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시습지로 되살아난 '생명의 보고'
1만4000㎡ 면적에 500여종 동식물 서식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아 걷기 좋은 곳
호남권 대표 생태문화관광코스로 부각
우리의 조상들은 음양오행설을 믿고 살아 왔다.
그래서 오방색(五方色) 즉 다섯 방위를 가리키는 색으로 황(黃), 청(靑), 백(白), 적(赤), 흑(黑)의 5가지 색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요즘의 화가들은 우리의 오방색을 즐겨 쓰고 있다. 이왕이면 좀 더 알아보자.
이러한 선조들의 색채문화를 가지면서 우주의 생성의 근본이 되는 것을 색깔이라고 여겼으며, 그것 다시 동, 서, 남, 북, 중앙으로 5가지 방향을 연결시켜 우주와 생성의 근본을 지키면서 우리문화를 지켜왔다. 오행사상에서 동쪽은 봄을 의미하며, 태양이 솟는 곳으로 나무가 푸르러서 청색을 썼으며, 서쪽은 가을로 표현 했으며, 쇠의 기운이 강한 곳으로 쇠의 빛이 희다고 보아 백색을 썼으며, 남쪽은 여름으로 항상 태양의 빛을 받기 때문에 붉게 봐서 적색을 이야기 하며, 북쪽은 겨울로 깊은 골이 있어 물이 있다고 생각하고 검은색을 썼으며, 중앙은 지구의 중심으로 흙의 빛깔인 황색을 썼다.
옛 어른들이 고창읍내에서 질마재를 넘어 사실재, 행정재(송암), 직업재(매산), 굴치재(용계), 백운재(운곡) 등 다섯 갈림길로 나누워지면서 오방골로 불리다가 오베이골로 변화 되었다. 포구인 좌치나루는 지금의 고창군 부안면 용산리 근처로, 이곳은 부안의 격포, 모항, 곰소, 위도 등의 사람들이 뱃길로 오면 한나절이면 고창의 좌치나루에서 질마재 넘어 쉽게 고창 현으로 오는 길이였다.
이곳의 오방골은 사통팔달로의 번화가는 아니었어도, 그 어디엔가 주막도 있을 법 하는 곳인데, 지금은 운곡저수지 아래 있어 가볼 수도 없는 처지다.
운곡습지와 고인돌 공원을 가보자.
고창의 내륙습지인 운곡습지는 남쪽의 DMZ라고들 한다.
비무장지대 DMZ는 1953년 한국전쟁 휴전 후 근 60여 년간 사람의 발길이 없어서 보존이 되었다면, 이곳은 1970년대 후반 영광원자력의 냉각수를 위해 저수지를 공사를 하면서 용계리 등 9개 마을 사람들이 이주를 하면서 이일대가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인 전형적 저습지의 형태의 전답에 고인 물이 사방으로 둘러싸인 산 때문에 자연스럽게 물이 고일 수 있어, 자연 스스로 습지화가 진행되어 생태계의 놀라운 회복력이 발휘되면서 원시습지 형태로 복원된 것이다.
버드나무군락, 괭이사초군락, 갈대군락 등 다양한 식물 군락과 조류, 나비류, 수서곤충 등 500여 종의 동식물 서식이 확인됐으며, 1만4천㎡의 면적에 수백종의 관속식물이 서식했다. 나비와 조류의 분포도 왕성했다.
산지저층습지로 국내에 이만한 규모는 찾아 볼 수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조사결과다.
세계문화유산인 고인돌군과 고인돌박물관과는 불과 3㎞거리다.
선사유적과 천혜의 습지가 함께하는 구역이다. 요즘같이 일교차가 심한 날은 물안개가 일품이다.
가는 방법은 2가지이다.
고창고인돌 공원에서 시작해서 박물관을 들려, 고인돌공원을 한바퀴 돌며 호젓한 흙길을 조금 걷다보면 서낭재가 나오는데 이곳에는 오래된 옛길로 재를 넘어, 먼 길을 떠날 때 안녕을 빌었다는 서낭재가 나온다.
이 옛길은 우리의 민중전래 신앙이었던 서낭당이 있었던 곳이란다.
오래된 고목에 돌멩이나, 헌 짚신 등을 걸어두면서 여행길의 안녕을 빌었던 곳이다. 여기서 조금만 내려가면 습지보존구역을 지나 운곡저수지 상류를 거쳐서 가는 방법과 반대로 오는 방법이 있다.
운곡저수지와 고창고인돌 공원구간은 8km 정도의 평지다. 쉬엄쉬엄 노닥거리면서 걸면 서너 시간이면 충분하다.
필자는 운곡저수지 길을 선택했다.
이유는 저수지의 물안개와 철새들을 촬영하기 위해 이른 새벽녘에 지인들과 광주를 출발하여 운곡저수지에 도착하여 카메라 풀고 준비하는데 하늘이 도움을 안준다.
날씨가 너무 포근하다. 포기하고 주변을 살피는데 뽕밭이 있고, 그리고 마을의 흔적이 강산이 세 번이나 바뀌었어도 남아있다. 흔적이란 무섭다. 다만 저수지 깊게 잠겨버린 오베이골을 비롯한 마을의 흔적을 볼 수 없어 아쉽다.
내가 있는 길은 지방도 734번 길이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moodeungilbo.co.kr%2Fupimages%2Ffiles%2F201401%2F433314-0.jpg) | 운곡서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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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길은 선조들이 곰소 쪽으로 갈 때 걸었던 신작로 이었을 것이다. 필자는 뽕밭에서 저수지 철조망 따라 있는 비포장 길로 가본다.
