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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南漢山城)을 찾아서
1.
인조(仁祖,1595-1649)는 조선 제16대임금으로 1623년 보위에 올라 1649년 삶을 마치게 된다. 1627년의 정묘호란(丁卯胡亂)과 1636년의 병자호란(丙子胡亂)이라는 큰 전쟁을 연이어 맞이하여서도 나라를 흔들림없이 잘 보존하여 후세 조(祖)의 묘호(廟號)를 추증받게 되었다.
이탈리아 예수회 선교사 마르티니(Martino Martini, 1614~1661)는 그의 책 《달단전쟁사》(De Bello Tartarico Historia)-1654년 벨기에 안트베르펜 출판-에서 1627년의 정묘호란(丁卯胡亂)은 전쟁의 승패를 놓고 보았을 때 조선이 승리한 전쟁이라고 명확히 단언하고 있다.
조선조정(朝鮮朝廷)은 후금의 공격기미를 이미 파악하고 남한산성(南漢山城)을 수축하는 등 방비에 만전을 기하였으며, 결국 1627년 정묘년(丁卯年)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몰려오는 후금(後金)의 기마부대를 맞이하여 조선의 임금 인조(仁祖)는 전군(全軍) 총동원령을 통해 약 일백만명의 용맹한 전사(戰士)를 집결시킨 후 후금의 기병대(騎兵隊)를 맞아 중국대륙역사상 가장 치열하고 참혹한 전쟁을 펼치게 되었다.
조선군과 후금군이 대치한 가운데 후금군의 후미(後尾)로 명나라 모문룡(毛文龍)의 지원대(支援隊)가 도착하여 후금군은 앞뒤로 싸움을 하게 되었고, 이 결과에 대해 마르티니는 후금군 5만이 전사하고, 조선군 7만 전사, 명군(明軍)은 전멸상태에 이르렀으며 결국 후금군은 퇴로를 뚫고 도망치게 되어, 조선임금 인조는 순식간에 빼앗겼던 북방 4개도를 일거에 회복하고 군대를 재모집해 국방에 엄중을 기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르티니의 1654년의 기록과 달리 조선사편수회에 의해 교열된 반도조선사학에서는 정묘호란 당시 후금군의 병력을 약3만-3만5천명으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대륙의 거대한 조선 만승천자(萬乘天子)국의 일백만 대군을 상대하는데 후금군이 달랑 3만의 기병을 보낸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며 마르티니가 묘사한 대로 5만이 전사했다는 것을 비교해 고찰해보면 후금군은 약 30-50만명에 이르렀을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결국 뼈아픈 실패를 맛보게 된 후금은 1636년 대청국(大淸國)으로 국호를 변경하며 사신들을 초청해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를 받게 되는데, 유일하게 조선국의 사신들은 비웃으며 절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왜소한 반도국의 조선이었다면 어찌 절하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인가?
청(淸)은 북방초원로를 통해 이루어지는 막대한 무역의 이익을 조선과 나누어 가질 의도는 명확히 없었던 것이다. 승자독식(勝者獨食)을 위해 조선과의 일전(一戰)을 어쩔수 없는 숙명이었고, 1차 원정이었던 정묘호란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청나라는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일컬어지는 2차원정에서는 이른바 전격전(電擊戰)을 구사하게 된다.
징기스칸의 세계정복역사에서 몽고는 하루 400km의 정보전달체계를 구축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른바 역참(驛站)이다. 현 카자흐스탄의 북방지역과 알타이산 남북지역에서 형성되어 면면히 역사를 이어온 기마민족은 멀리 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로 민족적 계통을 이어왔으며 이 조선민족에서 여러 갈래가 분파되어 선비,거란,말갈,몽고,갈단 등으로 세분화되어 역사를 채워 오게 되었다.
즉 이 기마민족들은 하루 400km를 달릴 수 있는 기마전술과 마술(馬術)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이 민족들을 통일한 청(淸)나라는 세계최초의 전격전을 구사한 조선에 대한 2차침입에서 기마병당 2마리의 말을 몰고 말에서 먹고, 잠을 자고 달리는 방식으로 압록강(鴨綠江)을 건넌 날로부터 7일만에 홍제원(弘濟院)에 도착하게 되는데, 하루 400km를 기산하면 무려 2,800km를 달려온 것이 되니 필자가 고찰한 알타이산(백두산)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린후 다시 서쪽으로 흘러가는 압록강(현 이리티시강)을 기산하면 그 거리는 정확히 일치하게 된다.
