 종교와 문명에 따라서 천주는 다양한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다. 문명에 따른 표현의 다양성에 대하여 수운의 의식은 분명하다. 수운 자신은 동방 땅에서 나서, 동방 땅에서 득도하고, 동방 땅에서 그 뜻을 폈기 때문에 자신의 가르침을 학으로는 동학이나 도로는 천도라 하였다(「논학문」). 학은 지역에 매이기에 동서남북이 있을 수 있으나 도(道)는 지역이나 방위에 매이지 않으므로 같은 천도라 한다고 했다. 천도는 하나이며 천도의 운동도 또한 하나이나 이를 설명하는 이치와 철학은 다르다는 것이다(「논학문」). 그러나 천도는 형체가 없는 것 같으나 자취는 있다(「논학문」)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비록 형태로 색깔로 없지만 그 자취는 있다고 하였다.
수운에게 내려 와서 이야기를 나눈 천주는 분명 인격적 존재로서 천주의 자취와 흔적이라 하겠다. 수운은 천주의 형상(形)은 태극(太極)이요 궁궁(弓弓)이라 했다(「포덕문」). 해월은 수운이 천주의 형상을 태극과 궁궁이라는 영부로 드러낸 것은 세상 사람들이 마음이 곧 하늘인줄 알지 못하므로 천주가 쉬임없이 활동하는 마음이라는 점을 알려주기 위해서라고 해석하고 있다(「기타」). 조금 더 쉽게 말하자면 천주는 끊임없이 약동하는 마음으로 내려와 있다는 사실을 가르치기 위하여 궁을(弓乙)을 말했다는 것이다. 궁을이란 약동하는 천주의 기운 자체라고 할 수 있겠다.
귀신이란 것도 나니라라는 천주의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유일신이 되었든 개체신이 되었든 어떤 종류의 신이라도 천주이며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내 마음이 네 마음이라는 천주의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하늘마음과 사람 마음이 하나인줄 알 수 있다. 형이상의 세계에서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해월에게서 알 수 있듯이 형이하의 수많은 세상사와 사물들이 모두 천주(物物天事事天)이므로 또한 천주와 사물이 둘이 아님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천주는 형이하와 형이상을 하나로 꿰뚫는다 하겠다.
수운은 무극대도를 형상화하자면 태극이라 하였다. 약동하는 하나의 기운으로 무극대도는 태극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고 하겠다. 무극이 무형을 강조하기 위함이라면 태극은 무형의 자취를 그려내기 위함이라 하겠다. 사고, 인식, 행위 등은 주체-대상의 이원성 위에서 이루어진다. 극을 전제로 해서만 성립되는 것이다. 모든 운동이 이원성을 전제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시공간이 전제되지 않는 연속세계에서는 움직임 혹은 운동은 불가능하다. 수운은 무극이라는 개념으로 일체의 사유, 말, 행동이 정지되는 세계를 형용하고자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수운이 만난 천주는 모든 상대적 운동과 존재들로 하여금 존재케 하는 마지막 근원의 심연이라 하겠다. 지금까지의 모든 생각, 논리, 사고가 끝나는 곳이라 하겠다. 무수한 이름과 의미를 부여할 수는 있지만 그 존재 혹은 경지는 어떤 이름이나 의미로부터도 자유롭다고 하겠다. 그렇기 때문에 수운은 무극대도라는 개념을 원용했다고 할 수 있다. 달리 말하자면 인간이 어떤 의미를 부여하던지 그 존재는 그로부터 무관하다고 하겠다. 그 자리는 선악으로부터도 자유롭다.
