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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내 인생을 바꾸어놓았는가
증언자 : 임병준(남)
생년월일 : 1959. 2. 28(당시 나이 21세)
직 업 : 타일공(현재 카페 경영)
조사일시 : 1988. 12
개 요
부상자 임병준 씨는 5월 19일 현대극장 앞에서 식당 내부에 타일 붙이는 작업을 하다가 타일이 부족해 대인동에 있는 현대타일상사로 가다가 공수부대에게 구타를 당했다.
19일 대인동에서 부상당함
나에게 있어서 열심히 산다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나에게 있어서 부모님께 효도한다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정말 건강하고 패기만만한 사회인으로서 무언가 하고 싶었는데,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아버님은 이북에서 이미 결혼도 하고 아들은 둘이나 두셨지만 6·25 때 인민군 소속 보급부대로 참여했다가 인천 상륙작전 때 탈출하여 유엔군에게 항복, 거제도 반공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되셨기 때문에, 친척은커녕 잘 아는 사람들도 없었다. 그래서 내가 집안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역할은 정말 큰 것이었다. 더구나 1980년에는 아내가 첫애를 가져 적적하신 부모님께 곧 손주를 안겨드린다는 기쁨과 나도 조금 후면 아빠가 된다는 설레임 속에 하루하루가 그저 행복하기만 했다. 나와 우리 가정이 조금씩 안정을 찾아간다는 것이 무엇보다 기뻤다.
그런데 그날(5월 19일) 아무런 이유 없이 당한 일이 나의 꿈, 우리 가정의 단 꿈을 그렇게 산산조각 내버릴 줄이야!
80년 5월 19일 나는 이종누나가 현대극장 앞에서 팔무정이라는 식당 개업 준비를 하고 있어 사람들을 데리고 그 식당의 내부수리를 하고 있었다. 나이는 어렸지만 배짱이 있어서 타일기술을 익히고 난 3개월 후부터는 고용인으로서가 아니라 내가 직접 사람들을 데리고 시공을 맡아서 하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여기저기 전전하면서 잔일을 많이 해본 탓인지 일들이 일사천리로 잘 되어가던 때이기도 했다.
그날 식당 내부에 타일을 붙이는데 마침 타일이 부족했다. 작업중에 오토바이를 타고 박인천 씨 집(대인동) 골목에 있는 현대타일상사에 타일을 사러 갔다.
현대타일상사 앞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그때만 해도 나는 돈벌이에만 신경을 썼을 뿐 시내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오토바이를 빵빵거리면서 나아갔다. 부족한 타일을 빨리 사다가 일을 끝내야겠다는 일념으로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건 말건 그런 것에는 개의치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사람들이 도망을 가기 시작했다. 그래도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자꾸 앞으로만 갔다. 사람들이 다 흩어진 상태라 앞에 공수부대들이 보였다. 그때 대여섯 명의 공수부대원들이 내게로 달려들더니 느닷없이 때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당하는 일이라 어이도 없었지만 미처 피할 겨를도 없었다. 그렇게 온몸을 맞고는 기절해 버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정신을 차려보니 군트럭 위에 나 혼자 누워 있었다. 머리에서는 피가 흐르고 어깨 근육이 파열되었는지 전신이 아파왔다. 엉기적거리며 일어났더니 공수부대원들이 보고는 "어, 저 새끼 살았네!" 하였다. 그때의 그 비애감! 아무런 이유 없이 맞은 것도 억울한데 죽었어야 했단 말인가. 그러나 그때는 한대라도 덜 맞는 것이 상책이었다. 그들은 나를 또 어디론가 끌고 갔다. 끌려가서 보니 금남로였다. 