김소월(金素月, 1902~1934)이 1923년 노래한 <삭주구성(朔州龜城)>이란 시작품에서 당시 한양에서 시인의 고향 구성(龜城)까지 6천리라 표현한 시어(詩語)를 보면, 1636년 청군(淸軍)이 들어온 공격로(攻擊路)의 거리와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전격전(電擊戰)에 놀란 인조(仁祖)는 왕실가족을 강화도로 피난 보내고 임금 자신은 길이 막혀 미리 준비해둔 남한산성으로 피하게 되는데, 이후 강화도를 방어하던 강화검찰사(江華檢察使) 김경징(金慶徵, 1589~1637)의 안이함과 어리석음으로 왕실가족이 청군(淸軍)에 잡히게 되면서 조선임금 인조(仁祖)는 어쩔수 없는 치욕의 항복의식을 치르게 되었다.
정말 항복을 했는지 아니면 청국의 요청을 들어주는 강화조약이 이루어졌는지 알 수는 없는데, 식민사학은 항복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구한말 프랑스 정부에서 파견해 조선에 왔던 샤를 바라(Charles Varat)는 그의 저서 《조선기행(En Corée)》에서 삼전도비(대청황제공덕비)를 직접 목격하고 그 크기를 기록했는데 명확히 현재의 삼전도비와 크기가 다르다. 또한 내용도 대략적인 내용만 써 놓았는데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치욕스런 내용과는 분명 다르다. 이를 통해 고찰하면 조선임금 인조는 청국의 조건을 들어주는 강화조약을 수락했을 개연성이 충분하다는 생각이다.
당시 인조가 청군의 강공(强攻)을 피해 들어갔던 남한산성에 대해 살펴보겠다.
1926년 이전 조선의 남한산성은 현 대륙 하남성(河南省) 남양(南陽)시 우측 대승산(大乘山)에서 그 역사의 숨결을 간직한 채 지금도 그 웅장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2. 남한산성
먼저 사서(史書)속에 보이는 기록들을 간략히 고찰해 보겠다.
⑴고전번역서 > 신증동국여지승람 > 신증동국여지승람 제6권 > 경기 >
성안에 두 개의 동(洞)이 있다 남동(南洞)과 북동(北洞)이다. 경안(慶安) 남쪽에 있는데 첫머리는 10리이고 그 끝이 40리이다. 오포(五浦) 남쪽에 있는데 첫머리는 30리이고, 끝은 50리이다. 세촌(細村) 남쪽에 있는데 첫머리가 50리, 끝이 20리이다. 낙생(樂生) 남쪽으로 첫머리가 20리요, 마지막이 40리이다. 돌마(突馬) 남쪽으로 첫머리가 20리요, 끝이 30리이다. 동부(東部) 동북쪽으로 첫머리가 10리요, 끝이 30리이다. 서부(西部) 서북쪽으로 첫머리가 10리요, 마지막이 20리이다. 퇴촌(退村) 동쪽으로 첫머리가 20리, 끝이 40리이다. 초부(草阜) 동쪽으로 첫머리가 30리, 끝이 60리이다. 도척(都尺) 동남쪽으로 첫머리가 40리이고, 끝이 70리이다. 실촌(實村) 동남쪽으로 첫머리가 50리, 끝이 70리이다. 초월(草月) 동남쪽으로 첫머리가 30리이고, 끝이 40리다. 중대(中垈) 서쪽으로 첫머리가 10리, 끝이 20리이다. 언주(彦州) 서쪽으로 첫머리가 20리, 끝이 40리이다. 구천(龜川) 서북쪽으로 첫머리가 20리요, 끝이 30리이다. 육왕(六旺) 서남쪽으로 첫머리가 15리요, 마지막이 30리이다. 의곡(義谷) 서남쪽으로 첫머리가 40리요, 끝이 60리이다. 왕륜(旺倫) 서남쪽으로 처음이 60리요, 끝이 70리이다. 북방(北方) 서남쪽으로 첫머리가 70리요, 끝이 90리이다. 월곡(月谷) 서북쪽으로 첫머리가 70리요, 마지막이 80리이다. 성곶(聲串) 서남쪽으로 첫머리가 80리고, 마지막이 1백리로 해변(海邊)이다.