천주의 자리는 어떤 장애로부터도 자유롭다. 자유롭다는 것은 걸림이 없다는 뜻이다. 걸림이 없다는 것은 매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천주는 어디에도 걸리지 아니하고 매이지 않는다. 지공무사하고 불택선악하면서 동시에 일체의 사유활동, 언어활동, 행동의 바탕인 그 자리를 왕양명은적연부동(寂然不動)하면서 감이수통(感而遂通)(『王陽明全集』, 58; 122)한다고 묘사하였다. 사람의 본체이면서 동시에 우주만물의 본체인 그 자리는 고요하여 어떤 움직임도 없지만 대상이 그 앞에 오게 되면 분명하게 느끼어 정확하게 안다. 어떤 움직임이 없는 완전 고요에 들 때 비로소 어떤 대상이라도 정확하게 느끼어 완전히 통할 수 있는 것이다. 고요하지 않고 흔들린다면 일체가 일그러져 느껴 통하지 못할 것이다. 지공무사(至公無私)하고 불택선악한 그 자리에 이른 사람을 수운은 유학의 용어를 빌려 군자라 불렀다. 군자란 마음 본체와 천리가 일체화된 존재라 할 수 있다. 수운은 한시도 쉬임없이 예외 없이 작용하는 천주를 지기(至氣), 혼원일기(混元一氣)라는 개념으로 표현하였다. 즉 기라는 것은 허령이 창창하여 일에 간섭하지 아니함이 없고 일에 명령하지 아니 함이 없으나, 그러나 모양이 있는 것 같으나 형상하기 어렵고 들리는듯하나 보기는 어려우니, 이것은 또한 혼원한 한 기운(「논학문」)이라 하였다. 여기에서 수운은 천주를 밖으로 찾아 헤매는 자들의 어리석음을 명료하게 보여준다. 천주는 종이 위에 그려진 영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정성을 다하여 영부 안의 정성에 통한 마음에 있다고 하겠다. 쉬지 않는 천주는 우리의 마음 안에 들어와 있다고 하여 궁을(弓乙)이라고 하는 영부로 그 이치를 밝혔다. 천주는 푸른 창공에 있는 신선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안에서 약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동학의 천주는 인간의 공포심과 콤플렉스가 만들어 낸 신도 아니며, 저 높은 푸른 창공에서 우주 만유를 주재하는 유일신도 아니다. 동학의 천주는 천지인을 하나로 꿰뚫는 천도이자, 본성이자, 정성이자, 근본이치이다. 수운은 무궁한 창조성 자체를 가서 돌아오지 아니함이 없다(無往不復)는 개념과 무위이화(無爲而化)의 개념으로 표현했으며, 해월은 인간생활과 우주만물 속에 살아 계신 천주를 말했으며, 의암은 천주는 매매사사에 간섭하고, 명령하고, 바로 보고, 바로 들으므로 언제나 올바르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라고 하였다. 끊임없이 솟아나는 창조성 자체로서의 천주가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또한 동학의 주장이다. 이때 천주는 정성(誠), 천심, 생명으로 이해된다. 의암은 무형의 천주와 활동하는 천주를 성과 심으로 내재화시킨다.
라고 분석 연구 결과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통하여 동학의 천주의 새로운 모습과 그 의미를 확장시켰다고 볼 수 있다.
이 보다 훨씬 앞선 시기에 가장 새로운 해석 중에 하나는, 윤노빈의 ‘신생철학(1974.)’에 기술된 저자의 해석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서구의 요소론적 세계관을 집중적으로 비판하고 새로운 세계관의 도출가능성울 동학에서 찾을 수 있다는 판단과 경주에서의 동학사상의 출발은 서구의 밀레토스의 로고스적 혁명에 버금가는 것이라 격찬하고 있다. 그리고 서구적이거나 기독교적인 신을 처음으로 한울님이라고 지칭하고 있다. 이것은 세계 역사상 동서양을 막론하고 처음 일어난 대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머리말에 실린 주기도문에 해단되는 마태복음 6잔 9-12절 까지의 인용문에서부터 시작하여 전 문장에서 ‘하나님’ 대신 ‘한울님’을 사용하고 있다. 이렇게 인식하고 있는 저자는 한울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하고 있었는가를 독립된 장으로 기술한 ‘한울님’(PP.225 -252.)에서 알아보자.
