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바다는 바다란 말로 다 담을 수 없다. 내 바다는 바다 위에 떨어진 겨울 폭설이다. 내 바다는 실재이자 허구이다. 내 바다는 오직 마음속에 머물 뿐이다. 내 바다가 바다인 것은, 바다 밖이 비었기 때문이다. 내 바다는 육지보다 더 슬프다. 내 바다는 바다란 말 바깥에 있다. 내 바다는 물의 의경意經 속에 신神이 거한다. - 김동원 '시인의 말'
김동원 시집 《관해觀海》읽기
- 목소리, 그 천지 비(否)와 지심
김상환 시인 평론가
《깍지》(2016)와 《빠스각 빠스스각》(2022)에 이어 마침내 세상에 내어 놓은 김동원의 새 시집 《관해觀海》는 〈바다와 시니피앙〉외 32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시와 사유,자전 해설또한 이채를 띠는 이번 시집을 위해 저자는 고향 영덕 일대의 바다는 물론, 울릉도와 제주도, 비진도와 지심도 등 섬이란 섬, 바다라는 바다를 두루 돌아다녔다. 그리고 바다의 절대시를 읽고 또 마음에 아로새겼다. 그 결과 바다는 하늘이었다. 불교적 우주관의 하늘이 도리천忉利天의 삼십삼천이라면, 이번 시집의 서른 세 편은 바다의 모든 것이며 가장 깊은 심연이다. 일찍이 공자는 동산에 올라 노나라가 작다는 것을 알았고, 맹자는 진심장구 상편에서관해난수觀海難水라 하여 바다를 본 사람은 물에 대해 더 이상 말하기가 어렵다고 했다. 이런 바다의 사유와 방법으로서관해觀海는 무엇인가? (무)의식의 바다에 대한 관심과 관찰, 관조로서 물物은 무엇이며, 어디에 있는가? 그 질문의 물[水]과 바다는 이번 시집을 통해 어느 정도 관해(寬解, remission)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의 바다는 풍경이자 상처이며, 사물과 마음의 바다이자 시니피에와 시니피앙의 바다로서, 물의 경전이다. 그것은 시인의 마음에서 생성된 풍경인 만큼, 마음의 추상[意景]을 말한다.
김동원 시인에게집은 시의 바다로 나 있는 꿈길(「자전 해설」)이다. 꿈에도 길이 있다면 바다로 나 있는 시의 집이 그것. 그 집에 당도하는 데는 생의 아픔과 슬픔의 고비를 넘고 넘은 이순의 나이를 넘어서였다. 그랬을 때, 비로소물(이) 물의 은유임을,몸 있는 것은 몸 없는 것임을(「월아천月牙川」),지우는 방식으로 채우는 바다(「바다와 시니피앙」)임을 새삼 깨치게 된다. 이런 모순의바다는 언어를 가리고 언어로 핀다(「시뮬라크르」). 언어로서 언어를 넘어서는 시작詩作의 본래는 물 속의 불, 죽음 속의 사랑을 발견하는 일이다. 바다는 질문이며 눈물이며 입술이다. 몸이며 처녀이고 아버지다. 시와 화엄, 귀면鬼面으로서 바다는, 바다의 얼굴은 존재와 생성의 상징이자 무한이며 에피파니ephypany다. 그 바다의 심층에 다다르는 말은장님의 언어와낯선 언어, 아니면 언어를 죽이지 않으면 불가능한 말이다.
한편, 천지가 서로 사귀지 못하면 비否가 된다. 이 경우 비否는 막히거나 비색함을 뜻한다. 아닌게 아니라, 김동원의 많은 시편들에는 이런 천지 비괘否卦의 비색한 인물과 배경이 주를 이루며, 아름답고 깊은 서정의 방식으로 승화되어 있다. (달빛에 물이 너무 맑아 울고 싶거든/ 그 밤바다 은빛 꽃가루 눈부신 고래불해수욕장으로 가라,「고래불해수욕장」)「바다와 시니피앙」에서 보듯이,복復에서 천지의 마음을 본다.(復其⾒天地之⼼乎:『周易』彖傳 復卦).계속해서 물속으로 들어가다 보면, 어느 사이에 나는 깨달음의 목어-물고기가 된다. 그 물과 몸각의 바다는 문門이 없고 문問이 있다. 곤鯤이 붕鵬이 되는 순간이다. 대소와 유무가 전도되는, 속박이 자유가 되는 그것은 천지의 마음을 알고 느낀다.바다는 바다일 때만 나비가 되는(「바다와 시니피앙」) 그것은, 있는 그대로의 말이다.
관해의 시인에게 이번 시집이 갖는 특이점은 또한 목소리(어조)와 음성상징어에 있다.아아/ 으악!/ 아이쿠/ 아흐!/ 흑 흑/ 아버지!/ 호오이, 휴잇/ 칭 칭 칭/ 타앙, 탕!/ 둥, 두둥/ 흐렁등에 나타난 단말마적인 음성과 명령형의 어조(번지거라,더듬어라,밤바다를 보라,고래불해수욕장으로 가라)가 그것. 이는 극적인 방식으로 임팩트 효과와 계시적 성격을 드러내는 미적 장치이다. 그리고 여전히 알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것은,그 새벽 모랫벌 위 어둠 속 흰 천 밖으로(「지심도」) 나 있는 섬과 바다, 그 목소리다. 시의 네 번째 음성으로서 환한 어둠의 현.
