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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지와 한확의 차원부 관련 글에 대한 고찰
1. 양성지의 《눌재집》
양성지(梁誠之, 1415~1482)는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관직이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그의 저서에 《눌재집》이 있는데, 그곳에 양성지가 썼다는 차원부 관련 시가 실려 있다. 이것만 보면 차원부에 대한 기록이 1482년 이전에도 존재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더구나 양성지라는 인물이 직접 시를 썼으니 차원부의 행적에 대한 중요한 증거가 된다. 실제 어떤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분이 이렇게 썼다.
“양성지(1415~1485)의 문집 《눌재집》에 〈제 차원부 설원기독후기〉가 있으며 이는 설원기가 1485년 이전에도 존재했다는 증거이다. 따라서 이수건 교수가 차원부 설원기의 저자로 지목한 차천로 삼부자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으로 판명된다.”
여기서 두 번째 문장은 문맥에 맞지 않게 어색하게 쓰였는데, 양성지의 《눌재집》을 보면 설원기가 차천로 3부자(차식, 차천로, 차운로)에 의한 위작이라고 2007년의 논문에서 밝힌 이수건 교수의 주장이 거짓이라는 뜻의 말이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눌재집》은 이미 《대호하루”》(류주환 저) 214~215 페이지에서 상세히 살펴본 사항이다. 거기서 《눌재집》은 절대로 차원부나 설원기의 증명으로 이용될 수 없음이 논증되어 있다. 이미 이 단행본은 위 글을 쓴 책임자 분에게 2012년 상반기에 직접 기증이 되었다. 그런데도 위와 같은 주장을 하고 있으니 할 말을 잊게 만든다.
그래서 다시 한 번 확실하게 하기 위해 그 내용을 여기서 재론하고자 한다.
우선 《눌재집》의 해당 구절을 보면 사안이 명백해진다. 그 원문은 다음과 같다.
(출처: 한국고전종합DB, http://db.itkc.or.kr/)
應制書車雲巖 原頫 雪寃錄後
巍巍星斗仰公名。一世皆知哲者情。如何恐怯三四達。不修公道護私程。
公自註。朴彭年累次陳達不書原頫罔僕之實跡者。只慮私門之後禍而然也。
제목에서 보면 《차원부설원기》의 이본 중 하나인 《차운암설원록》 뒤에 붙어 있는 응제시를 옮겨 쓴 것이 자명하고, 주석(A)에서도 ‘公自註(공이 스스로 주석을 달았다)’ 운운 하여 응제시 뒤에 붙어 있는 주석(S)을 가리키고 있다. 결국 이곳의 주석(A)에서도 제목에서도 이 글이 설원록에서 옮겨 적힌 것임이 명백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설원록(여기서는 《운암선생설원록》, 학음정판) 혹은 설원기(《차원부설원기》, 필사본)와 《눌재집》의 원문을 비교하면 설원기의 난맥상이 여실히 드러난다.
시: 눌재집: 巍巍星斗仰公名 一世皆知哲者情 如何恐怯三四達 不修公道護私程
설원기: 竹書曾恨乃君名 餘史明知哲者情 恐㥘如何三四達 不修公道護私程
주: 눌재집: 朴彭年累次陳達不書原頫罔僕之實跡者. 只慮私門之後禍而然也.
설원기: 彭年等不言原頫不就 國朝之意只護私門之後禍意也
설원록과 설원기는 여기의 원문은 동일하다. 먼저 시를 보면 설원기의 구절이 《눌재집》과 마지막 구(4구)만 동일하고 앞으로 갈수록 달라진다. 양성지가 여러 시를 쓴 것이 아니므로 《눌재집》의 편찬자가 참조한 이본은 설원기와 달랐음이 확인된다. 설원기가 여러 버전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왕명이라고 수백 번을 밝혀 놓고, 양성지의 시와 주석에서도 “臣梁誠之 奉 敎幷詩註”(신 양성지가 임금의 명을 받아 시와 주석을 씀)이라고 밝혀 놓았다. 왕명도 조작이고 양성지도 조작임을 이로써 여실히 알 수 있다. 《눌재집》의 주석은 설원기의 주석 가운데 마지막 부분, 곧 마지막 구절(不修公道護私程)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는 부분만을 옮겨 놓고 있다. 그런데 그 주석도 《눌재집》의 편찬자가 ‘公自註’라고 시작하여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 것인데 같은 뜻을 전달하고 있지만 구체적인 구절은 상당히 상이하다.
