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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니콜라우스 축일에... 성니콜라우스와 산타클로스의 차이
니콜라우스 성인의 축일을
맞아 니콜라우스 성인과 산타클로스의 차이에 대해 썼던 글을 올려 봅니다.
<소비-자본주의 시대의 성탄>
I. 오늘날의 성탄
축제에 대한 성찰
이 장에서는, 소비-자본주의 축제로
변질되고 있는 성탄 축제의 문제점을 성찰할 것이다. 먼저, 오늘날의 성탄 축제가 많은 이들에게 ‘소비자들’을 위한 쇼핑의 시기로 고착되고 있음을
지적한 후, 산타클로스가 물질적 보상자로서 왜곡된 신(神)적 이미지와 연관되어 있음을 논하려 한다.
1. 거룩한 날(Holy Day) 인가?
또 하나의
휴일(Holiday) 인가?: 성탄과 소비-자본주의
메시아의 오심을 기다리도록 초대되는 대림시기에, 우리는 회개의 증거로 사회 정의와 애덕을 실천하라는
세례자 요한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3,11).
그러나 성탄이 다가올수록, 세례자
요한의 말대로 괜찮은 여벌의 옷을 없는 이들과 나누기보다는, 오히려 새로운 옷을 한 벌 더 장만하거나 선물로 받거나, 상품권을 받을 기대를 품는
경우가 더욱 많다. 이유는 간단하다. 연말연시이기도 한 성탄 전후가 가장 성대한 쇼핑의 기회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백화점 전단지마다 산타 복장을 한 젊은 여성이 마술 지팡이를
들고 세일 품목을 안내하고 있다. ‘크리스마스 선물 대축제’라는 제목이 붙은 전단지가 소개하는 상품 품목은 방한 의류, 모피코트, 스키복 등의
의류가 주종을 이루고, 패션잡화와 장난감 세트가 뒤를 잇는다. 백화점과 대형마트에서 경품 행사가 열리고, 어떤 백화점에서는 ‘크리스마스 향수
특별전’이 열리기도 한다.
세계 어디에서나 특별한 날에 선물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사랑과 우정을 표현하는 일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공통된 관습이며 아름다운 일이다. 그러나 오늘날, 미국에서 시작되어
세계 곳곳으로 뻗어나가 있는 성탄 쇼핑 행사는, 생활필수품이 아닌 상품들을 지나치게 사고파는 것에만 경도되어 있는 소비문화의 일종으로서, 가히
‘소비주의의 축제’라 불릴만하다.
James Tracy는 미국의
성탄 쇼핑문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미국인들은 자신의 아이들을 미치게 만든 새로운 장난감을 구매하기 위해 매장으로 돌진한다. 이것은
단순한 선물 교환과는 현저히 다른 문화를 전격적으로 양산해 내고 있는 T.V. 광고의 결과로서, 이를테면 포틀래치(potlatch) 사회의
문화라 할 수 있다.”
실재로 미국의 많은 백화점과 소매상에서는
연간매출의 4분의 1이 성탄 전후에 이루어지는데, 이때에 더 큰 이윤(마진)을 남기기 때문에 연간 순이익의 50~70%가 이때에 발생한다고
한다.
성탄 소비문화의 위험성에 대해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는
미국의 신학자 리챠드 A. 호슬리(Richard A. Horsely)에 의하면, 세계 전체 자원의 70%를 소비하는 미국에서, 추수감사절과
성탄절 사이의 한 달 동안, 한 해에 팔리는 모든 상품의 40%가 판매된다고 한다.
호슬리는 크리스마스 쇼핑에 대한 열망을, 그가 일종의 신흥종교라 부르는 ‘소비자본주의’ 의 예식으로
간주하며,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이 예식에 참여하도록 강요된다고 말한다:
"크리스마스 장식, 불빛, 전시, 그리고 특별히 시내와 대형마트, 공공기관과 시민광장 등 공공장소에서
벌어지는 광고행렬. 그러나 크리스마스는 공공장소에만 침투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의 모든 환경에 전반적으로 침투한다. 후각을 포함한 우리의 모든
감각에 호소한다. 실로, 크리스마스는 사적인 공간까지 침략한다. 그것은 특별히 광고를 통하여, 언어 뿐 아니라 음악과 이미지 등 가능한 모든
미디어를 동원하여 우리의 정신에 침투한다. 우리는 이것에 참여하지 않을 자유를 박탈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성탄이 과도한 상업성에로 치닫게 된 데에는 미국이 만들어 낸 우상인 산타클로스의 역할이
지대하였다. 산타클로스가 말하는 메시지는 단순하다: ‘당신 자신과 당신의 자녀들이 크리스마스 경축행사에서 소외되고 싶지 않다면, 무엇인가
사라!’는 것이다.