바다와 시니피앙
김동원
숨을 깊이 들이쉬고, 그는 계속해서 물속으로 들어간다. 한 마리 물고기가 되어, 아래로 아래로 헤엄쳐 내려간다. 물은 물의 은유다. 바다는 문門이 없고, 있다. 바다의 깊이는 질문이다. 오, 지우는 방식으로 채우는 바다여! 바다는 거울을 보지 않는다. 바다는 생각을 생각하지 않는다. 바다는 노을을 버리고 주체가 된다. 바다는 바다일 때만 나비가 된다.
섬과 수화
김동원
슬픈 귀머거리는 슬픈 그림자가 있네. 그 아침 동백꽃에게 다가가, 그녀는 붉은 손가락을 펴 무어라 혼자 수화를 하네. 바람과 바람 사이, 꽃잎의 입술을 더듬네. 그 순간, 바다가 들썩였네. 막힌 울대에서 이상한 물 울음소리를 냈네. 슬픈 귀머거리는 슬픈 그림자가 있네. 손끝에서 우는 슬픈 섬이 있네.
격발
김동원
그 여자의 무릎에 누워 화경花莖을 들어서야만 했다. 다가서니 형形이 없구나. 하늘에 바람의 두 다리가 걸려 있다. 그렇게 번지거라, 붉은 언어여! 쪼개지리라. 장미의 격발擊發, 그 피의 흰나비여! 추상은 추상의 거리만큼 아득한 순수. 꽃의 피살, 교활하구나 혀여! 멀어서 낯선 언어여!
세월처歲月處
김동원
좀 들어 보라 카이. 의미 그거 다 쓸데없는 기라.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아이가. 바람 불면 꽃 쪽으로 달빛 나오면 댓잎으로, 간들간들 사운대다 가는 게 인생 아이가. 그래, 그기라니까. 말도 안 되는 기 말 되는 기라니까. 그래, 그래, 반쯤 술에 취해 그렇게 놀다 서산으로 번지는 기라. 한 백 년 서로 얽히고설키고 뜯어먹다 가는 기라. 좀, 좀 들어 보라 카이. 안 보이는 거 보이도록 하는 기 시詩 아이가. 막히면 죽고 뚫리면 사는 거 연놈들 이치 아이가. 쓱 쓱 허공에 썼다가, 쓱 쓱 쓱 지우는 거, 그게, 오고 가는 세월처歲月處 아이가!
비괘否卦
김동원
내 심장 번쩍 칼빛 번개가 내리쳐요
저 바다 폭풍을 건너
무작정 그녀가 밀려 들어왔으니까요
왜 이리 마음이 아플까요
처음부터 그녀 심장에 내가 없었으니까요
그 남자의 눈빛 속에 내 여자의 사랑이
걸어 들어가는 것을 보았으니까요
아, 내 심장 쿵쿵 천둥이 쳐요
그녀의 눈에 내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내 흐르는 눈물이 다 말해주었으니까요
흐렁 흐렁 흐렁
김동원
아이고, 자가 누고! 복순 아버지, 순돌이네 큰애, 뒷집 허갑이 아제 아이가. 신묘년 오징어잡이 한배 탔다가 몽땅 수장水葬된, 가엾은 가엾은 목숨들. 흐렁 흐렁 흐렁 물 밟고 서성이네. 그래 그래 그래…, 뭍은 무탈하니 훨훨 다 벗고 올라가거래이. 돌아볼 것 없다 카이! 아이고, 이 새벽 뭐 할라꼬 또 흰 수의壽衣 입고 저리들 몰리오노!
시뮬라크르
김동원
바다의 입술은 위선적이다
라고 했다가, 바다란 말은 더 폭력적이다라고 고친다
미친놈!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할 것
비트겐슈타인이라고
썼다가, 바다는 언어를 가리고 언어로 핀다
다시 바다는,
바다의 몸은 관점의 차이라고 썼다가
들뢰즈에게 들켜, 닮은 것은 모두 사기꾼이라고 적는다
창포항 문어잡이
김동원
동해 폭설이야 내리라면 내리라지
갈매기 콧등에나 내리라지
문어 하면 봄 문어文魚라
붉은 물결 등대 너머 번지는구나
새벽해야, 수평선 화폭을 칠하라지
구름에 경심줄도 달아야지
물안개에 도래도 달아야지
총각 어부 처녀도 낚아야지
미끼는 가재가 그만이라
청어 내장 더 좋을시고
아이쿠, 이놈 먹물 뿜는구나
바다에 시를 찍 찍 갈기는구나
반들반들 이마가 빛나는 문어야
여덟 다리로 빨판으로
칭 칭 칭 저 아침 햇덩이 감아 올려라
대진항 해녀
김동원
대진항 바닷속에는 내 여자가 산다
지느러미를 가진 그 여자는 물속에 핀 장미였다
두 귀가 들리지 않아
밀물과 썰물 사이 집을 짓고 살던 그 여자
나만 보면 소라 소리로 웃다가
자홍색 우뭇가사리처럼 물속 깊은 바위 속에 달라붙다가
수줍은 노래미가 되어 물 밖 하늘하늘 고개를 내밀고
그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몰아쉬며
호오이, 호오이, 휴잇!
꽃 피는 숨비소리를 내었다
물안개 자욱한 물속 산호 이야기를
그 여자의 무릎을 베고 나는 들었다
가슴에 망사리를 끼고 길쭉한 빗창으로 전복을 따
한 잎 한 잎 장밋빛 손으로
혀 속에 밀어 넣어 주던 그 여자
어느 날 붉게 웅크리고 우는 노을의 이야기를
여자는 수화로 들려주었다
대진항 바닷속에는 내 여자가 산다
그 겨울 수평선 아래로
떨어져 녹아버린 흰 눈의 그 아픈 여자가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