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중심의 삶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사람에게서 '신앙 중심', '그리스도 중심', 이것에 있는 '교회 중심'이란 말은 자주 듣는 말일 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 또한 자주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중심'이란 말은 사전적인 의미를 보면, "중요하고 기본이 되는 부분, 기준이 되는 물체나 지점, 사물이나 일정한 장소의 가장 가운데가 되는 곳" 이라고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건물에서 이런 중심이 흔들리면, 그래서 중심을 잡고 받쳐주지 못하면 전체가 무너지는 참사에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를 굳건히 잡아주는 중심이 잡힘에 있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우리 신앙에 중심이 잡혀 있는 삶, 이를 그리스도 중심적인 삶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를 바울이 빌립보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해 주고 있는 말에서 보고자 합니다. 바울은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 1:20-21) 라고 한 말에서 보게 되듯이 자기 중심적이 아니라 그리스도 중심적인 인생의 방향에 있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있을 수 있었는지요. 어떻게 그에게서는 죽음도 더 이상 두려운 대상이 아닐 수 있었는지요. 바울에게 있어서 삶은 그리스도를 의미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행하는 모든 것, 즉 신뢰하고 사랑하고 소망하고 순종하고 전도하는 것 등은 그리스도에 의해 고취되고 그리스도를 위해 행해진다는 의미에서 자신의 삶이 그리스도로 채워져 있었고 그리스도께 몰두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게 사는 것은 그리스도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바울의 삶이 그리스도께 몰두해 있고 완전히 그리스도께 헌신하고 그의 뜻을 행하는데 전념하고 있기 때문에 바울 자신에게 있어서 죽는 것도 유익했습니다. 이것은 죽어서도 그리스도와 함께 하고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보여줍니다. 그리스도 자체인 생명은 죽음에 의해서도 결코 파괴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생명은 죽음을 통해 커지고 풍요로워지며 부요함에 있습니다. 따라서 바울에게 있어서는 사는 것이나 죽는 것이나 모두 그리스도 중심적입니다. 바울에게 있어 삶과 죽음은 더 이상 족쇄가 아니었습니다. 최후의 적인 죽음조차도 바울에게는 정복되었으며 길들여졌고 만일 필요하다면 죽음조차도 바울을 위해 봉사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자신이 죽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을 더 소망하고 있었습니다(빌 1:23). 바울에게 이 영광된 죽음과 삶 사이에서 선택해야만 하는 시간이 왔을 때 그는 기꺼이 죽음을 선택하였습니다. 다음의 말은 이를 입증합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딤후 4:6-8)
이러한 바울은 자신의 죽음이 임박한 순간에서까지 하나님의 복음인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에 마음을 두고 있었으며, 그 복음전파에 있는 사명을 마치는 것에서 오슬로라고 불리는 로마의 한 외곽지역에서 단두대에 의해 처형되었습니다.
이는 바울의 마음과 생각의 온 집중이 그리스도에게 있기 때문에 있은 일이었습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간 상황에서도(딤후 4:10) 바울은 그리스도 그분의 복음을 인해 살았습니다. 그리스도 중심적인 삶은 이렇습니다. 사나 죽으나 그는 그렇게 그리스도를 중심하고 있었습니다. 그 바울과 우리와 차이가 있을 수 있는가요. 바울이 그렇듯이 우리 또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따르고 있으며 그리스도 중심에 우리의 삶도 죽음도 놓여 있는데, 아니 그러한지요.
