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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아온 글...(보이지 않는 전쟁 30년)
베트남 역사의 기원을 들어가자면 베트남은 인도차이나 반도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외부의 침략이 끊이지 않고 계속 침공해왔습니다. 그래서 베트남의 역사를 투쟁의 역사라고 정의합니다. 베트남 민족은 인도차이나 반도내에서 분열과 통일을 반복하고 크메르 인들과 중국의 왕조들의 침공에 식민지화 되거나 독립하는 역사를 가졌죠. 이러한 점으로 보았을때 베트남 사람들은 외부인의 지배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이며, 한편으로는 자신의 민족의 긍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자 이제 각설하고 베트남전 배경에 대해 서술해보겠습니다. 베트남 전쟁은 복합적으로 프랑스 식민지 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프랑스 식민시절 착취식 지배구조로 베트남 내에서는 프랑스에 대한 반감이 식민지 시대부터 싹트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2차대전이 발발하여 유럽전선에서 프랑스가 독일에게 항복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상황이 이렇게 변하자 인도차이나 프랑스 식민지는 본토가 항복했으니 비시 프랑스(독일 점령 당시 비시를 수도로 하는 폐탱 수반 프랑스)로 넘어가게 됩니다. 하지만 당시 아시아는 일본이 대동아 공영권을 바탕으로 군국주의를 앞세워 침략전쟁을 벌이던 시기였습니다. 그리고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면서 추축군에 가담하였고 당연히 프랑스는 일본의 적국이 되는 상황이 오게 되었죠. 그리하여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는 일본에 항복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여 일본이 인도차이나를 지배하고 식민지배 프랑스 인사는 그 아래로 흡수되는 형식으로 진행하게 됩니다. 당시 이 시기에 베트남 내부에서는 공산주의자와 민족주의자가 연합하여 침략군에 대항하는 실정이였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때 미국은 OSS(CIA 전신, 전략정보국)을 이용하여 비밀리에 베트남 내부 투쟁에 지원을 하였습니다.이유는 일본이 연합군과 전쟁중이였기 때문에 미국은 당시 남방전선의 와해로 일본 점령지가 된 지역에 게릴라 지원을 하게 된 것이죠. 그리고 2차대전 종전후, 일본이 항복하고 베트남 지배권이 누구에게 가야는 것인가 문제가 대두하게 됩니다. 하지만 미국은 같은 연합군으로 싸워준 프랑스의 식민지였으므로 프랑스를 암묵적으로 지지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프랑스는 다시 베트남에 대한 지배권을 명목으로 군대를 파견하여 베트남의 독립운동을 저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식민시절 꼭두각시 황제 바오다이를 수장으로 앉히게 되고 실질적인 통치를 실시합니다. 그러자 호치민을 필두로한 공산주의자들이 북베트남 지역에서 독립을 선포하자 프랑스가 무단으로 하이퐁을 폭격하고 북베트남으로 침공하게 됩니다.
▲디엔비엔푸 함락 후 프랑스 포로 모습, 디엔비엔푸 전쟁은 불리한 전황을 타개하기 위해 프랑스군이 요새화 시켜 베트민을 끌여들여 섬멸시킨다는 계획을 가지고 건설한 요새입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단점으로 지상 수송로가 1개밖에 존재하지 않았는데, 이것을 안 보구엔 지압 장군은 이 수송로를 틀어막고 요새를 겹겹이 포위시켜 포위망을 좁혀나가면서 프랑스군을 압박하였습니다. 결국 물자가 떨어진 프랑스군은 항공수송으로 버텨보나, 대공포를 설치하고 이마저도 힘들어지면서 항복하게 됩니다.