송파진(松坡津) 서북쪽으로 20리며, 삼전도(三田渡)와 무동도(舞童島)를 주관하는데 별장(別將)은 한 사람이다. 삼전도(三田渡) 서북쪽으로 25리이며, 옛날에는 도승(渡丞)이 있었는데, 송파(松坡)로 옮겼다. 광진(廣津) 북쪽으로 20리다. 마점진(麻岾津) 봉안(奉安) 동쪽으로 통하는데 25리이다. 신천진(新川津) 삼전도 북쪽으로 5리이다. 두미진(斗迷津) 동쪽으로 20리인데 그 북쪽 언덕은 두미천(斗迷遷)으로 돌길이며, 빈강 강 가로 따라 둘리기를 7, 8리이며, 동쪽으로 봉안을 향한다. 미음진(渼音津) 북쪽으로 30리인데, 양주(楊州) 편에 보면 자세하다.
⑵동국여지지 제2권 / 경기(京畿) 좌도(左道)○광주진(廣州鎭)
건치연혁(建置沿革)
본래 백제의 남한산성(南漢山城)이다. 시조(始祖) 온조왕(溫祚王) 14년(기원전 5)에 위례성(慰禮城)에서 이곳으로 도읍을 옮겼고, 근초고왕(近肖古王) 26년(371)에 이르러 도읍을 북한산(北漢山)으로 옮겼다
산천(山川)
일장산(日長山)
청계산(淸溪山) 일명 청룡산(靑龍山)이라고도 한다. 과천현(果川縣)에도 보인다.
대모산(大母山) 산 남쪽에 우리 태종(太宗)의 헌릉(獻陵)이 있다. 윤회(尹淮)의 〈비음기(碑陰記)〉에 “청계산에서 꺾여 동북쪽으로 가다가 한강(漢江)을 등지고 멈추니 이것이 대모산이다. 곤령(坤靈 땅의 신령)이 멈춰 솟았고 기운이 구불구불 서렸으니 원릉(園陵)의 자리를 기다렸도다.”라고 하였다.
검단산(黔丹山) 백제 승 검단(黔丹)이 살던 곳이므로 이와 같이 이름 지었다. 그 남쪽 봉우리를 자봉(紫峯)이라고 부르니 본조의 허목(許穆)이 일찍이 그 아래에서 독서하였다.
조곡산(早谷山) 일명 초동산(草洞山)이라고도 하고, 수종산(水鍾山)이라 부르기도 한다.
문현산(門懸山)
영장산(靈長山)
운길산(雲吉山)
수리산(修理山)
대해산(大海山) 대화산(大華山)이라 부르기도 한다. 양지현(陽智縣)에도 보인다.
무갑산(武甲山)
원적산(元寂山) 일명 원적산(圓寂山)이라고도 한다.
광교산(光敎山)
도양산(道養山)
오봉산(五峯山) 산 위에 다섯 개의 작은 봉우리가 있는데 서로 이어진 모양이 치아 같으므로 이와 같이 이름 지었다.
망월봉(望月峯) 성(城)의 동쪽에 있으니 곧 남한산의 동쪽 봉우리이다. 성의 사면(四面)에 마주하는 봉우리가 없는데 오직 이 봉우리에서만 너머로 성안이 보인다. 처음에 성을 쌓을 때 이 봉우리를 성안으로 넣지 않았다. 그래서 병자년(1636, 인조14)의 난리 때 오랑캐가 이 봉우리 위에 올라가 대포를 쏘니 성이 거의 망가질 지경이었다.
응봉(鷹峯) 곧 성 서쪽의 주봉(主峯)이다. 한양 도성이 훤히 바라보인다.
쌍령현(雙嶺峴) 그 동쪽 7리에 또 고개가 하나 있는데 소쌍령(小雙嶺)이라고 부른다. 모두 대해산의 북쪽 줄기이다. ○ 본조 인조(仁祖) 때 경상 병사(慶尙兵使) 허완(許完) 등이 병사를 이끌고 구원하러 산성을 향해 달려가다가 이 고개에 이르러 오랑캐와 만나 싸움에 패해 죽으니, 죽은 군졸의 수가 3000여 인이었다.