그곳에는 나처럼 잡혀온 사람들을 옷을 벗겨놓았는데 웃옷은 웃옷대로, 바지는 바지대로, 구두는 구두대로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나도 웃옷을 벗고 막 바지를 벗으려는데 지프차를 타고 온 사람이 옷은 입히라고 명령해서 다시 입었다. 그리고는 공무원 버스(법원 버스인 것 같았다)에 태워 머리를 숙이게 하고는 곤봉으로 등을 때렸다. 버스는 달리는데 커튼에 가려 어디로 끌려 가는지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잠시 후 도착한 곳은 서부경찰서였다. 수용인원이 이미 다 찼다고 해서 차에 그대로 있는데, 아줌마들이 빵과 우유를 넣어주었다. 하지만 그런 상태에서 무엇이 넘어가랴! 고스란히 남겨둔 채 또다시 끌려간 곳은 31사단이었다. 오후부터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연병장에 천막을 치고 가마니를 깔아주었다. 담요 한 장에 몇 명이 붙어서 잤는지는 기억에 없지만 가마니 위로 비가 축축하게 젖어들어 몹시 추웠다. 그렇게 하룻밤을 지새고 난 우리들에게 식사는 시민들이 해온 것을 두 끼인가 세 끼인가를 주었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군인들과 같은 식사를 하게 되었다. 그때 정웅 31사단장이 자기는 고향이 순천이라고 하면서 "광주가 고향은 아니지만 학교를 광주에서 다녔기 때문에 내 친구, 친지들은 전부 광주에 있다. 나는 광주 사람들한테 이렇게까지 무자비하게는 못 하겠다. 내 나름대로 여러분들에게 잘해주려고 노력하겠다. 그러나 부족한 점이 있다면 이해해 달라"고 했다. 정웅 사단장을 수행하는 부관이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다. 아마도 그 때 이미 군복을 벗기로 각오한 것 같았다.
정웅 사단장 때문이었는지 우리는 갖혀 있긴 했지만 그래도 좋은 대우를 받았다. 구타하지도 않았고 탈출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는 정도였다. 그러나 합동수사반에서 포로들을 분류하기 위해 재수사를 할 때는 심하게 구타를 당했다. 재수사가 끝나고 석방될 때 우리들이 "나가서 또 잡혀 두들겨맞느니 여기 있는 게 더 편하다. 밖에 나가 이유없이 또 폭행을 당하기는 싫다"고 하면서 나가기를 거부하자, 군인들은 왼쪽 팔에다 도장을 하나씩 찍어주면서 미리 연락해 놓을 테니 염려 말고 팔을 보여주라고 했다. 그러고는 광주교도소 뒤쪽 고속도로에다 내려 주었다. 집 앞까지 데려다달라고 했지만 군인들에게 팔만 보여주면 된다고 하면서 돌아가버렸다. 우리는 고개를 숙이고 걸어서 서방에 도착했다.
다시 가정으로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때는 이미 시민군에 의해 광주가 해방구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우리들을 외곽지대에 내려주었던 것 같다. 나는 서방에서 시민군에 의해 운행되는 버스를 얻어타고 대인동 집으로 돌아와 끙끙 앓기 시작했다. 5월 19일 부상을 당했을 때 부모님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이나 알자고 경찰서로부터 교도소까지 안 찾아다닌 곳이 없고 도청, 상무관 등 시체마다 얼굴을 확인하고 다니셨다고 한다. 석방되어 집에 돌아왔을 때는 온 집안이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아버님이 평소 나이는 드셨어도 처세를 잘하셨기 때문에 주위사람들이 모두 찾아와 살아 돌아온 것만도 천만다행이라고 위로했다. 아내의 극진한 보실핌으로 몸은 차차 좋아졌지만 내가 하고자 한 일과는 너무 멀어져버렸다. 당시 그 작업을 계속했더라면 분명 그 방면으로는 유명해졌을 것이다. 그때만 해도 보통 40명씩을 데리고 다니면서 일을 할 때였으니까. 그런 와중에 큰애가 태어났고 부모님께서는 힘든 일은 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할 수도 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가장으로서 집에서 놀고 있자니 한심하고 광주가 싫어지기 시작했다.
1982년 처가가 금산이어서 대전으로 갔다. 어려서부터 나는 떠돌이 생활을 많이 했는데 한 가정의 가장이 되어서도 먹고 살기 위해 또 타향살이를 시작한 것이다.