‘神은 있는 것(存在)이 아니라 살아 계시는 것(生存)이다. 神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生存하는 것 즉 行爲하는 것으로서 파악되어야 한다. 神은 있는 것이 아니라 行爲한다. 행위하는 것이 神이다. 신의 존재증명이라는 문제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 오로지 神의 行爲證明이 문제로서 성립하며 또 그 증명도 확실하며 명백하게 성립하며 납득된다. ’있는 神‘은 행위하는 神이 아니라 죽은 神이다. 神을 存在로서 파악하려던 온갖 시도들은 신의 존재를 증명한다기 보다는 살아 계신 神을 죽이려는 시도들이었다. 펜끝으로는 죽은 神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을런지 모르나 神의 行爲를 증명할 수는 없다. 오로지 사람의 행위로써만 증명될 수 있다. 신의 존재에 관한 증명은 종이나 책 속에서 잉크의 흔적으로써 계속될 수 있으나 신의 행위에 관한 증명은 오로지 사람의 행위로써만 증명될 수 있다’. 라고 좀 난해한 논리적 진술에다 강조를 위한 반복 설명은 이해를 어렵게도 만들고 있지만 신은 ‘살아 계신 존재’이어야 한다고 전제한 다음
神은 살아 계신 분이다.
神은 行爲다.
神은 하는 님이다.(중략.)
하는님의 행위는 사람의 행위로써 증명된다.
하는님의 행위는 악마의 존재를 打倒함으로써 증명된다.
하는님의 行爲는 行僞를 타도한다.---行僞늕 生存的 行爲를 방해하며 行爲를 파괴한다.
라고 단정하고 선언하고 있다. 이 ‘하는 님’에 대한 해석과 주장은 김지하도 같은 견해를 갖고 있다. 이러한 해석은 오늘날의 종교학계의 흐름의 하나인 종교를,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세계를 창출하는데 적극적으로 참여하려는 행태(行態)와 기능적 측면에서의 해석과 정의에 답을 제시한 것이라고 보여진다.
‘ 참다운 종교는 위안의 종교가 아니다. 神은 인간을 慰問하기를 원하지 않고 인간을 해방하고자 하다. 인간을 해방 하는님 이 바로 神이기 때문이다.(중략) 신적 행위는 인간을 우상으로부터 해방 ’하는님‘이다. (중략) 하는님의 행위를 증명함은 神을 우상으로부터 해방하는 인간의 神的 行爲로써, 인간을 우상으로부터 해방 ’하는님‘의 神的 行爲로써 증명된다.
한울님 하신말씀 開闢後 五萬年에
네가 또한 첨이로다 나도 또한 開闢以後
勞而無功 하다가서 너를 만나 成功하니
나도 成功 너도 得意 너희 집안 運數로다 / 용담가.
이리하여 神의 存在가 아니라, 하는님 즉 行爲로서의 神, 神的 行爲가 명백히 증명되었다. 이제 하는님은 기지개를 펴고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그러면 살아 있는 神으로서의 하는님은 누구이며, 하는님의 行爲가 이루어지고 있는 장소는 어디인가?’ 라고 모든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마지막 질문을 우리를 향해 던지고 있다. 그리고 계속해서 저자는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솟구쳐 오르는 충격적이고 확신에 찬 말을 이어나가고 있다.
‘하는님은 한울님이다. 인간을 해방하는 것은 하나의 추상적인 신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
구체적 인간이다. 인간을 해방 하는님은 바로 한울님으로서의 당신이며 한울님으로서의 우리이다. 하는님의 生存은 한 울속에서의 살아 있음이며 하는님의 行爲는 한 울속에서의 行爲이다. 한 울속에서의 살아 있는 자들, 한 울속에서의 행위하는 자들이란 오래전부터 사람이라고 불러왔다. 한울 속에 사람이 있으며 한울 속에 사람이 있는 것은 오직 사람뿐이다. 한울은 사람이며 사람은 한울이다. 사람은 사람들 즉 한울 속에 생존한다.(중략) 사람이 사람의 집이다. 사람이 하나의 동물로서 취급되는 한 그의 畜舍인 草家, 기와집, 스라브뚜껑아래서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이 生存하는 거처가 아니다. 사람生命의 거처는 人間 밖에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람들이 사람의 한울이다.
