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
우리가 느낄 때 그 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 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 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도종환의 시 ‘담쟁이’) 좋아하는시라 한번 괜히 인용해 보고....
또스또엡스키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어린나이에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는 농민들의 손에 맞아 죽습니다.,
졸지에 고아가 된 그는 천형인 간질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툭하면 길거리에서 거품을 물고 쓰러지던 그는
세상에 대해, 신에 대해 적개심과 분노밖에 남은 것이 없습니다.
그에게 세상은 뒤집어져야 할 대상일 뿐입니다.
신이란 없는 것이고, 기독교 신자란 권력에 빌붙어 기생하는 자들입니다.
가차 없이 숙청해야 할 대상들일뿐입니다.
그는 혁명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28살에 체포되어 사형을 언도받습니다.
그러나 사형 집행 직전 황제의 사면으로 인해 극적으로
살아나 시베리아 유형을 떠나게 됩니다.
시베리아 유형을 가는 도중 한 기차역에서
이름모를 여인이 전해준 신약성경을 받아 듭니다.
이것이 그의 인생을 바꿉니다.
러시아 제정 당시 시베리아 유형이라는 것은 사형에 다름 아니었다고 합니다.
상상할 수 없는 추위, 부실한 음식으로 인한 영양실조,
간수들의 무자비한 폭력에 6개월도 버티지 못하고 70-80%의 죄인들이 죽어가는 처참한 곳이었습니다.
간질병을 앓고 있었으며 육체적으로 약했던 그는 성경을 읽으면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합니다.
놀랍게도 가장 한과 미움이 많았던 그가 예수님을 만나면서
그분의 사랑 안에서 모든 미움과 한을 날려버립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유형지에서 견딜 수 있는 체력과 믿음을 허락하십니다.
4년 만에 시베리아에서 풀려나 돌아온 그가 한 말입니다.
“세계적인 과학자가 예수가 허구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할지라도
나는 십자가에 매달려 내 죄를 사하신 그분과 함께 하겠다.”
그는 바로 러시아의 세계적인 문호 도스토예프스키입니다.
유형지에서 돌아온 그는 그곳에서 만난 예수님과 사람들의 삶,
당시 러시아의 생활상, 그리고 그 자신과 가정을 배경으로 한 소설들을 집필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라면 ‘죄와 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있지요.
세계적인 불후의 명작이기도 하지만,
기독교문학사의 한 획을 긋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가장 세속적인 욕정을 가지고 탐욕한 삶을 사는 아버지,
순수하기는 하지만 무절제하여 방탕에 쉽게 빠지는 큰 아들,
대학출신의 수재이지만 오만한 무신론자인 둘째 아들.
수도원에서 성장하여 기독교적인 사람으로
순수하고 성결한 박애주의자로 성장한 셋째 아들,
사생아로 태어나 편집광적인 간질병환자인 넷째 아들의 삶과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지요.
제가 보는 관점으로 도스토예프스키가 하고 싶었던 말은
세상에서의 승리의 삶이란 겸손하고 온유한 사람들의 몫이라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넷째아들에게 살해당한 아버지, 아버지를 죽이고 돈을 훔친 넷째 아들의 자살,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누명을 쓰고 20년의 형기를 선고받은 큰 아들,
자신의 이성과 능력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던 둘째아들의 좌절,
그러나 자신을 멸시하고 모욕을 주는 사람마저 용서하고
온유와 겸손과 사랑으로 모든 악함을 감싸 안는 셋째 아들,
셋째 아들은 작품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경외심을 불러일으킵니다.
작가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셋째 아들 알료사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순전히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썼다고 괜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건...
아닌지...다만 세계적 문호 도스트에프스키의 삶의 과정을 잠시
살펴본 것입니다.
필요이상의 오해는 없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