가마령(佳亇嶺) 강정왕(康靖王 성종)의 어태(御胎)를 봉안하였다.
추령(楸嶺)
이보령(理輔嶺) 추령과 서로 잇닿아 있으니, 곧 남한산에서 온 산줄기이다.
조포평(助布坪) 예전에는 목장(牧場)이 있었다.
한강(漢江) 양근군(楊根郡)에서 주의 경계로 들어와 두미진(斗迷津)이 되고, 주의 북쪽 경계를 지나는 곳을 독포(禿浦), 광진(廣津)이라고 하며, 또 서쪽으로 흘러 삼전도(三田渡)를 지나 한성부(漢城府) 경계로 들어간다.
독포(禿浦) 곧 한강이 꺾여 도는 곳으로 미호(迷湖)라고도 부른다. 그 서쪽이 곧 양주(楊州)의 경계이다.
○ 고려 이색(李穡)의 시에,
독포 모래톱에 어스름 빛 깔리니 / 禿浦沙頭暝色來
먼 산 평평한 들 구불구불 에웠네 / 遠山平野勢逶迤
뱃사공은 출범해 강물 따라 흘러가고 / 舟人解纜隨流下
나는 달 밝은 양주서 거저 시 한 수 / 月白楊州恰得詩
하였다.
소천(昭川) 우천(牛川)이라고도 한다. 발원이 두 곳이니, 하나는 대해산 동북쪽에서 나와 쌍령과 무갑 두 산 사이를 흐르고, 하나는 곧 용인현 금령천(金嶺川)이니 경안역(慶安驛) 동쪽을 지나서 합하여, 북쪽으로 흘러 한강의 두미진으로 들어간다.
탄천(炭川) 곧 용인현 장장천(莊莊川)의 하류이니, 낙생역(樂生驛) 앞을 지나 북쪽으로 평야(坪野)를 거쳐 한강의 삼전도로 들어간다.
동계(東溪) 산성 안에서 나서 수문(水門)을 지나 여러 골짜기 물과 합해 동쪽으로 흘러 소천으로 들어간다.
세고탄(洗姑灘) 한강의 물이 이곳에 이르러 여울을 이룬다. 광진나루[廣津渡]의 아래에 있다 해서 광진탄(廣津灘)이라고도 부른다. 민간에 전하기를, 예전에 한 노파가 강가에 살면서 베 빠는 일을 업으로 삼았는데, 이로 인해 세고탄이라 부른다고 한다.
태호(太湖) 둔지(芚地)라고도 한다. 호수가 강가를 따라서 있으니, 너비가 100여 보이고, 길이가 10리이다. 그 서안에 작은 산이 홀로 솟았으니 구산(龜山)이라고 한다. 본조의 이원진(李元鎭)이 그 아래에 터를 잡아 집을 짓고 태호어은(太湖漁隱)이라고 자호(自號)하였다.
구포(鳩浦) 속칭 굿포(仇叱浦)라고 한다.
이곶포(梨串浦)
초천(椒泉) 물맛이 청량하여 마치 산초[椒] 같으니, 그 물에 목욕을 하면 병이 낫는다.
성곽(城郭)
남한산성(南漢山城) 곧 온조(溫祚)의 옛 성이다. 인조 4년(1626)에 개축하여 매우 견고하게 만들었으니 성안으로 주치(州治)를 옮겨 경기를 보장(保障)하는 곳으로 삼았다. 돌로 쌓았고 둘레가 20리이다. 동서남북으로 문이 있고, 암문(暗門)이 여덟 개 있다. 성안에 우물이 아주 많으니 여름과 겨울에도 마르지 않는다. 산골짜기의 여러 물이 합하여 큰 개울을 이루니 동쪽으로 수문을 통해 흘러 나간다. 성 밖 사면의 산세가 깎아지른 듯 비탈져 기어 올라올 수 없는데, 오직 동남쪽 모퉁이만 덜 가파르니 세 곳에 포루(炮樓)를 설치하였다. 서북쪽 모퉁이에 작은 봉우리가 있는데 성안을 굽어볼 수 있어서, 대(臺) 하나를 설치하고 용도(甬道)를 쌓음으로써 성에 속하도록 하였다.