‘사람이 바로 한울덩어리오 한울이 바로 만물의 정기니라. 사람이 바로 한울이오 한울이 바로 사람이니, 사람 밖에 한울 없고 한울 밖에 사람없다. / 도종법경 중 天, 地, 人, 鬼神, 陰陽; 人是天塊 天是萬物之精也-----人是天天是人 人外無天天外無人. 이 인용되었지만 다음 법설을 이해하면 더욱 선명해 질 수 있다. (心在何方 在於天 天在何方 在於心故 心卽天天卽心 心外無天天外無心 天與心本無二物 心天相合 方可謂侍定知 心天相違則 人皆曰侍天主 吾不謂侍天主也)
‘삶이 곧 한울이니 사람섬기기를 한울같이 하라’ / 待人接物 ‘人是天 事人如天’
한울은 큰울이며 큰 울은 우리다. 우리가 한울이다. 우리는 統一體(whole)이다. 여기서 統一體란 靜物的 全體와 구별된 生存的 全體를 뜻한다. 라고 하여 한울과 한울님에 대한 해석을 생소하지만 새롭게 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하고 이해하는 것이 바른 해석에 접근할 수 있는 첩경일 수 있다.
‘하는님의 行爲가 이루어 지는 場所는 한울나라다. 한울나라는 어디에 있을까? 番地도 집도 나무도 물도 없는 곳인가? 아니다. 한울나라는 한울 즉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다. 한울님 즉 우리가 앉아 있는 하늘이 한울님의 倚子이며, 한울님 즉 우리가 디디고 있는 땅이 한울님의 발판이다.’ 라고 하는 저자의 해석은, 동학을 넘어 세계사상과 문화의 중심이 기독사상의 바탕인 성경의 구절에서의 하나님을 모두 한울님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것은 수운의 한울님을 세계의 중심에 서게 했고 모든 신의 이름을 일반화하고 보편화했다.
‘만일 네가 네 형제를 보았다면 너는 네 한울님을 본 것이다.’ /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너의 한울님은 너의 형제다. 너의 형제가 너의 한울님이다. 너의 한울님을 한울님으로 섬겨라. 너의 한울님은 너의 이웃사람이다. 너의 이웃사람이 너의 한울님이다. 너의 이웃사람을 한울님으로 모셔라. 너의 심정을 다하고 너의 영혼을 다하고 너의 생각을 다하여 너의 主 한울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 계명도 그것과 똑같은 것이다. 너자신 처럼 너의 이웃을 사랑하라. / 마태복음 22장 37 - 40절.
註 44; 新生哲學; 尹 老彬 ; 第一文化社. 부산. 1974. 윤노빈(1941)은 강원도 원주 출생으로 1964년에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1967년에 동 대학원 철학 졸업, 부산대 철학과 부교수로 있다가 1970년 독일 프랑크프르트 대학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83년에 가족과 함께 자진 월북하였다. 월북 후 북한에서 ‘지성인의 각성’의 저술과 남한에 대한 방송에서 선전문 작성활동을 하여 그 공로로 북한 국기훈장을 1급을 받은 바 있다. 윤교수는 “新生哲學”에서 헤겔의 변증법, 스피노자의 윤리학, 베르그송의 생명철학을 통해 궁극적으로 수운최제우의 동학에 이른다고 파지했고 동학을 통하여 설계한 한국적 생명철학의 수립을 꿈꾸고 있었다. “新生哲學”에 담겨진 그의 사상의 순례를 숙독해보면 그의 월북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시인 김지하는 윤노빈을 친구이자 스승이라고 말하고 있다. /중앙일보 2003년 6월 12일 판, 22면 윤노빈을 아십니까? 란 칼럼 기사를 참조바람.