초기엔 프랑스군의 우세로 베트민(북베트남 사람)들이 게릴라 전술로 회귀 하였으나, 전후 군축이 진행되는 프랑스는 전비 문제로 18만의 병사중 8만의 병사를 철수 시키게 되고 베트남 내부 여론이 반프랑스 정서 였기 때문에 전쟁이 장기화 되자 프랑스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954년 디엔비엔푸 요새에서 프랑스군 주력이 포위당해 치열한 전투끝에 프랑스군이 항복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7월 21일 제네바 회담을 끝으로 프랑스군 철수와 함께 북위 17도선 휴전선 설정과 2년후인 1956년에 남북 통합선거를 통해 베트남을 통일시킨다는 합의를 보게됩니다. 하지만 프랑스는 앞서말한 꼭두각시 황제인 바오다이를 남베트남 황제에 앉히고 정통 정권이라고 주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1956년에 남베트남이 총선거 이행을 거부하면서 양국의 관계는 악화됩니다. 이 시기에 미국은 1차인도차이나 전쟁(베트남 - 프랑스간의 전쟁)당시에 프랑스에게 지원을 해주고 있는 상황이였는데 상황이 급변하자 남베트남에 대한 지원을 확대하기 시작하였고, 도미노 이론을 통해 남베트남이 무너지면 전 동남아시아가 공산화 된다는 공포심에 적극적인 행동으로 실천하게 됩니다. ▲틱쾅뚝 스님의 분신 자살, 1963년 6월 11일에 전쟁 반대를 주장하던 스님의 소신 공양 사진입니다. 당시 남베트남 정국은 혼란스러웠고 사회주의자, 민족주의자, 불교계 인사, 대학생, 지주 세력등 여러가지 세력이 얽히고 뒤엉켜 데모가 빈번하게 일어났는데, 당시 불교계는 남베트남 정부로부터 크게 탄압받고 있었습니다. 이 분신 자살을 시작으로 분신 자살의 숫자가 증가 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남베트남 사정은 좋아보이지 않았습니다. 황제가 조폭들에게 경찰권을 팔아넘기고 군부 쿠테타가 진행되면서 정치권은 혼란스러워지게 되었고 쿠테타 정부는 친미를 강조하고 반공을 중요시하였기 때문에 미국은 이런 쿠테타를 암묵적으로 용인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쿠테타로 남베트남 사회는 혼란의 연속이였고 남베트남 사람 조차 정부를 비판하다가 포기하게 되는 상황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런 혼란시기에 남베트남 통일 전선(베트콩)이 형성 되었고 이들은 북베트남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조국 통일을 목표로 행동하게 됩니다. 그리고 북베트남 수반은 조국 통일이라는 목표아래 국가를 단합시키고 10년이든 20년이든 목표를 수행하겠다라고 방침을 세우면서 전쟁의 기운이 감돌게 됩니다.
▲1964년 통킹만 사건 직후 Life지 표지, 이 당시에는 미국이 베트남에서 패배할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극히 소수에 불과 했다. 미국은 베트남 상황이 안좋게 치닫자(특히 63년에 벌어진 압박전투에서 남베트남군 2000명이 게릴라군 200명에게 패퇴당하는 졸전을 벌이게 되며), 케네디 정부때 군사 고문단 파견을 시작으로 지원을 늘려나가게 됩니다. 그리고 1964년 통킹만 사건이 벌어지자, 베트남 상황을 타개할 구실을 찾던 미국에게는 좋은 기회로 다가와 직접적인 군사 개입에 돌입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흔히 아는 베트남 전쟁의 주요 부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 때 당시 미국은 국제적으로 지원을 요청하기에는 명분이 부족했기 때문에 우방국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한국에서도 군사지원을 하게 되고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타이등 국가가 소수의 전투병력과 비전투병력을 파병합니다.
▲베트콩 땅굴의 내부 구조도, 기본적으로 저기서 생활이 가능하고 작전 기지로 사용할 정도였습니다. 유사시에는 강과 연결되어 있어 대피할때 강을 헤엄치고 강을 따라 도망가기도 합니다. 이러한 땅꿀이 수만개가 있다고 알려져있으며, 미군은 입구로 추정되는 곳에 수류탄을 떨구고 '땅쥐'라고 불리는 몸집이 작은 병사를 이용해 땅꿀 수색을 실시하였습니다.
