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브게니 자먀찐(1884~1937)
1884년 레베쟌에서 성직자의 아들로 태어나, 1962년 뻬쩨르부르그 공대 조선학과에 들어갔다. 재학 중 사회민주당에 입당하여 혁명 운동에 참가했다가 체포되어 추방 선고를 받았으나, 몰래 귀환하여 졸업했다. 그와 동시에 작품을 쓰기 시작했는데, 초기의 중·단편 소설은 지방의 궁핍한 생활을 그로테스크한 수법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 중에도 중편 「어느 지방의 이야기」(1913)는 고골, 레미조프의 영향이 농후한 것으로 보이며, 그 풍자적이고 장식적이며 그로테스크한 문체로 새로운 산문을 대표하는 신사실파의 대표가 되었다. 1916년 자먀찐은 쇄빙선 건조를 감독하기 위해 영국에 파견되었다. 이듬해 귀국하여 그 때부터 네쁘 시대까지 여러 잡지의 편집에 관여하는 한편, ‘예술회관’에서 문학 강의와 작품을 통해 ‘세라삐온 형제’그룹에 강한 감화를 주었다.
영국에 체재 중 구상했던 영국의 시골을 무대로 소시민의
위선을 풍자적으로 묘사한 「섬사람들」(1918), 전시 공산주의
하에서 황폐해진 도시 생활을 혈거 시대의 원시생활로 역행하여
풍자한 「동굴」(1922), 스페인의 종교 재판을 빌려 공산주의자의
폭력을 공격하는 희곡 「성 도미니끄의 불」(1922)을 발표하여
프롤레타리아 파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소련의 비평가들은 자먀찐이
현실의 부정적 측면만을 파헤친다고 공격했고, 자먀찐이 프롤레타리아 작가들보다 혁명 정신에 더 가까운 논문을 썼다고 주장하는 것을 불쾌하게 생각했다. 그의 논문은 지조 없고 교활한 자들에 의해 지배받는 허위 예술을 폭로하는 것이었다. ‘진실한 예술은 광인, 은자, 이단자, 몽상가, 반역자, 회의론자에 의해서만 창조될 수 있는 것이지, 능률적이고 충성스러운 기능주의자들에 의해 창조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새로운 문학과 당 문학을 요구하는 프롤레타리아의 시도를 조롱하면서 미래의 러시아 문학에 대해서 우려를 표명했다. 때문에 그는 당으로부터 위험 분자로 지목되고 체포, 박해를 받았다. 그에 대한 공격을 1929년에 극에 달했는데, 그것은 외국에서 출판된 장편 소설 「우리들」(1924) 때문이었다.
「우리들」은 자먀찐이 공산주의 사회가 노예 국가로 타락하는 것에 불안을 느낀 나머지, 그의 사상적·문학적 입장을 분명히 나타낸 작품이다.
이 소설은 먼 미래에 완전히 조직화된 ‘단일 국가’ 도시가 무대이다. 거기서 개인은 완전히 부정되고, 시민은 이름 대신 번호로 불리고, 어떤 대화도 기록되고, 사랑도 정부가 발급하는 쿠폰에 의해서 상대와 일시가 결정되는 이 ‘유토피아’에서 두 남녀가 규정을 어기고 사랑에 빠져 탈출을 시도하지만 실패로 끝나는 것이 이 소설의 골자이다. 이 반유토피아 소설 때문에 자먀찐은 반소 작가라는 규탄을 받았고, 여러 단체로부터 사임을 강요받게 되었다. 그의 전집은 출판이 금지되고, 레스꼬프의 「왼손잡이」(1881)를 극화한 「벼룩」(1926)의 상연은 거부되었다. 그 후 자먀찐은 중편 「홍수」(1929)를 발표했는데, 이는 고골의 「외투」와 도스또옙스끼의 「죄와 벌」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쟈먀찐은 1932년에 고리끼의 도움으로 파리로 이주하였다. 「신의 채찍」을 집필하다가 심장병으로 1937년에 사망했다. 1920년대에 자먀찐의 영향을 받은 작가는 많다. 또한 「우리들」은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오웰의 「1984」등 미래 소설에 영향을 주었다. (www.edurussia.co.kr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