설원기의 서문, 본문, 응제시 가운데 본문에서는 곳곳에 여러 신하들이 ‘왕명으로’ 달았다는 주석이 주어져 있는데 본에 따라 주석의 달려 있는 위치 등의 체재가 바뀌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서 각각의 말미에 한결같이 ‘왕명을 받들어 누구누구가 주석을 달았음’이라고 밝히고 있다. 도무지 왕명일 수가 없고, 누군가 조작해 놓은 본문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이 그 본문을 해설하는 주석들을 넣으면서 왕명과 저자들을 참칭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응제시 또한 본에 따라 저자의 수와 시의 수가 달라지며, 주석은 아주 천편일률적이다.
위에서도 《눌재집》의 시와 설원기의 시의 상이점이 지적되었는데, 《대동운부군옥》이나 《해동잡록》 등, 비교적 설원기가 조작된 시기에 가까운 문헌에 인용되어 있는 다른 몇몇 응제시들에서도 유사한 일이 발견된다. 특히 《군옥》에 나오는 권반의 시는 설원기에 나오는 것과 다른 구절이 인용되어 있는데 확인해 보면 그것은 설원기에 나오는 이석형의 시와 유사한 구절이다. (《대호하루》, p. 211.) 이것은 응제시가 조작된 것이 아니면 불가능한 상황이다.
설원기는 들여다보면 볼수록 왕명으로 지어진 것일 수 없다. 본문의 끝에 “1456년 5월 17일 가정대부 행 형조참판 박팽년이 왕명을 받들어 삼가 기록함”이라고 밝혔는데, 박팽년은 그때 형조참판이 아니었다. 왕명도 거짓일 뿐만 아니라 박팽년이 지었다는 것이나 그 날짜도 조작임이 확연히 드러난다.
그런데 위에 언급된 책임자는 《눌재집》의 글의 제목이 〈제 차원부 설원기독후기〉라고 쓰고 있다. 스스로 문헌을 보지 않는 듯하며, 이미 제기된 문제점도 무시하거나 알지 못하고 있다. 무슨 논의를 더 할 수 있을지 막막한 심정이다.
《눌재집》은 한국고전종합DB의 해제(김기빈(金圻彬) 작성)를 보면 “저자의 시문은 원래 주의(奏議) 10권ㆍ가집(家集) 6권이 있었다고 하나 후손이 미약하고 병란에 산일(散佚)되어 남아 있는 것이 십수 통뿐이었”기 때문에 정조가 명하여 양성지의 글을 모아서 1791년에 비로소 간행되었다는 문헌이다. 그때는 설원기(설원록)가 널리 퍼져 있어 그 안에 들어 있던 글 하나가 양성지의 작품으로 위작되어 있는 것을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넣은 것이다. 반면에 영조 때의 저명한 문신이었던 홍계희(1703~1771)는 1768년에 하위지의 유고집인 《단계유고》를 간행할 때, 설원기에서 하위지의 글로 명기되어 있는 서문을 싣지 않았고, 아예 “차원부설원기의 서문은 그 문자가 황잡하고 비루할 뿐만 아니라 ..... 뒷사람이 이름을 가져다 붙여서 거짓으로 지은 것이니 ... 그래서 뜻을 결단하여 깎아버리고 여기 그 사실을 기록한다”고 확실하게 밝히고 있다.
2. 한확
한확(1400~1456) 관련해서 이런 주장이 있어왔다.
