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건고 야구부를 검색하다가 뜻밖의 글을 얻었습니다.
도광의 시인과 대건고 문예반 태동기에 관한 글인데 태동기 동인이 쓴 귀중한 글입니다.
참고로 저는 문예반 출신은 아닙니다. 다음 어느 카페에서 퍼온 글입니다.
돌아갈 수 없는,
영혼의 고향 태동기(胎動期)
글_조성순
조직에 가입하든지 복권을 사든지 어떤 선택이 우연이라고 생각했던 게 나중에 깨닫고 보니 필연이고 그게 당신 삶의 전부를 뒤바꾸었다면 그건 바로 알 수 없는 숙연이 영향을 미친 것이다. 그래도 우연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필연을 가장하는 신의 솜씨가 빼어나기 때문이리라.
그것도 전공으로 선택한 대학의 학과가 아니라 고등학교 때 잠시 몸을 담았던 동아리가 삶의 여로를 밝히고 끊임없이 작용을 한다면 당신은 그 인연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나는 대구에 있는 한 고등학교 문예반에 든 게 계기가 되어 대학의 국문학과를 다녔고 고등학교 국어 선생이 되어 20년 넘게 학생들을 배우며 가르쳐왔다. 그 고등학교 문예반 출신 선후배들과 지금까지 서로를 그리워하며 만나고 있고 이들은 그들이나 내게 돌이킬 수 없는 변고가 생긴다면 아마 천재지변이 생길지라도 무릅쓰고 보러가는 사람이 될 것이다.
영남전문대 백일장 수상 후 찰칵
뒷줄 오른쪽 끝-서정윤 시인, 두 번째-일간스포츠 부국장으로 있다가 퇴임한 김성환 씨, 아랫줄 왼쪽 끝-시나리오 작가 이경식 씨, 두 번째-문학 평론가 하응백 씨, 그 옆-단대문예창작과 교수 박덕규 씨, 장원 상장과 상품을 든 소년-필자, 한 사람 건너-조선일보 기자 최보식 씨, 오른쪽 끝-소설가 권태현 씨.
돌연한 아버지의 죽음의 여파와 정신적 공황으로 마약을 상습적으로 사용해 감옥을 오가던 전직 대통령의 아들 박 아무개가 첫 연합고사로 서울의 모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면 소재지에서 조금 공부한다던 나는 대처인 대구의 명문고 입학시험에 실패하고 다음 해 예정된 연합고사를 피해 2차로 이른바 이류 고등학교인 대건고에 들어갔다.
대건고는 순교한 김대건 신부의 이름을 딴 천주교 재단에 속한 고등학교였지만 종교적 색채가 없이 비교적 자유스러운 분위기였다. 당시 선생님들께서는 마지막으로 시험을 치르고 들어온 제자들에게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대했고 열성적으로 가르쳤다. 무엇보다도 제대로 된 사람을 만들려고 많은 애를 쓰셔서 지금도 어쩌다 같은 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이구동성으로 그런 훌륭한 선생님들께 배운 걸 자랑스럽게 여기고 그리워하는 모습들을 보게 된다.
당시에 남산동에 있던 고등학교 교정에는 로마 교황청에 등록된 예스런 풍의 성당 건물이 있었고 교사 뒤편 주교관을 사이에 두고 효성여고가 있었다. 주교관이 있는 곳에는 아카시 나무가 여러 그루 있어서 꽃핀 봄날 바람이라도 부는 날이면 우리들은 코를 벌름거리면서 그 향기에 취해서 교정을 배회했다.
신라문화제 백일장에 참가한 뒤의 태동기 동인들.
가운데-소설가 김동리 선생님, 왼쪽-시인이자 진주 제일여고 교사인 하재청 씨, 옆에 키 크고 잘 생긴 분-지도교사 도광의 선생님, 옆-홍성백 시인, 왼쪽 끝-류후기 시인, 오른쪽 끝-이근배 시인, 왼쪽-필자, 맨 뒷줄 가운데 마르고 안경 낀 서정윤 시인이 보인다.
1974년 3월 어느 날 교실에 동아리 광고를 나온 선배를 따라 문예반에 들게 된 게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줄기를 이루었고 그 이후 문학이란 바다를 떠나 살아본 적이 없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냥 문예반이 아니라 태동기(胎動期,생명체가 어미의 뱃속에서 꿈틀거리는 때, 이 닉네임은 지금 대구문화계에서 활동 중인 6년 선배인 박상훈 님께서 명명함)란 다소 낯설지만 미래지향적인 별명도 지니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당시 지도교사인 도광의 선생님께서는 매일신문 신춘문예와 현대문학을 시로 문단에 나온 키가 크고 잘 생기신 분으로 태동기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계셨다. 친구 분께서 동막(冬幕,겨울 원두막)이란 호를 붙여줬다는데 지금 생각해도 외람된 소견에 키가 크고 좀 쓸쓸해 보이는 선생님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선생님께서는 작품 한 편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말씀하시지 않고 주로 큰 범주에서 물꼬를 터주시는 말씀을 해 주셨던 것 같다. 선생님의 지도를 받고 문단에 나오거나 언론 등 문학 관련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대략 60명을 넘는다. 그래서 대구 쪽 문단에서 대건 산맥이라 말씀들 한다는 걸 듣기도 하였다.