윤노빈의 ‘하는님’과 같은 사상적 바탕으로 한울님을 이해하고 있는, 윤노빈을 친구이자 스승이라고 말한, 김지하의 ‘일하는 한울님’(김지하 이야기 모음『밥』중에서 1994)이란 글에서 구체적이고 분명하게 ‘한울님’을 ‘하는님’이라 하는 그 의미를 밝히고 있다. ‘일하는 한울님’을 이해하기 쉽도록 요약해보면, 김지하의 하는님에 대한 해석을 통해 하느님이 된 까닭과 진정한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일하는 한울님.’ 한울님은 일하는 분입니다. 일하는 분이 한울님입니다. 한울님이 천지를 창조했다는 것은 천지가 개벽됐다는 말이며, 천지가 개벽됐다는 말은―유식한 문자로 하면―무극(無極) 속에서 태극(太極)이 움직였다는 말이올시다. 음양의 주체는 하나인 한울님입니다. 하나이고 태극인 한울이 둘이고 음양인 천지를 창조했다는 말입니다. 즉, 운동이며 노동이며 순환을 의미하는 창조를 했다는 말이올시다.
'일하는 한울님' '움직이는 한울님' '운동하는 한울님' '노동하는 한울님' '창조하는 한울님' 그리고 '창조적으로 순환하는 한울님'―바로 그 한울님이 천지와 세상의 주체입니다. 따라서 한울님은 일을 하시는 분이며 일하는 한울님이 이 천지의 주체입니다. 잠시라도 쉬지 않고 간단없이 변화하며 쉴 새 없이 천변만화하는 운동 속에서 끊임없이 창조하고 일하는 그 주체가 한울님인 것입니다. 한울님은 간단없이 변화하는, 끊임없이 쉴 새 없이 천변만화하는 운동 속에서 일하고 특히 창조적으로 일하는 분을 말합니다.
이 세상의 근원적인 생명은 쉴 새 없이 변화․운동하며 중생을 통해서, 생명 가진 모든 것을 통해서 시간과 공간 속에서 확대하고 지속하면서 움직이며 일합니다. 따라서 '사람이 바로 한울님'이라고 할 때, 그것은 사람과 한울님이 곧 일하는 존재라는 그 사실을 통해서 그리 되는 것입니다.
동학의 2대 교주인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 선생은 도망 다니거나 동학의 진리를 가르치거나 하면서도 끊임없이 일을 했습니다. 40여 년에 걸친 도피의 생활 가운데, 그러한 진리를 가르치고 동학을 선포하고 종단을 조직하고 일상적인 생활을 하는 시간 이외에 자기의 조그마한 여가가 날 때도 그는 조금도 쉬지 않고 일을 했습니다. 새끼를 꼬거나 짚신을 삼거나 기타 여러 가지 일들을 했습니다. 만약 한자리에 앉아서 짚신을 다 삼았는데 새끼나 짚이 남아 있지 않을 경우에는, 다시 풀어서 또 새끼를 꼬거나 짚신을 삼고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제자들은 "좀 쉬시지 않고 무엇 때문에 그렇게 끊임없이 몸을 움직이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최해월 선생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했습니다. "한울님도 쉬지 않는데, 사람이 한울님이 주는 밥을 먹으면서 손을 놀린다면 한울님이 노하신다."