“《위키백과》의 한확(韓確, 1400~1455*)을 보면 그의 저서에 〈고려 후기 문신 차원부를 애도하는 치제문〉이 있는 것을 보면 차원부의 치제가 있었다고 확인할 수 있다.” (*1455는 1456의 잘못임)
위키백과는 유용하고 가치가 있지만 그 작성이 일반 사용자들에게 열려 있기 때문에 공신력을 담보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과연 위키백과의 ‘한확’ 항목을 보면 그의 작품에 유일하게 〈차원부 치제문〉이 언급되어 있고, 본문에도 “작품으로는 고려말기의 문신 차원부를 애도하는 치제문이 있다.”고 밝혀져 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한확은 누이들이 명나라 황제의 후궁으로 들어갔고 자신의 딸들도 세종과 세조의 아들들에게 시집갔으며, 그는 성종의 외할아버지가 된다. 이런 배경도 크게 작용했을 뿐만 아니라 인품도 훌륭해서 명나라와의 외교뿐만 아니라 국내 정치에서도 큰 활약을 펼쳤다. 그는 특히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세조)을 적극 도왔으며 명나라를 설득하여 수양대군의 입지를 확립해서 세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그의 시호는 양절(襄節)이다.
그런데 그의 역할과 비중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집이나 저술이 전혀 남아 있지 않는데, 유독 위키백과에서 〈차원부 치제문〉을 언급하고 있어 그 연유가 궁금했다. 그런데 그 의문은 《청주한씨양절공파족보》를 보고 풀렸다. 그 141 페이지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襄節公께서 累代王朝에 內外重職을 역임하시었고 오랫동안 相府에서 總百官하고 理陰陽하여 經國濟世에 功勳이 至大함은 史策에 昭然하나 그 經綸과 行蹟을 說話나 文字로 體系的으로 編著된 傳記가 없고 宿德僚友와 傾國名士間에 往復된 事物論評이나 詩賦贈答 等 貴重文籍이 不少할 것으로 推考되나 至今에 傳하는 것이 없음은 實로 哀惜한 일이다. 多幸이 應製詩一編이 傳하여 있으므로 公의 高雅한 詩格을 欽慕할 수 있기에 여기 收錄한다.”
한자가 많지만, 대략 “한확이 여러 대의 왕조에서 고관(高官)으로서 큰 활약을 펼쳤으므로 여러 저술이 있었을 터이지만 지금 전하는 것은 없어 애석하다. 그러나 다행히 응제시 한 편이 전하니 여기 싣는다.”는 뜻이다. 그리고는 다음 내용이 이어진다.
“車原頫伸雪後應製 臣確奉敎幷詩註
차문절공원부(문절공 차원부)는 전조(前朝, 고려) 때의 간의대부로서 평산의 수운동에 은거하였더니 아(我, 우리) 태조가 옛 친구로 벼슬을 주어 불렀으나 이를 사퇴(謝退)하니 하륜 정도전 등이 참소해서 이를 살해하고 그 일족 70여명을 멸망시켰다. 태종이 그의 억울함을 알고 이를 신원해주고 찬성(벼슬 이름)으로 증직(贈職)하였으며 하위지에게 하명하여 설원록을 서술(序述)케 하고 다음은 공에게 하명이 있어 응제한 신원시(伸寃詩)다. [시 해석은 인용을 생략함.]
原詩
一路芟夷五老豪 幾年幽枉恨滔滔 絲綸昨夜呼丹鳳 匝城賢愚競頌褒
又
松路重原五老豪 幾年眛枉怨憂勞 絲綸昨夜呼丹鳳 能智愚蒙罄頌褒”
참고로 설원기(설원록도 동일)에 나오는 한확의 응제시를 제시한다. 여기에는 한 편만 주어져 있다.
松路重原五老豪 幾年昧枉怨憂勞 絲綸昨夜呼丹鳳 能智愚蒙罄頌褒
이는 양절공파족보에 나오는 시 중 두 번째와 실제 동일하다(眛=昧). 우선 양절공파족보에 두 개의 시가 실려 있는 연유가 궁금한데 더 이상 정보는 없다. 일단 두 개의 시라고 볼 수 있겠지만 두 개의 시 혹은 두 수로 이루어진 한 개의 시를 지을 때 결코 저렇게 세 번째 구가 동일하고 나머지도 상당히 유사하도록 짓지 않는 법이다. 그래서 위의 양성지의 경우처럼 두 버전이 돌아다니는 것을 함께 실은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설원기는 왕명을 참칭하고도 정립된 버전이 존재하지 않는 황당한 문헌임이 여기서도 드러난다.