고적(古蹟)
일장산성(日長山城) 곧 신라 때의 주장성(晝長城)이니 문무왕(文武王) 때 축조한 것이다. 안에 우물 6개와 시내가 있다. 둘레는 4360보이며 돌로 쌓았다. ○ 내가 살펴보건대 이는 곧 남한산성(南漢山城)이다. 남한(南漢)은 온조(溫祚)의 옛 성이라고 전해지는데,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기록된 바가 이와 같으니, 어찌 백제의 옛 도읍에 문무왕이 다시 성을 쌓았겠는가.
⑶두타초 제3책 / 시(詩)
조선후기 문인 이하곤李夏坤(1677~1724)의 문집. 전체 18책으로 1,650여편의 시(詩)와 서(書) 등이 실려 있다
남한산성 잡시 8수〔南漢雜詩 八首〕
대낮에도 모래바람에 철문 어둡고 / 白日風沙暗鐵關
외로운 성 사방이 황량한 산이구나 / 孤城四面卽荒山
이곳을 하늘이 어찌 무심코 만들었으랴 / 此中天豈無心設
어쩌다가 오랑캐가 의기양양하게 돌아갔나 / 底事胡曾得氣還
전사한 귀신들 머리 찾느라 때때로 울고 / 戰鬼索頭時自哭
묻힌 창에 얼룩진 피 오랜 뒤에도 선명하네 / 沈戈漬血久猶殷
못난 선비 태평한 세상을 걱정하지만 / 腐儒但識憂平世
다행히 병자년에 태어나지 않았구나 / 幸不身生丙子間
쓸쓸한 외로운 성 찾아오니 절로 서글픈데 / 蕭瑟孤城氣自哀
성 머리에서 바라보니 높은 누대구나 / 城頭縱目更危臺
한 무리 흰 기러기 비스듬히 날아가고 / 一群白鴈方斜度
무수한 푸른 산들 솟구치는 듯 / 無數靑山似湧來
전장에 지금은 노목만 남았으니 / 戰伐于今餘老木
흥망은 예부터 뜬 먼지 같았지 / 興亡從古只浮埃
가련하다 부질없이 남은 온조의 사당 / 可憐溫祚空遺廟
국화 꺾어 술잔 올리고 싶네 / 欲折寒花薦酒杯
예부터 금성탕지로 남한산성 일컬었으니 / 從古金湯說漢城
구름이 닿을 듯 성가퀴 우뚝하네 / 連雲雉堞復崢嶸
오늘에도 산하에 치욕 남았는데 / 今來自有山河恥
늙어서도 중국 맑아졌단 말 듣지 못하네 / 老去難聞華夏淸
창망한 세상사에 눈물 흘리니 / 世事蒼茫堪一涕
비루한 유자로 평생의 포부 저버렸네 / 儒冠齷齪負平生
주민이 동쪽 봉우리 가리키며 / 居人指點東峰上
가한이 당시에 주둔했던 곳이라 하네 / 可汗當時此結營
결영(結營)은 “깃발 세우다.〔豎旌〕”로도 쓴다.
