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대(將臺)란 지휘관이 올라서서 군사들을 지휘하던 돌로 쌓은 대(臺)를 말하며, 장대벌은 장대가 있는 벌판이란 뜻이다. 부산시 수영구 광안동에 있는 수영 장대와 마찬가지로 울산시 중구 남외동에 위치한 울산 병영 장대 역시 천주교인들이 무참하게 처형된 순교 터이다.
병인박해(1866년)는 한국 천주교회 역사상 가장 혹독했던 박해로 기록된다. 울산 병영 장대벌에서 처형된 순교자들은 소위 군문효수(軍門梟首)의 형에 처해졌는데, 이는 참수된 이들의 머리를 장대 위에 매달아 두는 대단히 가혹한 처형 방법이었다.
병인박해 당시 이곳에는 경상좌도 병마절도사(慶尙左道 兵馬節度使)가 있었고 장대 앞에는 연병장이 있었다. 그래서 이곳은 군인들의 주둔지로서 군사 훈련뿐 아니라 간혹 중죄인을 처형하는 장소로도 쓰였다.
1860년 경신박해 때와 병인박해 중인 1868년, 두 차례의 큰 박해 때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에서 순교했다. 경신박해 때 백지사형(白紙死刑)으로 순교한 오치문, 병인박해 때 경주 감옥에 갇혔던 허인백(야고보), 김종륜(루카), 이양등(베드로) 회장 등이 이곳에서 군문효수를 당했다.
울산 장대벌의 첫 번째 순교자로 알려진 오치문은 언양 사람으로 해주(海州) 오(吳)씨 명문가의 자손이다. 그는 1801년 이곳 언양에 귀양 온 강이문에 의해 이 지방에서는 처음으로 교인이 된 것으로 전해진다. 학자이면서도 벼슬길에 나서지 않고 외교인들과도 별로 가까이하지 않던 그는 오로지 산골에서 숯을 굽는 교우들과 깊은 교분을 가지며 신앙생활에 충실하다가 1860년 체포되어 울산 장대벌에서 백지사형으로 순교했다.
허인백은 김해 출신으로 언양 간월로 이주해 살다가 경신박해 때 체포되어 언양으로 끌려가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도 천주교 신자임을 떳떳이 고백하였다. 경주로 이송되어 8개월 동안 옥에 갇혀 지내면서도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다가 박해를 중단하라는 임금의 명에 의해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그 후 허인백은 간월보다 더 깊은 산중의 대재 공소[죽령]로 숨어들었다. 그곳에서 그는 충청도 공주에서 박해를 피해 온 김종륜과 대재 공소회장이던 이양등의 가족들을 만났다. 이 세 가족은 안전한 피난처를 물색하다가 경주시 산내면 단석산(소태리 단수골)에 있는 한 범굴을 찾아내고 그곳에 가족들을 피신시켰다.
이들은 목기(木器)를 만들어 팔고 부락으로 내려가 밥을 구걸하는 등 어려운 생활을 했으나 밤마다 가족들이 둘러앉아 함께 기도하며 서로의 신심과 용기를 북돋우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하지만 포졸들은 이 깊은 산중에까지 들이닥쳐 결국 이들은 경주로 끌려갔다.
그 무렵 오페르트(Oppert)의 남연군(南延君) 묘 도굴사건으로 대원군이 크게 노해 매우 혹독한 박해령을 내렸기 때문에 포졸들은 혈안이 되어 산 속 깊은 곳까지 신자들을 찾아 샅샅이 뒤지고 다녔다. 경주 진영에서 가혹한 형벌과 심문을 받던 이들은 다시 경상좌도 병마절도사가 있는 울산으로 이송되어 문초를 받다가 마침내 1868년 9월 14일(음력 7월 28일) 울산 장대벌에서 순교했다.
