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이번에는 북한 평양(平壤)에서 출토되는 유물, 유적을 통해서 초기 신라(新羅)의 위치에 대해서 알아 보겠습니다.
북한 평양에서 나타나는 유물, 유적에 대해 강단사학계는 낙랑군(樂浪郡)의 유물이다. 민족사학 쪽에서는 낙랑국(樂浪國)의 유물로 팽팽히 맞서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평양 지역에는 학계에서 해석을 못하는 유물과 사료의 내용들이 있습니다. 바로 북한 평양에서 출토되는 흉노, 선비계의 유물입니다.
1. 북한 평양(平壤)의 금제 허리띠
이 유물은 평양 지역에서 출토된 금제 허리띠 유물입니다. 처음 강단사학자들은 낙랑군재평양설을 외치며 이는 한(漢)나라 시대의 황제가 하사한 금제 유물이며 이는 낙랑군(樂浪郡)이 평양에 있다는 증거 라고 주장 했습니다.
그런데 이와 똑 같은 유물이 신장위구르자치구(新疆維吾爾自治區) 카라샤르 지역에서 발견되면서 그 주장은 거짓말이라는 것이 드러나고 지금은 낙랑군(樂浪郡)이 아니라 그냥 삼한(三韓)의 유물이라고 입장을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왜 이런 유물이 평양 지역에서 나오는 지 학계에서는 아직도 모르고 있습니다.
신장위구르자치구(新疆維吾爾自治區)의 위치로 볼때 이 금제 유물은 분명 금(金)과 연관된 흉노나 선비의 위치의 것입니다. 왜 북한 평양 지역에서 이런 흉노의 유물이 발견될까요? 이는 신라가 평양 지역까지 차지 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또한 이 지역의 유물들을 보면 흉노, 선비의 유물과 함께 고조선계 유물이 같이 출토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 할까요?
이는 신라(新羅)의 역사를 보면 알수 있는데 개국한 박혁거세는 고조선을 계승한 북부여계이고 이후의 미추왕은 흉노의 신라계이기 때문에 2가지 형태의 유적이 모두 출토되는 것입니다. 또한 묘의 양식을 보면 낙랑지역의 묘의 형식과 선비족 양식과 거의 똑 같습니다. 좌측은 평양 낙랑구역의 묘이고 우측은 선비족의 묘입니다. 형태나 모양이 같습니다.
또한 흉노, 선비의 대표적인 북방 유목 민족의 유물인 동복(철복)이 평양 지역에서 출토되었습니다. 그런데 같은 흉노계인 김해 가야의 대성동 고분에서도 같은 동복이 출토되었습니다. 즉 이것은 무엇을 의미 할까요? 이 둘은 같은 북방 유목민 계열이라는 것이 아닐까요? 또한 일부 중국계 유물들도 나오는데 이는 신(新)나라 김씨들이 어디에서 이동했는 지를 보면 알 수 있는 내용입니다.
2. 신(新)나라 화천(貨泉)
두번째 유물의 증거가 바로 왕망(王莽) 전(錢)이라고도 불리우는 신나라 화천(貨泉)의 출토 위치입니다. 신나라 화천은 신나라 이동의 표지 유물로서 북한 평양의 일부지역과 대부분은 가야의 위치로 추정되는 한반도 남부와, 제주도, 일본 지역에서 다량 출토되었습니다. 가야 지역에서 화천이 많이 나오는 것은 가야가 1세기 경에 신나라가 멸망 후 가장 먼저 한반도로 이주한 세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출토 위치를 살펴보면 북한 평양 지역에서는 일부 화천이 나오지만 우리가 통설로 알고 있는 신라의 위치인 경주(慶州)나 경상도(慶尙道) 지역에서는 화천이 전혀 나오고 있지 않습니다. 이런 내용은 바로 초기 신라가 경상도(慶尙道)에 있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3. 신라가 평양(平壤)에 있었다는 사료와 남하의 증거
그렇다면 신라가 평양(平壤)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문헌 사료가 있을까요? 네 있습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강단학자들이 전혀 해석을 못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禁人斬伐樹木. 新成平壤州大橋.
〔12년(413)〕 평양주(平壤州)[註 001]에 큰 다리를 새로 만들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실성(實聖) 이사금(尼師今)」
실성 이사금 413년에 평양(平壤)에 큰 다리를 만들었다는 기사 내용입니다. 당시 신라가 경상도 경주에 있었다면 이 기사의 내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 강단학계에서는 이 기사에 다음과 같은 이상한 주석을 달았습니다.
