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비겁한 폭력 – 혐오
나승구 F. 하비에르 신부. 서울대교구 빈민사목위원회 위원장
예멘에서 내전이 길어지면서 이를 피해 조국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예멘 난민들이 무비자를 통해서 제주도로 입국하는 경우가 2018년에 부쩍 늘어났습니다. 제주도에는 무비자로 30일간 체류할 수 있는 여행자 프로그램이 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2015년까지는 예멘 사람들의 제주도 입국은 없었지만, 2016년에 7명, 그러다가 2017년에 42명으로 늘어나다가 2018년에는 500여명까지 늘어났습니다. 2015년 비자 없이 90일간 체류가 가능한 말레이시아로 탈출한 일부 예멘인들이 때마침 생긴 말레이시아 국적기의 제주도 직항 노선을 타고 제주도로 입국한 것입니다. 특별히 젊은 남자가 많은데 이는 내전 중에 원치 않게 군대에 끌려가는 것을 피하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한국은 1992년에 “난민협약”에 가입하였고 국회는 이듬해 이를 비준하였습니다. 따라서 한국으로서는 난민을 받아들이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 난민을 두고 근거 없는 흉포한 소문이 떠돌면서 난민들의 입지는 무척이나 어려워졌습니다. 이들이 과격한 무슬림이며 테러집단이라는 소문과 범죄 집단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또 성범죄를 걱정하며 뒤숭숭한 분위기를 만들어냅니다. 정작 제주도에서는 고향 떠나온 외롭고 슬픈 이들을 따뜻하게 대하고 있지만 육지에서는 말이 많습니다. 수많은 난민들이 밀려들어 가뜩이나 젊은이들 일자리가 없는데 더 힘들어지는 것 아니냐며 집 없고 가족 없는 이들을 궁지에 몰아넣고 있습니다.
사실 아무런 근거도 없는 말들입니다. 무슬림이어서 성적으로 문란하다거나, 테러의 위험이 있다거나, 일자리를 빼앗는다거나……. 이렇듯이 사실과 다르거나 가능성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서 배제하거나 차별하는 것을 혐오라고 합니다. 장애인 공동체나 장례식장 등 꺼리는 시설이 들어서면 이를 혐오시설이라고 적극 나서서 반대를 합니다. 남자가 여자에 대하여, 성소수자에 대하여, 장애인에 대하여, 그밖에 특수한 계층에 대하여, 지역에 대하여 꼬리표를 달아 싫어하고 꺼리는 극단적인 행위입니다.
혐오의 대상자들은 하나같이 약한 존재들
여성이 차별을 받아왔습니다. 최근까지도 여성의 세상 참여에 대해 곱지 않은 눈으로 바라봅니다. 운전을 하다 조금만 실수를 해도 운전자로서 받는 실수에 대한 질책보다 여자이기에 받는 질책이 더욱 신랄합니다. 마치 알에서 태어난 사람들인 것처럼 여자에 대한 편견이 지나칩니다. 실제로 같은 일을 해도 임금의 격차가 있습니다. 김치녀, 된장녀 등 여성 폄하와 혐오가 여성들을 위험에 처하게 합니다.
장애인이 차별을 받아왔습니다. 장애인차별금지법 제19조는 ‘교통사업자와 교통행정기관은 이동 및 교통수단 등을 접근․이용함에 있어서 장애인을 제한․배제․분리․거부해서는 안 된다’고 명시하고 있지만 서울시의 교통 약자를 위한 저상버스 운행 비율은 2016년 11월 기준 2816대로 전체 7427대의 37.9%에 불과합니다. 고속버스는 상황이 더 열악해 장애인단체 등이 매년 명절에 ‘우리도 고향에 가고 싶다’고 시위를 벌이기도 했습니다.