나는 어머니가 두분이셨다. 한 분은 낳아주신 어머니, 한 분은 길러주신 어머니였다. 그 사실을 몰랐을 때는 공부도 잘하고 착실한 학생이었으나 주위 사람들로부터 어머니가 아이를 낳지 못해서 어머니 집안사람들이 서둘러 어떤 여자에게 아이만 낳게 하고는 내가 태어나자마자 데려와버렸다는 것을 알았을 때 충격을 받아 집을 뛰쳐나가고 말았다. 중학교 2학년생이 집을 나가 객지에서 할 일이 무엇이었겠는가. 신문팔이, 다방 청소, 식당 잡일, 안해본 일 없이 다 하면서 전전 했는데 부모님이 어떻게 알았는지 나를 찾아오셨다. 다시 2학년으로 복학을 했지만 2년이나 어린 애들과 함께 공부하기가 쉽지 않았다. 담임선생님께 정식으로 학교를 포기하고 나름대로 공부를 계속하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다시 서울로 가버렸다. 서울에서 일을 하면서 검정고시 준비를 했다. 열심히 하다가도 시험볼 때만 되면 웬일인지 반항기가 생겨 시험을 보지 않고 말았지만 일반상식 등 공부는 좀 했다.
명절 때면 남들은 조상들의 산소로 성묘를 가는데 우리 식구들은 아버지를 따라 '망향의 동산'으로 가곤 했다. 아버님은 늘 "살아 생전에 한 번만이라도 고향 땅을 밟을 수 있을까" 하며 비통해 하셨다.
그런 어린 날의 기억 때문에 나이가 들면서부터는 부모님을 위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길러주신 어머니가 어렸을 때는 그렇게 밉더니 점점 고맙게 느껴졌다. 열아홉 살이 되자 이렇게 보낼 것이 아니라 무언가 해보아야겠다고 결심을 했다. 그림에 소질이 있어서 그림도 잘 그렸지만 그것보다는 기술을 배우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았다. 그래서 건축 막일부터 시작해 타일(요업) 붙이는 기술을 익혔는데 손재주가 있어서 남들보다 빨리 배웠다. 그러던 중 아내될 사람을 만났고 나이는 어렸지만 결혼을 빨리 해야 된다는 생각에 광주로 내려왔다. 왜냐하면 부모님과 함께 살면서 아내도 교육시키고, 손자를 빨리 안겨드리고 열심히 일해서 지금껏 못 한 효도도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또 그렇게 광주를 떠나간 것이다. 1982년 광주를 떠날 때는 몸이 다 나았다고 생각하고 허리에 가끔씩 통증이 오는 것은 맞아서 그러려니 했다. 대전에 올라가서 처음에는 일거리도 없을 뿐 아니라 직접 일을 할 형편도 못 되어서 처가 집에서 쌀도 가져다먹고 집에서 생활비를 가져가기도 했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지 계속할 수는 없었다. 내가 직접 일을 못 하면 머리로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빚을 내어 일을 시작했다. 그러나 내 손으로 직접 일을 하면서 공사장을 뛰 어다닐 때와는 달리 일이 잘 안 풀렸다. 2년 동안 빚은 늘어갔고 전세에서 사글세로 전전하다가 급기야는 나앉을 자리도 없게 되어버렸다. 애는 둘이나 되는데, 아내를 부둥켜안고 운 적도 많았다.