위의 인용에 대해 토론해 보면, 우선 제목 “車原頫伸雪後應製 臣確奉敎幷詩註”은 설원기(설원록)의 시를 옮기고 있음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臣確奉敎幷詩註”는 설원기에서 응제시와 주석의 끝에 천편일률적으로 붙이는 형식이다. (참고로, 신하가 임금에게 외람되게 자신을 이름(성을 제외한 부분)만으로 칭하지 않을 것이니 臣確은 臣韓確의 오기임에 분명하다.)
그리고 그 제목 아래의 설명은 족보 편찬자의 것인데, 《차원부설원기》의 내용을 요약하고 있다. 이 글은 《차원부설원기》의 비평 자체가 목적은 아니지만 그에 대해 간략히 언급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우선, 이 요약 자체에도 역사적 오류가 들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차원부가 일족 70여명과 함께 살해당했다고 주장되는 시점은 태조 때의 왕자의 난 이후이다. 왕자의 난은 1398년 8월 26일에 발생했다. 하륜은 1347년에 태어나서 1416년에 사망했고, 정도전은 1337년경(추정)에 태어나서 바로 그 왕자의 난이 일어나던 날 살해당했다. 이방원이 정도전 일파를 제거하고 정권을 잡기 위해 벌인 것이 왕자의 난인 것이다. 그런데 위 설명에서는 하륜, 정도전 등이 차원부와 그 일족을 참소해서 살해하고 멸망시켰다고 적시되어 있다. 하륜은 그렇다고 하고, 정도전은 어떠한가. 이미 정권싸움에서 참혹하게 처형된 인물이 어떤 왕에게 참소하고 차원부 일족의 살해의 주동자 중 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은 도무지 정상은 아니다. 또 여기의 왕은 대체 힘을 잃고 곧 정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태조란 말인가, 아니면 이미 정도전을 죽인 태종이란 말인가. 또한 여기서는 차원부 살해의 주동자가 ‘하륜 정도전 등’이라 되어 있지만 설원기의 묘사에 따르면 ‘정도전, 조영규, 함부림, 하륜’의 네 명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 중 조영규도 역시 이미 1395년에 죽은 인물이다. 조영규와 정도전 같은 죽은 인물들이 차원부와 그 일족을 살해했다고 말도 되지 않는 주장을 하는 문헌이 곧 설원기(설원록)이다. 필자의 표현대로 하면 《차원부설원기》는 바로 ‘유령의 놀이터’인 것이다.
또한 위 설명 가운데 한확 관련 묘사에도 근본적인 문제가 내재해 있다. 설명에서는 태종이 하위지에게 설원록을 서술케 한 다음 공(한확)에게 응제시를 지으라 명해서 지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는 한확에게만 응제시를 지으라고 한 것처럼 묘사되어 있지만 설원기를 보면 여러 신하들과 재야 사림(士林)들에게도 응제시를 지어 바치라고 했다고 묘사되어 있다. 그런데 설원기의 서문은 하위지가 지었다고 나온다. 그 끝에 보면 “1456년 5월 21일 가정대부 행 예조참판 하위지가 왕명을 받들어 삼가 서문을 씀”이라고 나와 있다. 이 날은 박팽년이 본문을 지었다는 5월 17일에서 나흘째 되는 날이다. 그렇다면 응제시를 지으라는 명령은 1456년 5월 21일 이후에 내렸을 것이다. 실제 응제시 가운데는 박팽년의 본문을 보고 지었다는 표현이 나오는 것도 있다. 여기서 혹시 독자들께서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는지 모르겠다.
