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한번은 《명상록》을 쓴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우스
(Marcus Aurelius Antonius)"를 만나게 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우스 제
[ ~帝 , Marcus Aurelius Antonius ]
출생 - 사망 :121. 4. 26. ~ 180. 3. 17.
본명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Marcus Annius Verus)
직업 :로마 황제, 철학자
분야 :스토아 학파
시대 :로마
https://blog.naver.com/jydecor/222149989160
본명은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Marcus Annius Verus).
로마황제(재위 161~180). ‘5현제시대’ 최후의 황제.
루키우스 베루스 (Lucius Verus, 130~169)와 분할통치를
하였던 최초의 황제이며, 그 치세는 피지배 민족의 저항과
반란으로 어려움을 겪었던 시대였었다. 철학자로서도 유명하며,
『Eis Heauton』 12편 (자성록(自省錄)은 스토아철학의
대표작의 하나이다. 그의 초상은 많이 남아있으나 로마의
카피톨리노의 언덕(캄피토리오)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기마상』이 가장 유명하다. 그의 업적을 칭송한
기념원주가 로마의 피아차 콜로나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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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아 학파의 철학자이며 로마 황제.
그가 재위에 있던 무렵의 로마제국은 위기의 상태에 있었고
그것이 그의 철학사상에 표현되어 있다. 그의 스토아 사상은
이 파에 있었던 유물론적 특징이 모두 거세된, 종교적
신비주의에 가깝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의 근저인 신(神)은
보편적 이성이며, 인간 의식의 모든 것은 죽음 후에 이 이성 속에
해소된다고 하며, 윤리적 사고에는 숙명론이 지배하고,
겸허와 금욕을 주장했다.그가 기독교도를 박해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철학사상은 기독교에 영향을 크게 끼쳤다.
출처:네이버 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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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는 로마 제국의
제16대 황제(121년 4월 26일 - 180년 3월 17일)이다.
‘철인황제(哲人皇帝)’로 불리며, 5현제 중 한 사람이다.
중국의 역사서 《후한서》에 기술된 ‘대진국왕(大秦國王)
안돈(安敦)’이 바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라고 한다.
그러나 그의 죽음을 끝으로 로마 제국의 전성기는 끝났으며,
군인 황제 시대가 도래하였다.
[유년시절]
121년 4월 26일, 로마에서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와
도미티아 루킬라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3살 때 아버지가
죽자 3번 집정관을 연임한 할아버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베루스에게 입양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자질이 특출하였던
그는 하드리아누스의 눈에 띄었다.
[차기황제의 길]
136년 하드리아누스는 자신의 후계자로 당시 30세 안팎이었던
루키우스 케이오니쿠스 콤모두스를 지명하였는데, 같은 해
마르쿠스는 루키우스 케이오니쿠스 콤모두스의 딸 케이오니나와
약혼함으로써 일약 로마 정계 전면에 부상하였다.
그러나 138년 1월 1일 케이오니쿠스 콤모두스가 급사하자,
하드리아누스는 마르쿠스의 고모부인 티투스 안토니누스를
양아들로 맞아들여 새로운 후계자로 삼았는데, 나중에 그는
제위에 올라 안토니누스 피우스라 불린다.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하드리아누스의 명령에 따라 마르쿠스를
자신의 양아들로 입적하였다. 이 때 마르쿠스의 이름은 마르쿠스
아일리우스 베루스 카이사르로 바뀌었다.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나중에 케이오니나와 마르쿠스의 약혼을 파기시키고 자신의 딸
파우스티나와 결혼시켰다.
[치세]
161년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죽은 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케이오니쿠스 콤모두스의 아들 루키우스 베루스와 함께 공동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재위 첫해부터 본국 이탈리아와 그 주변에
걸쳐 기근과 홍수가 일어났다.
같은 해 파르티아가 제국 동방에 침입하여 반격에 나섰던 1개 군단이
궤멸당하고 카파도키아의 세다티우스 세베리아누스총독은 패전의
책임을 지고 자결하였으며, 대아르메니아 왕국이 파르티아의 영향권에
들어가는 사태가 일어난다. 이에 카파도키아 총독에 스타티우스
프리스쿠스를 임명하고 공동 황제 루키우스 베루스를 동방으로
보내어 파르티아 전쟁을 수행하게 했다. 그러나 전쟁에 관심이 없었던
루키우스 베루스를 대신하여 직접 전쟁을 수행한 사람은
아비디우스 카시우스였다. 그는 163년 동방의 남은 군단들을 이끌고
파르티아군을 격파한 뒤 대아르메니아 왕국의 수도 아르타크사타를
탈환했으며 165년에는 유프라테스 강 건너편까지 진격하고
166년 티그리스 강을 건너 파르티아의 심장부로 깊숙히 쳐들어가
철저히 격파했다.
