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정 시대 로마 장군들이 추구한 최대의 영예는 전과를 시민들 앞에서 과시하는 개선식이었다. 개선식의 주인공이 되기란 쉽지 않 았다. 외적과의 전쟁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둬야 하는 것은 물론, 직접 참전해
적어도 5,000명 이상의 적군을 저승길로 보내야 자격이 생겼다. 외교적인 방법을 통해 얻은 승리나 내전의 경우에는 개선식 이 허용되지 않았다.
이런 조건을 갖췄다 해서 일이 끝난 것은 아니다. 개선장군은 승전 당시
참전군 최고사령관의 권한인 지휘권(Imperium)을 갖고 있어야 했고, 원로원 승인을 받기 위한 절차를 반드시 밟아야 했다. 포로들 과 전리품을
끌고 귀환길에 오른 장군과 휘하 부대원들은 포메리움 (pomerium) 밖에
멈춰 대기하면서, 원로원에 상황 보고서를 보내 까 다로운 심사를 받아야 했다.
포메리움은 반드시 물리적인 의미의 성벽과 일치하지는 않는다. 로 마시를 둘러싼 성스러운 경계선으로서, 시기에 따라 그 위치도 바뀌 었다.
이 경계선 안쪽은 로마시민들이 직접 통치하는 영역이었고, 바 깥은 장군들이 통치 권한을 한시적으로 위임받은 곳이었다. 따라서 군사력을
보유한 장군이 포메리움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이 경계선 밖에서 무장을 해제하고 위임받은 지휘권을 반납해 일반 시민의 신 분으로 돌아가야 했다.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와 원로원의 압력으로 귀환하던 중 루비콘 강을 건너면서 ‘주사위는 던져졌다’고 한 말 은 이 강이 포메리움 경계선이었기 때문에 무장 상태로 강을 건넘으 로써 초래할 상황을
염두에 두고 나온 것이었다.
로마 북동쪽 300㎞ 지점의 루비콘 강이 경계선으로 정해진 것은 기 습적으로 로마로 진군해 권력을 잡은 술라에 의해서였다. 그는 다른 장군들이 같은 식으로 권력을 잡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루비콘 강으 로 포메리움을 이동시켜 놓았다. 따라서 무장 상태에서 치러지는 개 선식은 사전에 승인을 받아야 하는 것은 당연했다. 상황 보고서를 접수한 원로원은 증인들을 불러 사실 확인을 한 후 평결을 내렸다. 흑해 연안의 폰투스왕 미트리다테스와 전쟁을 치른 루쿨루스는 개선 식 승인을 받기 위해 성 밖에서 무려 3년이나 대기했다. 심지어 로 마로부터 20㎞ 떨어진
알바노 언덕에서 승인받지 못한 개선식을 치 른 장군도 있었다.
개선식은 본래 쥬피터 신에게 감사 표시를 하는 의식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화려하고 성대한 행사로 발전했고, 점차 정치적 색 채를
띠게 되었다. 특히 몇몇 실력자들이 원로원의 과두 권력 체제 를 압도하기 시작한 기원전 1세기에 들어서면서 그 정치적 의미와 효과는 매우
커졌다. 마리우스를 비롯해 술라, 폼페이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
등 공화정 말기 정치가들은 개선식의 영예를 정치적 위상을 강화하는
데 이용했다.
개선식의 묘미는 제정 성립과 함께 사라졌다. 황제만이 실질적인 임 페리움을 보유하는 시대에 황제 아닌 장군들에게 개선식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팽창 국면에서 방어 국면으로 전환된 시대에는 승전을 기 념할
만한 큰 전쟁도 별로 없었다. 창건 이래 제정 초까지는 300여 차례의 개선식이 거행된 반면, 그 이후에는 개선식이 30차례도 안 됐 던 점이 이를 잘 반영한다.
개선식이 로마 시민들에게 미친 영향은 막대했다. 엄청난 노획물을 실은 마차와 쇠사슬에 묶인 포로들을 이끌고 중심가를 행진하는 장 군과
로마 병사들. 이들의 모습에서 시민들은 자부심과 긍지를 느꼈 다. 개선식은 바로 로마의 힘을 실감하는 현장이었다.
〈신상화/ 로마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