미라(Myra)의 성 니콜라우스의 왜곡된
상(像)인 산타클로스는 1820년대에, 당시 미국 시장 경제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처음 등장했다: “1820년대에 미국의 공장에서
생산된 상품들이 처음으로 상점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당시의 상점 주인들이 직면했던 공론화된 여러 과제들 중 하나는, 어떻게 하면 대량 생산된
상품들을 구매하도록 미국인들을 설득할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대량 생산된 상품들, 특별히 사치품들을 사서 선물을 한다는 것은, 영국으로부터 갓 독립한 신생 독립
국가로서 “스스로 물건을 만들어서 쓰고, 검소하며 절약해야 한다는 당대의 공화국의 이념”과 맞지 않았던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 산타클로스가 어린이들에게 선물을 준다는
아이디어는 대단히 합리적인 해결책으로 등장하였다. 이 아이디어는 어른들로 하여금 대량 생산된 공산품을 사도록 격려하고, 아이들에게는 공장에서
생산된 상품을 선물로 받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는데, 이는 “친절한 노인의 너그러움에서 쏟아져 나오는” 선물이었던
것이다.
쇼핑의 축제로 변질된 미국 판(版) 성탄절 행사는
산타클로스의 이미지와 함께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할리우드(Hollywood)에서는 산타클로스에 대한 다양한 영화를 만들어서 전 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로 수출을 한다.
‘메리 크리스마스’ 대신에 ‘해피
할리데이(Happy Holiday)!’를 외치는 산타클로스와 선물 상자가 함께 인쇄된 성탄 카드가 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에서 팔리고 있다.
산타클로스를 신화화(神話化)하는 크리스마스 캐럴들이 연예인들에 의해 매년 새로운 버전으로 녹음되고 백화점과 대형마트, 길거리에서 울려 퍼진다.
매년 11월 중순에 캐나다의 토론토에서 펼쳐지는 ‘산타클로스
퍼레이드(Santa Claus Parade)’는 미국 판 산타클로스가 어떻게 해외로 확산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적절한 예라 할 것이다.
5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길거리로 쏟아져 나와 관람하는 이
행사는 1905년 12월에 토론토 소재 이튼(Eaton) 백화점의 주최로 처음 시작되었다. 첫 해에는 한 개의 이동식 무대차가 등장하였으나,
지금은 25개의 무대차, 24개의 밴드, 그리고 1,700여 명이 참여하며, 길이가 6킬로미터에 달하는, 북미 대륙 최대의 퍼레이드 중 하나가
되었다. 이 퍼레이드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뉴질랜드, 아일랜드, 노르웨이에서까지 T.V. 로 중계했지만, 이제는 캐나다 소유의 CTV를 다른
나라에서 직접 시청하는 방식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굳이 다른 나라 방송국이 생중계를 하지는 않는다.
스폰서를 하는 회사들의 광고로 도배가 된 수많은 무대차와 밴드의 행렬이 지나고 나면, 마침내 이
행사의 주인공인 산타클로스가 탄 무대차가 등장을 하고, 관람객들은 환호성을 지른다. 메시아의 오심을 예언했던 구약의 예언자들 대신, 은행과
백화점, 장난감 가게의 광고로 도배가 된 무대차들이 글로벌 시대의 자본주의의 새로운 메시아, 미국 판 산타클로스의 도래를 예고하고 있는 것이다.
2. 물질적 보상자(報償者)로
왜곡된 신적인 이미지로서의 산타클로스
미국 판
산타클로스의 이미지는 여러 해에 걸쳐 신화화되어 왔다. 미국의 소비주의가 산타클로스에 대해 여러 가지 신화를 창조해 낸 덕택이다. 이에 따라 전
세계의 많은 어린이들은 산타클로스가 북극의 어느 마을에 살며 자신들을 관찰하고 있다고 믿는다.
일례로, 성탄 즈음에 라디오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캐럴 중 하나인 ‘산타 할아버지 우리 마을에
오시네(Santa Claus is coming to town)’의 가사를 보자. 우리말로 “산타 할아버지는 알고 계신데. 누가 착한 애인지 나쁜
애인지”로 번역되어 있는 부분의 본래 가사는 다음과 같다. “he's making a list, checking it twice, gonna
find out who's naughty or nice(그는 명단을 만들고, 다시 확인하시네. 누가 버릇이 없고 누가 착한지 찾아내실
것이네).”
일부 할리우드 영화에서는 어린이들이 산타클로스에게
기도하는 장면까지 등장한다. 산타클로스 문화를 반대하는 저술가 톰 플린(Tom Flynn)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존 레넌(John
Lennon)은 비틀즈(Beatles)가 예수 그리스도보다 위대하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틀렸다. 영광은 산타클로스에게 돌아간다. 4살 먹은
미국 어린이들의 대략 85퍼센트 정도가 산타의 존재를 믿고 있다.”
산타클로스에 대한 믿음은 더 이상 미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미디어의 발달에 힘입어 우리나라를
비롯한 전 세계로 확산되었으며, 종교를 막론하고 많은 어린이들이 굳게 믿고 있는 신화적, 심지어 종교적 존재로 자리 잡고 있다.