아시다시피 동학의 기본 진리는 '인내천(人乃天)' 즉 '사람이 바로 한울님'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바로 한울님이 되는 것은, '일하는 한울님의 그 일을 사람이 한다'는 바로 그 점을 통해서 그리 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일을 통해서 사람은 한울님이 됩니다. 일을 통해서 사람은 바로 한울님인 것입니다. 일을 통해서 한울님은 바로 사람 속에서 일하는 것입니다. 일하는 사람만이 가장 한울님다운 한울님이며, 일을 하는 사람만이 가장 생명의 본성에 알맞은 생명활동을 하는 생명주체입니다. 일이야말로 가장 한울님다운 존재규정이며, 가장 생명다운 생명의 활동규정입니다. 한울님을 우리가 모신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 안에 한울님을 모신다는 것은 일하는 한울님을, 우리 스스로 일함으로써 한울님의 일을 모시는 것을 말합니다. 즉, 일 속에서 일을 일답게 살아 있는, 일함 속에 살아 있는 형태로 모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생명을 우리 안에 모시고 있다는 것은 생명의 근원적인 본성대로 쉴 새 없이 일하고 쉴 새 없이 천변만화함으로써 살아 움직이는 모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은 일을 통해서 한울님이며 한울님은 일을 통해서 사람인 것입니다. "사람 섬기기를 한울님같이 하라"는 것은 일하는 사람 섬기기를, 끊임없이 일하고 창조하는 한울님같이 일 속에서 살아 움직이며 일하는 사람을 섬기라는 말이올시다.
앞에서, 우리는 1920년대의 이돈화의 한울과 한울님에 대한 해석으로 출발하여 윤노빈과 김지하의 새로운 해석까지 살펴보았다. 한울과 한울님에 대한 해석에 대한 연구는, 교단 내외에서 꾸준히 연구되어 수차례 발표된 바가 있고, 일부는 하나의 해석을 중심으로 정착되어 가는 경향이 뚜렷하게 들어나고 있으나 교단의 공식적 입장과는 비교 연구된 바가 없기 때문에 그 귀결이 궁금하다. 한울님은 동경대전에 ‘天主’에 대한 한글표기이기 때문에 이로 인한 오해를 살펴보기로 한다. 기독교계의 대표적인 기독사상의 연구자인 윤성범, 유동식을 비롯하여 몇몇 연구자들을 직간접으로 수운의 사상형성과정에서 기독교 사상이 수용되었고, 그것을 증명해주는 것이 ‘天主’라 호칭되는 신앙의 대상을, 기독교에서 차용한 것이라는 주장과 수운이 득도과정에서 받았다는 天書가 “天主實義”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天主’는 동경대전에 15회가 나오는 표기로, 기독교의 천주와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미 앞에서 천주란 단어의 생성과 의미를 장황하리만치 설명했기 때문에 생략하고, 동학 경전에 나타난 ‘天主’에 대해서 설명하기로 한다. 수운은 論學文에서 ‘님(主)이라고 하는 것은 부모님을 모시는 것과 같은 모심을 받는 존재에 대한 존칭과 같은 것이다.(侍者 內有神靈 外有氣化 一世之人 各知不移者也 主者 稱其尊而與父母同事者也)’ 라고 주문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분명히 하고 있다. 가톨릭에서 부르는 천주가 갖고 있는 유일이며 창조주라는 주인이란 의미가 없다. 중국에서 천주란 말아 처음으로 만들어져 우리나라로 유입되어 사용되고 있지만, 지금의 중국에서는 ‘天主’ 대신 ‘上帝’로 불리어지고 있다.
註 45; 天主가 기술된 글과 회수. 布德文 (3) 天主造化, 天主之意, 天主者. 論學文((9) 天主之恩, 天主敎卽, 學稱天主, 天主之端, 天主之敎, 學非天主, 天主之字, 敬天主也, 在於天主. 本 呪文(3) 侍天主 2회, 爲天主 1회.