그 때 문학동아리 방의 풍경은 구석에 야구방망이(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전시용이었다)가 하나 놓여 있었고 기다란 책상 위에 책꽂이가 하나 놓여 있었다. 거기에는 교지와 시집과 소설집 몇 권 그리고 손때 묻은 공책이 한 권 있었는데 우리는 그 공책 속의 글을 외며 오로지 그 공책 속의 주인공이 되고자 애를 썼다. 푸쉬킨이나 박경리보다도 그 공책에 있는 주인공이 부러웠다. 그 공책은 역대 선배들이 백일장이나 대학 문예현상 공모에 입상한 명단과 작품을 적어놓은 이른바 태동기 족보였다. 당시 우리의 소원은 공부를 잘해서 상을 받는 것보다 족보에 이름 올리는 것이었다.
1975년 대건고등학교 교사를 배경으로.
가운데-도광의 선생님, 뒷줄 오른쪽 끝-서정윤 시인 그 옆-필자, 왼쪽-일간스포츠의 김성환 씨, 가운뎃줄 끝- 소설가 박덕규 씨 등이 보인다.
당시에는 경희대학교나 원광대학교 외에 문학특기생을 뽑는 대학교도 거의 없었다. 그러나 오직 족보에 이름을 올리기 위해 경주의 신라문화제, 진주의 개천예술제 서울의 동국대 문학콩쿠르 등에 참가하기 위해 밤 열차를 탔다.
지금은 많은 대학교에서 문학특기생을 뽑으니 문호가 개방되어 다행이나 문학에 대해 순수한 열정으로서 글을 쓰기 보다는 대학에 입학하기 위하여 글을 쓰는 것 같아 좀 아쉽기도 하다.
내가 대건고에 다니던 시절 전후 몇 년은 태동기 역사 가운데에서도 이른바 르네상스 시대였던 것 같다. 그 중 몇을 손으로 꼽아보면 위로 2년 선배로 신춘문예로 등단한 류후기 선배와 신인상 출신의 홍성백 시인이 있고 나와 같은 동기 중에는 홀로서기의 서정윤 시인이 있다. 한 해 후배로 단국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있는 박덕규 씨와 신춘문예로 나와 소설을 쓰는 권태현 씨가 있으며, 2년 후배로는 문학평론가 하응백 씨와 시나리오로 대종상을 수상하기도 한 이경식 씨가 있다. 3년 아래로는 국어교과서에 시가 나오는 우석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인 안도현 시인이 있으며 4년 후배로는 「너는 눈부시지만 나는 눈물겹다」의 시인 이정하 씨가 있다.
태동기는 선후배간의 위계질서를 존중하는 동아리이다. 선배는 후배를 위해주고 후배는 선배를 따르나 함부로 무람없이 굴지는 않았다. 박덕규 씨는 나와 같이 입학하여 같은 학급에 다녔으나 사정이 있어 1년 휴학을 하게 되어 문예반 1년 후배가 되었다. 지금은 어느 정도 받아들여지지만 문예반 동기생이 있는 데에서는 박덕규 씨는 내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았다. 재학 중 박덕규 씨는 기타를 치며 송창식의 ‘피리 부는 사나이’를 잘 불렀다. 뒤풀이 자리에서 노래 부르는 게 부담스러운 나는 키 큰 그가 비브라토를 넣어 멋지게 노래를 부르는 게 참 부러웠다. 그는 고등학교 재학 때 소설에 재능이 빼어나 당시 모 대학현상공모에 입상한 ‘평행봉 선수’란 단편은 아직 내게 인상적으로 남아 있다. 시운동 동인으로 시를 쓰기도 하였으나 지금은 다시 소설가로 글을 쓰고 있다.
「홀로서기」로 문명을 날린 서정윤 시인은 김춘수 시인을 사사했다. 서정윤 씨는 나와 앞뒤를 다툴 정도로 음을 다스렸으나 ‘지금도 마로니에는’을 즐겨 불렀다. 그는 모교인 대건고에 재직하다가 지금은 영신고 국어교사로 있다.
하응백 씨는 「깨 엄마」란 수필을 써서 선생님의 칭찬을 받기도 했는데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가끔 가발을 쓰고 외출을 하기도 하였다. 현재 비평 활동을 하며 출판사를 경영하고 있다.
눈이 크고 잘 생긴 이경식 씨는 당시 대구에서 손꼽히는 수재로 서울대 경영학과에 입학했는데 경영학과 공부보다는 국문학과 수업을 열심히 듣다가 경희대 국문과 대학원을 마치고 문학 판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지금은 전문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는데 한 때 시인 김정환 씨와 노동자문예운동을 하여 공연문화 발전에 기여하였다.
