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이제는 氈脣이卜자 형태이지만 앞서 운교경반형(雲較擎盤形)혹은 괴혈 참관혈과는 그 형세 구별이 다른
맥혈에 대해서 세론해 볼까한다.
근래의 대다수 서책에서는 당나라때 楊筠松 혹은 료우寥瑀(寥金精)가 구분했던 脈窟息突의 혈상에서 脈穴을
오늘날 穴의 四象인 窩鉗乳突에서의 鉗穴이라고도 한다.
아래의 묘소는 경기도 고양에 있는 밀양박씨 박사경 묘소로써 脈盡處에 用事한 脈血의 대표적인 곳이다.
사진에서 보듯 앞서의 卜자 형태가 있지만 운교경반형(雲較擎盤形)혹은 괴혈 참관혈과은 다르게
앞쪽으로 氈脣餘氣가 斬關된 것이 아닌 좌우 지각형태로 있다.
이곳의 정혈처라면 묘소 하단 비석만이 설치된 壇의 자리여야하지만 그곳에서는 혈처를 일구지 못했다.
아래는 이곳 묘역 안내문을 확대했다.
안내문에는 조선 선조때 의인왕후 묘소 작업에 참여했던 이의신이 "혈도가 조금 노출된 것이 한스러우나"라고
지적한 것 처럼 맥로가 노출된 맥혈은 그 폐해가 크기 때문에 후세에 이르러서는 맥혈을 버리고
窩鉗乳突로써 穴의 四象을 취용하고 있음이다.
아래는 위 묘주인의 세계도이다.
위의 묘소를 쓰고 박사경의 아들 박침 그리고 손자 박저생과의 下女의 性的 共有사태가 벌어진다.
박침의 어린 첩을 박침 死後 아들 박저생이 다시 그녀를 첩으로 들인 것이다.
물론 박침 繼配와의 박저생의 재산싸움에서 비롯된 繼配의 고변으로 알려진 일이지만 어찌하든 종국에 형벌을 받게된
박저생을 동생들이 위계로써 빼내려한 사실들이 탈로나 동생들 까지 출세에 지장을 받는다.
끝내는 도망쳐서 쫒기는 박저생의 자살로 막을 내린다.
묘역 안내문에 표기된 것과는 달리 위의 세계도에서처럼 가문의 가장 큰 번창은 먼 후대의 일들로 당연 위 묘소
발응과는 관련이 없음이다.
아래 역시도 행주기씨 기건의 묘소로써 맥혈이다.
사진에서는 나무에 가려 혈장이 잘 확인되지 않았지만 이곳 또한 맥로가 노출된 곳이다.
더더구나 청룡의 모습과는 달리 백호는 없는 듯 희미하다.
위의 후손들은 玄孫 기대승,영의정 기자헌으로 영화가 이어갔지만 끝내 曾孫 기준奇遵은 유배지에서 사사당하였다.
영의정 기자헌 또한 역적으로 몰려 일족이 몰살당했다.
후대에 이르러서는 5형제가 이곳 행주를 피해 흩어졌다.
그중 한분이 우리가 꾀꼬리 명당으로 잘알고 있는 노사 기정진 선생의 선대로 전남 담양으로 가서 숨어 살았던 것이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맥혈의 폐해 절정은 조선조 철종의 부친 전계대원군 묘소일 것이다.
철종 즉위 4년뒤 은평구 진관외동에서 이곳으로 이장하였다.
얼핏보기에는 대명당처럼 보이지만 좀더 살피자면 부려 이장한 저의가 심히 의심된다.
이곳은 조응관계의 부조화를 포함해서 맥혈로써 심하게 노출된 맥로상에 用事한 곳으로 대흉지이다.
철종의 4명의 왕자는 어린 나이로 죽어갔고 3딸 역시도 1명만이 출가해서 곧 죽었을 뿐 모두가 어린 나이로 죽었다.
묘소의 하단 지각 모습 조차 아래의 건유절 설명과도 유사한 곳이다.
이에 혹여 초보자들을 위해 위의 맥혈관계를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곳이 3대정승을 배출한 아래의 덕수이씨
택당 이식선생 묘소이다.
사진에서 처럼 좌우 지각 아래로 있는 것이 최상의 모습이다. 위의 빨간 지점 근처에 노출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아래의 사진은 상단 2개의 묘소가 택당선생 묘소 상단과 같은 곳으로써 위의 이의신 지적처럼 혈도가 노출되어
흉한 곳이다.
당연 정혈처는 비록 소지소혈이지만 위의 택탕묘소처럼 아래쪽 사진 빨강점이 있는 묘소이다.
위의 사진은 조선말 어찌하든 후손들이 한시대를 풍미한 안동김씨의 김조순 묘소이며 아래는 그의 생부 김이중 묘소이다.
모두 맥혈이지만 앞서와 다르게 지각사이에 자리하고 있음이다.
지금에는 와혈 또는 겸혈로써 명명 또한 바뀌어 사용하고 있으며 어떤곳은 딱히 와혈과 겸혈의 명확한 구분이 어려운
곳도 있음에 도선국사 유산록에서는 이러한 곳을 통칭해서 와겸혈이란 용어로 사용했다.
이는 풍수 음양의 법칙 하나인 陰來陽作 혹은 陽來陰作의 법칙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