부상 치료
그러던 차에 누가 외국에 가면 국내에서 일하는 것보다 더 편하고 눈치봐가면서 살 필요도 없다고 해서 외국으로 나갈 결심을 했다. 아내에게 차마 입이 떨어지지를 않았지만 "우리 잠시 헤어져 있어야겠네. 돈도 없으니 금산 집으로 가서 어떻게든 편한 대로 있소. 어른들 곁에 있어야 내 맘이 좀 놓일 것 같으니" 하면서 아내를 달래 광주 부모님께는 숨겨달라고 하고는 광주에 있는 이종누나에게만 전화를 했다. 김포공항에서 언제 떠난다고... 그런데 떠날 날이 되어 김포공항엘 나갔더니 부모님들께서 먼저 나와 계셨다. 연로하신 부모님을 뵈니 '내가 무엇이 부족해서 이렇게 살아야 하나' 싶어 눈물이 마구 쏟아졌으나 사우디아라비아를 향해 비행기에 올랐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대림건설 타일기술공으로 한 달 가량 일을 했는데 가끔씩 있던 허리 통증이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심해졌다. 허리 통증이 다리에까지 내려와 걷지도 못하고 급기야는 마비상태가 되어버렸다. 무슨 병이냐고 물어도 가르쳐 주지도 않고 수술을 하라고만 했다. 나는 속으로 그때 맞은 것이 일을 하니까 악화되었나보다 생각했지만 사실대로 말을 못 했다. 6개월이 못 되었기 때문에 왕복비행기료를 부담할 일과 치료비 부담이 걱정되어 사실대로 말을 못 하고 "나는 여기 기술을 못 믿겠다. 국내로 보내달라"고만 했다. 한 달 후엔 국내로 보내져 전남대 병원에서 수술을 했다. 추간판탈출증이라고 했다. 서울 순천향병원에서 2차 수술까지 해야 했다. 대림건설과 보험회사(외국에 나가면 전부 보험에 가입함)에서 치료를 해주었는데, 내가 만약 정식으로 일을 하다 다쳤다면 법정투쟁을 해서라도 평생 먹고살 것을 마련했겠지만 양심상 완쾌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빨리 퇴원을 해버리고 말았다. 디스크 환자는 보통 치료하는 데 3, 4년이 걸렸고 산재환자이기 때문에 가만히 있어도 60퍼센트의 월급이 나오게 되어 있었다. 본의 아니게 대림건설에 피해를 입히고 말았다. 퇴원을 했지만 서너 달 동안은 걷지를 못했고 합병증으로 비만증세를 보여 5분 이상 서 있지도 못해 누워 있거나 앉아 있는 것이 고작인 몸으로 다시 광주 부모님 곁으로 돌아왔다.
나는 보상을 바라고 신고를 한 것은 아니었다. 이미 대림건설을 통해서 보상을 받고 치료를 받았으니까.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광주의 명예를 회복하고자 노력하고 있는데 억울하게 당했던 한 사람으로서 나도 증인이 되고 싶어 신고를 하게 되었다. 물론 허리는 한 번 수술하고 치료했다고 해서 완쾌되는 게 아니어서 일도 못 하고 부부생활 하는 데도 불만족스러운 점이 많지만 말이다. 1987년 9월 1일부터 나는 어느 분의 도움으로 조그마한 카페를 경영하기 시작했다. 이런 장사엔 경험이 없어서 애로사항이 많았고 밤에 영업을 하기 때문에 부모님과는 떨어져서 살아야 하지만 밥 먹고 살 정도는 된다.
1987년 10월에 1980년 그 힘든 상황에서 낳고 기른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어버리는 아픔을 겪었고, 아직까지는 부모님 찾아가서 먼저 안부를 여쭤야 하는데 그 반대가 되어 세상을 거꾸로 살고 있는 형편이다.
나는 많이 배우지는 못했지만 사회인으로서 독특한 역할을 하고 싶었는데 국민이 키워준 군이 어떻게 그렇게 무자비할 수가 있을까 의심스럽다. 분명 누군가 위에서 시킨 사람이 있으니까 그렇게 했을 것이다. 밝혀질 것은 밝혀지고 용서해 줄 것은 용서해 주어야 하지만 하루 빨리 폭도라는 누명이 벗겨지고 모든 국민들이 광주를 재인식할 수 있도록 진상규명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번에 박옥재 씨 5·18 부상자협회에서 연락이 와서 부산을 한 번 다녀온 적이 있다. 그때 아주 사소한 일로 서로 다투고 언성을 높이는 것을 보았다. 광주 사람들이, 그것도 억울하게 부상을 당한 동지들이 타지에서 그렇게 사소한 일로 다투는 것을 보았을 때 정말 실망했고 또 부끄럽고 가슴이 아팠다. 1980년 나는 참여해서 맞은 것도 아니지만 그런 불미스러운 일을 보고는 그 후 몇 번 연락이 왔지만 나가지 않고 있다. 앞에서 내세우고 하는 것보다 나름대로 제 할일 하면서 열심히 살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이다. (조사.정리 장옥근) [5.18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