옥정사 차가운 샘 찾아가지 않고 / 玉井冷泉不去尋
고목 우거진 서대에 올랐어라 / 西臺老木此登臨
구름에 살기 엉겨 산천이 엄숙하고 / 雲凝殺氣山川肅
귀신이 황량한 해자에서 울어 초목이 음산하네 / 鬼嘯荒壕草樹陰
다른 날 황하 맑아짐을 다시 볼 수 있을까 / 異日河淸能復覩
백 년 동안 하늘 취했으니 이 무슨 마음인가 / 百年天醉是何心
서글피 노래하며 홀로 웅검을 바라보고 / 悲歌獨自看雄劍
찬바람 맞으며 저녁 산에서 눈물 흘리네 / 衰涕寒風灑夕岑
선왕께서 예전에 한양 떠나 / 先王昔有去邠行
다급한 상황에 사직을 이 성에 의탁하셨지 / 社稷蒼黃寄此城
누가 동관의 험지를 끝내 잃게 했는가 / 誰遣潼關終失險
정나라만 맹주를 찾아왔다고 하네 / 還聞鄭國但尋盟
바람과 구름은 아직도 천 년의 한 띠었는데 / 風雲尙帶千年恨
해와 달처럼 몇 사람의 이름 부질없이 걸렸네 / 日月空懸數子名
한강 물 넘실넘실 바다로 흘러가니 / 漢水滔滔朝海去
찬 하늘 향해 눈물 흘리며 숭정을 떠올리네 / 寒天流淚憶崇禎
높다란 서장대 구름과 나란하고 / 西將臺高雲與平
화산 마주하고 술 마시니 한강 비껴 흘러가네 / 華山對酒漢江橫
부끄럽다 삼전의 비석 차마 보랴 / 深羞忍見三田石
옛 자취 부질없이 백제성에 남았구나 / 古跡空餘百濟城
너른 들판에 외로운 안개 일어 저물녘 풍경인데 / 野闊孤烟方暮色
맑은 하늘에 낙엽은 다시 차가운 소리 내네 / 天淸落木更寒聲
쓸쓸히 가을 슬퍼하는 마음 있는데 / 蕭條自有悲秋意
하물며 여기 올라 감개한 마음 견딜 수 있으랴 / 況耐登臨感慨情
구름 속 고목에 등 넝쿨 드리웠는데 / 參雲老木亂藤垂
천 년 전 온조의 사당 있네 / 溫祚千年亦有祠
낙엽은 가을 내내 흙 자리에 수북이 쌓였고 / 落葉一秋深土座
음산한 바람 종일토록 깃발에 불어오네 / 陰風盡日颯靈旗
세시마다 주민들이 제사 올리지만 / 歲時尙致居民祭
흥망의 역사에 나그네 서글퍼지네 / 興廢空令過客悲
문 앞에서 말 내려 재배하니 / 下馬門前還再拜
황량한 숲의 석양이 이끼 낀 계단 비추네 / 荒林斜照入苔墀
별처럼 늘어선 여덟 사찰 성 사이에 있는데 / 星羅八寺府城間
천주사를 가볼 만하다지 / 天柱曾聞可一攀
걸어가는 곳 민가의 연기가 하계에 이어졌고 / 行處人烟連下界
앉았노라니 낙엽이 찬 산에 가득하네 / 坐來秋葉滿寒山
방울 흔들며 취한 무당 참으로 우습고 / 搖鈴醉覡眞堪笑
삿갓 쓴 승려 모두 완고하구나 / 戴笠居僧盡是頑
다만 남쪽 누각에서 달을 감상할 만하여 / 獨有南樓宜翫月
머물러 술 마시고 밤중에 돌아오네 / 只須留飮夜中還
⑷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① 조선시대 남한산성은 주봉인 해발 497.9m의 청량산을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연주봉(467.6m), 동쪽으로는 망월봉(502m)과 벌봉(515m), 남쪽으로도 여러 봉우리를 연결하여 성벽을 쌓았다. 성벽의 바깥쪽은 경사가 급한데 비해 안쪽은 경사가 완만하여, 방어에 유리하면서도 적의 접근은 어려운 편이다. 봉암성(蜂巖城), 한봉성(漢峰城), 신남성(新南城) 등 3개의 외성과 5개의 옹성도 함께 연결되어 견고한 방어망을 구축하였다. 성벽과 성 안에는 많은 시설물과 건물이 있었지만, 지금은 동·서·남문루와 장대(將臺)·돈대(墩臺)·보(堡)·누(壘)·암문·우물 등의 방어 시설과 관청, 군사훈련 시설 등이 남아 있다.
②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일장산성이라고 기록되었는데, 둘레가 3,993보이고 성 안에는 군자고(軍資庫)가 있으며 우물 7곳은 가뭄에도 마르지 않으며, 성 안의 논밭이 124결(結)이나 된다고 하였다. 이 기록 역시 신라 때 축성된 주장성, 일장성이 그대로 이어져 온 것으로 보인다.(124결=372,000평, 여의도 면적의 43%, 축구장 약170개)
3.