또 법은 ‘누구든 장애를 이유로 집단 따돌림을 가하거나 모욕감을 주거나 비하를 유발하는 언어적 표현․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지만 장애인 비하는 일상다반사입니다. 작년에는 서울에서 장애인학교 설립을 호소하는 부모가 무릎을 꿇는 안타까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장애인 학교가 혐오시설이고 장애인들이 다니면 주변 집값이 떨어진다는 주민들의 반발 때문이었습니다.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을 받고 혐오의 대상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외모, 성적 지향, 인종, 신체조건, 국적, 나이, 출신 지역, 이념 등도 차별과 혐오의 대상이 되곤 합니다.
혐오의 대상자들은 하나같이 약한 존재들입니다. 약하기에 더 보호받아야 할 터인데 오히려 이를 끊어내려 합니다. 그러기에 약자들에 대한 혐오는 가장 비겁한 폭력입니다. 인권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모임에서 한 선생님께서 “우리 몸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어디라고 생각하세요?”라고 질문을 던졌습니다. 참가자들은 “머리요”, “심장이요”, “폐요”, 등등 다양한 신체 부위를 말했습니다. 이를 듣고 있던 선생님은 “우리 몸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아픈 곳이랍니다. 제일 많이 신경 쓰이고, 손이 많이 가는 곳이지요. 손톱 밑에 생채기 하나 생기면 온 정신이 그곳에 가 있지 않나요?”라고 답하셨습니다. 참석자들은 허를 찔린 듯한 표정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작은이들에게서 하느님의 얼굴 보셔
혐오의 대상이 된 사람들을 모두가 싫어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혐오를 주도하는 사람들은 여론을 형성하여 혐오를 부추깁니다. 이에는 거짓 뉴스와 곡해가 사용됩니다.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채 자신과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들에 대하여 분노하고, 또 이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여 나쁜 여론이 번지게 됩니다. 그러면 혐오피해자들은 너무도 억울하게 사람들의 질시의 대상이 되고 함께 살 수 없게 됩니다. 두렵고 불편하게 만들고, 쫓아내고 끊어내어 마침내 사라지게 하는 방식입니다. 혐오는 이토록 큰 파장을 일으키는 범죄입니다.
하지만 이를 깨닫지 못하는 혐오의 확대는 자신도 모르게 범죄의 공범이 되어버리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합니다. 그래서 혐오를 조장하는 일은 가장 비겁하고 야비한 폭력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다른 사람들의 두려움을 통하여 이루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 혐오를 국가기관이 만들어내기도 했습니다. 70~80년대에 무수히 많았던 간첩단 사건을 비롯하여 국가기관이 만들어낸 혐오사건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통치를 위해서 통치에 방해되는 세력들이라고 여기면 국민들 모두의 혐오를 이끌어내 처벌하고 배제했습니다. 지금은 재심에서 무죄판결이 난 ‘인민혁명당사건’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인민혁명당 사건 또는 인혁당 사건은 중앙정보부의 조작에 의해 유신반대 성향이 있는 인물들이 기소되어 선고 18시간 만에 사형이 집행된 날조사건입니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마태 18,10) 혐오의 대상자들은 늘 작은이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작은이들에게서 하느님의 얼굴을 보십니다. 혐오에 대처하는 예수님의 방법이 성서에 전해져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는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끌고 와서 돌로 처 죽이려는 장면이 그려집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하시며 여자에게서 악의에 찬 사람들을 떼어 내십니다. 물론 간음은 죄입니다. 지은 죄에 따라 적절히 처벌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적절한 사법절차를 거치지 않고 사람들의 분노를 동원하여 여자를 처벌하려고 하였습니다. 거기에 예수님의 권위까지도 그 분노의 정당성에 이용하려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분노를 더해주시지 않으시고 자비를 선보이십니다.
우리의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웃들을 끊어내고 몰아내려는 일에 동조하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의 마음을 드러낼 수 있다면 혐오는 더 이상 확산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 시대의 고통 받는 이웃들에게 살아갈 힘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너희는 이방인을 학대해서는 안 된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이방인이었으니, 이방인의 심정을 알지 않느냐?”(탈출기 23,9) 68년 전! 우리도 피난민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