진지하게 묻고 싶다. 산타클로스에 대한 믿음은, ‘하나이신
하느님을 흠숭하라’는 십계명의 제1계명에서 예외적으로 허용되어도 무방한 것인가?
산타클로스의 모델은 기원 후 4세기 초엽 리치아(Lycia) 지방 미라의 주교였던 성
니콜라우스이다. 니콜라우스 성인에 대한 전설 몇 가지가 전해져 내려오는데, 대표적인 것 세 가지를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부당하게 감옥에 갇힌 세 관리들을 석방시켜 주었다는 것, 가난한
세 처녀의 결혼 지참금을 마련해 주었다는 것, 그리고 무죄한 세 소년을 구출해 줌으로써 사형 선고를 받았다는 것 등이다.
이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은 가난으로 인하여 결혼 지참금을
마련하지 못했던 세 자매를 도왔다는 일화이다. 전설에 의하면, 성 니콜라우스는 자매들이 각각 결혼할 연령에 도달했을 즈음, 한 밤 중에 몰래
금화가 들어 있는 자루를 들고 와, 이 자매들이 사는 집 담장 너머로 자루를 던져 놓고는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 전설에 기초하여 네덜란드와 독일의 라인 강 서쪽 지방에서는,
니콜라우스 성인의 축일인 12월 6일 전날 저녁, 어린이들에게 비밀리에 선물을 주는 관습이 생겨나게 되었다.
성 니콜라우스의 전설은, 19세기 초 미국에서, 후에 뉴욕
시(New York 市)로 발전하게 된 뉴 암스테르담 (New Amsterdam) 지역의 네덜란드 프로테스탄트들에 의해 북유럽의 민속 전설과
결합되어 나타나게 되었다. 그것은 “버릇없는 어린이들에게 벌을 주고 착한 어린이들에게는 선물로 상을 주는 마법사”에 대한 전설이었다.
1820년대에 산타클로스는 상업적인 모델로 뉴욕에 등장하기
시작했고, 20년 뒤인 1840년대 초기에 “특정한 상점들에서 어린이들의 주목을 끌기 위해 상인들이 공통적으로 채택한 상업적인 우상”으로
등극하였다. 빨간 옷에 흰 테두리를 두른 현대의 산타클로스 복장은, 같은 이미지의 상표를 사용한 코카콜라 회사에 의하여 1920~1930년대에
도안된 것이다.
산타클로스가 성 니콜라우스를 모델로 하여 창작되었지만, 둘 사이에는 많은 차이점이 있다.
두드러진 것 두 가지만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니콜라우스 성인은 가난한 사람들을 도았고, 생활에 꼭 필요한 것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산타클로스는 대부분 생활필수품과 거리가 먼 상품을 선물로 주며, 가난한
아이들에게 더 주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본주의의 논리를 따라 선물을 준다 - ‘너의 부모님이 부자일수록, 너는 더 비싸고 사치스러운 선물을
받을 것이다.’
둘째로, 니콜라우스 성인은 대가(代價)없이 선물을 주었는데 반하여, 산타클로스는 보상(報償)으로 선물을 준다. 산타클로스의 선물은 무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는 “명단을 만들고 다시 확인하여, 누가 버릇이 없고 착한지 찾아내어” 선물을 준다 - 착한 행동을 더 많이 할수록 너는 더 멋진 선물을 받을
것이다.
어린이들이 믿고 기도까지 하는 산타클로스가 신앙심의
형성기에 있는 어린이들에게 잘못된 신관(神觀)과 은총에 대한 오해를 심어주고 있지는 않은가? 니콜라우스 성인의 일화는 하느님의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을 상기시키며, 하느님의 은총이 무상으로, 거저 주어짐을 보여준다. 이에 반하여 산타클로스는 철저한 경제 논리에 따라 선물을
지급한다. 부자일수록 더 좋은 선물을 주며, 그 선물은 공짜가 아니라 착한 일에 대한 보상이다.
어떤 의미에서 산타클로스는 어린이들뿐만 아니라 성인들에게도 우상으로 작용하며, 하느님에 대해 왜곡된
이미지를 갖도록 부추기는지도 모른다. 혹은 반대로, 오늘날 우리가 소비-자본주의 문화 안에서 갖고 있는 물질적 보상자로서의 하느님상이
산타클로스에게 투영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늘날
아시아신학과 흑인신학, 해방신학, 여성신학과 생태신학 등의 여러 상황신학(contextual theology)들에서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는 과거
가부장적인 신학의 문제는 하느님의 이미지를, 그간 세계의 지배 세력이었던 ‘늙은-백인-남자[white-old-male]’로 묘사해 왔다는 데
있다.
이에 대하여 상황 신학들은 예수님은 백인이 아니시며,
하느님께서는 늙지도 젊지도 않으시고, 남성성과 여성성을 초월하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산타클로스와 가부장적
신학에서 묘사하는 하느님의 이미지에는 놀라운 유사성이 있다. 바로 ‘늙은-백인-남자’라는 데에 있다.
출처: 대전 가톨릭대학교 김유정 유스티노 신부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