註 46; 경전의 전체적인 맥락으로 보아 天主의 기능이 至氣와 동일한 것이라 판단됨으로, 降靈之文에서의 지기에 대한 해설을 참조하기 바람 曰至者 極焉之爲至 氣者虛靈蒼蒼 無事不涉 無事不命 然而如形而難狀 如聞而難見 是亦渾元之一氣也 / 論學文
7. 맺음말.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사전 23 하늘항목에서는 ‘그러므로 한울이란 사방 곧 끝(末)이 없는 창공. 일월이 교차하고 성신(星辰)이 운행하며 만물이 자생하고 만사가 발생하는 천지 사방과 상하 좌우를 뜻하는 공간상의 ‘한울’이다. <울>은 우리(吾等)란 뜻도 있다. 그러므로 한울은 큰 우리란 말이니 천지만물과 나, 천지만물과 우리는 일체감을 가진다는 의미가 내재하여 있다. 전자는 현상으로 본 하늘이요, 후자는 덕성으로 본 하늘이다. ‘한울’의 한은 또 같다는(同一) 뜻이 있다. 그러므로 한울이란 같은 울타리 즉 <한울타리>라는 뜻을 가진다. 이것은 기능면에서의 하늘의 공동체의식을 지칭하고 있다. 또 옛날에는 하늘을 환국(桓國)이라 하였는데, 환(桓)은 환하다, 밝다는 뜻으로 광명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한울이란 <광명이 빛나는 온 누리>라는 뜻을 간직하고 있다.
한울이념에는 너와 나의 구별이 없고, 박애, 평등, 효제, 충서(忠恕)는 크고 밝은 한울타리라는 관념 속에서 용해된다. 그리고 한울이념은 중국의 천인합일(天人合一)사상이 일보 발전하여 인내천을 강조하고 있다. 성리학이 도입된 이후 천인합일의 이법천 관념이 지배적이었다. 사람이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본성을 천리로 순선(純善)한 것이나 인욕(人慾)의 교폐(交蔽)로 더렵혀진 것을 경(敬)과 성(誠)을 다하여 인욕을 제거하여 본성으로 되돌아가면, 성인이 되는데 이때 천과 인은 합일된다는 것이다.’
학계에서 지금까지 연구 발표된 신관과 교단내의 연구자들의 신관은 상당부분에서 해석과 신관을 이해하는 시각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한울님에 대한 학계의 연구 결과와 교단 연구자의 결과를 비교해 보면,
최동희는 최제우의 한울사상은 이러한 전통적인 ‘天 思想’을 새로운 맥락 속에서 발전시킨 것이다 水雲과 海月의 神觀을 汎神觀에다 하느님의 攝理에 따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고 했다.(PP. 751-754.) 이에 반하여 金敬宰는 ‘韓國思想’ 12호 崔水雲 硏究라는 특집호에 게재된 ‘崔水雲의 神槪念’에서 동학의 신관을 汎在神觀이라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인류고등종교에서의 신관의 발전은 自然神觀 - 有神觀(一神觀) -汎神觀 - 汎在神觀(進化神論)으로 진화하는 것으로 서구의 신관보다 앞섰다고 평가했다. 다른 한 편으로는 ‘水雲’의 神觀은 至氣一元論 自然觀이다. 라고도 하고 있다. 장영민은 수운의 신관은 범신관 속에 일신(一神)이 포함된 신관이라고 할 수 있다. 즉,범신(汎神)이면서 일신(一神)이요, 일신이면서 범신이다. 이러한 관법(觀法)이 곧 인내천의 관법이다.이 신관은 더 나아가 ‘동학이 이전의 다른 신앙운동과는 달리 우리나라 역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기게 된 이유는 한울님이란 신앙의 구심체, 강력한 신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높이 평가하고 있다 또는 어떤 학자는 동학의 천주관을 초월적 내재론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라 하기도 했다.
윤노빈은 전혀 다른 시각으로 한울님을 ‘참다운 종교는 위안의 종교가 아니다. 神은 인간을 慰問하기를 원하지 않고 인간을 해방하고자 하다. 인간을 해방 하는님 이 바로 神이기 때문이다. 라 하여 하는님으로 해석하고 있다. ‘하는님은 한울님이다. 인간을 해방하는 것은 하나의 추상적인 신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 구체적 인간이다. 인간을 해방 하는님은 바로 한울님으로서의 당신이며 한울님으로서의 우리이다. 하는님의 生存은 한 울속에서의 살아 있음이며 하는님의 行爲는 한 울 속에서의 行爲이다. 라고 새로운 해석을 함으로서 다시 한 번 돌아 볼 필요가 있다.