한편 168년부터 게르마니아 전쟁이 발발해 이 과정에서 169년
공동 황제 루키우스가 죽었고 170년 봄부터 클라우디우스 프론토가
이끄는 로마군은 다키아 속주에서부터 북상해 대규모 공세를 감행해
게르만족들을 패주시켰으나 이 과정에서 사령관 프론토가 전사하고
2만 명이 포로로 끌려갔다. 설상가상으로 270년 만에 북부 방위선이
뚫리면서 게르만족이 이탈리아 북부까지 쳐들어왔으며, 이에 대응하여
황제는 4개 군단을 신규로 창설했다. 뿐만 아니라 171년 북아프리카
속주에서는 마우리타니아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히스파니아까지
쳐들어와 눌러앉는 사태가 발생하였고, 마르쿠스는 베테랑 장군
아우피디우스 빅토리우스를 파견해 이를 진압했다.
172년부터 본격적인 제1차 게르마니아 전쟁이 시작되어 빈과
베오그라드에서 동시에 공세를 감행했으나 도나우 강 건너편에서
근위대가 패배하고 근위대장 빈덱스가 전사하는 등 성과가 좋지
않았다. 그러자 173년부터는 각개격파작전으로 선회하여 전쟁을
우세하게 이끌었고 174년 강화가 성립되었다.
175년에는 시리아 총독 아비디우스 카시우스가 마르쿠스가 죽었다는
오보를 접하고는 황제를 자칭하며 반란을 일으켰다가, 소문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불안에 빠진 부하들에 의해 암살당했다.
177년그때까지의 5현제의 관습을 타파하고 친아들인 콤모두스를
자신의 후계자로 결정하여 5현제 시대는 끝나게 된다
[죽음]
178년에 시작된 제2차 게르마니아 전쟁에서 로마군은 집정관 율리우스
베루스가 전사함에도 불구하고 보헤미아(현재의 체코)에서 대공세를
펼친 결과 마르코마니족, 콰디족, 야지게스족을 압도하며 전황을
우세하게 이끌었다. 그러나 180년 3월 17일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도나우 강변의 군사기지였던 빈도보나(현재의 빈)에서 재개될 전쟁을
준비하던 도중 지병이 악화되며 병사하였다. 그의 시신은 테베레 강변의
하드리아누스 영묘에 안치되었으며, 원로원은 그를 신격화하였다.
[저서]
한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자신의 사색과 철학에 관한 내용을
토대로 쓴 《명상록》이라 불리는 에세이를 남겼다. 그는 정신적
스승이었던 에픽테투스(Epictetus), 세네카와 함께 스토아
학파를 대표하는 철학자이며,금욕과 절제를 주장하였으며 수많은
명언을 남길 정도로 공부를 많이 하였다. 전쟁터에서 틈틈이 쓴
그의 명상록 12편은 로마 스토아 철학의 대표적인 책으로
일컬어지고 있다.그는 언제나 인정이 많고 자비로워 백성을 널리
사랑하였다. 그의 유명한 저서인 《명상록》에는 철학인으로서의
그의 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출처: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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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의 역사에서 황금시대로 간주되는 로마제국의
오현제(吳賢帝)중 마지막 황제는 스토아 학파의 대표적
철학자이기도 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우스
(Marcus Aurelius Antonius)이다.
그의 유명한 ‘명상록’은 에픽테투스(Epictetus)의
‘교설(Encheiridion)’과 함께 스토아 철학의 경전으로
평가 받고 있는데, 특히 포괄적인 설득력과 심층적인
영향력에 있어서 가장 높게 평가되는 고전 중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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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한번은 《명상록》을 쓴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우스
(Marcus Aurelius Antonius)를 만나게 된다...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스토아학파의 지혜로부터 배우는 마음 평온의 기술
《명상록》을 쓴 사람은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우스
(Marcus Aurelius Antonius),
121~180(재위 161~180)다. 철학자가 되고 싶었던
그는 인생의 대부분을 전쟁터에서 보냈다.
죽음을 맞이한 곳도 전쟁터였다. 그는 생사를
넘나드는 매일의 곤경 속에서도 삶에 대한 고뇌와
자신에 대한 성찰을 담은 글을 수시로 적었다.
그렇게 모인 짧고 긴 글들은 《명상록》이라는
한 권의 책이 되었다. 《명상록》의 원제는
‘Ta eis heauton’이다. ‘자기 자신에게’라는 뜻이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은 그가 자기 자신에게
가 닿기 위해 쓴 글인 것이다. 그 성찰의 기록은
아우렐리우스에게 삶의 기술이 되었다.
어떤 원칙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스스로에게
일러 주는 매뉴얼이었고 개인의 철학이었다.
문화일보 편집기자 유인창은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을 읽고 난 후, 자신에게도 자기만의 삶의
기술이나 인생 매뉴얼이 있으면 하는 생각이 절실했다.
그래서 아우렐리우스가 조용히 자기 자신에게 말을
걸었듯, 유인창 또한 그 길을 따라간다...
출처:명상록을 읽는 시간(유인창)-책소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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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http://blog.daum.net/cozygarden/117761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