그리고 베트남 전쟁의 전개 양상은 전면전이 아닌 '고양이와 쥐'라고 비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미국은 소련과 세계를 양분한 초강대국이였기 때문에 북베트남 혼자서 전면으로 상대하기엔 열세였으므로(아이드랑 전투 에서 미군의 화력에 밀려 패배하게 됩니다) 곧바로 게릴라 전술로 전환하였고, 특히 베트콩이 이시기에 준동하여 남베트남 농촌 지역의 지배권을 강화하게됩니다. 이렇게 되자 미국은 남베트남의 베트콩 무리를 소탕하기 시작했고 베트콩은 땅굴을 이용한 요새를 구축하고 야밤에 마을을 점거하거나 미군 기지를 습격해오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미군은 이들 근거지를 토벌하기 위해 여러가지 군사 작전을 전개하게 되고 막대한 화력(공군력과 야포를 이용해 적이 주둔할 예상지점을 폭격 또는 순찰정을 이용해 강변의 지역을 포격)을 투사하여 말 그대로 지역을 초토화 시키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베트남 사람들이 피해를 입게 되었고 이들은 미군의 이러한 행동에 반발하여 베트콩에 지원을 하는 악순환을 겪게 됩니다. ▲1966년 당시 헤이스팅스 작전중인 미 해병대, 이처럼 베트남 전쟁은 수색작전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처음에 미국에서는 전쟁 찬성의견이 많았으나 일부 사람들은 제한전이라는 성격으로 한국전쟁을 비유하여 전쟁 수행시 완벽한 승리를 장담하지 못한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실제로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는 주 전장이 남베트남에 국한 되었고 미국은 북베트남 전투능력과 의지를 꺾기 위한 제한적인 북폭만 감행하게 되고 북위 17도선 DMZ지역으로 침입하는 것에 대해서 소련이 개입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해 제한을 두는 전쟁을 치르게 됩니다. 그렇게 1967년까지 진행해오게 되는데 이 시기까지 미국 국민들은 정부의 말을 믿고 전쟁은 순조롭게 진행되며 곧 끝날 것이라고 믿게 됩니다. ▲휴이 헬리콥터를 이용한 공중 강습 상륙, 2차대전당시에는 글라이더를 이용한 공중강습상륙이였으나, 그것을 대체한 헬리콥터는 베트남 전쟁시기부터 널리 쓰였습니다. 일반적으로 부대의 기동성이 증가했으며 지역에 불문하고 유용한 작전수단 병기였습니다. 이 것을 통해 헬리콥터의 효용성을 입증하게 되고 현대전에서 중요한 무기로 발전하게 됩니다.
베트남 전쟁은 2차대전의 전쟁과 현대전의 과도기상에 있는 전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초기 전자전(호치민 루트에 사람 움직임을 감지하기 위한 전자 장치나, 열 감지 장치를 B-52를 통해 투하하였습니다.)이 이때부터 시작되었고 미국은 미사일 만능주의(제공권을 다투는 전투기간의 전투에서 미사일로 중장거리의 적기를 격추시키는데 효율적이라고 생각했으나, 이런점을 알고 북베트남 공군이 근접전을 벌여와 막상 기총을 복구시키는 결과)와 공군 폭격(북폭 당시에는 B-52가 아닌 함상 공격기를 통해 폭격을 하는데 이유는 제한적인 북폭이니 공격기로 끝낼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장기화 되고 나서는 B-52도 동원하게 됩니다.)을 이용한 지원 양상이 눈에 띄게 늘어나게됩니다.또 당시에는 헬기가 발달되어 헬기를 이용한 수색작전이나 공격지원, 물자 수송, 부상자 후송등 여러가지 임무에 투입됩니다. 이 시기의 헬기의 중요성을 입증한 미 군부는 이후에 헬기의 유용성을 통해 대규모로 운용하게 됩니다. 그래서 흔히 베트남 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를 보면 공군지원에 의존하려는 성격이 강했고 밀린다 싶거나 정글로 침투하기 전에 대량의 폭격을 이용한 초토화 중반 이후에는 고엽제를 통한 정글을 말라죽이기 위한 작전이 시행되었죠. 이당시 사용된 폭탄량만 해도 2차대전 연합군이 사용한 폭탄량의 1.5배에 달하는 양의 폭탄을 쏟아 부었고 전쟁이 장기화 되면서 북베트남에서 보내오는 물자루트인 호치민 루트를 차단하기 위해 많은 폭탄을 이 지역에 쏟아붙게 되지요, 하지만 북베트남 군대는 미군의 공습을 겪였기 때문에 공습이 진행되자 재빨리 참호로 숨어 피해를 최소화 한뒤, 야간에 미군을 습격하고 정글로 치고 빠지는 전술을 씁니다. 당연히 미군은 정글속에 숨은 적을 찾기 위해 정글 수색을 하게 되고 매복중이던 베트콩의 공격이나 부비트랩으로 많은 수의 미군 사상자가 발생하게 됩니다. 이것이 기본적인 1968년 이전의 베트남 전쟁 양상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1968년 테트공세 당시 북베트남군의 침공로입니다. 남베트남 주요지역에서 베트콩이 봉기하였고 북베트남군은 남부와 중부 침공은 예정보다 규모가 축소되에 침공하게됩니다.(이유는 사이공은 남베트남의 수도였기 때문에 항시 미군의 경계가 테트기간이라 기존보단 축소되었지만 곧바로 군대를 반격할 수 있게끔 신속한 행동으로 옮겨졌습니다, 중부 플레이쿠 지역은 미군의 공군기지가 있는 곳인데 여기도 역시 철통같은 경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반면 중북부의 쾅트리, 케산일대가 포위당하고 후에지역은 북베트남의 1차적인 목표로 삼았기 때문에 전황이 유리하게 돌아가자 북베트남군이 여기로 병력을 집중시켰죠, 후에를 중심으로 치열한 전쟁이 벌어졌고 다낭항에 상륙한 미 해병대 병력이 후에를 탈환하고 뒤이어 쾅트리도 탈환 시킵니다, 그리고 페가수스 작전을 통해 케산의 포위망을 풀고 연계하는데 성공하죠.
