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일 년 3
열일곱, 익을 대로 익어 터질 것 같은 가슴으로
바닷바람을 맞으면서 세월을 보내고 있던 희수에게
드디어 '운명'이 다가온 것이었다.
희수는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서둘러 목욕을하였다.
무슨 일일까.
목욕을 하고 나서 어디 신당이라도간단 말인가?
아니면 다른 일이 있는 것일까?
갑자기 목욕은 웬 목욕이람.
목욕을 마치고 방으로 들어가자 어머니는
어디서구했는지 깨끗한 치마 저고리 한 벌을 내놓았다.
한번도 보지 못했던 속곳들도 잘 개켜져 있었다.
"입그라."
"무슨 일이어요, 어머니?"
"가면 알어. 이걸 입고 따라오니라."
희수는 어머니의 재촉에 서둘러 새 옷으로 갈아입고
어머니를 따라나섰다.
벌써 해가 바다 아래로 가라앉아
서쪽 하늘과바다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토담 밑에 곱게 피어난봉숭아가
한껏 멋을 부리고 있었다.
희수가 간 곳은
일 년에 두어 번 손님이 찾아올까말까 한 주막이었다.
희수는 어머니를 따라 뒷문으로 들어가
별채 마당으로 갔다.
마당에는 친구 명옥이도 제 어머니를따라 와 있었다.
"어머, 희수야. 너 여기 웬일이여?"
"몰라, 엄마 따라서 왔어."
"큭큭큭!"
명옥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웃었다.
명옥은 무슨까닭인지 이미 알고 있다는 눈치였다.
"무슨 일인데?"
"쉿!"
명옥이 손가락을 세우면서 희수의 말을 막았다.
이윽고 주모가 나타나더니
희수의 어머니와 명옥의어머니를 데리고
별채 쪽으로 사라졌다.
어른들이 모습을 감추자마자 명옥이 입을 열었다.
"너 오늘 머리 얹는구마."
"무슨 말인데?"
"바보야. 객사에 든 남자들 말이여.
남정네들이있지라."
"그래? 그런데?"
"그런데가 뭐여? 남자 씨를 받아야제.
우리동네에는 남정네가 없으니
지나가는 나그네 씨라도받아야지라.
너희 엄마가 벌써 주모한테말해놨었다구.
오늘 밤 우리는 저쪽 별채에 있는남자들하고 잔단 말이여."
"뭐여?"
"놀라긴? 남자가 뭐 짐승이디야?"
희수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말로만 들어왔던 남자를이제 보게 된 것이다.
이따금 주막에 들른 남자들을 본 적이 있긴 했지만
이렇게 성숙해서 보기는처음이었다.
그것도 같이 잠을 자야 한다니 뭐가 뭔지알 수 없었다
. 그래서 어머니는 난데없이 목욕을시키고
새 옷을 입혔던 것이었다.
희수는 숨이 가빠졌다.
"너 떠는구나. 계집애, 내숭은? 아무것도 아니여.
엄마가 그러는데 겁낼 거 없대.
오히려 좋은 거래,계집애야."
얼마 지나지 않아서 주모가 다시 나타났다.
그러고는 희수와 명옥에게 방으로 들어가 있으라고했다.
희수와 명옥은 주모가 가리킨 방으로 들어갔다.
"너, 잘해야 하니라."
안심이 안 되는 듯 어머니가 걱정스런 얼굴로말했다.
"어머니, 나 무서워요."
"무섭긴. 엄마도 이렇게 해서 너를 낳았다.
너도아기를 가져야 돼여.
우리 해사 마을에서는 이렇게하지 않으면
아이조차 갖지 못한단 걸 알고 있잖는가.
처녀로 늙어 죽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 세상에서이것이 첫 남자이고 마지막 남자라고 여기그라.
더이상 남자는 없다 이 말이구마."
어머니는 밖으로 나갔다.
창문에 땅거미가 스물스물 기어오고 있었다.
어디선가 닭이 때늦은 울음을 길게 뽑아내고 있었다.
"명옥아, 이리 따라 오그라."
주모는 명옥을 먼저 데리고 나갔다.
희수는 오들오들 떨면서 방에 혼자 남아 있었다.
"희수야."
주모는 이번엔 희수를 불렀다.
희수는 벌떡일어났다.
현기증으로 몸이 비틀거렸다.
"이리 따라 오그라."
희수는 주모를 따라 뒷채에 있는 방문 앞에 가섰다.
방문을 연 주모는 희수를 방 안으로밀어넣었다.
방 안에는 용모가 수려하고 점잖은 선비가 앉아있었다.
희수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하룻밤 만에끝날 인연이라는 걸 알면서도
희수는 가슴 속에 그선비의 모습을 깊이 새기고 있었다.