⑴남한산성의 위치를 지도로 고찰하면 다음과 같다
2026.05.04.松溪
첫댓글 감사합니다!^^
(지금 다시 찾아보니 2022년 여름이었네요. 남한산성에 소나기 한 번 쏟아졌다고 성벽 허물어졌다는 기사가 떴었는데, 그것만 봐도 현 반도에 있는 그것은 급조한 가짜라는 게 증명되고도 남습니다. 성(城)이라 할 정도의 석축 구조물이라면 포크레인으로 철거하지 않는 이상 최소 수 백년은 짱짱하게 버텨야 하는데 폭우 한 번에 무너진다는 건 말도 안되겠지요.)
고맙습니다
1. 남녘땅에 이름만 심어놓은 곳이 가짜라는 사실은, 18만4천坪 정도에 지나지 않는 現 지정면적 608,705㎡이 송계선생님께서 인용하신 世宗實錄地理志 京畿 廣州牧 기록과 어긋난다는 점에서도 드러납니다. 日長山城在州治南 高險 周回三千九百九十三步 內有軍資庫井七 遇旱不渴 又有旱田水田共一百二十四結...라는 대목 중에(正祖는 일찍이 南漢本名日長山而國朝中葉以後始稱淸凉山(正祖實錄 3년 8월 7일)이라 하였습니다), 水田 旱田 합하여 一百二十四結이라 하였으니, (좁게 잡아) 一等田기준 약 3,000坪이라 해도 (위에 쓰신 바와 같이) 372,000坪이 됩니다. 논밭만 그러하니 각종 건물들을 합친다면 그보다 훨씬 넓어지게 될 터인데, 18만4천坪은 城內 農土 절반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2. 다만 위치에 관해 덧붙이자면, 최두환 역주 [하멜표류기] 179-184쪽을 참고하건대, 하멜 일행이 말했던 Namman Sangsiang은 결국 終南山이 아닐까 합니다. 위에 인용된 頭陀草 南漢雜詩 第五首 第一句에 先王昔有去邠行 社稷蒼黃寄此城이라 하여 邠(咸陽>長安)을 들고 있고, 仁祖 14년 12월 14일 실록기사에 日晩大駕將發...駕到崇禮門...上還從水溝門出向南漢山城...初更後大駕到南漢山城이라 했으니 (이 기록이 조작된 것이 아니라 한다면), 해질 무렵(日晩) 長安에서 출발하여 그날밤 初更 지나 도착할 거리로 대략 맞아떨어진다고 보입니다.
12월14일의 일몰시간은 반도와 대륙 남양 기준 모두 5시20분전후입니다. 남한산성으로의 피난은 말을 타고 가는것으로 보아야 하니, 최고속도가 아니 그 절반의 속도로 본다면 시간당 20-25km수준입니다. 해질녁 출발하여 밤 초경이 지나 도착했다고 하니 4시간이상 걸렸다는 말이 됩니다. 80-100km를 이동했다는 분석이 되겠지요.
송계님 좋은글 감사합니다
근데 대사산(大寺山)의 풍경사진이라고
올린 사진의 모습은 섬서성의
퉁촨시(铜川市)의 위치한 향산풍경구로
허난성에 있는곳이 아닙니다
해당 관광사이트에도 올라와있습니다
https://k.sina.cn/article_2135948922_7f4ffe7a001013fxs.html
해당사이트에 소개글과 사진입니다
잘 지적해 주셨습니다. 일전 연구시 구글지도를 통해 위치를 찍어 들어갔더니 첨부한 사진들로 연결이 되어 올린거였는데, 다시 살펴보니 천조님 말씀이 정확합니다. 일단 위치는 타당성이 높아 그대로 두고 사진만 내렸습니다. 좀 더 찾아봐서 타당한 사진이 보이면 재첨부하도록 하겠습니다. 중요한 것 찾아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송계 빠른수정 감사드립니다 구글지도에
올라온사진들중에는 현지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장소나 건축물들도 자주올라옵니다 저도예전의 이것때문에 여러번 허탕친 경험이 있습니다 꿀팁하나 드리자면은
구글검색창에 허난성(河南省)과함께
산(山)고성(古城)등을 한자로 검색하시면
여러자료들과 관광사이트에 소개된곳들을
볼수있으실겁니다
@천조 네 감사합니다. 사진 찾는대로 다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