곧, 바로 며칠 후인 6월 2일 사육신 난이 일어난 것이다. 설원기 서문의 저자라 하는 하위지는 8일에 처형되고 박팽년은 고문을 받다 7일에 죽었다. 도무지 설원기를 보고 응제시를 낸다는 것이 시간적으로 불가능하다. 더구나 한확은 5월 초에 명나라에 사은사로 떠났다. 실록에는 4월 27일 기사에 “좌의정 한확(韓確)·형조 판서 권준(權蹲)을 보내어 표문을 받들고 명나라에 가서 고명(誥命)·관복(冠服)·채단(綵段)의 흠사(欽賜)를 사례하고, 겸하여 세자 책봉(冊封)을 주청(奏請)하게 하였다.”고 기록하고 또 “환관(宦官) 전균(田畇)을 보내어 선온(宣醞)을 가지고 한확 등을 전송하게 하고, 승지(承旨)에게 명하여 당직(當直)을 제외하고 모두 가서 참여하게 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사육신난이 일어난 6월 2일의 실록 기사에서도 성삼문의 말로 “좌의정(左議政) 은 북경(北京)에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아니하였다.”는 진술이 나온다. 좌의정은 바로 한확을 지칭한다. 한확은 9월 11일 명나라에서 돌아오다 명나라 땅에서 죽었다. 그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조는 사육신 사건의 난신(亂臣)들의 노비와 재산을 처분할 때 한확에도 내려주었고 그 가운데는 하위지의 선산 전지도 포함된다. (“조선 초기 한확의 생애와 정치활동”, 한희숙, “한국인물사연구” 제18호, 2012)
따라서 한확은 아무리 해도, 5월 21일 저술된 하위지의 서술(序述)이 있은 다음 왕이 응제시를 쓰라는 명을 받아서 시를 써서 제출할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응제시의 48명의 저자들 중에는 설원기가 완성되었다고 하는 시기에 이미 죽어 있던 사람이 여럿이며, 어리거나 행적이 맞지 않아 응제시를 쓸 수 없는 사람도 여럿이고 심지어 마지막 응제시의 저자 남효온은 당시 만2세였다. 역시 설원기는 ‘유령의 놀이터’임이 확실하다.
이상을 종합하면 양절공파족보에 나온 설명은 전부 거짓이며 취할 것이 없다. 이것은 그 족보의 오류가 아니라 설원기 자체에서 비롯된 오류이다. 대개 차원부는 설원기에서 처음 묘사되었고 설원기는 저자들과 내용이 모두 철저히 위조된 위서(僞書)이다.
한확의 경우는 후손들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다른 저술이 모두 사라졌기 때문에 설원기에 있는, 그의 이름으로 되어 있는 글을 보고 반가운 마음이 앞서겠지만, 유독 문제가 되는 설원기에 실려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우선 그것이 정말 한확의 글인가를 의심해야 할 것이다. 한확은 문관이 아니면서 재상이 되었다고 한다(실록의 광해 4년 9월 15일과 9월 16일 기사). 이 점도 그의 글이 남아 있지 않은 사실에 하나의 배경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위키백과에는 한확의 작품으로 차원부 관련 “응제시”나 그 유사한 구절이 들어간 제목의 것이 아니라 “차원부 치제문”이라고 되어 있을까. 그 연유는 집필 당사자밖에는 알 수 없겠지만 짐작은 해보았다. 곧, 앞에 살펴본 양절공파족보의 페이지의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여기에 보면 중간에 “치제문”이란 제목이 있고, 그 오른쪽에는 설원기 관련 글의 마지막 부분이 있고, 왼쪽에는 한확에게 내린 “치제문”의 처음 부분이 있다. 혹시 위키백과의 한확 항목을 작성한 사람이 이것을 보고 차원부 관련 글의 제목이 “치제문”이라고 착각한 것은 아닐까. 세로 줄글이 익숙지 않은 사람이라면 할 만한 실수일 것이다.
아무튼, 한확의 경우 결론은 확실하다. 한확의 작품은 남아 있는 것이 없고, “차원부 치제문”이란 제목의 글을 쓴 적이 없으며, 한확의 이름으로 쓰였다고 유일하게 남아 있는 응제시는 위서 설원기에 들어 있고 그 신빙성은 전무하다는 것이다.
