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천(醴泉)은 경상북도(慶尙北道) 북서(北西)쪽 끝에 위치(位置)하는 지명(地名)으로 본래(本來) 변진미리미동국(弁辰彌離彌凍國)이라는 소국(小國)이 있었다. 신라(新羅) 영역(領域)으로 들어가 수주현(水酒縣)이 되었고, 757년 신라 경덕왕(新羅 景德王 16년 예천군(醴泉郡)이라 하였다. 935년 고려 태조(高麗) 太祖) 18년에 보주(甫州)로 개칭(改稱)하였다. 1012년 현종(顯宗) 3년 용궁군(龍宮郡)으로 고쳐져 상주목(尙州牧)에 속하였다. 1018년 현종(顯宗) 9년 안동부(安東府)에 편입(編入)되었다가 명종(明宗) 때 기양현(基陽縣)으로 승격(昇格), 1204년에는 지보주사(知甫州事)로 승격(昇格)되었다. 1416년 태종(太宗) 16년 예천군(醴泉郡)으로 개칭(改稱)되었으며, 1729년 영조(英祖) 5년 이인좌(李麟佐)의 난(亂)에 연루(連累)되어 현(縣)으로 강등(降等)되었다가 1738년 군(郡)으로 환원(還元)되었다. 1914년 군면(郡面) 폐합(廢合)으로 용궁군(龍宮郡)을 병합(倂合)하였고 1937년 예천면(醴泉面)은 읍(邑)으로 승격(昇格)되었다. 예천윤씨(醴泉尹氏)의 시조(始祖)는 고려조(高麗朝)에 추밀부사(樞密府使)를 지내고 예빈시소윤(禮賓寺少尹)에 추증(追贈)된 윤충(尹忠)이다. 문헌(文獻)이 없어 자세(仔細)한 내용(內容)은 상고(上考))할 수 없고, 그 후 후손(後孫)들이 여러 대에 걸쳐 예천(醴泉)에 세거(世居)하면서 윤충(尹忠)을 시조(始祖)로 하고 예천(醴泉)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界)를 이어왔다. 윤충(尹忠)의 아들 윤신서는 조선(朝鮮)에서 호조참의(戶曹參議)를 역임(歷任)했으며, 손자(孫子) 윤상(尹祥)이 태조(太祖) 때 문과급제(文科及第)하여 예조정랑(禮曹正郞), 사예(司藝)를 거쳐 대사성(大司成)에 올랐다. 그밖에 군기감정(軍器減定)을 지낸 윤창문, 부호군(副護軍)을 역임(歷任)한 윤이흥, 참판(參判)을 역임(歷任)하였던 윤계구 등이 예천윤씨(醴泉尹氏)의 가문(家門)을 빛낸 인물(人物)들이다. 윤상(尹祥) 태조 때 문과에 급제하고 대사성, 예문관제학, 성균관박사를 지냈으며, 성리학과 역학에 밝아 많은 후진을 양성하였다. 윤흠신(尹欽信)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을 지냈다. 동생(同生) 흠도(欽道)와 함께 의병(義兵)을 일으켜 유종개(柳宗介) 대장(大將)과 함께 화장산 전투(戰鬪)에 참여(參與) 적을 치다가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형제(兄弟) 모두 전몰(戰歿)하였다. 윤흠도(尹欽道) 형(兄) 흠신(欽信)와 함께 의병(義兵)을 일으켜 유종개(柳宗介) 대장(大將)과 함께 화장산 전투(戰鬪)에 참여(參與) 적을 치다가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형제(兄弟) 모두 전몰(戰歿)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