안도현 시인은 내가 대학 시절 대구에 내려갔을 때 태동기 시화전 뒤풀이에서 처음 만났다. 그는 맑은 눈빛으로 좋은 시인이 되고 싶다했는데 그의 말대로 일가를 이룬 시인이 되었다. 대구 출신의 그가 원광대로 간 것은 문예특기생이었기 때문이며 그의 뒤를 따라 이정하 씨도 원광대로 가서 같은 대학의 후배가 되었다.
안도현 시인은 전에는 서정주 시인의 시 「푸르른 날」을 송창식 씨가 가창한 것을 잘 불렀으나 이즈음은 김광석의 ‘거리에서’를 잘 부른다.
1976년 봄 YMCA 화랑에서 시화전을 하고 나서.
앞줄 왼쪽-조선일보 최보식 기자, 오른쪽-미국 간 김용칠, 오른쪽 끝-서호승 신부, 가운뎃줄 엉거주춤한 자세의-이경식 씨, 오른쪽-소설가 권태현, 그 옆-문학평론가 하응백 씨, 뒷줄 왼쪽에서 두 번째-단대 문창과 교수 박덕규, 가운데 필자(키가 따라 가지 못해 까치발로 서 있음), 그 오른쪽-언론인 김성환 씨, 바로 옆-서정윤 시인, 오른쪽 맨 끝-당시 문예반장이었던, 현재 백암고 국사교사 김태홍 씨 등이 보인다.
노래와 기타 솜씨가 빼어난 동인들이 많으나 그 중 가장 빼어난 사람을 들라면 이정하 시인을 꼽아야 할 것 같다. 언젠가 한 번 라이브 카페에 함께 갈 기회가 있었는데 출연자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던 기억이 떠오른다.
당시 대구의 고등학교 문예반은 제각기 닉네임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를테면 대구고 문예반은 계단, 계성고 문예반은 근일점 등이었다. 어느 학교 문예반이나 다른 학교 문예반원들과 서로 긴밀하게 교유를 했다. 대구 시내 각 고등학교 문예반원들이 모여 배구대회를 하면서 의를 돈독히 하기도 했고 합평회를 하면서 문학에 대한 열정을 태웠다. 그 시절 만난 다른 학교 선후배들로는 홍영철, 황영옥, 문형렬, 박기영, 장정일 씨 등이 기억에 남아 있다.
학교마다 다소 사정은 있었으나 당시 대구 시내 고등학교에 학적을 두고 있던 대다수 문예반원들은 학교를 물론하고 봄철이면 시내 중심가에 있는 YMCA화랑 등지에서 시화전을 열었고 언제 어떤 문학동아리가 시화전을 한다고 연락이 오면 떼로 몰려가 축하를 했다. 시화전 팸플렛을 만들고 포스터를 그려 각 학교를 방문하던 기억이 지금도 눈에 아삼하다. 마음에 두고 있던 여학생이 있는 학교를 갈 때면 마치 초등학교 때 소풍 전날 밤 잠 못 이룰 때처럼 가슴이 설렜다. 시화전을 며칠 동안 했는지 구체적으로 기억이 나지는 않으나, 학교의 허락을 받아 당번을 짜서 시화전을 하는 화랑을 지키고 방문객을 안내했다. 태동기는 미술반원들과 긴밀하게 협조를 하여 문예반원이 원고를 써주면 미술반원들은 만사를 제쳐두고 시화를 그려줬다. 그들의 시화 솜씨 또한 기성 못지않았으며 빼어났던 것 같다.
지금 돌이켜보니 문재가 있었으나 꽃피우지 못하고 일찍 지상을 떠난 이도 있으며 외국에 나가 연락이 돈절된 사람도 있다. 은사 도광의 선생님 시비 건립 얘기도 나오고 있으니 머지않아 동인들이 한 자리에 만나서 도타운 의를 확인하는 자리가 있으리라 믿는다.
태동기의 역사는 나 같은 천학비재가 쓸 글이 아닌 것 같다. 꼭 문학만이 아니라도 고시를 통과한 사람에서 의사와 화가도 있으며 현재 활동 중인 빼어난 언론인이 한둘이 아니다. 빼어난 후배 문인이 나와 따로 자리매김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러하자면 지나간 시절의 영화를 자랑만 삼을 게 아니라 문학에 젖어 사는 사람이라야 가능한 일일 게다. 또 웅숭깊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손끝의 재주만 생각할 게 아니라 많이 공부를 해야 하며 그 공부가 즐거워야 할 것이다.
조성순 경북 예천에서 나고 자랐으며 대구 대건고를 나와 동국대학교 국문학과와 대학원에서 시비평과 고전 산문을 공부했다. 시를 써오고 있으며 전통문화연구회 등에서 10여년 한문을 수학했다. 태동기 7대 동인으로 현재 서울 단대부고 국어교사이다.
첫댓글 우연히 방문하다 지난날이 새로워 지는것같습니다 대구에서 문단을 주도하는 태동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우연히 방문하다 지난날이 새로워 지는것같습니다 대구에서 문단을 주도하는 태동기가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