▲대사관에서 총격전이 벌어진 직후 베트콩의 시체가 정원에 널부러져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내 반전여론이 증가합니다.
1968년 3월 1일 테트(베트남의 구정)기간에 휴전을 하자는 북베트남 제의를 미군이 받아들이게 되면서 미군과 남베트남 장병이 휴가기간 동안 휴식을 갖게 됩니다. 하지만 북베트남은 이 시기에 대대적인 공격 계획을 세우게 되고 남베트남 사회에 침투해 있던 베트콩을 이용해여 내부에서 봉기하게 하고 외부에서 친다는 전술을 구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 날 미국 대사관이 습격을 받아 한때 베트콩의 국기가 옥상에서 노출되는데 이것은 나중에 큰 파장을 몰고 오게 됩니다.
▲1968년 테트공세 당시 치열한 전장이던 후에 전투에서 작전중인 미 해병대 사진, 후에 전투는 한달동안 지속되었으며 당시 미군 교리는 정글전 위주의 수색전으로 구성되었는데, 처음으로 시가전을 경험한 전투이기도 합니다. 후에는 베트남의 고도(古都)로 불리며 이 전투에서 4/5이상이 피해를 보고 막대한 문화재가 손실되었습니다.
그리고 테트 공세가 진행되면서 베트콩이 내부에서 준동하자 미군은 이들을 곧바로 소탕합니다. 북베트남은 이 정보를 입수하고 대대적인 공격 계획을 대폭 축소하게 되지만 예외로 중부 베트남의 도시이자 옛 베트남 왕조 수도였던 후에를 점령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이 방면으로 군대를 보내 침공해옵니다. 기습적인 침공이였기 때문에 미 해병대 기지인 케산 기지가 포위당했고 후에는 곧바로 북베트남의 수중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하지만 미군은 곧바로 반격계획을 세우고 포위 당한 케산지역에 공수지원과 함께 공군 폭격으로 북베트남군을 저지하였고 후에지역은 미해병대를 주축으로 남베트남군과 협동작전을 전개하여 치열한 시가전 끝에 재탈환 하게 됩니다. ▲미국내 반전운동, 당시 미국의 사회는 혼란스러웠는데 그 중 하나는 베트남 전쟁으로 인한 사회문제였습니다. 시카코에서 운동 진압으로 사망자가 발생하면서 그 후 미국 전역으로 퍼졌고, 테트공세 직후에는 세력이 확장되어 급기야, 미국내 여론이 흔들리는 기점이 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승부수는 결정났습니다. 전술상으로는 미국의 압도적인 승리(이 공세로 베트콩 세력은 소멸하게 되고 주도권은 북베트남 출신에게 넘어가게 됩니다.)로 끝났으나 앞서 말한대로 미국 대사관이 게릴라에게 점거당한 화면이 미국 전역에 매스컴으로 퍼지게 됩니다. 이 것을 지켜본 많은 미국 국민은 전쟁에 대한 의문을 품게 되고 베트남 전쟁이 과연 옳은 것인가 생각하게 됩니다. 이 것은 히피운동과 결합되어 반전 운동으로 전개 되며, 당시 존슨 행정부의 지지도는 급락하게 됩니다. 이것은 곧 정권교체를 의미하며 1968년 미국 대선 당시 공화당의 닉슨이 베트남 전쟁을 끝내겠다는 공약을 세워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됩니다.