이튿날 토정 일행이 해사를 떠나고 나자,
희수는일도 하지 못하고 시름시름 앓았다.
하룻밤 쌓은 정이 깊은 그리움이 되어
마침내 병이 되었던 것이다.
마냥즐겁게 뛰어놀고 일하던 장난꾸러기 처녀 희수는
어느새 그리움에 애간장을 태우는 여인으로
성숙하게되었던 것이다.
"달아
님께 아뢰어다오
서방 정토까지 비치어
아뢰어다오
님 곁으로 가기를 손 모아 비는
이 몸이 있다고 아뢰어다오
아으, 이 몸 버려두고
먼저 대원(大願) 이루시오면
어이하랴
아으 어이하랴"
희수는 날이면 날마다 눈물과 한숨으로 보냈다.
같은 밤에 같은 일을 겪은 명옥은
그런 희수를안타까워했다.
그런다고 어찌 할 방도가 생기는 것도아닌데
그러면 어쩌냐며 함께 눈물을 흘렸다.
희수의 상사 증세는 매달 찾아오던
달거리가없으면서부터 점점 더 심해졌다.
희수는 매일 실성한여인처럼 넋을 놓고 지냈다.
그러면서도 열 달이 차자희수는 아이를 낳았다.
사내아이였다.
명옥은 하루 늦게 아이를 낳았다.
계집아이였다.
희수는 아이에게 규철(圭澈)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토정이 일러준 이름이었다.
아이에게 정을 붙인희수는병세가 많이 나아졌다.
일도 찾아다니고 마을사람들과 어울리기도 했다.
그러나 아이가 두 살 나던 해에 희수는
아이를동냥승에게 붙여 해사에서 내보냈다.
음기가 센마을에서 요절하는 것을 피하려면
어쩔 수 없는일이었다.
며칠 뒤 희수도 해사 마을을 떠났다.
그 선비,이지함을 찾기 위해서였다.
찾아본들, 희수를 알아볼리도 없건만,
그저 얼굴이라도 한번 보아야만
살아갈기력을 찾을 것 같아서였다.
그저 멀리서 바라보며 살 수만 있어도
희수는 더 바랄 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희수는 무작정 해사를 떠났다.
희수는 이 마을 저 마을 떠돌아다니면서
잡일도거들고 장사도 해가면서 이지함을 찾아다녔다.
그렇다고 이지함의 성명을 함부로 입에 올리며 찾지는않았다.
혹여라도 자신이 찾아다니는 일이 그 선비에게 누가될까봐
저어한 것이었다.
그래서 이지함을 찾는 일이 더욱더 힘들었다.
그렇게 떠돌던 끝에 희수는 마침내
삼개나루에서 토정을 찾았다.
그러나 감히 토정에게 가까이 가지는 못했다.
희수는 동막골 새우젓 장수들 틈에 끼어
일손을거들고, 바느질을 하면서 매일같이 토정을기웃거렸다.
그리고 먼 발치서라도 토정의 얼굴을한번이라도
꼭 보아야만 돌아갔다.
그 뒤 토정이 포천 현감으로 제수되자
희수는포천까지 따라갔다.
그러나 언제나 토정에게 가까이가지는 못했다.
포천에서 희수는 굶기를 밥먹듯이 했다.
그러나백성들 문제로 노심초사하는 토정의 모습을
한번보기라도 하면 그런 고통쯤은 말끔히 잊을 수 있었다.
토정이 포천에서 일을 마저 마치지 못하고
조정에송환되었을 때에는
정한수를 떠놓고 무사를 비는기도를 간절히 올리기도 하였다.
그 뒤 토정이 금강산을 다녀와
임진 방비차 팔도를주유할 때에도
그림자처럼 토정을 따라다녔다.
그러다가 토정이 어디론가 은둔하면서
그만 토정을놓치고 말았다.
다시 토정을 찾아 전국을 헤매며 떠돌이 생활을하던 희수는
마침내 병을 얻었다.
그러면서도 토정찾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다.
힘겹게 아산현까지흘러들어온 희수는
주막에서 허드렛일을 거들면서
밥술이나 얻어먹기를 청했다.
몸을 잠시 의탁하며 건강이 회복되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토정을 찾아나설 참이었다.
"병든 몸으로 그럴 게 아니라 걸인청에 가보오.
거기 가면 병자들도 쉽게 할 수 있는 일거리도 있고,
밥 먹는 거 하나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오."
"아직은 거지가 아니니 일을 맡겨주세요.
힘 닿는대로 열심히 하겠어요."
"일을 못할까봐 하는 소리가 아니라오.
병자한테힘든 일을 시키기가 민망해서 그러는 게지."
