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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출과 일몰은 매일 있으니 네가 마음만 먹으면 매일 볼 수 있어.
너도 얼마든지 아름다움의 길로 들어설 수 있어”
자신의 몸무게보다 무거워 보이는 배낭을 매고 '악마의 코스'인 PCT(미국 퍼시퍽 크레스트 트레일 / 4285km)를 걸은 영화 와일드의 실제 주인공 세릴 스트레이드가 길을 걸으며 다짐하는 말이다.
마힐로가 10일 찾은 충남 태안 해변길 1코스 들머리인 학암포에 들어서니 펜스처럼 낮은 방파제엔 ‘일몰의 명소’라고 씌어있었다. 송년에 노을이 수평선을 붉게 수놓은 서쪽 바다를 보는 것은 나의 오랜 로망이다.
그곳에서 세릴의 명언이 불현듯 떠올랐다. 올해가 가기전에 1박2일로 여행을 떠나고 싶지만 굳이 석양에 찾지 않아도 학암포는 아름답다. 송년의 바다는 더욱 그러하다.
입자가 고운 모래사장은 매끄럽게 갈무리해놓은 에폭시 바닥처럼 윤기가 흐르고 일기예보와 달리 파란 하늘은 산뜻하다. 이런 길을 걸으면 누구나 세파에 찌든 마음에도 순수함이 깃들터다.
12km. 결코 짧은 길이 아니지만 시작이 좋다.
삭풍(朔風)을 우려했지만 바람은 계절을 잊은 듯 훈풍(薰風)이다.
개인적으로 태양이 작열하고 요란한 여름바다 보다는 고적(孤寂)하고 차분한 겨울바다를 선호한다.
사유(思惟)할 수 있는 여유를 주기 때문이다.
학암포를 뒤로 하고 작은 언덕을 넘어서자 백사장이 광활한 구례포해변이 나왔다.
바캉스철에는 젊음의 열기가 가득했을 모래사장은 파도소리마저 숨을 죽인듯 조용하다.
하늘마저 흐렸다면 무척 을시년스러웠을 것이다.
그 길을 발자국 흔적을 내며 걸어가는 회원들의 활기찬 모습이 적막한 바다에 활력을 불었다.
구례포해변에서 다시 숲속의 작은 마을을 지나면 먼동해변이다.
원래 지명은 ‘안뫼’인데 1993년 KBS 드라마 ‘먼동’의 로케이션 장소로 유명해지면서 해변 이름도 바뀌었다.
소나무 두그루가 거북바위와 꼬깔섬 위에 서있어 해가 기울면 그림같은 낙조를 연출하는 곳이다.
사진으로만 본다면 동해라고 할지도 모른다.
조수간만 차가 심하고 갯바위가 유난히 많아 파도소리도 경쾌하다.
거북바위 아래에 앉아 회원이 건네 준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무심히 먼동해변을 바라보았다.
마치 무대위의 조명처럼 구름사이로 햇볕이 쏟아지면서 바다가 ‘윤슬’로 반짝이는 광경에 잠시 넋을 잃었다.
한산한 겨울바다에서 누릴 수 있는 호사다.
이제부터는 해변을 벗어나 나즈막한 산을 넘어가야 한다. 곰솔길이다.
해송(海松)으로도 불리는 곰솔은 소금기가 가득한 땅에서 모진 해풍에 맞서며 굳굳이 군락을 이뤄 해변풍경을 풍요롭게 한다. 아마도 해송은 수평선이 아득한 너른 풍광을 즐기며 견디는지도 모른다.
적당히 업다운이 있는 곰솔길은 바라길의 또 다른 묘미다.
그 길의 끝에서 멀리 신두리 사구가 갑작스레 흐려진 하늘아래 드넓게 펼쳐졌다.
바라길의 날머리이자 사구길의 시작이다.
자연과학 사전을 찾아보니 해안사구는 해류에 의해 운반된 모래가 파도에 밀려 육지로 올라 온 뒤 다시 바람에 날린 모래가 쌓여서 만들어진 언덕 모양의 지형이다. 신두리 사구는 국내에서 가장 넓다.
바람이 만든 물결무늬가 선명한 모래언덕과 나무 한그루 보이지 않는 황량한 사구는 영화에도 여러번 출연했다.
봉준호 감독의 2009년 개봉작 '마더'에서 김혜자는 신두리 사구의 작은 별똥재에서 오묘한 춤을 추며 등장한다.
김한민 감독이 연출한 '최종병기 활'에선 조선 최고의 궁사 남이(박해일)가 누이(문채원)를 구하기 위해 청나라 장수 쥬신타(류승룡)과 최후의 일전을 벌이는 곳도 바로 신두리 사구다.
1만5000년전에 형성됐다는 신두리 사구는 바다와 바람이 만들어낸 보기드믄 작품이다.
우리나라 해안사구에 있는 모든 지형을 관찰할 수 있는 사구의 종합선물세트라고 할 수 있다.
해변을 따라 늘어선 길이 무려 3.4km, 해안선에서 육지까지 폭은 긴 곳은 1.3km에 달한다.
미로처럼 이어진 억새밭과 모래언덕을 꼼꼼히 돌아보려면 족히 반나절은 걸린다.
바라길은 5년전에도 걸었다. 하지만 왠지 낮설은 느낌이다.
해안숲길 대신 바닷길을 주로 걷고 살짝 과장하면 신두리 사구가 ‘상전벽해(桑田碧海)’처럼 변했기 때문이다.
예전엔 모래밭을 걸을 수 있었지만 천연기념물 제 431호로 지정되면서 보존의 필요성을 절감했는지 모래밭과 억새밭에 들어가지 않도록 산책로를 별도로 만들어놓았다.
그래서 먼동해변이 동해같은 느낌이라면 신두리 사구는 바다에 접한 제주 오름을 걷는 분위기다. 예전엔 바라길이 멀고 다소 지루했지만 지금은 무척 짧은 듯 했다. 거리는 그대로지만 5년새 변한 버러이어티하고 매혹적인 풍광 때문일 것이다. 세릴의 말처럼 우린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 아름다운 길로 들어설 수 있다.
첫댓글 회장님 글 덕분에 지식도 쌓고 늘 트레킹후 읽으며 반추하는 즐거움이 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