▲1969년 메콩강변에 고엽제를 뿌리는 미 헬리콥터, 고엽제는 1961년부터 75년까지 살포되었으며 총 8천3백6십리터에 달하는 고엽제가 남베트남 델타 지역(메콩강 하류)를 거점으로 살포되었습니다. 고엽제로 인해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휴유증으로 피해를 보고 있으며 베트남 사람의 400만명이 고스란히 노출되어 전후 큰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미군이 남베트남에 주둔하는 동안에도 남베트남 정국은 혼란스러웠습니다. 계속되는 쿠테타로 국민의 민심은 멀어져 갔고, 미군의 학살사건(미라이 학살)이 벌어지면서 미국의 도덕성에 치명적인 결함을 주게 됩니다. 그리고 닉슨 정권 초기에는 호치민 루트를 제공한다는 명분으로 캄보디아와 라오스를 괴뢰화 시키기 위해 확전을 벌이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특수부대가 캄보디아 전선에 전개 되어 호치민 루트를 습격하거나 북베트남 기지를 습격하게 됩니다. 역시 이 시기에도 전투 양상은 위의 68년 이전의 소탕작전이 주였으나, 간혹 북베트남 정규군과 중요 위치를 두고 치열하게 고전하게 됩니다.(69년에 제 101 공중강습사단이 937고지를 두고 점령 작전을 세우게 되는데 작전 과정에서 치열하게 전투가 진행되어 아군의 시체가 이리저리 굴러다니자 이 것이 햄버거 같다고 해서 불리워진 이름이 햄버거 고지전투입니다.) 하지만 미국내 여론이 안좋아지면서 당연히 미군의 사기는 현저히 저하되고 각종 프래깅 사건(사병이 장교를 살해한다거나 관련된 지하 신문)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마약이 빈번하게 부대내에 만연하면서 전투력이 급감하게 됩니다. 베트남 전쟁이후로 미군은 모병제로 전환하게 됩니다.
▲1972년 트랑 방이라는 마을이 폭격당하고 위의 사진은 베트남 출신 AP 기자인 닉 우트라는 사람이 찍은 사진입니다. 이 사진은 '전쟁의 공포'라는 이름으로 Life지에 실렸고후에 퓰리처 상을 수상받습니다. 베트남 전쟁으로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를 통틀어 200만명의 민간인 사망자가 발생했습니다.
그리고 1972년에 대대적인 침공준비를 마친 북베트남 정규군이 침공을 개시하면서 쾅트리지역을 점거하며 남베트남 일부성(省)을 점령하고 군대를 주둔하게 됩니다. 이시기에는 육군은 남베트남군을 주력으로 소수의 파견 병력이 존재하였고, 공군력과 해군력은 미군이 배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군 지원은 여전히 미국의 주도하게 이루어 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라오스로 침공한다는 작전을 세운 람손 719 작전이 71년에 진행되었는데 남베트남군이 북베트남군대와 싸우고 미 공군이 지원을 함에도 불구하고 대패하는 전술적인 패배마저 겹쳐지면서 남베트남군의 사기는 저하되고 맙니다.
▲1973년에 조종사 포로였던 로버트 중위가 극적으로 귀환하였다. 당시 미군 사망자는 공식적으로 5만 8천 159명으로 집계 되었고, 실종자 2천여명, 부상자가 30만 3천 635명에 달하였을 정도로 극심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1969년 부터 닉슨의 공약대로 부분적인 철수가 이루어졌고 1972년에는 대부분의 전투병력이 철수합니다. (완전 철수는 아니였으나 당시 남베트남군을 제외한 전투요원 숫자로는 한국군이 가장 많았습니다.)그리고 이 시기 동안 북베트남과 협상이 비밀리에 진행되기 시작합니다. 이 과정에서 북폭을 중단하였으나 북베트남측이 협상을 지지부진하게 끌자 미국이 협상을 끝내기 위해 대대적인 북폭작전 - 1972년 크리스마스 작전이 일어나고 결국 1973년에 정전협정을 맺고 미군과 우방국가 군대가 완전한 철수를 하게 됩니다.