"괜찮아요. 주막일쯤은 거뜬히 할 수 있어요."
희수는 주모에게 사정을 하여 주막에서 일을 보기시작하였다.
그때 주막에 와서 술을 먹고 있던 사람들의 말에
희수 여인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무심결에 들어넘기던 대화 속에서
몽매에도 그리던 이름 석 자가튀어나왔던 것이다.
"우리 현감은 세상에 둘도 없이 어진 분이셔."
"그러게 말이야. 그 어른은 원래 기인으로 유명하신분인데
저렇게 백성을 잘 보살필 줄은 나도몰랐다네."
"나도 그 분이 지은 <토정비결>이라는 책을보았는데
하여튼 그걸 읽으니 살 맛이 절로나더구만."
"아무튼 이지함 어른은 하늘이 낸 분이시네."
주막에서 들려오는 남정네들의 말소리 가운데에서
'이지함'이라는 이름 석 자가 불쑥 튀어나왔던것이다.
희수는 주모에게 넌즈시 이지함 그이가 누구냐고물었다.
"아니 그 유명한 토정 선생도 모르단 말이우?
그이로 말하자면 우리 아산 현감이라는 직분이 너무작아서
도무지 빛이 날 수 없는 큰 인물이라우."
주모가 떠드는 소리를 듣고 있던 주당들이 목청을돋우었다.
"아, 타관에서 오신 손님네야 아실 리 없지.
토정이지함, 그분은 세상일을 훤히 다 꿰뚫고 있어서
무소불능 이르지 못하는 데가 없는 분이라오."
희수는 그 길로 걸인청으로 달려갔다.
마침 그곳에는 사또 이지함이 순시를 나와 있었다.
멀리서 그 모습을 본 순간 수십 년 기다려온 희수의인내는
한꺼번에 무너져내렸다.
희수는 혼미해지는정신을 모두려 안간힘을 쓰며
걸인청으로 들어섰다.
희수가 비칠거리며 들어서는 모습을 보고
토정이달려나와 부축했다.
아, 꿈에서도 그리던 그분이 희수를 달려와 맞은 것이었다.
그분의 그윽한 눈길과마주치는 순간
희수는 그 자리에서 혼절하고 말았던것이다.
토정은 희수 여인의 손을 꼬옥 잡았다.
기구한인연이었다.
"선비님…"
"고생이 많았소. 그렇지 않아도 어딜 갈 때마다
가끔 나를 심상치 않게 바라보는 시선이 있다는 걸
느낀 적이 많았소. 그게 그대일 줄은…"
"선비님…"
"그러지 말고 차라리 모습을 드러냈더라면…"
토정은 눈을 지그시 감고 여인의 사주를 다시열어보았다.
이윽고 토정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대가 나를 찾은 게 이생만은 아니었구료."
"···"
"미안하오. 세세생생 그대에게 눈물만 흘리게하다니."
"예? 무슨 말씀이시온지…"
"이제야 화담 선생님의 뜻을 알아들을 수 있을 것같소.
천안 삼거리에서 선생님은 신라에서 찾아온아내라며
어떤 처녀를 지목하였었소.
그리고두륜산에서 갑자기 해사 마을로 길을 바꾸시길래
어찌그러시나 했었소.
후에 정휴 일행이 우리를 기다려서 그런가 보다했는데
그것만도 아니었구료.
선생님은 벌써 우리일을 알고 있었던 것이오."
"저희 마을에 오시던 적 얘기시옵니까?"
"그렇소. 그대와 인연이 있음을 아시고
그리로인도해주신 것이오.
그대는 먼먼 옛날부터 나를 찾아헤매었소.
이제는 내 곁에 머물면서 편히 쉬시오.
원(願)도 갖지 말고, 원(寃)도 갖지 말고…"
토정은 희수의 손을 따뜻하게 어루만졌다.
그때부터 희수는 걸인청에서 사람들을 돌보는 일을
손수 맡아서 했다.
토정을 만났다고 해서 더 가까이모시는 것도 아니었다.
토정 또한 희수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
다만 자주걸인청에 나가
희수가 하고 있는 일을 돌아다보면서
세세생생 품어 왔을 희수의 그리움을 눅여주었다.
그러다 토정이 과로로 쓰러져 이질에 걸리자
희수는그의 머리맡에서 시중을 들었다.
토정은 그것을말리지 않고 묵묵히 받아들였다.
두 사람의 사연은아무도 알지 못했으나
다들 무슨 깊은 뜻이 있으려니하는 눈길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몇 년 전에 어머니를 잃은 산휘는
이 사실을 나중에 알고는
희수 여인을 어머니처럼
극진히 받들어모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