세 순교자의 유해는 허인백의 부인 박조이가 수습해 사형장 근처 강둑 아래 가매장했다가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어 교인들의 장례가 가능해지자 1907년 유족들에 의해 연고가 있는 경주시 산내면 진목정 뒷산인 도매산으로 옮겨 합장하였다. 그러다가 1932년 5월 말 허인백의 손자 허명선과 김종륜의 손자 김병옥에 의해 대구 월배 천주교회 묘지로 다시 이장하였다. 1962년 10월 25일에는 대구 가톨릭청년회 주선으로 월배 교회묘지 내 성모상 앞의 석함 속에 안장했다가 또다시 1973년 10월 19일 대구시 동구 신천 3동에 있는 복자 성당 구내로 이장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복산 성당(전 울산 성당)에서는 1957년에 태화강변의 새치벌에 작은 팻말을 세워 순교자들의 숭고한 뜻을 기렸다고 하는데, 강변 정비로 지금은 어떤 표시도 찾을 수 없다. 이후 순교 터를 보존하고 개발하기 위해서 1977년 동천강변에 순교지 535평을 매입하였으나, 예산 부족으로 손을 쓰지 못하고 있다가 1979년 9월 7일 본당 사목회가 중심이 되어 개발에 착수하였다. 현재 울산 장대벌 성지에는 순교자 현양비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동상 그리고 돌 제대가 설치되어 순례자들을 맞이하고 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
울산 장대에서 대구로 이어진 신앙
울산 시내 동쪽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동해 남부선의 효문역 근처에는 이 지역의 유명한 순교 터인 ‘울산 장대’(울산시 중구 남외동 567번지)가 있다. ‘장대’란 군대 지휘관이 올라서서 군사를 지휘하던 곳으로 대부분 돌을 쌓아 만들었다. 이곳 울산에는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의 지휘소가 있었고, 장대 앞에는 군인들의 주둔지와 연병장이 위치해 있었으므로 자주 중죄인들의 처형장으로 이용되었으며, 경신박해와 병인박해 때는 교우들의 형장이 되었다.
그 첫 번째 순교자인 오치문(베드로?)은 언양의 명문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신앙을 받아들인 뒤에는 오로지 교리만을 실천하려고 애썼다. 주변의 유력한 사람들이 그에게 벼슬길을 열어 주겠다고 유혹했지만 그의 굳은 마음을 돌릴 수는 없었다. 1860년 경신박해가 경상도 지역을 휩쓸게 되자, 이름이 알려져 있던 오치문은 곧바로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울산 장대로 압송되었고 그곳에서 순교하였다. 순교 당시 그는 얼굴을 한지로 덮은 채 물을 뿌림으로써 숨이 막혀 죽게 하는 백지사(白紙死, 일명 도모지) 형벌을 받았는데, 무의식중에 혀를 내밀어 물 묻은 한지를 뚫자 군사들이 그 구멍을 막아 질식시켰다고 전한다.
경신박해 때의 또 다른 사적지로는 울산 ‘죽림굴’(울산시 상북면 이천리)이 있다. 이곳은 간월산 아래의 깊은 산중에 있으며, 최양업 신부가 곳곳의 교우들을 순방하던 중에 박해를 만나게 되자 은거한 곳이다. 토마스 신부는 이곳에서 4개월 동안 모든 것을 주님께 의탁한 채 교우들과 함께 생쌀을 먹으며 박해를 피했고, 스승에게 마지막 서한(1860년 9월 3일자)을 작성하면서 자신의 애처로운 모습을 설명하기도 하였다.
울산 장대의 두 번째 광란은 1868년에 일어났다. 병인박해가 계속되면서 교우들은 아무도 살지 않는 곳으로 옮겨가야만 했고, 이때 울산 간월산 아래에 살던 허인백(야고보)도 더 깊은 산중인 대재(울주군 상북면 이천리) 교우촌으로 이주하였다. 당시 대재 마을에는 이양등(베드로) 가족을 비롯하여 문경 멍에목(문경군 동로면 명전리)에서 이주해 온 김종륜(루가) 등이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포졸들의 포위망이 점점 좁혀 오자 대재의 교우들은 범바위굴을 찾아 가족들을 피신시킨 다음 목기(木器)를 만들어 팔거나 구걸을 하면서 어렵게 살았다. 이러한 생활 속에서도 그들은 신앙을 버리지 않았고, 오히려 기도 생활 안에서 즐거움을 찾았다. 그러나 포졸들은 그들의 조그마한 흔적까지도 찾아내려 하였고, 1868년 5-6월경에는 마침내 범바위굴에 있던 신앙 공동체를 발견하였다. 이에 앞서 가족들을 피신시킨 이양등, 허인백, 김종륜은 순교를 각오하고 있다가 체포되어 경주 진영으로 압송되었다. 그런 다음 그곳에서 형벌을 받고 울산으로 이송되어 장대 앞에서 참수형을 받으니, 때는 1868년 8월 14일(양력 9월 30일)이었다.