[註 001]"평양주(平壤州): 위치 미상. 평양은 기본적으로 현재의 평양을 지칭한다. 그렇지만 당시 평양은 신라의 영역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 기사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아마도 신라가 견문한 사실을 기록했을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이들의 역사에 대한 이해 수준은 신라는 경상도 = 신라로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이 문구에 대해 전혀 해석을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료의 내용을 보면 413년에 신라는 평양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기록을 통해 신라는 북쪽 경계가 길림의 서북쪽인 '죽령' 과 남쪽으로는 '평양' 지역까지는 차지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북한 평양 지역을 언제 부터 신라(新羅)가 차지 하게 되었을 까요? 북한 평양은 원래 마한(馬韓)의 도읍지였습니다. 하지만 이후에 낙랑국(樂浪國)의 도읍지가 되었고 다시 신라(新羅)가 여기를 차지 한것으로 보입니다. 이와 관련된 기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正月樂浪王崔崇 納穀三百石于海城 先是 崔崇 自樂浪山 載積珍寶而渡海 至馬韓 都王儉城 是檀君 解慕漱丙午冬也
정월에 낙랑왕 최숭이 해성에 곡식 3백석을 바쳤다. 이보다 먼저 최숭은 낙랑산에서 진귀한 보물을 싣고 바다를 건너 마한에 이르러 왕검성에 도읍하였다. 이때는 해모수단군 재위45년 병오(서기전 195)년이었다.
『북부여기』
낙랑국은 평양 지역을 차지 했다가 고구려 대무신왕(무휼)에 의해 공격을 당해 무너지자 이후에 서서히 신라로 편입된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삼국 사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十四年, 髙句麗王無恤, 襲樂浪滅之. 其國人五千來投, 分居六部.
14년(37)에 고구려왕 무휼(無恤)이 낙랑(樂浪)을 습격하여 멸하였다. 그 나라 사람(其國人) 5,000명이 투항해 오니 6부(六部)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신라본기』 「유리(儒理) 이사금(尼師今) 」
기사 원문을 보면 그 국인(其國人) 이라고 하며 군(郡)이 아니라 국(國)이라고 명확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때 부터 낙랑국(樂浪國)의 유민들이 신라에 투항하기 시작했으며 낙랑국(樂浪國), 대방국(帶方國)이 완전히 복속된 것은 기림 이사금 시기로 사료에는 기록 되어 있습니다.
三月, 至牛頭州, 望祭太白山. 樂浪·帶方两國歸服.
〔3년(300)〕 3월에 우두주(牛頭州)에 이르러 태백산(太白山)에서 망제(望祭)를 지냈다. 낙랑(樂浪)과 대방(帶方) 양국(两國)이 항복하여 복속해 왔다.
『신라본기』 「 기림(基臨) 이사금(尼師今) 」
이때를 기점으로 평양 지역은 신라에 완전히 편입되고 그후 413년 실성(實聖) 이사금(尼師今)시기에 평양에 큰 다리를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고구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의 공격으로 신라가 점차 남하하기 시작하였고 결국에 경상도 지역으로 신라가 이동한 것 추정됩니다. 그 사료의 증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八月, 髙句麗攻䧟牛山城.
〔19년(497)〕 8월에 고구려가 우산성(牛山城)을 공격하여 함락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소지(炤知) 마립간(麻立干)」
鎭海縣顯宗九年, 來屬. 恭讓王二年, 置監務. 別號八鎭【一云牛山】.
진해현(鎭海縣)은 현종(顯宗) 9년(1018)에 〈진주목에〉 내속(來屬)하였다. 공양왕(恭讓王) 2년(1390)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별호(別號)는 팔진(八鎭) 【우산(牛山)이라고도 한다.】이다.
『고려사』 「卷五十七 志 卷第十一 地理 二 경상도 진주목 진해현」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497년 소지 마립간 시기에 우산성(牛山城)을 고구려에게 모두 함락 당하게 됩니다. 그런데 고려사의 기록을 보면 우산(牛山)이라는 지명이 경상도에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이것이 평양지역에서 흉노, 선비계의 유물이 나오는 이유와 신라가 길림(吉林)지역에서 경상도(慶尙道)로 이동한 문헌 사료의 기록입니다.
첫댓글 요동에 있던 전기진국을 주도하던 왕검계 (북)진한세력이 일부는 평양에 남고 일부는 경상도로 남하하여 진한6국을 형성하고 후에 혁거세를 거서간으로 옹립하여 신라를 건국했던 바이고, 경주 김씨가 흉노계통인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인 바 위 주장은 매우 타당성이 있어보입니다. 평양은 "초기마한->준왕(한왕)->고구려 대무신왕 점령->진한계 낙랑국->진한계 염사국->진한계 후낙랑과 대방국의 근거지 였던 바 같은 진한계인 신라에 잠시나마 귀복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여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