멋들어지게 덩치 큰 당산나무가 반긴다. 당산나무 아래는 ‘내무부 지정 보호수 당산목 느티나무 제1815호’라는 쓰여 있고, 뒤편에는 ‘警告’(경고)라고 한문과 큼직하게, 보호수는 국가의 보물이며, 조상의 유산으로 훼손하는 자는 의법처단 한다고 새겨져 있다.
어린 시절 동네어귀에 있던 비석에서 봤던 적이 있었는데 참으로 오랜만에 보니 고향마을에 있는 비석 생각이 든다.
이 당산나무에서 오베이골 어머니들은 정안수 떠놓고 전쟁 통에 나간 아들의 무사귀환을 빌었을 것이며, 손이 귀한 집은 삼신할메께 손주녀석 점지해 달라 빌기고 했으며, 정월이면 오베이골의 안녕을 빌었을, 당산나무는 이제는 소임을 바꾸어 운곡습지를 보존을 위해 있는 것 같다.
당상나무 건너편에는 운곡서원이 있다.
서원에는 고려말의 절신 충개공(忠介公) 백암(白嚴), 김제(金濟)과 충청공(忠正公) 농암(龍嚴) 김수(金澍)선생의 형제가 모셔졌다. 백암은 고려가 망했다는 소식에 동해 섬에서 숨을 거뒀다. 농암은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고려가 망했다는 얘기를 듣고 부인 류씨에게 두 군주를 모실 수 없다는 뜻을 전하고 중국으로 돌아갔다.
또한 강호(江湖) 김숙자(金叔滋)와 문충공(文忠公) 점필재(畢齋) 김종직(金宗直)과는 부자지간이 모셔져 있다. 강호 김숙자 조선 세종때의 학자로 정몽주 길재 등과 같이 성리학의 대가이며, 아들도 역시 영남사림파를 대표하는 조선성리학 학자이다. 정몽주(鄭夢周). 길재(吉再)- 김숙자(金叔滋)의 뒤를 잇고. 김굉필(金宏弼).-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의 앞에선 도통(道統)의 중심이라는 평가 받는 분이다.
사원의 안내판만 있고 네 분에 대한 안내문조차 없으며, 사원 건물이라면 좀 고풍스런 팔작지붕에 솟을대문이 있고, 그런 생각인데 좀 생뚱맞은 파란색의 발암덩어리 슬레이트 지붕의 사원이다. 아쉬움이 감돈다.
여기서 몇 걸음만 가면 동양최대의 고인돌이 있다.
무개만 300t 이라고 한다, 이 거대한 고인돌을 옮기기 위해 중장비도 없던 선사시대에 얼마나 많은 군중이 동원되어서 수고를 했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이곳부터가 운곡습지로 가는 길이다. 이곳부터는 환경부가 직접관리를 한다. 그래서 모든 길은 옛길 그대로 맨땅이다. 한여름이라면 맨발로 걸어보고 싶은 길이다.
이 길에서는 굳이 등산화 말고 가벼운 운동화난 시골 장에서 구할 수 있다면 짚신, 고무신으로 맨땅의 감촉을 느껴보자. 그 기분은 걷는 우리를 힐링 시켜줄 것이다. 소음이 없고 소리라곤 새들의 지저기는 새소리뿐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살았던 동네여서 유실수가 종종 눈에 들어오고 오솔길을 걷다보면 탐방로다.
습지의 육화방지를 위해서, 그동안 방치되어 자연적 환경에 의한 훼손된 물길과 주변 환경이 복원되고 있다.
근 30여년의 세월을 폭우와 토사의 범람과 습지의 잡목 등이 물길을 막아버리거나, 바꾸어 버렸던 곳을 복원작업을 한 것 같다.
그리고 탐방객의 안전한 탐방을 위해 데크공사를 했다. 데크가 없다면 습지생태를 먼발치에서 봐야하고, 파충류가 나오는 계절에는 습지를 다는 것 자체가 위험천만이다. 필자는 얼마 전 흑산 장도 습지를 갔다가 뱀을 보고 놀란 적이 있었다.
그리고 이곳의 습지는 깊은 곳은 어른 가슴정도의 된다고 하니, 습지보호와 탐방객의 안전을 위해서도 데크의 필요성은 인정된다.
이곳의 데크는 다른 여타 데크보다 폭이 좁다. 1m정도의 폭으로 성인이 혼자 다니면 딱 맞는 정도여서, 어린아이를 데리고 갈 경우 손잡고 걷기가 불편하며, 오가는 좀 몸집이 있는 성인이 만날 때는 힘겨움께 옆으로 비켜서야 한다. 이왕 자연 환경적 공사를 하였다면 20~30cm 만 넓혔어도 하는 아쉬움이 든다.
그리고 데크는 꽤 높다. 그 점은 잘되어 있다. 발 아래로 동물도 다니기도 하며, 습지에 햇볕 잘 들도록 되어 있고, 바닥의 간격도 약간 넓어 아래를 관찰 할 수 있고, 나뭇가지도 충분하게 활동 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이곳의 원시림에 들어오면 나 스스로가 외부와 단절의 느낌을 바로 받을 수 있다. 이곳에서는 현대문명의 이기인 핸드폰도 불통 구역이여서 좋았다. 잠시라도 휴대폰의 노예에서 석방된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잠시 여기에서는 휴대폰을 놔두시면 어떨까요?”라고 외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