실제 설원기에서 저자가 위조되어 있는 글들, 특히 응제시들이 그 저자의 진짜 작품인 양 다른 문헌 속에서 인용된 것은 설원기가 세상에 나오고 나서 곧 시작되었다. 양성지의 《눌재집》의 경우처럼 그 인물들의 개인 문집에도 들어갔고, 인물들의 전기를 묘사하는 문헌에도 들어갔다. 그것이 다시 설원기의 부록이나 설원기를 다루는 다른 문헌에 재인용되면서 마치 정말 그 저자들이 그 응제시를 지은 것처럼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또한 설원기에서 여러 인물들에 대해 꾸며진 에피소드 형태의 일들도 마찬가지 운명을 겪어왔다. 그 후손들은 조상의 글이나 행적으로 믿어 어떻게든 신봉하고 싶겠지만 화려한 거짓을 믿는 것보다는 소박한 진실을 믿는 것이 더 정의롭고 가치 있는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설원기가 깊게 내린 거짓의 뿌리를 제거하는 일은 참으로 지난(至難)한 일이다. 이것은 특정 가문 혹은 가문들 사이의 일이 절대 아니다. 필자는 오히려 배타적으로 가문을 중시하는 관점에 극력 반대하는 입장이다. 그 일은 대한민국의 역사와 사회에 내재해 있는 부조리와 부당함을 제거하는 일의, 작지만 중요한 한 예라고 믿는다. 부디 뜻 있는 분들의 동참을 바라마지 않는다.
4346년 4월 6일
류주환
첫댓글 "《눌재집》의 경우처럼 그 인물들의 개인 문집에도 들어갔고, 인물들의 전기를 묘사하는 문헌에도 들어갔다. 그것이 다시 설원기의 부록이나 설원기를 다루는 다른 문헌에 재인용되면서 마치 정말 그 저자들이 그 응제시를 지은 것처럼 인식되기에 이르렀다."는 것처럼 2000년 이후에도 다른 문헌에서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입니다.
[차원부설원기]는 비굴(卑屈), 비겁(卑迲), 용렬(庸劣) 졸렬(拙劣)의 표본으로 품성이 천하고, 줏대 없이 떳떠하지 못함이 가득 채워져 있어서 많은 이들을 기만하여 왔고, 지금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는 위서(僞書)의 표본으로 한국사에 길이 남겨져 후인들에게 진실을 전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현재 위선(僞善)의 양파 껍질이 많이 벗겨지고 있습니다. 한미한 가문을 보상하기 위하여 400여 년을 지탱하여 온 그 끈잘긴 생명력을 감탄합니다. 허나 손바닥으로 역사의 진리를 가릴수는 없을것입니다. 참은 거짓을 용서하지 않습니다.
한미한 가문이라 평생 자기능력에 못미치는 출세의 한을 사육신 사건이후 시대적 상황과 군주제 정보폐쇄의 약점을 이용하여, 한풀이식 소설로 써 놓은것이, 시대가 지나 왕조실록등의 진실확인이 어려운 상태에서 유비통신식으로 유림들에게 유포되어 욕구를 총족시키는 베스트셀러로 됨에 따라, 점점 족보에도 활용하며 대낮같은 정보화 시대에
시조찬탈 쿠테타를 일으켰으니, 제무덤 제가 판꼴이 되었군요 바로잡아 망신으로 돌려주는 일만 남았습니다.
잘 배우고 있습니다
차원부 자체를 부인할려니 위키백과사전까지도 부인해야 하고 청주한씨양절공족보까지 부인하게 되고 차문이 한미하다고해야 훌륭한 류문의 시조를 찬탈한 것이라는 주장이 그럴듯 할 것이다.전대에 일어난 일을 후대에 기록하다 보면 서술이 잘못 될 소지도 있는 법인데 부인할려니 아전인수격으로 짐작하고 해석하고 갖다 붙이는 우를 범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좌우지간 조금이라도 잘못된 점이 있어면 바루는 것이 옳지만 그 과정에서 양가문이 인정하지않고 확정된 사실이 아닌 것을 일방적으로 주장하면서 차문을 비하하는 말을 하는 것은 훌륭한 류문이 취할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위에 언급된 위키백과의 구절은 이미 수정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전 문헌들이 무엇이라도 잘못이 있으면 그 잘못은 지적되어야 마땅합니다. 우리나라의 가문과 족보 관련 글들에는 심한 과장이나 거짓도 많습니다. 그런 것들이 발견될 때 지적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양가문 ...' 운운은 귀하께서 실정을 전혀 모르고 한 말씀입니다. 문화류씨는 2008년부터 공식적으로 완전히 차문과의 선계의 혈연관계를 부인했습니다. 이것은 확정되고도 남은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