이돈화는 신인철학에서는 ‘한울’은 汎神觀的이며 萬有神觀으로 解釋할 수 있다고 했고 人乃天要義에서는 人乃天은 宇宙萬有를 한가지로 神의 自己創造的 表現으로 본 点에서 汎神敎의 色彩를 가젓스나 終에 사람性이 進化的 理法에 由하야 萬有汎神性을 사람性自體의 中에 包容하면서 宇宙 最高神經末梢의 統制的 靈長으로 본 点에서 汎神觀的 一神敎이라 할 수 있다. 라고 결론을 내렸다.
교단이 지금 제시하고 있는 천도교의 신관은 ‘초월과 내재또는인격성과 자연성을 모두 포함하는 신관이며, 동시에 사람이 한울님을 모시고 있으니 사람이 이에 한울님’이라는 시천주(侍天主)를 근간으로 하는인내천의 새로운 신관’이다. 라고 하고 있어 확실한 신관 정립이 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
민족적인 신인 한울님은, 수운의 후천개벽사상이 가미되어 강화되고 확장되었다고 할 수 있다. 교단에서 한울님과 하느님의 논쟁은, 단순히 신앙의 대상에 대한 옳고 그름이 아니라, 한울님을 공식용어로 수용한, 천도교 시대의 근대사에를 빛낸 천도교의 역사를 전부를 부인하는 것으로, 이들은 천도교인이 아니므로 그들이 원하는 동학시대나 하느님을 전통신으로 숭배하는 교단을 찾아가거나 그런 종교를 만들어 종교생활을 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합당한 결론이다. 천도교는 한울님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울님을 모시는 것이 천도교신앙이고 侍天主의 신앙을 하는 교단이 천도교 교단이다. 한울님은 어원학적으로나 담겨진 의미와 사상으로, 천도교의 교리를 전부 담을 수 있는 용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오랜 역사 속에서 기독교, 불교, 유교, 이슬람의 종교들이 겪고 있는 아픔은, 근본주의 또는 원리주의자들과의 싸움이다. 이 들 종교들의 내부적인 문제를 어렵게 하는 근본주의 자들은 교리해석에 있어 시대의 변화와 사회가 처한 상황에 따르는 변화와 발전적 해석을 막고 있어, 교단을 망치고 있다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판단이다. 기독교가 근본주의자들을 말할 때, 經典盲信(bibliolatry)자 들이라 하고, 천주교에선 경전을 임의로 해석할 수 없게 제약하고 있는 것을 無謬之權(infallibility)라고 한다. 이와 같이 무조건 경전을 중시하는 것은, 순수성의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 있으나 경전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수정을 통하여 정착되고 있는가를 모르기 때문에 오는 오판인 것이다. 천도교도 근래에 대두되었던 ‘한울님은 하느님이어야 한다.’ 고 논쟁을 벌이고 있는 것은, 천도교의 중흥을 천도교의 근본주의자들이 망치고 있는 것이다.
용담유사에 판각된 ‘님’은 ‘하님’의 바른 표기를 잘못 판각한 것이며, 담긴 의미도 天壤之差임을 어문학적으로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천도교에서 하느님을 주장하는 무리들은 근본주의자라고 지칭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필자가 처음이다.
후천개벽의 핵심은 다시개벽이며 개벽의 선두주자는 신인간으로, 후천의 시대가 요구하는 시대로, 사람과 세상을 이끌고 나아가야 하는데 이미 변한 것을 수용하지 못하거나 변화하는 것을 수용하지 못한다면, 수운이 선택한 후천의 세상을 이룩할 수는 없다.
참고문헌(전부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