▲1975년 4월 30일 사이공 함락 당시 사진, 사이공을 탈출하기 위한 몸부림 가운데 모든 외국인의 탈출 작전인 프리퀀트 윈드 작전이 시행되었고, 유복한 남베트남 사람도 탈출하기 위해 사이공 미 대사관 문을 넘어서 헬기에 타려고 아우성쳤다, 이 과정에서 한 여성은 자신의 자식만 비행기에 태우고 자신은 탈출하지 못한 안타까운 사연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미국은 베트남 문제에 손을 떼게 되었고 1974년에는 북베트남은 남베트남을 공격하면 미군의 추가 개입은 없을 거라고 판단(1973년에 제 4차 중동전쟁이 심화되는 과정에서 유가가 급등하면서 미국은 남베트남의 지원을 대폭 축소하였고 관심 순위 밖으로 밀려나게 됩니다.) 1975년에 사이공으로 향한 진군을 하게 됩니다. 남베트남군은 소수 부대를 제외한 대부분의 군대가 훈련조차 안된 오합지졸이였고 미군 철수 당시 수 많은 무기를 공여 받아 군사규모 4위 국가였지만, 그걸 유지하기 위한 비용이 없어서 제대로 운용하기 어렵게 됩니다. 그리하여 일부저항(쑤안록 전투 - 남베트남의 여단이 북베트남 4개 사단을 일주일동안 저지하였음)을 제외하면 제대로 된 저항을 하지 못하고 궤멸하게 되고 1975년 4월 30일, 사이공이 함락되면서 베트남 전쟁은 종결하게 됩니다.
▲1975년 4월 30일 당시, 사이공의 대통령 궁인 독립궁으로 진입하는 북베트남군 T-54전차, 위의 사진은 사이공 함락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진이 되었다.
베트남 전쟁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미국에서는 패배하지 않았다고 공식적으로 주장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미국이 패배한 전쟁이라고 평가하며 이후 미국 사회는 한동안 혼란스러운 격동기를 보내야 했습니다. 결국에는 전략적인 고도의 정치적인 패배가 드러난 완벽한 패배라고 봐야겠습니다. 당초의 전쟁 목표 달성에 실패하였고 패인 요인으로는 몇가지가 있는데 결정적으로 베트남 민심을 얻지 못하였고, 남베트남의 무능함과 제한전의 성격을 띄고 있었기 때문에 승리가 어려운 상황이였습니다, 또 많은 폭탄이 북베트남에 투하되었으나 북베트남은 산업시설을 복구하고 소련에서 공여받은 SAM제 미사일로 미 공군,해군기를 격추하게 됩니다. 이러니 아무리 폭격을 해도 피해가 커서 북베트남 전쟁 억지력을 막지 못한 것이 중요한 패배요인으로 지목됩니다. 하지만 매스컴이 전쟁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각인 시킨 전투가 베트남 전쟁이 아닌가 합니다. 이시기 매스컴은 자유로이 전선을 촬영하였고 이 과정에서 피해를 입은 미군을 집중 조명하거나 전쟁이 장기화 되면서 미군의 실상을 그대로 국민에게 전달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베트남 전쟁의 전훈을 새긴 미국은 이후 매스컴의 전쟁 취재를 제한하게 됩니다. ▲베트남을 미처 탈출하지 못한 사람은 보트를 이용해 국외로 망명했는데 이들을 보트피플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공해상을 떠돌다가 풍랑을 만나 목숨을 잃거나, 해적에게 피랍되는등 고난의 연속이였으며 베트남을 탈출한 인원은 400~500만명으로 추정된다, 그중 바다로 탈출한 인원은 150만명인데 전쟁이 낳은 비극이라 할수 있겠다.
어찌보면 베트남 전쟁은 보이지 않은 전쟁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전쟁은 30년 이상(1945 - 75)간 벌어졌고 긴 전쟁동안에도 남베트남의 주요도시를 제외한 농촌 지역은 무법지대였으며 전면전의 성격을 띄면서도 여러가지 복합적인 전투(게릴라전)가 일어났기 때문에 격렬한 전쟁이라고 봐야겠습니다. 이 전쟁으로 미군의 사망자는 57,000명에 달하며 전후 미군이 당한 피해중에 최고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전비로 7380억 달러가 지출되어 경제적으로 크게 악화되었으며 이것은 클린턴 행정부가 경기를 회복할 때까지 경제 성장의 발목을 붙잡는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