지난 어느 날에 몇 분의 목사님이 자리를 같이하여 나눈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여러분들도 심각하게 듣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의 부패한 타락 속에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소수의 남은 자에 의해 개혁교회의 시대가 500년 세월이 이어져 왔습니다만, 지상에서 그 생명력을 띠고 지속해 온 수명이 이제 다한 시기에 있다고 보는 것이었습니다. 얼마 전에 한 분이 이런 글을 카톡단체방에 올렸었지요. 비유적으로 하는 말의 글입니다만, 그 말을 진지하게 보았습니다. 표현상 좀 더 말을 보태어서 해 보겠습니다. 어느 집에 불이 났습니다. 그 불난 집에서 쓸 만한 가재도구는 있는지 찾아내고 정리 중이느라 난리법석인 사람이 있으니 신학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리고 개혁주의란 이름을 가진 사람도 있었는데, 그는 불난 집을 인테리어 기술자를 불러 새로 꾸미느라 정신없이 분주하다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그게 급한 것인가? 정작 할 일은 그 불난 집에서 빠져나오는 게 급선무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이 있어 화재로 다 타버린 신앙을 정리할 수가 있었고, 개혁주의 신앙으로 서가는 개혁교회가 있어 500년의 세월 간에 신앙을 바르게 사용할 수 있게 고쳐 수리하고 꾸미고 갖추며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에 올곧게 주님의 교회로서의 참된교회로 서 오는 일이 있을 수 있었습니다. 만일 신학도 개혁주의도 없었으며 그로 인한 개혁교회도 없었으면 화재로 다 불탄 불 가운데서 겨우 구원받음에 있는 것에서 지금까지 중세시대교회에서 보아온 거짓신앙의 교회 속에서 타락한 신앙에 온 몸이 병들어 곪아터지는 상황에서 고통에 있으며 어찌할 바를 모르며 넋을 놓고 있는 것에 다름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개혁주의 신학도 개혁교회 시대도 수명이 끝났다고 진단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하여, 이제는 개혁교회도 개혁교회가 가져온 개혁주의 신앙도 더 이상 유지되지 못하고 사라져간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 이유로 첫째는, 개혁교회 신앙을 말하는 목회자가 그나마 있었던 분들도 고령화되어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런데다가 개혁교회 신학을 계승하여 개혁교회를 세워나감에 있어야 하는 신학생들도 그 수가 점차 줄며 사라지고 있습니다. 모교단의 신학대학교도, 또 모교단의 신학대학교도 신학생 지원자가 해마다 줄어드는 수가 커지고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하나님의 구속사적 관점에서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고 이를 설교하는 목회자가 양성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속사적 설교는 과거시대의 구태의연한 설교의 한 방법론으로만 남아 학문적 연구 자료로 남습니다. 신학교는 학교가 존속할 수 있기 위해서 경영 마켓팅에 골몰합니다. 둘째, 교회 성도가 개혁교회와 개혁주의 신앙에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개혁주의 신앙은 이제 과거시대의 구태의연한 것이 되어, 더 이상 생명과 인생을 걸고 추구하지 않습니다. 알고 있는 것이기에 입에서는 말해지고 있는데 그렇게 말하고 있는 신앙으로 사는 삶의 여정으로 사는 목숨에는 있지 않습니다. 셋째, 성도들이 목회자의 설교를 듣고 움직이지 않으며 권면을 듣지 않으며 교육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에서 행사되는 하나님의 권위 있는 권세에 복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주어지는 권면을 듣지 않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께서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 혼인잔치에 행해지는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하여 복음의 진리 탐구와 은혜 속에서 살지 않으며 은혜를 보존하여 믿음의 순전함, 곧 순결한 믿음으로 살고자 마음을 갖지 않으며 그에 따라서 애쓰지 않습니다. 신앙은 형편 속에서 교회 오가는 것으로의 역할을 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모습을 띠지 않으니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여(마 23:28), 선지자 이사야가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예언한 바인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하되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 있습니다(막 7:6). 그러한 것에서는 성경 중심, 복음 중심, 신앙 중심, 그리스도 중심, 교회 중심이니 하는 이 모든 말이 공허합니다.
우리도 그러하다고 하면, 우리가 교회 모임을 얼마나 가져갈 수 있으며, 교회 유지를 얼마나, 몇 년이나 가져갈 수 있을는지요. 지금 개혁교회를 이루어가는 교회마저도 그 상황에 처해 있으나, 이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아 자신들의 신앙을 돌아보지 않고 있는 형편입니다. 이게 우리의 현실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있지 않은 중세시대교회로 들어가 있겠습니까? 아니면 차마 그렇게는 하지 못하겠는데, 그렇다고 개혁교회로 서 나가고자 하지는 않아 사라지는 교회 속에서 우리 자신도 티끌이요 먼지처럼 흩어져 사라지겠습니까? 해서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주께서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마 24:43)고 말입니다.
깨어 있어 지내온 삶은 주님께 어떻게 대하며 살아 온지를 증거해 주는 흔적이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소홀히 할 수가 없습니다. 이를 믿음의 주께서 증언하십니다. "우리가 어느 때에 .......하였나이까"하는 우리에게 "너희가.......한 것이 곧 내게 대하여 한 것이다"(참조. 마 25:34-46). 우리가 주께 걸어온 걸음이 없는데, 어느 날 주님의 나라에 있을 수 있는지요. 하여, 주 안에서 성경 중심, 복음 중심, 신앙 중심, 그리스도 중심에 있는 주님의 참된 교회로 잘 지내야겠습니다. (*)