한편 이들과 함께 체포된 간월 교우촌의 김영제(베드로)는 경주 진영에서 서울로 압송되어 9개월 동안 옥에 갇혀 있으면서 종지뼈가 떨어져 나갈 정도로 심한 형벌을 받게 되었다. 이후 그는 석방되어 가족들이 있는 살티(울주군 상북면 덕현리) 교우촌으로 돌아오게 되었지만, 형벌로 생긴 상처 때문에 고생하다가 6년 후에 선종하고 말았다. 그의 무덤은 지금 살티 공소 인근에 순교자 묘역으로 조성되어 있다.
들어간다. 들어간다. 우리 세 명 천국으로 들어간다. … 너희들 저 두 사람의 목을 먼저 베고 내 목을 맨 나중에 베되, 머리를 각각 제 몸에서 떨어지지 않게 해 다오. 훗날 부활할 육신이다(김구정 편저, “영남 순교사”, 1966년).
순교 직전에 허 야고보가 남긴 말이다.
형이 집행된 후 세 명의 시신은 허 야고보의 부인 조아에게 거두어져 인근에 매장되었다가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된 후에 수습되어 경주 산내면 진목정(일명 참나무정이) 교우촌의 안산에 합장되었다. 당시 이들의 유해는 조아가 묻을 때 잘 표시를 한 뒤에 아들들에게 그 장소와 표를 기억하고 있도록 한 덕택에 누구나 쉽게 구분할 수 있었다고 한다.
1932년에 대구 교우들은 진목정 순교자의 무덤을 발굴하여 그 유해들을 대구시 월배 감천리의 교회 묘역으로 옮겨 안장하기로 결의하였으며, 5월 29일에는 수백 명의 교우들의 운집한 가운데 장엄한 천묘식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41년 뒤인 1973년 10월 19일에는 순교자들의 유해가 병인박해 순교 기념 성당으로 건립된 복자 성당(대구시 동구 신천 3동) 구내로 다시 옮겨짐으로써 울산 장대에서 꽃핀 신앙이 대구로 이어져 오게 되었다. 현재 부산교구 병영 본당 구역인 울산 장대는 순교 사적지로 조성되어 순례자를 기다리고 있다. [출처 : 차기진, 사목 2000년 1월호]
허인백(許仁伯) 야고보(1822-1868년)
허인백 야고보는 1822년 경상도 김해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언양으로 이주해 살았다. 그러다가 25세 때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고 입교하였으며, 이후로는 아주 열심히 수계 생활을 하여 교우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았다.
야고보는 아내 박조이와 자식들에게도 열심히 교리를 가르쳤다. 뿐만 아니라 정결을 지키기 위해 아내와 남매처럼 살았으며, 고신극기는 물론 겸손과 인내의 덕을 쌓는 데도 노력하였다. 또 애긍에 힘써 가난한 이와 병든 이들을 많이 도와주었다.
1860년 경신박해가 일어난 뒤, 야고보는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무수히 매를 맞고 언양으로 끌려가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천주교 신자임을 떳떳하게 고백하였다. 그리고 옥에 갇혀 50여 일을 지낸 뒤 경주로 이송되었으며, 이곳에서도 다시 굳게 신앙을 증거한 뒤 8개월을 옥에 갇혀 지내야만 하였다. 그러다가 박해를 중단하라는 임금의 명에 따라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후 허인백 야고보는 울산의 죽령(현 경남 울주군 상북면 이천리) 산중으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이곳에서 이양등(베드로) 회장과 김종륜(루카)을 만나 함께 신앙생활을 하였고, 나무 그릇을 만들어 팔아 가족들의 생계를 꾸려나갔다. 이처럼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그는 묵상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자주 순교 원의를 드러내곤 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면서 전국 각지에서 신자들이 체포되었을 때도 죽령 교우촌은 비교적 안전하였다. 그러나 2년 뒤인 1868년에는 포졸들이 마침내 죽령 교우촌을 찾아내게 되었고, 야고보는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어 경주로 끌려가게 되었다. 이때 그는 가족들에게 이르기를 “나를 위해 기도해 주어라. 성녀 바르바라의 순교 행적을 기억하도록 하거라”고 당부하였다.
경주 진영에 이르자, 곧 문초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야고보는 천주교 신자임을 고백하였을 뿐 천주교 서적이 있는 곳을 대거나 다른 신자를 밀고하지 않았다. 그러자 관장은 화가 나서 혹독한 형벌을 가하도록 하였다. 이내 그의 몸에서는 피가 나고 다리뼈가 드러나게 되었지만, 그의 신앙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이어 야고보는 동료들과 함께 울산으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다시 문초와 형벌을 당하고 신앙을 증거한 뒤에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런 다음 군대 지휘소가 있는 장대(將臺, 현 경남 울산시 병영동)로 끌려 나가 이양등 회장과 김종륜과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68년 9월 14일(음력 7월 28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46세였다.
순교 당시에 그는 십자 성호를 긋고 예수 · 마리아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고 하며, 그의 시신은 형장까지 따라온 아내에 의해 거두어져 비밀리에 안장되었다.
김종륜(金宗倫) 루카(1819-1868년)
김종륜 루카는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때 충청도 공주에서 천주교에 입교한 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본관은 경주요, 족보 이름은 ‘경희’(敬熙)이다.
루카는 평소에 특히 화목함을 강조하였고, 어느 누구와도 화목하게 지내려고 노력하였다. 이후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그는 부모를 모시고 경상도 상주 멍에목(현 경북 문경군 동로면 명전리)으로 피신하였다. 그리고 다시 언양 간월(현 경북 울주군 상북면 등억리)을 거쳐 울산 죽령(현 경남 울주군 상북면 이천리) 교우촌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죽령 교우촌에서 루카는 이양등(베드로) 회장과 허인백(야고보)을 만나 서로 권면해 가면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때까지도 이곳은 비교적 안전하였다. 그러나 2년 뒤인 1868년에는 포졸들이 마침내 죽령 교우촌을 찾아내게 되었고, 루카는 그곳 교우들과 함께 체포되는 몸이 되었다.
경주로 압송되어 가는 동안 김종륜 루카는 동료들의 권면을 잘 받아들여 순교를 결심하였다. 실제로 그는 경주 진영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자 천주교 신자임을 고백하고 굳건하게 신앙을 증거하였다.
이어 루카는 동료들과 함께 울산으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다시 문초와 형벌을 당하고 신앙을 증거한 뒤에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런 다음 군대 지휘소가 있는 장대(將臺, 현 경남 울산시 병영동)로 끌려 나가 이양등 회장과 허인백과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68년 9월 14일(음력 7월 28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49세였다.
순교 당시에 그는 십자 성호를 긋고 예수 · 마리아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고 하며, 그의 시신은 형장까지 따라온 허인백의 아내 박조이에 의해 거두어져 비밀리에 안장되었다.
이양등(李陽登) 베드로(?-1868년)
이양등 베드로는 경상도 울산의 죽령 교우촌(현 경남 울주군 상북면 이천리) 회장이었다. 본래 성품이 선량하였던 그는 꿀장사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열심히 수계 생활을 하였다.
그 후 베드로는 1866년의 병인박해를 피해 죽령 교우촌으로 이주해 온 허인백(야고보)과 김종륜(루카)을 만나 서로 권면해 가면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때까지도 이곳은 비교적 안전하였다. 그러나 2년 뒤인 1868년에는 포졸들이 마침내 죽령 교우촌을 찾아내게 되었고, 베드로는 그곳 교우들과 함께 체포되는 몸이 되었다.
경주로 압송되어 가는 동안 이양등 베드로는 동료들의 권면을 잘 받아들여 순교를 결심하였다. 실제로 그는 경주 진영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자 천주교 신자임을 고백하고 굳건하게 신앙을 증거하였다.
이어 베드로는 동료들과 함께 울산으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다시 문초와 형벌을 당하고 신앙을 증거한 뒤에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런 다음 군대 지휘소가 있는 장대(將臺, 현 경남 울산시 병영동)로 끌려 나가 허인백 · 김종륜과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68년 9월 14일(음력 7월 28일)이었다.
순교 당시에 그는 십자 성호를 긋고 예수 · 마리아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고 하며, 그의 시신은 형장까지 따라온 허인백의 아내 박조이에 의해 거두어져 비밀리에 안장되었다. [출처 : 이상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2003년]
<승용차> 경부 고속도로 언양 JC에서 울산 고속국도를 타고 울산 시내에 들어서면 7번 국도와 연결됩니다. 여기서 좌회전하여 북부순환도로를 타고 가다가 성신 고등학교에서 우회전한 후 MBC 사거리에서 좌회전하여 울산 중부 경찰서와 중부 보건소까지 가면 그 건너편 동천강 뚝방길 바로 왼쪽에 울산 병영 장대 성지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